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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송은(松隱) 김광수(金光粹)선생의 만년송과 선비정신

회기로 2009. 7. 3. 19:49

 

 송은 김광수 선생이 16세기 초 성균관에서 대과를 준비히다가 벼슬길에 오르는 것을 단념하고 귀향하여 집 뒤안에 심은 향나무. 그러나 송은은 만년송(万年松)이라 하여 이 나무를 소재로 두 편의 시를 남겼으며 .(경상북도 기념물 제107호) 지금도 생육상태가 양호하다.

 

향나무 꽃

 

 

 송은 선생이 고려말 안동 회곡에서 의성사촌으로 들어와 마을을 개척할 때 서쪽이 허해 자손들이 발복할 수 없음을 알고 인공적으로 조성한 의성 사곡리의 가로 숲 (천연기념물제 405호) 명재상 유성룡의 모친 안동김씨가 시집으로 돌아가다가 이 숲에서 유성룡 선생을 낳았다는 전설이 있다. 

 

 

  안동 김씨 사촌파의 종택의 부속건물인 만취당 16세기 중반에 지은 목조건축물로 임란 때도 불타지 않아았다고 하며.(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69호) 당호 만취당은 한호의 글씨라고 한다.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는 좀 특별한 마을이다, 유학의 연원이 깊은 곳일 뿐만 아니라, 선비정신이 몸에 배어 과거는 보되 벼슬에 연연하지 아니하고, 한적한 시골에 살고 있지만 임금의 국정수행에 문제가 있을 때에는 상소를 올려 바로잡으려 했었고, 임란 등 나라가 어려울 때에는 의병을 일으켜 목숨을 걸고 항거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600여 년 전 여말(麗末) 감목관(監牧官)을 지낸 안동인 김자첨(金子瞻)이 고려가 망하자 고향 회곡에서 이곳으로 들어와 개척했다고 한다.

마을 앞에는 기천(沂川)이 흘러 물이 풍부하고, 땅이 비옥해 농사짓기에 알맞았으나, 서쪽이 허해 후손들이 발복하지 못함은 물론 바람의 피해로 생활이 불편할 뿐만 아니라, 농사짓기에도 어려움이 있을 것이 예상되어 숲을 조성했다.

이 숲이 폭 20~30m, 길이 800m, 수령 400~600년생의 갈참나무 등 10여 종 500여 그루의 나무가 자라는 사촌리 가로숲(천연기념물 제405호)이다. 서림(西林)이라고도 부른다. 이런 입향조의 깊은 배려가 헛되지 않아 증손 김수광(金光粹, 1468~1563) 대에 이르러서 명문으로 발돋움 한다,

그는 지례현감을 지낸 아버지 극해(克諧)와 어머니 연안강씨 사이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천성이 고요하고 맑았으며 효성이 지극해 부모를 잘 섬기고 이웃 어른을 공경해 일찍부터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알았다.

당시 젊은이들이 그러했듯이 그 역시 1501년(연산군 7)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진사가 되었다. 다시 성균관에 입교하여 전도유망한 청년으로 대과를 준비하고 있었다. 특히 글짓기와 역학(易學)에 특히 능해 원로대신들의 질문에도 막힘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연산군의 폭정이 계속되고 무고한 선비들의 희생이 늘자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단념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뒤 안에 한 그루 향나무(경상북도 기념물 제107호)를 심고 스스로 호를 송은(松隱) 이라하고 마을 앞을 흐르는 기천 남록 경치 좋은 곳에 영귀정(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234호)을 지어 시가를 읊으며 후학을 지도하고 은둔생활을 했다.   그는 향나무를 만년송(萬年松)이라 부르고 늘 푸른 자태를 완상하면서 두 편의 시를 남겼는데 그 중 한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일별조래문기시 (一別俎來問幾時) *조래산을 떠나 온지 몇 해나 되었던고

재봉창취만년자 (裁封蒼翠萬年姿) 만년자태 푸른 솔을 고이고이 심었노라.

청향세세래시필 (淸香細細來詩筆) 맑은 솔 향은 은은하게 시축에 풍겨오고

잔자분분낙연지 (殘子紛紛落硯池) 송화 가루 날아서 벼루위에 떨어진다.

엽밀유금제자재 (葉密幽禽啼自在) 무성한 숲에서 새소리 그윽하게 들려오고

태반인갑노우기 (苔班鱗甲老尤奇) 노목에 이끼끼니 인갑인양 아롱진다.

앙장독립촌원리 (昻莊獨立村園裏) 꾸며 놓은 솔숲 뒤로 외로이 오르나니

불허심싱속사지 (不許尋常俗士知) 심상한 선비들이야 몰라준들 어떠리.

*조래산(俎來山) : 중국의 시인 이태백이 은거한 곳 (?)   


그러나 만년송은 소나무가 아니라, 향(香)나무다. 이런 예는 진성이씨 문중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와룡면 주하리의 대종택 뚝향나무(천연기념물 제314호)를 ‘경류정 노송(老松)’이라 했다. 이런 점을 볼 때 서양식 분류체계가 도입되기 이전에는 소나무와 향나무의 이름을 혼용했던 것 같다. 송은은 또한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할 것이며, 제사를 잘 받들고, 집을 바르게 다스려야 하며, 동기간에 화목하고, 죄를 짓지 말 것, 남을 헐뜯지 말 것, 여색에 빠지지 말 것, 친구를 잘 사귈 것, 분수를 지킬 것을 강조하는 경심잠(警心箴) 십조를 지어 자신은 물론 후손들도 지키도록 했다. 비록 오백여 년 전의 잠언이지만 지금의 생활에도 틀리지 않는 말이다.

성균관에서 같이 수학했던 김안국, 성세창, 김식 등이 벼슬길에 올랐으나 어떤 이는 사화로 귀양살이를 하거나 일찍 목숨을 잃은데 비해 그는 96세까지 천수(天壽)를 누렸다. 저서로는 <송은집> 등이 있으며 유림들의 발의로 장대서원에 배향되었다.

조선 선조 때 명재상 서애 유성룡(1542~1607)은 외손(外孫)으로 이곳 사촌에서 태어나 송은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고 한다.

임란 시 의병의 정제장(整薺將)으로 활동하고 가난한 이웃들에게 양식을 지원하여 ‘김씨 의창(義倉)’으로 불리던 만취당(晩翠堂) 김사원(金士元, 1539~1601)과 두 아우 독수헌(獨秀軒), 김사형(金士亨, 1541~?), 후송재(後松齋), 김사정(金士貞, 1552~1620)은 송은의 증손으로 각기 화왕산에서 홍의장군 곽재우와 함께 싸웠다.

외증손이자 의성인인 응봉 김치중(金致中, (?~1592)은 의병대장으로 임진년 7월 마을 앞 건마산에서 왜병을 맞아 싸우다가 절벽에 투신 순절하자 부인 평산 신씨, 여종 복분(福分)마저 뒤따르니 후세 사람들이 일가삼강(一家三綱)이라고 칭송했다. 

또한 조선 후기 문신 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 1724~1797)은 소퇴계로 일컬어지는 대산 이상정으로부터 성리학을 배워 가르친 제자만도 100여 명에 이르고 <성학정로>, <상학입문>, 등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역시 송은의 10세 손이다. 

민산(閩山) 유도수(柳道洙, 1820~1889)선생은 서애의 형 겸암(謙菴)의 10세손으로 1820년(순조 20) 이곳 사촌에서 태어났다. 역시 퇴계학을 이은 성리학자로 개혁정치를 하다가 실각된 이하응의 봉환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릴 때 영남유림의 대표로 뽑힌 분이다.

조금은 외진 마을 사촌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가로숲,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된 만년송과 더불어 김씨 문중을 대표하는 또 다른 문화재로 아름다운 고 건축물 만취당(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69호)이 있다. 당호는 조선의 명필 한호(韓濩, 1543~1605)가 썼다.

송은 이후 사촌에는 대과 13명, 소과 31명,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자 7명을 배출했고, 학문을 사랑해 무려 91명이 저서와 문집 남겼다. 이 모두 미리 숲을 조성하고 만년송을 심으며 자손의 번창을 기원한 송은의 음덕이 아닌가 한다.

출처 : 나무이야기,꽃이야기
글쓴이 : 이팝나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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