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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10여년전 한양에선… 80㎏ 쌀 한가마 76만원

회기로 2010. 1. 28. 19:21
110여년전 한양에선… 80㎏ 쌀 한가마 76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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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여년 전 한양의 중산층은 친척 결혼에 현 시세로 8만원 정도 부조했다. 관상을 보면 4만원, 두 사람이 탁주 한잔 걸치는 것은 1만원 미만으로 가능했다. 이자는 선이자로, 월 3푼(연리 36%)이었다. 기방(妓房)에는 8세 된 기생도 있었다. 정월 대보름날(음력 1월 15일) 밤에는 신세대들이 청계천에서 유행가를 부르며 고성을 질러댔다.

1891년 한양의 사회·생활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일기가 번역 출간됐다. 궁궐 등에 그릇을 납품하던 공인(貢人) 지(池)씨가 쓴 ‘하재일기(荷齋日記·서울시사편찬위 간)’. 궁궐 등이 요구한 그릇을 만들던 양근분원(楊根分院·현재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 근처에 주소지를 두고, 서울 인사동 등에서 하숙을 하던 지씨는 1891~1911년, 초서로 하루에 벌어진 일들을 꼼꼼히 기록했다. 그중 1891년 편이 번역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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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기엔 그때 서민들의 미시적 생활상이 낱낱이 적혀 있다. 우선 그날그날의 물건 가격이 소상하다. 장국밥은 5~6전, 쌀 한 섬(180kg에 해당)은 215냥, 냉면 1냥 식이다. 동전 한 닢이 1푼이고, 그 10배가 1전, 1전의 10배가 1냥이다.

박은숙 서울시사편찬위 연구원은 “햄버거로 세계 물가를 비교하듯 일기에 자주 언급된 장국밥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당시 물가수준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며 “5전짜리 장국밥을 요즘 음식점에서 백반이나 된장찌개 가격 4000원으로 친다면 1냥은 8000원 정도로 볼 수 있다”고 했다.

이에 따른다면 쌀 한 섬은 172만원이었다. 80㎏ 한 가마로 치면 76만4000원으로, 요즘(20만원선)보다 4배 가까이 높다. 그러나 “술 한잔 걸치는” 가격은 지금보다 훨씬 낮았다. 지씨는 술값을 여러 군데에 적었는데, 모두 4~5전(3200~4000원) 정도였다. 친척이나 지인 부조에는 10냥(8만원)씩을 주었다.

물가에 비해 임금 수준은 낮은 편이었다. 집에서 하인을 부릴정도로 넉넉했던 지씨는 지금의 대절 기사쯤에 해당하는 가마꾼들에게 술값과 가마 대여비까지 포함해 2냥4전(1만9200원)을 주기도 했다. 박기주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그러나 “경북 경주의 서원 기록 등에 따르면 1890년대 쌀 한 섬은 6냥, 닭 한 마리는 1냥이 채 안 됐는데, ‘하재일기’에는 이보다 각각 35배, 4배 가까이 높게 기록돼 있다”고 의문을 던졌다.

‘신세대’에 대한 우려는 110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정월 대보름 밤 청계천
수표교로 야경 구경을 갔다가 “달빛과 등불빛 속에서 북과 꽹과리를 치며 장안의 청춘 남녀들이 어지럽게 떠들어대는데 구경할 것이 못 됐다”고 적었다.

뇌물 풍속도 역시 흥미롭다. 지씨는 항아리 20개를 검사한 상궁이 퇴짜를 놓자 상궁에게 퇴짜 맞은 항아리 8개를 바친다. 상궁은 꿀물과 부채 23자루를 하사한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출세할 법한 사람을 미리 키우기도 했다. 지씨는 여주 이생원에게 과거 보는 데 드는 비용 3000냥(2400만원)을 빌려주기도 한다. 그러나 고위층과 맺은 '끈'으로
매관매직을 돕기도 했다. 아는 사람이 강원도 평해군수 자리를 알아보자 3만3000냥(2억6400만원)이 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지씨는 8세 된 기생을 만난 일도 ‘이례적인 일’이라며 기록했다. “이름은 금홍(錦紅). 재주와 미모를 겸비해 자라면 경성지색(傾城之色)이 될 만했다. 그를 보자 사랑스러워 노래 한 곡을 들으려 했다.” 조선 말기여서 민초들의 나라 걱정이 대단했을 법하다. 일기에는 그 같은 대목은 한 줄도 없다. 그날그날 먹고사는 이야기나, 부인이 아닌 애인을 만난 이야기 등이 기록됐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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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신형준기자)
 
 
 
 
 
출처 : Vision-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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