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가기행 36] 全州崔氏 遲川 崔鳴吉(전주 최씨 지천 최명길) 13대 종손 최종혁(崔鍾赫) 씨… 부친은 만주서 독립운동 헌신, 사료 대부분 한국전쟁 중 불 타 종택마을엔 종친20여 호 불과, 문중사람들 중국 동북부에 많이 살아 | ||||||||||||
성묘한 뒤 산 하나 너머의 와룡천변에 초가 한 채를 짓고 여생을 보내고자 했던 유서 깊은 공간이다. 종택과 가까운 곳에는 선생의 묘소와 신도비가 있다. 전주 최씨는 크게 4계열로 나누어진다. 지천은 문충공(文忠公) 최군옥(崔群玉) 계로 가장 현달한 갈래다. 이 씨족은 정승 3명, 대제학 7명을 배출한 명문이다. 지천의 부친 최기남(崔起南)은 생원과 문과에 급제해 영흥부사를 지냈다. 모친은 전주 류씨 감사를 지낸 류영립(柳永立)의 딸이다. 형 최래길은 생원과 문과를 거쳐 참판에 이르렀고, 아우 최혜길 역시 진사와 문과에 급제해 감사를 지냈다. 지천의 둘째아들인 최후상은 진사로 집의를 지냈고 최후상의 둘째아들인 최석정은 진사와 문과를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고 셋째아들인 최석항은 경종 대에 좌의정을 지냈다. 그리고 최석정의 아들인 최창대는 오두인의 사위로 생원과 문과를 거쳐 부제학에 이르렀다. 지천의 증손자인 최창대(崔昌大, 1669-1720)는 영의정의 증손, 영의정의 아들, 영의정(李慶億)의 외손일 정도로 혁혁했다. 지천은 어린 시절 임진왜란을 겪은 뒤라 가난한 살림에 주린 배를 움켜쥐고 부지런히 공부했다. 어려서 병이 잦았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천은 인동 장씨 장만(張晩, 1566-1629)의 사위로 장만은 문무를 겸전한 인물로 인조반정 후 진무1등 공신에 올랐다. 그는 정실에서 아들을 두지 못하고 딸 하나를 낳아 지천에게 시집보냈다. 지천의 평생지기인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7-1638)는 신도비명에서 그의 업적을 두드러지게 기렸다.
주유소에서 몇 마디 말을 나누지 않아 그가 조상을 현양하기 위해 평생을 헌신해온 어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주유소는 지천선생 기념사업회 사무실과도 같아 컴퓨터에 관련 자료들이 잘 보관되어 있었다. 전주 최씨 첨정공파 종중 회장직을 맡고 있는 그는 청주사범학교를 나와 32년간 교직생활을 하다가 고향에서 주유소를 운영하고 있다. 고향을 지킴과 아울러 자신의 소일거리로 주유소를 경영하며 즐겁게 종중 일을 챙기는 그는 호인풍으로 세사에 달관한 멋쟁이 노신사였다. “직원 인건비 주고 모자라지 않으면 됩니다. 내 집이라 집세도 없잖아요. 그리고 시간이 나 이렇게 책도 읽을 수 있으니 더 바랄게 뭐가 있겠어요.” “참, 지난해 5월께 서울시장을 지낸 조순(趙淳) 선생이 오셨어요. 여기 그날 찍은 사진도 있습니다. 그냥 지나시다 오신 게 아니더라고요. 알고 보니 그분은 풍양 조씨로 포저 조익 선생의 후손이신 것 같았어요.” 지천 선생 묘소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서 ‘세의(世誼)’라는 단어가 다시 떠올랐다. 조순 박사는 현재 민족문화추진회 회장으로 민족문화 창달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강릉이 고향인 조 박사는 풍양 조씨로 정승을 지낸 포저 조익의 후손이다. 포저는 지천과 절친한 관계. 포저 조익, 조암 이시백(연평부원군 이귀의 아들), 지천 최명길, 계곡 장유, 이 네 사람이 특별히 친했고, 시차를 두고 정승에 올랐다. 포저를 제외한 세 사람은 이항복의 문인이다. 이들은 우도(友道)의 모범을 보여 후세에까지 회자되고 있다. 우암 송시열은 포저 조익의 신도비를 쓰면서 이들 네 사람의 우도를 ‘사우(四友)’라고 추앙해 마지 않았다. 그중에 맏형 격이 포저 조익이다. 포저는 지천의 죽음을 애도하기를 “아! 공은 나의 평생 친구였고. 소싯적부터 서로 사랑하던 정은 어찌 골육 형제와 다름이 있겠소. 도의로 서로 사귀니 옛사람들의 우도를 기약했지요. (중략) 그대가 임종하던 날 나를 쉼 없이 생각하였다는 말을 들었소.” 포저는 이미 계곡 장유를 잃었고 다시 지천을 떠나보냄에 그 비통한 심정을 담아 제문을 지었다. 친밀했던 두 분의 관계를 생각해 조 박사가 지천 선생의 묘소를 찾아 추모한 것이 아닌가 한다. 400년 이상을 이어오는 좋은 관계다. 이것이 바로 세의다. 세의에는 영호남도, 지위의 고하도, 재물의 유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직 당시의 고결했던 정신으로 돌아갈 뿐이다. 망신보국(亡身輔國, 자신의 목숨조차 아끼지 않고 나라를 위해 헌신함)이요, 도의교(道義交, 이해를 따지지 않고 도의로써 사귐)였다. 계곡 장유는 지천보다 한 살 아래로 사우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다. 그는 선원 김상용의 사위이기 때문에 청음 김상헌이 처백부가 된다. 계곡은 절박한 때를 맞아 우의정으로 부름을 받게 되었다. 문제는 당시 계곡이 부모 상중이었다는 데 있었다. 계곡은 이 부름에 대해 18번이나 사퇴 상소를 올려 완고하게 사양했다. 이때 자신을 천거한 이가 지천이었다. “신은 좌의정 최명길과 소년기에 교분을 맺은 이후로 지금 흰머리가 되도록 교우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의 사정에 대해서는 그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지금 그만 감당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한 자리에 신을 천거하고, 누구도 차마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신을 몰아치면서, 마치 신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인조15년(1637) 때의 일로 계곡은 1년 전부터 지천과 함께 화의론(和議論)을 주장해온 터라 그 일의 마무리가 무엇보다 급했다. 좌의정인 지천은 자신의 주장을 관철해 사직과 백성의 안위를 도모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상중인 계곡을 우의정으로 불러 올린 것이다. 이를 ‘기복(起復, 상중에 있는 이를 불러 내 벼슬하게 하는 것)’이라 한다. 사퇴 상소문의 문세(文勢)는 논리적이고 격렬하지만, 자신의 그러한 처지를 알면서도 강력한 천거를 한 것 또한 공적인 것에서 나온 것임을 안다고 마무리했다. “그렇게 행한 동기가 공적인 데서 나온 것인 만큼 그것에 대해서는 신이 감히 원망을 품지 않고 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우정이다. 종손 소개와 종가 안내를 부탁했더니 13대 종손 최종혁(崔鍾赫, 1924년 생) 씨는 노환으로 와병 중이라 외인을 맞이하기 어려운 형편임을 양해해 달라고 했다. 종손의 부친은 일제 강점기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해 만주로 갔고 그 때문에 종손 역시 좋은 여건에서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지금도 종가 집안 사람들은 중국 북동부 지역에 그대로 사는 이가 있다 한다. 종가는 그 때문에 형편이 여의치 못했다. 이렇듯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들의 고초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금 이 마을에 남아 있는 전주 최씨가 20여 호에 불과한 것 역시 많은 문중 사람들이 만주로 옮겨가 산 때문이다. 종가에는 본래 많은 사료들이 남아 있었다. 그러다 한국전쟁 당시 불에 타 재가 되고 말았다. 그 때문에 지금 종가에는 남은 자료가 거의 없다. 천신만고 끝에 남은 지천 선생 영정은, 도굴 뒤 다시 찾은 지석(誌石)과 함께 현재 국립청주박물관에 위탁 보관되어 있다. 최명길 1586년(선조19)-1647년(인조25) 명청(明淸) 교체기에 화의론으로 나라 구한 실리주의자 우리는 지천 최명길을 인조 당시 남한산성에서 화의론(和議論)을 편 대표적 인물로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한 청음 김상헌의 라이벌로 기억하고 있다. 화의론을 택한 조정은 산성에서 나와 항복을 했고 홍익한, 오달제, 윤집 등 소위 삼학사(三學士)는 청나라로 압송되어 순국했다.
이에 비해 지천의 짧은 졸기는 부정적인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화의론을 주장해 청의(淸議)를 저버렸다는 논조다. 청의는 명분론, 의리론과 같은 것으로 조선 후기를 풍미한 시대정신이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내용은 국왕이 “최 정승은 재주가 많고 진심으로 국사를 보필했는데 불행히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애석하다(崔相多才 而盡心國事 不幸至斯 誠可惜也)”고 말한 정도다. 억울한 측면이 많은 역사 평가다. 그러나 현재는 변화의 정치논리를 가진 개혁주의자요 실리외교를 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현명한 재상으로 인정받고 있다. 호란이 진정된 직후 그가 보인 명나라와의 비밀외교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지천이 인조를 국왕으로 추대한 1등 공신(靖社功臣)에 들어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인조반정은 목숨을 건 정변이었다. 반정의 주역으로 김유(순천 김씨), 이귀(연안 이씨), 원두표(원주 원씨), 이괄(고성 이씨)을 떠올리게 되는데, 1등 공신이 10명, 2등 공신이 16명, 3등 공신이 26명이다. 그는 김유, 이귀, 김자점, 심기원, 이서, 신경전, 이흥립, 구굉, 심명세와 함께 1등 공신에 올라 있다. 52명의 공신 면면을 보면, 정승에 이른 이만도 7명이나 될 정도로 이들이 이후 정국을 주도하게 된다. 경우에 따라서 욕을 당하기도 했는데, 참형을 당한 이가 2명, 공신의 훈격이 삭제된 이가 6명이나 된다.
이 해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화의론을 처음으로 발의해 관철시켰다. 52세에 우의정, 좌의정이 되어 호란 이후 수습을 위해 사신으로 청나라에 가서 포로 수천 명을 속환(贖還, 대가를 치루고 데려 옴)했다. 53세(인조16, 1638)에 영의정이 되어 청나라에 가 빛나는 외교성과도 거두었다. 55세에는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졌고, 57세에 재차 영의정이 되었으나 명나라와 연락을 도모한 일로 임경업 장군과 함께 청나라로 압송되어 심양에 억류되었다. 60세(인23) 2월에 세자와 대군과 함께 귀환한 뒤 청주로 돌아와 진천에 머물렀다. 62세로 세상을 떠난 뒤 대율리 선영에 장사지냈다. 숙종7년(1681)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신도비명은 약천 남구만이 지었다. 고립무원(孤立無援)의 남한산성에서 인조는 지천 최명길 등 중신들의 주장에 따라 47일 만에 성문을 열고 지금의 송파구 지역에 있는 삼전도(三田渡)라는 나루로 나와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한다. 당시 인조대왕은 곤룡포도 입지 못한 채 죄인의 신분으로 치욕적인 예를 행했다. 지금 남아 있는 삼전도비와 이를 기념해 조성한 부조물을 보면 마치 어제의 일인 듯 오욕의 역사에 울분이 느껴진다. 부조물을 보면 인조는 곤룡포를 입고 있는데, 이는 그 복식 고증이 잘못되었다. 홍서봉(洪瑞鳳, 반정공신, 후일 영의정에 이름)과 지천은 적장 용골대, 마부대와 만나 항복 절차를 협의했고, 이에 용골대은 곤룡포를 입지 말라고 지시한 사실이 있다. 용골대는 최명길이 입고 있던 남의(藍衣)를 지시하며 “의당 이와 같은 의복을 입고 오게 하라”고 했다. 지천은 이 의복을 하룻밤 사이에 장만했다. 후일 이 일은 화의론을 주장한 것과 함께 우암 송시열 등 노론 측으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받는 빌미가 된다. 고추부서(孤雛腐鼠). ‘한 마리 병아리와 썩은 쥐’라는 이 말은 사람을 가장 천하게 여겨 경멸할 때 쓰는 일종의 욕이다. 병자호란 당시 절의를 지킨 상징으로 추앙받아온 삼학사와 대비해 이러한 정도까지 매도당한 이가 지천이다. 지천의 진가는 국난을 맞아 더욱 빛을 발했다. 조정 대신들은 싸울 것이냐 항복할 것이냐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했다. 심지어 절친한 친구였던 포저 조익마저 화의를 해서는 안 된다는 척화론으로 선회했다. 이 선택의 순간이 어떠했을까. 관련 자료를 살펴보았다. 인조15년(1637) 1월 2일, 남한산성에서는 가장 비참하고 무거운 분위기에서 문서 한 장을 어떻게 써서 적진에 보낼 것인가를 숙의했다. 지천이 앞장서 발의했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굴복하는 말을 피할 수 없으니, 국왕이 사람을 보내 문안한다는 내용으로 써야 한다고 했다. 이에 홍서봉도 “한번 사과한다고 하여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하고 동조했다. 이에 예조판서로 있던 김상헌이 불가하다고 고집했고, 지천은 이에 대해 소리를 높여 자신의 주장을 폈다. 결국 지천이 “명분에 대한 사항이야말로 중요하니 2품 이상이 모여서 정하자”고 중재안을 냈고, 국왕도 이에 따라 결론을 유보했다. 그리고 16일 뒤 유명한 ‘국서 찢는 사건’이 터졌다. 지천이 수정한 국서를 청음이 보고 통곡하며 찢어버리고 주상에게 나아가 이런 일을 저지른 자신을 벌함과 아울러 다시 생각해달라고 아뢰었다. 국왕은 “일찍 죽지 못하고 오늘날의 일을 보게 된 것이 한스럽다”는 말만 되뇌었으나, 같은 달 그믐에 항복으로 결말을 지었다. 당시 청음은 68세로 예조판서, 지천은 52세로 이조판서였다. 후일 청음은 71세의 고령으로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여의 억류를 당한 뒤 돌아와 정승을 지냈고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답사 때 최종형 씨로부터 <아 남한산성>이라는 상하 두 권의 책자를 받았다. 지천선생 이야기를 소재로 쓴 소설이라고 했다. 뒷면에는 ‘지천 최명길 선조 사적(事蹟), 전주최씨중앙화수회가 펴낸 최문(崔門)의 필독서’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이 책의 원제는 월탄 박종화 선생이 쓴 대표 역사소설인 ‘대춘부(待春賦)’였다. 일독하면서 소설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리얼한 묘사와 격조 있고 유려한 문체에 줄곧 압도당했다. 여러 해석이 가능하지만 ‘봄을 기다리는 선비’라는 의미의 소설 제목이 시사하듯, 청나라에 당한 억울함을 시원하게 풀고자 하는 염원이 담겨 있다. 국서를 찢는 상황을 월탄은 이렇게 묘사했다. “절반을 채 읽지 못한 청음 김상헌, 얼굴이 시뻘개지며 최명길의 초 잡은 글을 북북 찢어 버린다. 만좌는 얼굴빛이 백짓장 같이 하얗게 됐다. (중략) 이 모양을 본 지천 최명길은, 허허, 하고 껄껄 웃었다. 무척 속이 상하는 모양이다. 빙글빙글 웃으며 ‘대감은 찢으시오. 나는 암만해도 주서야겠소’ 하고 찢어진 초 잡은 종이를 조각조각 집어서 천천히 풀로 붙이고 앉았다. 무거웁기 태산과 같고, 안상하기 흐르는 시냇물 같다.” 조선은 명나라와 함께 개국했고 명나라의 문명을 받아들였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 누란의 위기에서 조선을 구해준 은인이다. 그런 명나라도 오랑캐로 멸시한 여진족의 세력에 의해 마침내 망국의 위기를 맞았고 인조22년(1644)에 멸망한다. 국제정세에 무지한 조선의 선비와 관료들은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중원을 지배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온갖 비난을 감수하며 청나라와 대화를 통해 전쟁을 종식하고 평화와 공존의 길을 모색한 것은 무모할 정도로 용감한 선택이었다. 그 중심에 지천이 있었다. 극적인 반전이 이어졌다. 강력한 화해 반대론자인 청음 김상헌이 청나라로 압송된 것은 이해되지만, 불철주야 화의론을 주장해 성사시켰던 지천 역시 심양으로 압송돼 억류당했다. 이유는, 지천이 병자호란 이후에 은밀히 명나라와 내통했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지천의 진가를 발견할 수 있다. 그가 택한 굴욕은 실리 외교 때문이다. 청음과 지천은 이국 심양 땅에서 극적으로 화해한다. 두 사람 모두 종묘와 사직을 구할 일념으로 충성을 다했다는 본심을 알았기 때문이다. 선전후화론(先戰後和論), 즉 먼저 싸운 뒤 나중에 화의를 하자는 청음이나, 선화후전론(先和後戰論), 우선 화의를 해 위기를 넘기고 나중에 싸우자는 지천 최명길은 방법은 서로 달랐지만 목표는 같은 셈이었다. 야담에는 청음이 자손들에게 지천 집과 의좋게 지낼 것을 명했다 한다. 그러나 그의 바람과는 달리 청음 계통은 노론으로 정권 핵심 세력이 되었고, 지천 계통은 소론으로 권력의 중심에서는 점차 멀어지며 대립했다. 지천의 사상과 경륜은 후대에 강화학파(江華學派) 형성과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지천은 주자학자이면서도 양명학에 관심을 가졌다. 흥미로운 점은 지천의 부친 최기남의 외가가 조선 중기의 학자 남언경과 닿아 있다는 사실이다. 고 윤남한(尹南漢) 교수가 행한 조선 시대 양명학 연구 논저를 보면 남언경은 양명학의 선구자 중의 한 명이었다. 이처럼 대립을 하다가도 또 화해를 할 수 있는 지도자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수많은 외침을 받으면서도 단일민족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고 고유의 문화와 역사를 간직해 오늘에 이를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
두 편의 신도비명과 신도비 비각 속에 서 있는 신도비는 충북 유형문화재 제59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자(篆字) 글씨는 손자 최석정이, 본문 글씨는 증손자 최창대가 써서 숙종28년(1702)에 건립했다. 최창대는 북관대첩비문을 지은 이로 유명하다. 지금 남아 있는 신도비명(神道碑銘)은 이례적으로 두 편이다. 당초 신도비명은 1686년(숙종12)에 약천 남구만이 지었다. 그리고 서계 박세당이 1700년(숙종26)에 지은 것도 있다. 서계의 처남이 약천 남구만이기 때문에 처남매부지간에 14년이라는 시차를 두고 동일한 인물에 대한 신도비명을 쓰고 있다. 약천은 지천의 손자인 명곡 최석정의 스승이다. 약천이 지은 신도비명은 3,000여 글자로 그 내용이 매우 응축되어 있는 느낌이다. 이에 비해 14년 뒤에 지은 서계의 글은 5, 500여 글자에 이르는 장문이다. 현재 신도비에는 서계의 글이 새겨져 있다. 아마도 약천의 글이 지나친 응축으로 충분히 그 문장과 사행을 드러내지 못했다는 지적 때문에 서계! 의 글을 다시 받아 비를 세운 것이 아닐까? 묘소의 비는 약?남구만이 지은 글을 새겨두었다. 충북 기념물 제68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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