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설립된 청송교도소는
교화대상에서 제외한 다른 교도소의 고질적인 전과자나
흉악한 범죄자들만을 수용하는 곳이었다.
그 시절 ‘청송교도소’라면 ‘빠삐용 요새’라는 별칭처럼
‘날짐승마저도 피해 간다.’는 무시무시한 퍼런 기들이
날아다녔던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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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질이 흉악한 범죄인들 200여명은 세상 모든 것을
자기 마음먹기에 따라 행했던 자들로,
그들에게서 뿜어 나오는 드센 기에 보통 사람들은 감히
나서지 못하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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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70 이 넘은 운보 화백은 그 칼날이 시퍼런 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만의 특유한 대화체로
‘병신 새끼들아!’는 욕으로 강연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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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보 화백이 청송교도소에 온 배경에는
삼중스님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시절 삼중스님은 사형수를 교화하기 위하여
청송교도소를 드나들었다.
하루는 교도소장이 삼중스님에게 부탁이 있다면서
‘삼중스님이 운보 화백님을 잘 아시지요?’ 하는 말을 던졌다.
삼중스님은 운보 화백과는 안면이 없었던 시절이라
자신에게 운보 화백을 묻는 이유를 궁금해 하였다.
“다른 교도소에서도 재소자들의 마음을 교화하기 쉽지 않은데,
이 청송에서는 더욱 더 힘이 듭니다.
좋은 미술품을 재소자들에게 보여서
그들에게 편안한 마음이라도 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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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장의 말에 감동한 삼중스님은 ‘내가 한번 알아보겠다.’는
답변으로 전혀 만난 적이 없던 화백의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청송교도소의 벽에 운보 화백의 그림을 걸고자 한다.
청송교도소에 수감된 재소자들의 정서를 순화시키려는
깊은 뜻에서 그림을 기부 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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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든 좋은 마음에서 덤비면 뭐든지 이루어진다는
소신만이 삼중스님의 장기 중의 특기였다.
뜻밖에도 운보 화백의 아들이 삼중스님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다.
“아버님이 허락을 해 주셨습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답니다.
자신이 직접 청송교도소로 그림을 가지고 가고 싶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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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답변 또한 참 고마운 일이었다.
그 시절 운보 화백의 혈기와 명성은
그가 지닌 최정상의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이라서 그런지 운보 화백은 그림 10점을
하루 동안에 그리는 정열이 있었다.
재소자들을 위해서 운보 자신의 귀중한 하루를
보내려는 그의 깊은 속뜻은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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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화백들이 기부한 그림 50점을 기념하는
행사는 청송교도소 앞마당에서 열렸다.
행사에 참가하려는 삼중스님은 운보 화백을
처음으로 만나 같이 동행하여 내려갔다.
간단한 식순에 맞추어 삼중스님은 재소자들
200여명이 도열한 앞마당에서 금강경을 법문했다.
삼중스님이 법문을 끝낸 후 자리에 앉으려하자
운보 자신도 강연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행사 식순에 없던 갑작스런 그의 강연의사에
진행자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분위기에도
‘나또 하마띠 타고 시타(나도 한마디 하고 싶다)’ 는
의사표현을 강하게 했다.
운보 화백의 모습에서는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말을 재소
자에게 들려주어야 한다고 때를 쓰는 듯 했다.
그래서 삼중스님은 주변의 양해를 구하고
연단에 그의 손을 잡고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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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마디부터 심상치 않았다.
“벼씨 새끼트라! (병신 새끼들아!)”
이 첫 마디에 연단 옆에 서 있던 삼중스님은
화들짝 놀랐다.
청송교도소 200여명이 있는 이곳에서 욕을 했다.
청송교도소로 내려오는 동안 차안에서 화백의
특이한 대화체에 어느 정도 익숙했던지라
삼중스님은 욕이라는 것을 금세 알아들을 수 있었다.
파랗게 놀란 눈으로 앞마당 재소자들의 표정을 살폈다.
잠시 출렁이더니 조금 지나자 조용해졌다.
화백의 말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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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은 나다. 내가 벙어리이니 내가 병신 머저리다.
그렇지만 나는 몸은 병신이지만 정신만은 건강하다.
그런데 당신들은 몸은 건강하나 정신은 병신이다.
그래서 내가 욕을 한 것이다.
나같이 몸이 병신이지만 뼈를 깎는 노력으로
성공한 화가가 되었다.
나는 타고난 재주나 조건을 믿지 않았다.
내 재주를 갈고 닦아서 성실하게 열심히 노력했다.
그래서 성공했다.
왜 건강한 몸으로 이런 무시무시한 교도소에 들어와서
이 지옥에서 죽을 고생들을 하느냐?” 며
재소자들을 몰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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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운보 아닌 다른 사람이 이런 욕을 했다면
아마도 폭동이 일어났을 것이라는 후문을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운보 화백의 말에는
진실로 그들을 아끼는 마음을 느꼈던지
한결같이 고개를 숙이더니 숙연하게 듣고 있었다.
참 이 기막힌 장면에 모두가 많이도 놀랬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서 받은 진실한 선물은
재소자, 교도관, 그리고 참가한 사람들 모두에게
커다란 마음의 출렁임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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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운보 화백은 법무부장관의 공로패를 받았다.
공식 행사를 끝낸 후 청송교도소를 나오려하자
운보 화백의 고집은 이어졌다.
운보 자신과 같은 처지인 벙어리 재소자를
만나 보고자 하는데 문제는 장소였다.
청각장애 재소자들이 먹고 자는 감방 안에 들어가서
그들을 만나야겠다는 황소고집은 누구도
꺾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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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각장애자가 수감된 감방’이라는 장소를 지적하는
그의 고집에 주변사람들의 애간장을 끓게 하였다.
아무리 말려보아도 소용이 없자,
삼중스님은 법무부 고위 관리에게
법무처의 특별 허락을 부탁했다.
드디어 운보 화백은 청각장애 재소자의 감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삼중스님도 그를 따라 처음으로 감방안의 광경을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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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 안에 들어 선 운보 화백은 벙어리 재소자를 꽉 껴안더니
볼을 비비면서 울었어요.
‘병신된 것도 서러운데 왜 이런 생지옥에서
이리 서럽게 살고 있느냐?’
울음 속에 전혀 알아듣지도 못할 말들을 서로 주고받았어요.
볼을 서로 비비면서 우는 통에 내 눈에서도 눈물이 저절로 나왔어요.
통곡으로 변해 서로 엉켜진 몸 타래를 풀어내는데 한참 걸렸습니다.”
진정한 우애의 정을 내비치는 운보 화백의 모습에
삼중스님과 교도관들은 녹아 내렸다.
이 사건이 있은 후부터는 삼중스님을 따라 운보 화백도
저 먼 제주교도소까지 다니면서 자신의 귀중한 시간을
더 귀중하게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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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우한 처지의 사람들에게는 끈끈한 정을 보이는
운보 화백에게 확연히 상이한 모습도 있었다.
그것은 권력과 재력에 휘둘리지 않는 그의 곧은 기질은
소문으로도 대단하였다.
한 번은 법무부 장관의 청탁에 의해
운보 자신의 그림 한 점을 법무연수원에 기부받기를 원하자
단호히 거절했다.
자신의 작품 한 점이 시중에서 3천만 원에 거래되고 있던
시절이었는데,
그는 기부를 원했던 법무부장관에게 작품가 5천만 원에
판매하겠다는 말을 서슴없이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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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중스님이 곁에서 지켜 본 운보 화백의 끈끈한 정은
그의 어머니에게 나왔다고 했다.
“운보 화백은 참 효자였어요.
청주에 있는 화실에서 내다보이는 양지바른 곳에
어머니를 모셨어요.
그가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그림은
자신의 화실 창문에서 바라본 어머니 묘지의 정경이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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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보 화백이 청송교도소 강연장에서 내지른 외마디.
‘벼씨 새끼트라!’ 는 목소리가 그리워진다.
이 혼란스러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외마디 욕을 내지르는 그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부활 옮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