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26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아침식사를 하기 전에 치악산 구룡사를 답사하였다.
숙소(횡성유스호스텔)에서 아침식사를 하기로 되어있는데 식당 사정으로
이른 아침 시간에 식사제공이 어렵다고 하여 구룡사 탐방으로 시간을 맞추었다.
원주시와 횡성군 경계에 위치한 치악산 북쪽 산록 소초면 학곡리에 있는 구룡사는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했는데 용 9마리가 살던 못을 메우고 지었다는 전설이 있다.
구룡사 보광루(유형문화재 제145호)를 비롯해 거북바위·구룡소 등의 경승지가 있다.
절 주위에 우거진 노송들은 조선시대에 황장목이라 하여 임금의 널을 짜거나 대궐을 짓는
데에 목재로 쓰려고 함부로 베는 것을 금했다고 하며 지금도 구룡사 진입로 왼편에
'황장금표(강원도기념물 제30호)'가 남아있다.
구룡사의 진입은 일주문을 지나 사천왕문을 통과하여 보광루 밑을 통과하고
대웅전 앞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
손가락 한번 뉼러 주시지요.^^*
구룡사 일주문
세속과 절의 경계를 나타내며 두 기둥위에 지붕을 얹은 독특한 양식이다.
사천왕문에서 본 보광루
구룡사 보광루
앞면 5칸, 옆면 2칸의 익공집으로 맞배지붕의 형태를 하고 있다.
기단은 자연석이며 배흘림이 있는 둥근기둥을 세운 뒤에 그 위로 누각형 건물을 올렸다.
누각층은 대웅전 앞의 마당을 향해 개방시킨 형태이며, 기둥은 1층보다 빈약한 배흘림이 없는 원형기둥을 사용하였다.
천장은 우물반자이며, 누마루는 우물마루인데, 한때 마루에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멍석이 깔려 있었다고 한다.
대웅전
고 최규하 전대통령 내외분 영정
사천왕문
구룡교
<구룡사의 전설>
명산인 치악산에 큰절을 세우고자 한 스님이 찾아들었다. 지금의 구룡골에 접어들었는데 동편에는 시루봉을 쳐다보며
아늑한 협곡으로 되어있는 이곳 풍치의 아름다움은 가히 절경이었다. 그러나 명당을 골라 절을 세우려고 주변을 살펴본즉
대웅전을 앉혀야 할 자리가 꼭 연못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스님은 그 연못을 메우려고 했다.
이때 이 연못속에서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는데 용들로서는 큰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의 살곳을 메우다니 그런 무자비한 일을 스님이 어떻게 할수 있소?" 하고 항의 했다.
그러나 스님은 "존엄하신 부처님을 모시려면 너희들이 사는 연못이어야 하는데 어떻하겠나?" 하고 양보하려 들지 않았다.
스님과 용들은 메우겠다 못 메운다 한참 실갱이를 벌이다 용쪽에서의 제의로 내기를 하여 이긴쪽의 뜻에 따르기로 하였다.
용들은 먹구름을 불러 일으키며 하늘로 치솟으니 갑자기 뇌성벽력과 함께 장대같은 소나기가 억수로 쏟아지는데 삽시간에
계곡이 넘쳐 스님이 서 있는데까지 잠겨버렸다. 이와 같은 용의 재주를 미리 짐작하고 시루봉과 천지봉 사이에 배를 건너
매어 놓고 태연히 기다리고 있던 스님은 배위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용쪽에서 볼때는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럼 이번에는 내가 한수 부려볼까?" 스님은 부적을 한장 그려서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는 연못속에 집어 넣었다.
그러자 연못에서 김이 무럭 무럭 오르더니 연못물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용들은 견딜수 없어 하늘로 달아났는데
그중 눈먼 용한마리가 달아나지 못하고 근처 연못으로 옮겨 앉았다.
스님은 예정대로 그 연못을 메우고 대웅전을 지음으로써 오늘의 구룡사가 들어 앉게 되었다.
구룡사에서 보면 동해를 향한 여덟 개의 골이된 산봉우리를 볼수 있는데 이것은 그때 여덟마리의 용이 급히 도망치느라
골이 생긴것이라 한다. 그래서 이 절을 아홉 마리의 용이 살던곳이라 하여 "구룡사"라 했다 한다.
지금은 아홉구(九)대신 거북구(龜) 자를 쓰는데 이자를 바꾸게 된 연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본래 구룡사는 스님들의 수양도장으로 세워졌으나 오랜 세월을 두고 흥망성쇠에 따른 곡절이 많았다.
이조에 들어서면서 치악산에서 나는 산나물은 대부분 궁중에서 쓰게 되어 구룡사 주지스님이 공납의 책임자 역할까지 하게 되었다.
좋거나 나쁘거나 구룡사 스님의 검사 하나로 통과되는지라 인근 사람들은 나물값을 제대로 받기 위해 별도로 뇌물을 받치기도 했다.
견물생심이라 아무리 부처님 같은 스님이라 할지라도 여기엔 욕심이 나지 않을수 없었다.
이리하여 구룡사는 물질적으로 풍성하기는 하였으나 정신도장으로서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럴즈음 한 스님 이 찾아와 몰락한 이절을 보고 개탄하면서 이 절이 흥하지 못하는 것은 절에 들어오는 입구에 있는 거북바위
때문이니 그 거북바위를 쪼개 없애면 좋을것이라고 했다. 절에서는 그 스님의 말을 믿어 거북바위를 쪼개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 후부터 찾아오는 신도도 더욱 적어지고 거찰로서의 명성은 점차 줄어들었다.
급기야는 절문을 닫아야 할 처지에 이르렀을때 어느 날 도승 한분이 찾아왔다.
"이 절이 왜 이렇게 몰락하는가 하면 그 이름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고 말했다.
주지스님은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요?" 하고 물었다.
"본시 이 절은 절 입구를 지키고 있던 거북바위가 절운을 지켜왔는데 누가 그 바위를 두동강으로 잘라 혈맥을 끊어버렸으니
운이 막힌 것이오."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주지 스님은 재차 물었다.
그 도승은 거북을 다시 살린다는 뜻에서 절의 이름을 아홉구(九)에서 거북구(龜)자를 쓴 구룡사로 쓰기로 했다 한다.
<출처 : 원주시청>
황장금표(기념물 제30호)
역사의 길 관동대로 옛길을 따라 울진 평해를 출발, 서울 동대문까지 천리길을 걷고 있다.
관동지방 (關東地方) 은 태백산 일대의 현재 강원도 지방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이 지역은 본래
예맥땅이었으나, 삼국시대에 고구려 영토로 귀속되었고 통일신라 이후에는 9주5소경(九州五小京)의
편제로 오늘날 영동지방에는 명주(溟州), 영서지방에는 삭주(朔州)를 각각 설치하였다.
고려 성종 때 전국을 10도로 편성하면서 관내도(關內道:서울·경기도)의 동쪽 지역에 있는 땅이라 하여
관동(關東)이라 명명하고 도급행정단위가 되었다.(현재 경북에 속한 울진군은 과거 강원도에 속했음)
태백산맥을 경계로 동쪽은 영동지방, 서쪽은 영서지방으로 구분하여 대관령의 동쪽인 영동지방만을
관동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명승지인 관동팔경이 모두 영동지방에 있는 것과도 관련된다.
요컨데 '관동대로'는 서울에서 관동지방에 이르는 옛길을 뜻하며 '관도별곡'을 지은 송강 정철,
율곡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 등이 오가던 역사의 길이다.
'(사)우리땅 걷기' 대표 신정일선생에 의하면 조선시대 서울에서 우리나라 각 지역에 이르던 옛길은
9대로였으며 그중 관동대로가 <동국여지비고>제 2권에 9대로 중의 제 3로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서북으로 의주에 가는 것이 제 1로가 된다. 홍제원과 양철평(梁鐵坪)을 경유한다.
동북으로 경흥부 서수라진(西水羅津)에 가는 것이 제 2로다. 흥인문과 수유사(水踰峙)를 경유한다.
동으로 평해군(平海郡)에 가는 것이 제 3로가 된다. 흥인문과 중량포(中梁浦)를 경유한다.
동남으로 동래부, 부산진으로 가는 것이 제 4로가 된다. 숭례문과 한강진을 경유한다.
남으로 고성현(固城縣)과 통제사영에 가는 것이 제 5, 6로가 된다.
두 길로 나뉘는데, 한강진을 경유하는 것이 제 5로, 노량진을 경유하는 것이 제 6로가 된다.
남으로 노량진을 경유하여 제주로 가는 것은 제 7로가 된다.
서남으로 보령현(保寧縣)수군절도사영에 가는 것이 제 8로가 된다. 노량진을 경유한다.
서쪽으로 강화부로 가는 것이 제 9로가 된다. 양화진(楊花津)을 경유한다. "
한편 '대동지지'에는 '동남지평해삼대로'라고 표기되었고 문경옛길박물관의 지도에도 '평해대로'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거리도370km(920리), 392km(980리) 등 자료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대략 '천리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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