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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최영창 기자의 역사속으로>

회기로 2010. 2. 2. 17:39
 
<최영창 기자의 역사속으로>
5~6세기 韓-日교류 수수께끼 ‘영산강 전방후원분’
최영창기자 ycchoi@munhwa.com
기자가 1990년대 후반 당시 취재차 덕수궁의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 청사를 찾아갔을 때 일입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직원 한 분이 국립광주박물관이 펴낸 ‘함평 신덕 고분 조사 개보’(1995) 한 권을 참고하라며 건네줬습니다. 1991년과 1992년 국립광주박물관이 조사한 전남 함평 신덕 고분에 대한 167쪽짜리 약(略)보고서였는데, 안쪽에 ‘이 보고는 행정보고에 국한함, 정식보고서는 추후 발간예정’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었지요.

물론 추후 발간 예정인 정식보고서는 지금까지 감감무소식입니다만…. 왜계(倭係) 유물이 쏟아지자 야마토(大和) 정권이 4세기 중반에서 6세기 중반까지 200년간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망령을 떠올리고 정식보고서 발간을 미뤘다는 얘기가 당시 떠돌았지요.

1990년대 이후 호남 지역의 유적 발굴이 본격화하면서 고민도 깊어졌는데 바로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굴 또는 관찰된 일본 고훈(古墳)시대의 전형적인 묘제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때문입니다. 앞부분은 사각형이고 뒷부분은 둥근 형태의 분구(墳丘·봉분)가 결합돼 있는 전방후원분이 영산강 일대에서 13기나 확인됐지요. 이에 따라 국내 일각에서는 신(新)임나일본부설의 대두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영산강 유역 전방후원분의 축조시기가 거의 대부분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 사이에 집중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 시기는 백제가 고구려의 압박으로 한성에서 웅진(공주)으로 천도하고 왕실을 둘러싼 권력투쟁이 거듭되는 등 미증유의 위기에 직면했던 때입니다. 한·일 고대 관계사 전문가인 김현구 고려대 교수는 이런 상황에서 6세기 초·중반 백제가 선진문물을 제공하는 대가로 야마토 정권이 군사원조를 제공하는 용병관계가 양국 사이에 성립·정착됐다고 보았지요. ‘일본서기’에 따르면 이 시기에 야마토 정권은 무려 10차례나 백제의 군원(軍援) 요청에 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에 최대 1000명(554년 관산성 싸움)을 넘지 않은 규모에서 알 수 있듯 야마토 정권의 군원은 한반도 남부 경영을 위해 독자적인 군사작전을 수행할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영산강 유역 전방후원분의 피장자는 과연 누구일까요. 웅진 천도 뒤 자력으로 남방지방을 통치할 역량이 부족했던 백제가 야마토 정권이 보내준 왜계백제관료 또는 왜계백제관련집단을 파견해 이 지역을 다스렸으며 피장자는 규슈(九州) 지역과 관련된 왜인일 것이란 견해가 제기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8기의 전방후원분을 시·발굴 조사한 결과 고분의 피장자가 왜인이라는 묘지명 등 결정적인 고고학 자료나 왜인의 집단거주를 논증할 수 있는 유적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지요.

20년 전과 달리 전방후원분을 바라보는 우리 학계의 시각도 그동안 많이 성숙해졌습니다. 영산강 전방후원분에 대한 진실은 앞으로의 연구 진척과 함께 한·일 양국이 근대 역사학의 산물인 민족주의를 떠나 교류사의 관점에서 접근할 때 실체가 드러나지 않을까요.




기사 게재 일자 2010-01-20

출처 : 황세옥의 전통건축이야기
글쓴이 : 황세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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