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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려(高麗) 두문동(杜門洞) 72현(七十二賢)

회기로 2017. 10. 11. 10:07
고려(高麗) 두문동(杜門洞) 72현(七十二賢)

고려(高麗) 두문동(杜門洞) 72현(七十二賢)

  두문동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光德面) 광덕산 서쪽 기슭에 있던 옛 지명으로, 칠십이현이  이곳에 들어와 마을의 동서쪽에 모두 문을 세우고는 빗장을 걸어놓고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 이름이 후세에 절의의 표상으로 숭앙되었고, 1783년(정조 7)에는 왕명으로 개성의 성균관(成均館)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배향하게 하였다. ‘두문동 72현’이란 고려가 망할 때 이성계(李成桂)를 비롯한 조선의 개국 혁명 세력에 대하여 반대한 고려의 유신(遺臣)으로서 이 두문동에 들어가 절의(節義)를 지킨 충신열사(忠臣烈士)를 지칭하는 말이다. 여기에서 ‘두문동’의 ‘두문(杜門)’이란 말은 ‘문을 닫다’ 또는 ‘문을 막다’는 의미로 두문동이란 문을 닫고 나오지 아니하고1) 외부와 단절하며 사는 洞里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조선을 개국한 혁명 세력과 단절함으로써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를 지키고자 하는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두문동이란 명칭은 기존 존재하였던 지명이 아니라 고려의 절신(節臣)이 은거한 이후에 붙여진 명칭이다. 

   두문동 72인의 72인은 공자의 제자를 지칭하는 말에서 유래되었는데,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공자의 제자는 3000명이었는데 몸소 육례(六藝)에 통달한 제자는 72인이었다.”라 하였다. 그리고 같은 책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에서는 77인이라 하고 그 명단을 수록하고 있다. 또 공자가어(孔子家語)에서는 “72인이라”)하고 칠십이제자해(七十二弟子解)에는 76인의 명단을 기록하고 있다. 이로부터 대체로 ‘사기’와 ‘공자가어’의 공통의 수인 72를 공자의 승당제자(升堂弟子)의 수로 간주하게 되었으며, 또 대체(大體)의 수, 즉 큰 수를 칭하여 70제자라는 말로도 썼다. 실제로 두문동 72현을 72子 또는 70子, 70자도(子徒)로 칭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수의 일컬음이 ‘공자’ 고제자(高弟子)인 ‘승당제자’를 지칭하는 말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에 72라는 숫자는 구체적인 사람의 수를 지칭하기보다는 ‘다수의 현인(賢人)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두문동 72현’이란 말은 공자의 제자 중에서 고제자(高弟子)를 지칭하던 수와 관련을 지어 우리 나라에서 형성된 독특한 용어로서 고려 말에 성리학의 수용과 더불어 유교적인 불사이군(不事二君) 또는 수절불이(守節不貳)의 절의 정신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어지게 되었다. 태학생 임선미(林先味), 조의생(曺義生)등의 고려 절신(節臣)이 숨은 곳을 두문동이라 하고 그들을 두문동 72현이라고 부른 것은 고려의 멸망과 더불어 일찍이 지칭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호칭이 영조 이전까지의 공식적인 문헌인 실록(實錄)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들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들에 대한 논의는 구전으로 민간에서 통용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태종 12년(1412, 임진)에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으로 고려조에 사헌부 장령을 지낸 서견(徐甄. 호는 麗窩)이 금주(衿州)에 은거하며 살 때 고려에 대하여 사모하는 시를 썼는데 이 시를 쓴 서견에 대하여 의정부에서 죄를 줄 것을 청한 기사가 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천년의 새서울이 한강 너머 있는데(千載新都隔漢江)

  충성하는 신하들 가지런히 밝은 임금을 돕네(忠良濟濟佐明王)

  삼한을 통일한 공 어디에 있느뇨?(統三爲一功安在)

  문득 전조 왕업이 길지 못함 한하노라.(却恨前朝業不長)


   이 오언고시(五言古詩)  기승(起承) 두 구절에서 ‘천년의 신도(新都)와 충성스런 신하들이 가지런히 밝은 임금을 돕네’라고 한 말은 조선의 개국을 찬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전결(轉結) 두 구절의 ‘삼한(三韓)을 통일한 공’이라고 한 말과 ‘전조의 왕업 즉 고려의 왕업이 길지 못함을 한하노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은연중 조선의 개국을 기롱(譏弄)하고 있는 말이다. 이 사실은 즉각적으로 태종에게 보고 되었는데, 이에 대하여 왕은 “서견이 조선의 조정에서 벼슬을 아니하고 전조(前朝)의 신하로서 추모하는 시를 지었으니 또한 착하지 아니한가?”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서견이 북면(北面)

하여 나를 섬기지 아니하였으니, 어찌 우리의 신하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길재의 예를 들면서 더 이상 죄를 묻지 말 것을 하교하였다.

   이 예는 서견이 다행스럽게 죄를 면할 수 있었지만 이미 당시에 고려의 유신(遺臣) 즉 두문동 72현의 행위는 상당히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들에 대하여 공식적인 논의는 할 수 없었으며 이러할 경우 중죄로 다스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태종조에 정몽주(鄭夢周, 1337~1392)에게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의 증직(贈職)과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리고, 세종조에는 그의 아들 정종성(鄭宗誠)에게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의 관직을 제수하기는 하였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정치적인 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

    두문동 내지는 두문동 72현에 대한 말은 영조실록(英祖實錄)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영조는 즉위 16년(1740, 경신)째 되는 해에 송도(松都)에 있는 재릉(齊陵))과 후릉(厚陵)을 참배[奉審]하기 위하여 8월 29일에 행차를 하여 경기도 파주에 주차(駐次)하였고,  이튿날 30일 저녁에 송도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9월 1일에 송도를 출발하여 연(輦)을 타고 제릉으로 가면서 시신(侍臣)들을 보고 이르기를 ‘부조현(不朝峴)이 어느 곳에 있으며 그렇게 명명한 것은 또한 무슨 뜻인가’ 물으니 주서(注書) 이회원(李會元)이 아뢰기를 ‘태종께서 과거를 설행(設行)하였는데, 본도(本都, 개성)의 대족(大族) 50여 가문이 과거에 응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이름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으므로, 또 그 동리를 두문동(杜門洞)이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위의 기사에 ‘부조현(不朝峴)’과 ‘두문동(杜門洞)’이란 말이 처음으로 나타난다. 위의 기록을 살펴보면 ‘부조현’이란 태종이 과거를 설행하였는데17) 고려의 유신들이 과거에 응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부조현’이란 의미는 ‘신왕조인 조선의 왕에게 조회를 하지 아니하고[不朝]) 넘어간 고개[峴]’라는 의미로 즉 조선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한다는 의미이다. 또 ‘두문동’이란 말은 ‘문을 닫고 나오지 아니하였으므로[杜門不出] 그 동리를 두문동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영조는 부조현 앞에 이르러 교자(轎子)를 정지하도록 명하고, 근신(近臣)에게 말하기를, “말세에는 군신의 의리가 땅을 쓴 듯이 없어지는데 이제 부조현이라고 명명한 뜻을 듣고 나니, 비록 수백 년 후이지만 오히려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을 보는 것과 같이 오싹함을 느끼게 한다‘라고 말하고, 이어서 승지에게 명하여 칠언시(七言詩) 한 구를 쓰게 하니 ‘승국충신면게세勝國忠臣勉繼世(고려의 충신들처럼 대대로 계승되기를 힘쓰라.)’라 하였다. 그리고 어가(御駕)를 따르던 옥당(玉堂)과 승지?사관으로 하여금 시를 이어서 지어 올리게 하였으며, 또 친히 ‘부조현不朝峴’ 세 글자를 써서 그 유허지(遺墟地)에 비석을 세우도록 하였다.

   영조 27년(1751, 신미)에는 개성 유수(留守) 서종급(徐宗伋)의 장계(狀聞)를 받고 두문동 72인의 충신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고)또 어필(御筆)로서 “승국충신금언재 특수기동표기절(勝國忠臣今焉在, 特竪其洞表其節, 고려의 충신이여 지금 어디에 있는가? 특별히 그 동리에 비석을 세워 그 절의를 표하노라.)”이라는 14자를 써서 내리고 비석을 세울 것을 명하였으며 그 제문(祭文)은 다음과 같았다.

『유(維) 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 124년 신미(辛未) 10월 21일에 조선 국왕은 신하 개성부 유수 서종급을 보내어 두문동 중에서 고려의 여러 충신들의 영령에게 치제(致祭)하노라. 절의를 지켜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것은 신하의 떳떳한 도리(道理)요 충신 열사를 표창(表彰)한 것은 에장(禮章)에 나타

나 있도다.  우리 조선이 천명을 받아 하늘의 뜻과 사람의 마음에 순응하여 임금의 성화(聖化)가 온 세상에 미치니 모든 사람이 신하가 되었건만, 오직 고려의 사람 72인은 망국의 신하로 자처하고 스스로 그 뜻을 깨끗하게 하였도다. 그들이 들어간 동리가 있으니 어찌 문에 빗장을 걸어 닫고 나오지 아니하고 형적(形跡)을 숨겼는가. 비록 몸은 죽었으나 그 절의는 사라지지 아니하였나니 충절을 지켜 죽음에 이름에도 후회함이 없었도다. 뒤에는 부조현(不朝峴)이 있고 앞에는 괘관현(掛冠峴)이 있도다. 이름은 비록 다르나 그 뜻을 취함은 같으니 오직 조(曺)와 임(林)과 맹성(孟姓) 세 사람만이 이름이 전하고 나머지는 기록이 되지 못하였도다.

    내가 옛날에 이 곳을 지나가다가 유지(遺址)를 물어본 적이 있는데 지난날을 생각하니 감회를 그칠 수가 없구나. 사적이 점점 오래되고 문헌이 없어져 후세에 권장을 하려해도 표석이 없으므로 특별히 큰 글자 14자를 비석에 세겨 나의 뜻을 나타내었노라. 남긴 충렬을 생각하여 후손을 찾아내어, 방위를 정하여 제단을 설치하고 깨끗하게 제수를 장만하여 제사를 드리노라. 백세(百世)가 어찌 멀다고 하겠는가? 길이 풍성(風聲)을 세우리라.』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영조는 부조현과 두문동에 비석을 세우고 두문동 72현에 치제(致祭)를 하는 등 두문동 72현의 절의를 그들의 신하들에게 본받게 하여 자신의 시대를 치세(治世)로 만드려는 강한 의지를 볼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지금까지 금령(禁令)으로 되어 있던 두문동(杜門洞) 제현(諸賢)에 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도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구본욱(具本旭, 두문동(杜門洞) 72현(七十二賢)과 송은(松隱) 구홍(具鴻)의 절의 정신(節義精神) 참조>>


(1) 우현보(禹玄寶)-단양인(丹陽人), 호 양호당(養浩堂)

(2) 조의생(曹義生)-창녕인(昌寧人), 호 원촌(遠村)

(3) 임선미(林先味)-평택인(平澤人). 호 휴암(休庵)

(4) 고천상(高天祥)

(5) 전귀생(田貴生)-위 두 사람은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살았음

(6) 이숭인(李崇仁)-성주인(星州人), 자는 자안(子安), 호 도은(陶隱), 정몽주가 상해된 후 그 일당으로 몰려 유배되었다가 조선 건국 후 정도전의 심복에게 배소에서 살해됨

(7) 이맹예(李孟藝)-오천(鰲川)에 숨어 살았음

(8) 유순(柳洵)-오봉산(五鳳山)에 숨어 살았음

(9) 전조생(田祖生)-호 뢰은(?隱)-두류산(頭流山) 배록동(排祿洞)에 숨어 살았음

(10) 조승숙(趙承肅)-호 덕곡(德谷), 고향 덕곡으로 돌아감

(11) 채귀하(蔡貴河)-다의현(多義峴)에 숨어 살았음

(12) 서보(徐輔)-적암(積岩)에 숨어 살았음

(13) 변숙(邊肅)

(14) 박심(朴諶)

(15) 신안(申晏)-호 황의옹(黃衣翁), 황의산(黃衣山)으로 돌아감

(16) 박녕(朴寧)

(17) 김충한(金?漢)-호 수은(樹隱), 두류산(頭流山)에 숨어 살았음

(18) 고천우(高天祐)-두류산(頭流山)에 숨어 살았음

(19) 서중보(徐仲輔)- 두류산(頭流山)에 숨어 살았음

(20) 조안경(趙安卿)

(21) 이색(李穡)-한산인(韓山人), 호 목은(牧隱), 판문하부사(判門下部事), 조선 건국 후 이성계 일파에게 몰려 유배 생활을 하던 끝에 죽음

(22) 이유(李裕)-오천(鰲川)에 숨어 살았음

(23) 조견(趙?)-송산(松山)에 숨어 살았음

(24) 허금(許錦)-자 존중(存中), 호 야은(?隱), 전리시판서(典理寺判書),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살았음,

(25) 이수인(李守仁)-원지(遠地)로 유배(流配)되었음

(26) 정희(鄭熙)-원지(遠地)로 유배(流配)되었음

(27) 길재(吉再)-해평인(海平人), 자 재보(再父), 호 야은(호 冶隱), 고려 멸망 후 고향 선산(善山)에서 후진 교육에만 힘씀

(28) 원천석(元天錫)-원주인(原州人), 자 자정(子正), 호 운곡(耘谷), 일찍이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을 가르

친 바 있었으므로 여러번 불렀으나 고려 멸망 후 치악(雉岳산)에 은거함

(29) 김주(金澍)-호 농암(籠岩), 중국(中國)으로 들어감

(30) 최양(崔瀁)-호 만육당(晩六堂), 중대산(中臺山)에 숨어 살았음, 정포은(鄭圃隱)의 생질(甥姪)

(31) 전오륜(全五倫)-서운산(瑞雲山)에 숨어 살았음

(32) 조홍(趙洪)-율원산(栗原山)에 숨어 살았음

(33) 김자수(金自粹)-호 상촌(桑村 ), 추령(秋嶺)에 숨어 살았음

(34) 이사경(李思敬)-숙신리(肅薪里)에 숨어 살았음

(35) 이수생(李遂生)-율리(栗里)에 숨어 살았음

(36) 김약시(金若時)-광산인(光山人), 호 음촌(陰村), 직제학(直提學), 조선 태조가 여러번 불렀으나 절의를 지킴, 금광리(金光里)에 숨어 살았음

(37) 남을진(南乙珍)-의령인(宜寧人), 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 사천(沙川)에 숨어 살다가 조선 태조가 부르자 더욱 깊숙이 감악산(紺岳山)에 숨어 살았음

(38) 이행(李行)-여흥인(驪興人), 자 주도(周道), 호 기우자(騎牛子), 백암(白巖 ), 일가도인(一可道人), 대제학(大提學), 고려가 망하자 예천동(醴川洞)에 숨어 살았음, 나중에 태종(太宗)에게 발탁되어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지냄

(39) 이륜(李淪)-도탄(桃灘)에 숨어 살았음

(40) 이양중(李養中)-광주인(廣州人), 자 자정(子精), 호 석탄(石灘), 형조참의(刑曹參議), 고려가 망한 후 절의를 지키다가 태종 즉위 후  불렀으나 끝내 절의를 지킴

(41) 서견(徐甄)-이천인(利川人), 호 여와(麗窩), 정몽주 살해 후 정도전 등에 의해 장류(杖流)되었다가 풀려나 조선 개국 후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으나 금천(衿川)에 숨어 살면서 절의를 지킴

(42) 임탁(林卓)-금성(錦城)에 숨어 살았음

(43) 김육비(金六庇)-고석산(古石山)에 숨어 살았음

(44) 변귀수(邊貴壽)-두류산(頭流山) 배록동(排祿洞)에 숨어 살았음

(45) 안종약(安從約)-위와 같음

(46) 김준(金俊)-위와 같음

(47) 윤육(尹陸)-위와 같음

(48) 박침(朴)-위와 같음

(49) 배상지(裴尙志)-호 백죽(柏竹), 위와 같음

(50) 구홍(具鴻)-능성인(綾城人), 호 송은(松隱), 좌시중(左侍中), 위와 같음

(51) 이유인(李唯仁)-위와 같음

(52) 박문수(朴門壽)-위와 같음

(53) 이석지(李釋之)-영천인(永川人), 호 남곡(南谷), 용인(龍仁)에 숨어 살았음

(54) 성사제(成思齊)-두문동(杜門洞)에 숨어 살았음

(55) 민보(閔普)-위와 같음

(56) 임척(林)-위와 같음

(57) 차원조(車元조)-위와 같음

(58) 최문한(崔文漢)-강릉인(江陵人), 호 충재(忠齋), 충숙왕 부마(忠肅王駙馬), 강릉(江陵)에 숨어 살았음

(59) 신석(申釋)-무인(武人), 병부랑(兵部郞), 두문동에 숨어 살았음

(60) 신자악(申自嶽)-위 ‘신석’의 아우(弟), 영해(寧海)에 숨어 살았음

(61) 김위(金瑋)-두류산(頭流山)에 숨어 살았음

(62) 민안부(閔安富)-위와 같음

(63) 신덕린(申德隣)-위와 같음

(64) 신포시(申包翅)-위와 같음

(65) 박의중(朴宜中)-밀양인(密陽人), 자 자허(子虛), 호 정재(貞齋), 대사성(大司成), 농사를 짓고자 돌아감, 뒤에 고려사 수찬에 참여하고 조선조의 검교참찬의정주사(檢校參贊議政府事)가 되었음

(66) 이양소(李陽昭)-순천인(順天人), 자 여건(汝健), 호 금은(琴隱), 군수(郡守), 조선 태조, 태종이 여러번 불렀으나 묘정(墓庭)으로 돌아감

(67) 박태시(朴太始)-호 송계(松溪), 고향으로 돌아감

(68) 이경(李瓊)-호 이우당(二憂堂), 두문동(杜門洞)에 숨어 살았음

(69) 맹호성(孟好性)-호 용호(龍湖). 위와 같음

(70) 길인적(吉仁迪)-위와 같음

(71) 신이(申彛)-호 신귀재(愼歸齋), 판도판서(版圖判書), 위와 같음

(72) 반모(潘某)-실명(失名) 위와 같음

자료출처 :광산김씨 예안파 보학자료 http://kksga99.hosting.paran.com/bohak.htm

 

출처 : 김해김씨족보
글쓴이 : 죽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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