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전주사고
안의와 손홍록이 조선왕조실록을 지키기 위해 애쓴 용굴안에는 지금도 기와조각과 도자기 파편들이 여기저기에 뒹굴고 있다. 1991년에야 비로소 이를 기려 내장산 들어가는 길목에다 조선왕조실록 ‘이안사적비移安事績碑’를 세웠으니, 그나마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비록 작은 조형물에 불과하지만, 후세 사람들은 우리 문화재를 지킨 선조들을 두고두고 기억할 지어다.
1592년 4월 16일, 동래를 급습한 왜적들이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한양 도성까지 함락하였지만, 도처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끈질긴 저항으로 장기전으로 돌입하는 양상이 전개되었다. 이렇듯 전국적인 저항을 가능케 한 힘의 원천이 바로 전라도가 함락되지 않았다는 점인데, 이를 간파한 왜적들의 창끝은 서서히 호남의 심장 전주로 향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전주 지역에도 5월말부터 불안한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고, 경기전에 보관되어 있던 태조의 영정이나 역대 임금의 실록과 수많은 서책들의 안전 문제에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쳐오고 있었다. 이미 성주·충주사고와 춘추관에 비장된 실록들이 병화로 불타버렸기 때문에, 전주사고 실록마저 소실되어 버린다면 조선 역사의 반 토막은 영원히 묻혀버리고 말 순간이었다.
태종 재위 시절부터 선대의 실록을 편찬하기 시작하였고, 모두 4부를 만들어 각 지역에 분산 보관하였던 것은 세종 때의 일이다. 이리하여 조선시대 4대사고 체제가 성립하였는데, 전주에 사고 설치가 결정된 것은 세종 21년(1439) 7월이었으며, 실록을 전주에 처음 안치한 것이 세종 27년 12월이었다. 그러나 이때에는 아직 실록각이 건립되기 이전이었기에 전주 성내에 있던 승의사에 임시로 보관되었고, 이후 한 두 차례 옮겼다가 성종 4년(1473) 5월에 가서야 경기전 안에 실록각을 건립하여 명실상부한 사고가 완비되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실록각에는 많은 전적들이 소장되어 있었는데, 『태조실록』에서부터 『명종실록』에 이르기까지 47궤를 비롯하여, 모두 60궤 정도가 있었다고 전한다. 이 속에는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등과 같은 중요한 서적들도 포함되어 있었음은 물론이다. 전주사고에 보관된 서책들을 옮길 때 짐바리가 자그마치 50태 나 되었다는 『봉안어용사적』 기록만으로도 그 규모를 대강 짐작할 수가 있겠다.
실록이 산으로 간 까닭
임진왜란이 발발했던 그해 6월 왜군 제6진이 성주, 선산, 금산, 남원을 거쳐 전주로 진격하고 있었다. 다급함을 직감한 전라감사 이광은 전주부윤 권수, 경기전 참봉 오희길 등과 함께 경기전에 모셔졌던 태조 어진과 역대 실록 피란처에 대한 대책을 숙의하고 있었다. 이 무렵 왜적들이 금산 지방까지 밀려와 공방전이 벌어졌고, 포로로 잡힌 왜적에게서 성주사고에서 약탈당한 실록 두 장이 나왔다는 소문도 들렸다. 이에 따라 땅속 깊숙한 곳에 묻으려던 계획이 취소되고, 그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깊은 산중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경기전 참봉 오희길은 일단 정읍 내장산 깊은 절벽 위에 붙어있는 은봉암을 대안으로 떠올렸으나, 이는 간단하게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이 때 왜적이 금산지역까지 당도했다는 소문이 돌자, 태인에 살던 유생 안의와 손홍록은 무엇보다 실록이 걱정되어 가동 30여 명을 인솔하고 전주 경기전으로 달려갔다. 이렇게 만난 세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실록을 내장산 은봉암으로 피란시킬 수 있었다. 내장산으로 옮겨 실록을 지키면서 기록한 안의의 『난중일기초』에 의하면, 실록은 임진년 6월 22일 은봉암에, 태조 영정은 7월 1일 용굴암에 각각 피란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은봉암은 용굴 아래쪽에 있는 금선암으로 추측되는데, 아마 일제시기인 1920년대에 폐찰된 것으로 보인다. 내장산 금선계곡 역시 금선암에서 유래한 이름이 아닌가 한다.
전쟁이 공백기에 접어 든 이듬 해(1593) 4월 왜군이 서울에서 철수하자, 7월경에 태조 어진과 실록을 충청도 아산으로 이안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따라서 실록이 내장산에 보관된 것이 약 370일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역대 실록을 깊은 산중에 보관하게 된 최초의 사례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그리고 아산으로 옮겨 간 실록은 강화도 마니산으로 이관되었다가 또 다시 묘향산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전란이 끝난 후 4개의 간행본을 새로 인쇄하여, 이제는 아예 사고를 깊은 산중에다 설치하게 되었다. 즉, 춘추관에 보관하던 1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태백산, 오대산, 묘향산(후에 적상산), 강화 마니산(후에 정족산)과 같은 깊은 산중에 사고를 지어 실록을 보관하게 되었는데, 이는 임란 중에 내장산에 보관하던 것에 착안하여 얻은 보존 방법이었다.
실록을 지켜 낸 시골 선비들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그해 6월 22일, 전주사고에 소장되었던 서적을 내장산 은봉암으로 옮겼는데, 이 때 물동량을 보면 조선왕조의 역대 실록 30여 태 , 고려사기문 등 20여 태 등이었다. 궤짝으로 따지면 약 60여 궤, 책 수로 따지면 실록이 830 책, 고려사 등 기타 전적이 538 책 분량이었다. 수십 마리의 말과 인원이 동원되어 서책을 싣고 7일 동안 고생하여 이룬 결실이었다. 그 후 이도 안심이 되지 않자, 7월 14일에는 더 깊숙한 비래암으로 실록을 숨겼다. 이 일이 순조롭게 성사될 수 있었던 것은 승려 희묵이 이끄는 승군, 무사 김홍무를 비롯하여 이름 없는 사당패들까지 동원된 점도 있었지만, 시골 선비 안의(1529~1596)와 손홍록(1537~1610)이 사재를 털고 목숨을 걸면서까지 실록을 지켜낸 덕분이었다. 이런 수난 속에서도 안의와 손홍록 같은 이들이 있었기에 전주사고 실록이 보존될 수 있었고,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빛을 보게 된 것은 물론, 문화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을 세계 만방에 한껏 뽐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안의와 손홍록은 당대 호남지역 대학자였던 일재 이항에게서 동문수학한 제자들이었다. 안의의 자는 의숙宜叔, 호는 물재勿齋, 본관은 탐진이다. 병조판서를 지낸 사종의 후예이며, 대제학 지현의 손자였다. 손홍록의 자는 경안景安, 호는 한계寒溪이며, 본관은 밀양이다. 부제학을 지낸 비장의 증손자이자 한림 벼슬을 지낸 숙노의 아들이다. 그러니 둘 다 명문의 후손들임을 알 수 있다. 가히 왕대밭에 왕대 난다는 말이 헛말은 아닌 듯싶다.
『임계기사』에 수록된 「수직상체일기」는 실록을 지키면서 기록한 일종의 당직 근무일지다. 전주사고에서 내장산으로 옮긴 실록을 지키기 위해 안의와 손홍록이 교대로 수직한 내용들이 빽빽이 기록되어 있다. 그 동안 안의와 손홍록이 함께 수직한 일수가 53일, 안의 혼자 수직한 일수가 174일, 손홍록이 수직한 일수가 143일이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선조 26년(1593) 7월에 전주부윤 이정암이 의외의 변에 대비하기 위해 어진과 실록을 행재소에 이안할 것을 요청했고, 그리하여 7월 9일 정읍 현감 유탁의 주도 아래 실록은 정읍현으로 운반되었다. 이어 7월 11일에 안의와 손홍록은 배행 차사원이 되어 정읍현감과 함께 아산까지 실록을 배송한 후 행재소에 나아가 나라를 중흥시킬 6가지 계책을 올리기도 했다. 아무튼 이들은 충청도 검찰사 이산보의 장계로 별제(6품)를 제수 받았고, 그 후 숙종 2년(1676)에 창건된 정읍 칠보면 남천사에 배향되었다가, 고종 때 훼철된 채 오늘날까지 잊혀져 가는 인물로만 기억될 뿐이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을 생각할 때마다 이들을 먼저 떠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글·사진 | 박홍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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