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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선시대 산수화의 흐름

회기로 2018. 7. 13.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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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산수화의 흐름

 

장진성 (서울대학교)

 

 

Ⅰ. 조선 초기의 산수화
Ⅱ. 조선 중기의 산수화
Ⅲ. 조선 후기의 산수화
Ⅳ. 조선 말기의 산수화

 

 

Ⅰ. 조선 초기의 산수화

 

조선시대(朝鮮時代, 1392-1910)에는 산수화가 크게 발달하였다.1) 조선시대의 산수화는 송원(宋元)‧명청(明淸)시대에 발달한 다양한 산수화풍을 수용하면서 발전하였다. 먼저 조선 초기(1392-약 1550)에는 고려시대(高麗時代, 918-1392) 산수화의 전통을 계승하고 중국으로부터 다양한 화풍을 수용하여 조선시대 산수화 발전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종친(宗親) 및 사대부와 화원(畵員)들이 양 축을 이루며 산수화를 발전시켰다. 종친(宗親) 및 사대부들은 중국으로부터의 화풍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새로운 화풍을 창출하였다.

한편 화원들은 도화서(圖畵署)에 소속되어 실무적인 측면에서 국가적 회사(繪事)에 종사하였다. 화원 선발제도의 채점 방식을 보면 대나무와 산수에는 높은 점수를, 인물․영모(翎毛) 및 화훼(花卉)에는 낮은 점수를 주었다. 화원 선발 시험에서 산수화가 차지한 높은 비중은 조선시대에 산수화가 발전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조선 초기 화단에 영향을 미친 중국의 산수 화풍으로는 이성(李成, 919-967)과 곽희(郭熙, 약 1001-1090년 경) 화풍을 중심으로 형성된 이곽파(李郭派) 화풍 또는 곽희파(郭熙派) 화풍, 마원(馬遠, 12세기 말-13세기 초 활약)과 하규(夏珪, 12세기 후반-13세기 초 활약)의 화풍인 마하파(馬夏派) 화풍 또는 남송의 궁정화풍인 원체화풍(院體畵風), 명대(明代)의 원체화풍 및 절파화풍(浙派畵風), 고극공(高克恭, 1248-1310)계의 미법(米法)산수화풍을 들 수 있다.2)

 

1) 조선시대 산수화의 흐름을 초기(1392-약 1550), 중기(약 1550-약 1700), 후기(약 1700-약 1850), 말기(약 1850-1910) 등 4기로 나눈 것은 안휘준의 편년을 따른 것이다. 안휘준,『한국회화사』(일지사, 1980), pp. 90-320 참조.
2) 위의 책, pp. 92-93.

 

 

곽희(Guo Xi 郭熙 1020~1090 ) 조춘도 (早春圖) 대만고궁박물원. 도 1

 

 

안견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1447년 견본담채 38.6x106cm 일본 덴리대학교. 도2 

 

 

안견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안견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먼저 이곽파 또는 곽희파 화풍의 수용과 관련하여 가장 주목되는 화가는 안견(安堅, 1440-1470년경 활약)이다. 안견은 여러 대가들의 장점을 종합하여 자기 화풍의 토대로 삼았으며 특히 곽희파 화풍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곽희의 <조춘도(早春圖)>(대만 국립고궁박물원, 도 1)에 잘 나타나 있듯이 마치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 같이 생긴 바위를 표현하는 준법인 운두준(雲頭皴)과 게의 발톱과 같이 날카로운 소나무 가지를 묘사한 수지법(樹枝法)인 해조묘(蟹爪描)를 양식적 특징으로 하는 곽희파 화풍은 이미 고려시대에 전래되어 조선 초기에 널리 유행하였으며 안견 화풍의 기반이 되었다.

조선 초기 곽희파 화풍의 수용과 발전은 안견의 최대 후원자였던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 1418-1453)이 곽희파 계통의 작품을 다량으로 소장했던 사실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안견은 안평대군 소장의 곽희파 산수화들을 학습하면서 자신의 화풍을 형성해 나갔다. 현존하는 안견의 작품 중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1447년, 일본 텐리대학 중앙도서관, 도 2)는 안견의 유일한 진적(眞蹟)으로 조선 초기 회화를 이해하는데 기념비적인 작품이다.3)

<몽유도원도>는 1447년 4월 20일에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박팽년(朴彭年, 1417-1456)과 함께 도원(桃園)을 여행한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으로 안견이 이룩한 독자적인 화풍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이 그림에는 안평대군의 발문(跋文)과 신숙주(申叔舟, 1417-1475), 성삼문(成三問, 1418-1456), 박팽년 등의 명사들이 쓴 찬문(讚文) 등 총 23개의 찬문이 곁들어 있다. <몽유도원도>는 도연명(陶淵明)으로 더 잘 알려진 도잠(陶潛, 365-427)의 <도화원기(桃花源記)>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도화원기>는 어부가 강물을 따라 갔다가 복숭아꽃이 만개한 동굴을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진시황(秦始皇) 시절에 난리를 피해 온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본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중국의 도화원도
(桃花源圖)에는 보통 도화원을 발견한 어부와 그를 맞이하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그런데 안견의 <몽유도원도>에는 인물이 전혀 나타나 있지 않으며 전통적인 구도와는 달리 이야기가 왼편 하단으로부터 오른쪽 상단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아울러 이 그림은 현실세계와 환상적인 도원의 대비적 구성, 경물(景物)들의 유기적인 연결, 부감법(俯瞰法)을 통한 거시적인 조망(眺望), 안개의 적극적 사용, 드넓은 공간 처리, 섬세한 세부 묘사 등이 돋보인다.

 

3) 안견과 <몽유도원도>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안휘준, 『안견과 몽유도원도』(사회평론, 2009) 참조.

 

 

전 안견(安堅) . 사시팔경도 만추 국립중앙박물관.  도 3 

 

〔南宋〕王洪 「瀟湘八景圖」之「漁村夕照」

 

 

안견의 전칭작(傳稱作)인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국립중앙박물관, 도 3)에도 이러한 안견 화풍의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사계절의 모습을 8장면으로 그린 <사시팔경도>는 구성에 있어 한쪽으로 무게가 치우친 편파이단구도(偏頗二段構圖)를 취하고 있다. 각 장면에는 경물 사이에 수면과 안개를 배치하여 조화로운 구성과 넓은 공간감이 드러나 있다. 이러한 확대지향적인 공간개념을 바탕으로 한 안견의 화풍은 15, 16세기 산수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많은 화가들이 그의 화풍을 추종하여 안견파라고 지칭할 수 있는 하나의 화파(畵派)를 형성하였다.

아울러 안견의 화풍은 슈분(周文, 약 1444-50년 경 사망), 분세이(文靑, 1450-60년 경 활약) 등 일본의 무로마치(室町)시대(1336-1573) 수묵산수(水墨山水) 화가들의 화풍에까지 폭넓게 영향을 끼쳤다.

 

 

산시청람(山市晴嵐). 정선

 

 

소상팔경첩 산시청람 [瀟湘八景帖 山市晴嵐] - 심사정

 

 

소상팔경도 산시청람[ 瀟湘八景圖 山市晴嵐 ] 필자미상, 16세기, 종이에 수묵, 각 91.0×47.7㎝, 국립진주박물관 소장(두암 기증)

 

 

<산시청람도>. 16세기 전반. 삼성미술관 리움. 도.4 

 

 

전 안견 <소상팔경화첩>.<산시청람>. 국립중앙박물관. 도 5

 

 

특히 안견파 화풍은 조선 초기에 유행한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소상팔경은 중국 호남성(湖南省) 동정호(洞庭湖) 남쪽의 소수(瀟水)와 상수(湘水)가 합류하면서 형성된 '산시청람(山市晴嵐)' 등 아름다운 여덟 가지 경치를 의미한다. 소상팔경을 주제로 한 그림이 처음 등장한 것은 북송(北宋) 말기인 11세기 말이다.

북송의 문인화가인 송적(宋迪, 1070년대 활약)이 처음으로 소상팔경도를 그렸다고 전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은 남송(南宋)대 왕홍(王洪)이 그린 <소상팔경도>(프린스톤대학교 박물관, 1150년 경)이다.

중국에서는 남송시대에 소상팔경도가 유행했으나 그 이후에는 점차 쇠퇴하였다.4) 오히려 소상팔경도는 한국과 일본에서 더 큰 인기를 끌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찍이 고려시대부터 소상팔경도가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고려시대의 작품은 현재 전해지는 것이 없다. 소상팔경도는 조선시대에 더욱 더 유행하여 많은 작품들이 제작되었다. 한편 일본의 무로마치시대에도 소상팔경도가 크게 유행하였다. 조선 초‧중기에 제작된 소상팔경도는 안견 화풍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의 <연사모종(煙寺暮鐘)>과 <동정추월(洞庭秋月)> 쌍폭 및 <평사낙안(平沙落雁)>, 일본 야마토분카칸(大和文華館) 소장의 <연사모종>,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의 <산시청람> (도 4) 등에 보이는 환상적인 느낌의 기이한 암산, 넓은 공간감, 곳곳에 퍼져 있는 안개 등은 안견 화풍의 전형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한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소상팔경도화첩>>은 16세기 초에 일어난 안견파 화풍의 변모를 알려주고 있어 주목된다. <산시청람> (도 5)의 경우 화면 뒤쪽의 산을 표현하는데 짧은 선과 불규칙한 점들이 구사된 것을 볼 수 있
는데 이러한 '단선점준(短線點皴)'은 1530년대를 전후해서 일어난 안견파 화풍의 새로운 양식적 변화이다. 16세기 전반기에 제작된 안견파 화풍의 산수화에는 거의 공통적으로 단선점준의 사용이 발견된다.

 

4) 소상팔경도의 기원과 발전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Alfreda Murck, Poetry and Painting in Song China: The Subtle Art of Dissent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2002) 참조.

 

 

송하보월도 [松下步月圖] 이상좌. 견본담채 (絹本淡彩) 82.3 x 190.6 cm 국립중앙박물관. 도 6 

 

 

이불해. 예장소요도(曳杖逍遙圖)

 

 

한편 조선 초기에 수용된 마하파 화풍과 관련해서 주목되는 화가는 이상좌(李上佐)이다. 이상좌는 16세기 전반에 활약한 노예출신 화원으로 남송시대에 유행한 마하파(馬夏派) 화풍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전칭작인 <송하보월도(松下步月圖)>(국립중앙박물관, 도 6)의 경우 일각(一角) 구도와 드라마틱하게 처리된 소나무의 모습, 바위 표현에 있어 흑백 대조 등 마하파 화풍, 특히 마원(馬遠) 화풍의 강한 영향이 간취된다. 구부러진 거대한 장송(長松) 아래에는 시동(侍童)과 함께 거닐며 달을 감상하고 있는 문인의 모습이 보인다. 마하파 화풍은 조선 중기로 이어져 이불해(李不害, 1529-?)의 <예장소요도(曳杖逍遙圖)>(국립중앙박물관), 윤의립(尹毅立, 1568-1643)의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국립중앙박물관)와 같은 작품에 영향을 끼쳤다.

특히 <하경산수도>는 바위와 나무 표현에 있어 하규 화풍의 영향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이곽파 화풍, 마하파 화풍 외에도 조선 초기에는 고극공(高克恭, 1248-1310)계의 미법(米法)산수화풍이 수용되었다.

 

 

 

미법산수화풍은 북송시대의 미불(米芾, 1051-1107), 미우인(米友仁, 1086-1165) 부자에 의해 확립된 산수화 양식으로 붓을 옆으로 뉘어서 횡으로 찍은 점을 미점이라고 한다. 미법산수화풍은 주로 비온 뒤 혹은 안개가 자욱한 자연의 습윤한 분위기를 묘사하는데 주로 쓰였으며 원대(元代) 화가였던 고극공에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

미법산수화풍과 관련해 주목되는 화가들은 이장손(李長孫), 최숙창(崔叔昌), 서문보(徐文寶)이다. 이들은 15세기 말에 활약한 화원들로 일본의 야마토분카칸(大和文華館)에 소장되어 있는 <산수도>(도 7)의 작가들로 알려져 있다.

연운(煙雲)에 둘러싸인 부드럽고 습윤한 경치를 빼어난 필치로 그려낸 <산수도>는 총 6장면으로 이루어진 그림으로 3장면에 이장손(李長孫), 최숙창(崔叔昌), 서문보(徐文寶)이 이름이 관서(款書)되어 있다. 그런데 이 관서의 글씨들은 서로 매우 유사해서 같은 사람이 각각의 그림 위에 쓴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산수도>는 본래는 두루마리 그림이었으나 어느 시점에 6개로 잘려져 낱장으로 표구된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이 작품의 작자가 과연 누구였는지는 보다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그러나 <산수도>가 조선 초기에 수용된 미법산수화풍의 양상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아울러 조선 초기에는 명대 원체화풍 혹은 절파(浙派)화풍이 수용되어 조선시대 절파화풍 형성의 토대가 되었다.5) 명초(明初)에 절강성(浙江省) 출신인 대진(戴進, 1388-1462)을 필두로 대진을 추종한 화가들, 절강성의 지방양식에 영향을 받은 화가들을 총망라한 명칭인 절파는 북송의 이곽파(李郭派)와 남송의 마하파(馬夏派) 양식을 절충한 화풍을 특징으로 한다.6) 절파에는 절강성 출신 외에도 복건성(福建省), 광동성(廣東省) 등 다양한 지역에서 절파 화풍으로 작업한 화가들이 포함되어 있다.
한편 절파 화가들 중 많은 수가 명대 궁정화가로 활동함으로써 절파 화풍은 명대 원체화풍(院體畵風)으로 자리 잡았다. 복잡하고 번다한 화면구성, 공간적 깊이감의 결여, 거친 필묵법, 먹의 강한 농담 대조를 특징으로 하는 절파 화풍은 15세기 경 한국에 전래되었지만 크게 확산되지는 못하였다.

 

 

안견 <적벽도(赤壁圖)> . 국립중앙박물관 도 8 

 

戴進 深堂詩意圖,絹本設色纵194厘米横104厘米遼寧省博物館藏 / 戴进(1388年-1462年)字文进,号静庵、玉泉山人。钱塘(今浙江杭州)人。中国明代画家。浙派创始人 / 维基.  도 9 

 


그러나 대진의 화풍을 보여주는 작품이 있어 주목된다. 먼저 안견 전칭의 <적벽도(赤壁圖)>(국립중앙박물관, 도 8)는 북송의 소식(蘇軾, 1036-1101)이 1082년 음력 7월에 호북성(湖北省) 황강현(黃岡縣) 소재 명승지인 적벽을 선유(船遊)하고 지은 두 편의 「적벽부(赤壁賦)」 중 「전적벽부(前赤壁賦)」에 해당하는 내용을 그린 작품이다.

<적벽부>는 구성과 양식 면에서 대진의 <계당시의도(溪堂詩意圖)>(요녕성박물관, 도 9)와 유사하다.7) 특히 거칠고 복잡하게 처리된 산들의 형태와 바위 처리 방식에 있어 <적벽도>와 <계당시의도>는 매우 흡사해 <적벽도>를 통해 조선 초기에 대진 화풍이 수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5) 조선시대에 유행한 절파화풍에 대해서는 안휘준,『한국회화사연구』(시공사, 2000), pp. 502-619 참조.
6) 명대 절파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鈴木敬,『明代繪畵史硏究‧浙派』(東京: 木耳社, 1968); Richard M. Barnhart et al.,Painters of the Great Ming: The Imperial Court and the Zhe School (Dallas: Dallas Museum of Art, 1993); 陳階晉, 賴毓芝 主編, 『追索浙派』(臺北: 國立故宮博物院, 2008) 참조. 대진에 대해서는 陳芳妹, 『戴進硏究』(臺北: 國立故宮博物院, 1981); Mary Ann Rogers, "Visions of Grandeur: The Life and Art of Dai Jin," Richard M. Barnhart 앞의 책, pp. 127-194; 單國强,『戴進』(長春: 吉林美術出版社, 1996) 참조.
7) 안휘준,『한국회화사연구』, pp. 451-462 참조.

 

 

 강희안(姜希顔, 1417-1464)의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국립중앙박물관)  도10

 

 

장로(張路)의 <어부도(漁夫圖)>(일본 호국사(護國寺) 도 11

 

 

장숭 <어주독서도(蔣嵩 漁舟讀書圖)>(북경 고궁박물원) 도 12

 

 

조선 초기에 절파 화풍이 수용되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작품은 강희안(姜希顔, 1417-1464)의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국립중앙박물관, 도 10)이다. 강희안은 안견과 동시대인으로 전형적인 사대부 화가이다.

그 동안 <고사관수도>는 강희안의 작품으로 전칭(傳稱)되었지만 이 작품은 작가와 제작 연대의 문제를 지니고 있다. <고사관수도>는 산수를 배경으로 전경(前景)에 인물을 크게 배치하는 구성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소경산수인물화(小景山水人物畵)는 후기 절파 화풍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특히 <고산관수도>는 후기 절파 화풍 중에서도 거칠고 강렬한 필묵법(筆墨法)을 특징으로 하는 광태사학파(狂態邪學派) 화풍, 즉 장로(張路, 1464-1538), 장숭(蔣嵩, 1500년 경 활약) 화풍의 영향이 뚜렷하다.

<고사관수도> 오른쪽에 보이는 거대한 단애(斷崖)와 밖으로 뻗어 내린 넝쿨 모습은 장로의 <어부도(漁夫圖)>(일본 호국사(護國寺), 도 11)와 같은 작품에서 볼 수 있다. 아울러 화면 왼쪽 하단에 보이는 삼각형 모양의 작은 바위들과 갈대 표현은 장숭의 <어주독서도(漁舟讀書圖)>(북경 고궁박물원, 도 12)의 하단 부분에 보인다.

수많은 갈대들과 굵은 묵선(墨線)으로 처리된 삼각형 모양의 작은 바위들은 장숭 화풍의 주요 모티프이다. 장로, 장숭 화풍과의 친연성을 고려해 볼 때 <고사관수도>는 대략 16세기 중반 경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고사관수도>의 경우 중국의 광태사학파 화풍을 수용하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사색적인 분위기가 농후하며 중국에서는 볼 수 없는 한국화된 특징이 뚜렷하여 조선 초기부터 중국의 절파 화풍이 수용되어 이와 같은 작품이 제작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8)

 

8) <고사관수도>의 작자 및 제작 연대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장진성, 「강희안 필 <고사관수도>의 작자 및 연대문제」, 미술사와 시각문화 8(2009), pp. 128-151 참조.

 

 

Ⅱ. 조선 중기의 산수화

 

조선 중기(약 1550-1700)는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1598),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1637) 등 외침의 연속과 격렬한 당쟁(黨爭)으로 대표되는 혼란한 시대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조선 초기 산수화의 전통을 계승하고 조선 후기 산수화풍 형성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회화사적 의의가 크다. 조선 중기 산수화의 특징 중 먼저 주목되는 사항은 안견파 산수화풍의 지속이다.

 

 

연사모종도 [煙寺暮鍾圖] 이징李澄 견본담채 (絹本淡彩) 국립중앙박물관

 

 

이징李澄 | 니금산수도泥金山水圖 | 17세기 전반 | 비단에 니금 | 87.8×61.2cm | 국립중앙박물관 도 13

 

 

조선 초기에 이어 조선 중기에도 안견파 화풍은 이정근(李正根, 1531-?), 이흥효(李興孝, 1537-1593), 이징(李澄, 1581-1643 이후) 등과 같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징의 <연사모종도>(국립중앙박물관)는 주제 면에서 소상팔경도의 한 장면으로 석장(錫杖)을 짚고 다리를 건너는 불승(佛僧)을 그린 산수화이다. 왼편에 무게를 두고 삼단으로 처리된 편파삼단(偏頗三段) 구도, 웅장한 화면, 드넓은 공간 표현, 안개의 효과적인 사용 등에서 안견파 화풍의 영향이 뚜렷하다.

아울러 이징의 <이금산수도(泥金山水圖)>(국립중앙박물관, 도 13)는 금을 사용하여 장대한 산수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작품으로 확대된 공간, 산과 바위 표현에 있어 조선 초기 안견파 화풍의 전통을 충실하게 계승하고 있다.

 

조선 중기 회화의 특징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절파(浙派) 화풍의 유입과 확산이라고 할 수 있다.9)
앞에서 지적했듯이 절파 화풍은 15세기 경 한국에 전래되었지만 크게 확산되지 못하다가 16-17세기에 이르러 산수화의 대세를 이룰 정도로 주도적인 화풍으로 발전하였다.10) 그런데 절파 화풍의 동전(東傳) 양상에도 불구하고 절파 화가들을 언급한 문헌기록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다. 문헌기록 상에 존재하는 중국의 절파 화가들은 임량(林良, 약 1416-1480년), 여기(呂紀, 1475-1503년 경 활동), 왕악(王諤, 약 1462-1541년 경), 주단(朱端, 약 1501-1520년 경 활동), 유준(劉俊, 약 1475-1505년 경 활동), 왕세창(王世昌, 1462-1531년 이후), 오위(吳偉, 1459-1508) 정도에 불과하다.11) 그러나 이러한 문헌 기록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조선 중기 산수화에 끼친 절파 화풍의 영향은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김시金禔 | 동자견려도童子牽驢圖 | 16세기 후반 | 비단에 채색 | 111.0×46.0cm | 삼성미술관리움 도14

 

 

조선 중기에 유행한 절파 화풍과 관련하여 가장 먼저 주목되는 화가는 김시(金禔, 1524-1593)이다. 김시는 안견파와 절파 화풍을 동시에 구사하였다. 그의 <한림제설도(寒林霽雪圖)>(1584년, 미국 클리블랜드박물관)는 안견파 화풍에 근원을 두고 있지만 기울어진 주산(主山)이나 바위의 강한 흑백 대조 등은 전형적인 절파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김시의 <동자견려도(童子牽驢圖)>(삼성미술관 리움, 도 14)에 보이는 흑백 대조가 심한 기울어진 주산(主山)의 모습과 근경(近景)에 높이 솟아오른 소나무 아래에 동자와 당나귀를 크게 부각시킨 구도는 절파 화풍의 강한 영향을 보여준다. 커다란 나무 아래에 인물을 크게 그려 배치하는 수하인물도(樹下人物圖) 형식의 산수화는 대진의 <기산고은도(箕山高隱圖)>(미국 클리블랜드박물관) 이래 많은 절파 화가들에 의해 그려졌다.

 

9) 안휘준,『한국회화사연구』(시공사, 2000), pp. 502-619 참조.
10) 위의 책, pp. 511, 568-571 참조.
11) 문헌에 기록된 중국 절파 화가들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유미나 「17세기, 인‧숙종기의 산수화―明 前期 宮廷繪畵의 영향을 중심으로―」, 강좌미술사 31(2008), pp. 73-78 참조. 조선 전기 중국 절파 회화의 수용 양상에 대해서는 한정희, 「조선 전기의 對中 繪畵交涉」, 한국미술사학회 편, 조선 전반기 미술의 대외교섭 (예경, 2006), pp. 61-65; 홍선표, 「15‧ 16세기 조선화단의 중국화 인식과 수용태도―對明觀의 변화를 중심으로」, 미술사논단 26(2008), pp. 49-73 참조.

 

 

산수. 전(傳) 이경윤(李慶胤, 1545~1611), 종이에 수묵담채, 91.1×59.5㎝,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경윤(李慶胤,1545- 1611) 산수인물첩(山水人物帖). 호림박물관.일적횡취도(一笛橫吹圖)> 16세기 후반 도15 

 

 

김시를 이어 조선 중기 절파화풍의 수용과 발전에 큰 역할을 한 화가는 이경윤(李慶胤, 1545- 1611)이다. 그의 전칭작들은 모두 전형적인 절파 화풍을 보여준다. 그 중 가장 대작인 <산수인물도>(국립중앙박물관)의 경우 각이 진 거대한 바위 표현에서 이경윤이 왕악(王諤)의 화풍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경윤의 진작(眞作)일 가능성이 높은《산수인물첩(山水人物帖)》(호림박물관)은 절파 후기 화풍인 광태사학파 화풍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이 화첩에 들어있는 <일적횡취도(一笛橫吹圖)>(도 15)는 넝쿨이 매달린 거대한 바위 아래에 앉아 피리를 불고 있는 인물을 그린 작품이다. 이 그림에 보이는 흑백 대조가 심한 바위와 밖으로 뻗어 나온 넝쿨, >형 구도 내에 배치한 인물 등은 광태사학파의 대표적인 화가인 장로의 <정주대월도(停舟待月圖)>(상해박물관)에서 그 양식적 연원을 발견할 수 있다. <<산수인물첩>>에 들어있는 또 다른 그림인 <고사독서도(高士讀書圖)> 또한 흑백 대조가 심한 바위 아래에 배치된 인물, <형 구도에 있어 장로 화풍을 충실히 보여 주고 있다.

16세기 후반에는 함윤덕(咸允德, 16세기 활약)의 <기려도(騎驢圖)> 등과 같은 ‘소경산수인물화(小景山水人物畵)'가 유행하였는데 <기려도> 또한 넝쿨이 튀어나온 바위 아래에 당나귀를 타고 가는 인물과 <형 구도가 뚜렷하여 장로 화풍의 영향을 살펴볼 수 있다. 이불해 전칭의 <기려독행도(騎驢獨行圖)>(개인 소장), 필자 미상의 <주유탄금도(舟遊彈琴圖)>(개인 소장), 이정(李楨, 1578-1607) 전칭의 <기섬도(騎蟾圖)>(이화여대박물관) 등의 작품은 모두 <또는>형 구도와 넝쿨이 달린 바위 아래 표현된 인물을 보여주고 있어 장로 화풍이 조선 중기 산수화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김명국, 관폭도(觀瀑圖), 견본(絹本) 설채도(設彩圖). 177.9×101.2cm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明 张路 八仙图之一  何仙姑和蓝采和  清华大学工艺美术院藏

 

 

明 张路 八仙图之二  铁拐李和张果老  清华大学工艺美术院藏

 

 

김명국(金明國)<설중귀로도(雪中歸路圖)> 17세기 국립중앙 박물관 도16

 

 

戴进 雪景山水轴

 

 

戴进. 雪景圖. 15세기 전반 Freer Gallery OF Art  도17

 

 

광태사학파의 영향은 17세기를 대표하는 절파계 화가인 김명국(金明國, 1600년-1662 이후)의 작품에도 잘 나타나 있다. <관폭도>(국립중앙박물관)는 바위 밑에 서있는 두 명의 인물을 매우 크게 표현한 그림이다. 그런데 구도와 인물 표현에 있어 <관폭도>는 장로의 <<팔선도병(八仙圖屛)>>(청화(淸華)대학공예미술학원)과 매우 흡사해 김명국이 광태사학파의 화풍을 적극적으로 자신의 작품에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그의 대표작인 <설중귀로도(雪中歸路圖)>(국립중앙박물관, 도 16)는 눈 덮인 겨울 날 길을 떠나는 문인과 동자, 그리고 이들을 배웅하러 나온 인물이 그려져 있다. 거칠고 강한 필묵법에서 오위(吳偉)와 후기 절파인 광태사학파(狂態邪學派)의 영향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흑백 대조가 심한 주산 표현과 주산의 바위에 매달린 거친 잡목과 넝쿨 묘사에서 광태사학파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그런데 <설중귀로도>는 화면 구성에 있어 대진의 <설경산수도(雪景山水圖)>(미국 프리어갤러리, 도 17)와 유사하다. 설경을 배경으로 다리를 건너려는 인물이 갑자기 뒤를 돌아보는 모습과 문을 열고 배웅하러 나온 집안의 하인인 듯한 인물을 그린 <설경산수도>와 김명국의 <설중귀
로도>는 구도 면에서 거의 일치한다.

 

그런데 대진의 <설경산수도>는 제목과는 달리 후한(後漢)의 정치가인 원안(袁安, ?-92년)의 ‘와설(臥雪)’ 고사를 다룬 고사화(故事畵)이다.12)

‘원안와설(袁安臥雪)’ 의 고사는 원안이 벼슬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 정진할 때 낙양에 큰 눈이 내려 많은 사람이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렸다. 이 때 마을을 시찰하던 현령(縣令)은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집에 혼자 틀어박혀 있는 원안의 모습을 보고 감동하여 원안이 벼슬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13)
대진의 <설경산수도>는 이러한 ‘원안와설’이라는 매우 특정한 고사를 그린 그림인 것이다. 대진의 <설경산수도>와 마찬가지로 <설중귀로도>가 ‘원안와설’을 주제로 한 작품인지는 현재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는 인물과 시동, 이들을 배웅하러 문밖으로 나온 인물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설중귀로도>가 대진의 <설경산수도>의 도상(圖像)과 매우 흡사한 것은 확실하다. 즉 <설중귀로도>에는 대진, 오위, 광태사학파의 화풍이 복합적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14)

 

12) Richard M. Barnhart, "Rediscovering an Old Theme in Ming Painting," Orientations, vol. 26, no. 8 (September 1995), pp. 52-61 참조.

13) 위의 논문, p. 56 참조.
14) <설중귀로도>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장진성, 「조선 중기 절파계 화풍의 형성과 대진(戴進)」, 미술사와 시각문화 9(2010), pp. 201-222 참조.

 

 

Ⅲ. 조선 후기의 산수화

 

조선 후기(약 1700-약 1850)는 역사상 가장 한국적이라고 불리어지는 회화가 발전한 시대이다.
조선 초기, 중기의 산수화가 송․원대 및 명대 산수화의 영향을 바탕으로 한국적 화풍을 형성했다고 한다면, 후기의 산수화는 명․청(明淸)대 산수화를 보다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와 같이 민족적 색채가 강한 매우 한국적인 화풍을 형성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정치적 안정과 더불어 경제적 발전을 바탕으로 산수화가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조선 후기 산수화 중 먼저 살펴보아야 할 사항은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의 수용과 한국화(韓國化)라고 할 수 있다. 남종문인화는 남종화로도 불리며 직업화가 또는 궁정화가들의 그림인 북종화(北宗畵)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문인 및 관료들이 학문과 교양을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고자 했던 그림을 의미한다. 일본에서는 난가(南畵)로도 불린 남종문인화의 개념과 용어는 명말(明末)의 저명한 화가이자 이론가인 동기창(董其昌, 1555-1636)이 선불교(禪佛敎)의 논리를 빌려 남북종론(南北宗論)을 체계화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동기창은 문인화의 절대적인 우월론을 바탕으로 직업 및 궁정화가들의 그림이었던 북종화를 폄하하였다.

 

남종문인화풍은 17세기 초부터 조선에 유입되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명‧청대에 널리 간행된 화보(畵譜)가 전래되면서 남종화의 전파는 가속화되었다. 남종문인화풍은 조선 중기부터 소극적으로 수용되었으나 본격적으로 유행한 것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였다.

이정근(李正根, 1531-?)의 <미법산수도>(국립중앙박물관)는 조선 중기에 미법(米法) 산수화풍이 수용되었음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아울러 이영윤(李英胤, 1561-1611) 전칭의 <방황공망산수도(倣黃公望山水圖)>(국립중앙박물관)는 본래 황공망(黃公望, 1269-1354)의 전형적인 화풍과는 거리가 있지만 미법 이외의 남종화풍이 나타난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이와 같이 17세기 초에 소극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한 남종화풍의 경우 비록 특정한 화풍을 형성하지는 못했지만 조선 후기에 남종화풍이 유행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하였다. 국내에 유입된 중국 문인화가들의 진작(眞作) 혹은 방작(倣作)뿐 아니라 『고씨화보(顧氏畵譜)』(1603년),『당시화보(唐詩畵譜)』(1620년 이전) 등 중국의 화보는 조선 후기에 남종문인화가 발전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1679년 초집(初集) 발행)이 전래되면서 남종화의 양식적인 특징들이 널리 소개되어 남종화의 전파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본래 남종화는 문인화가들의 사의적(寫意的) 여기화(餘技畵)를 지칭하는 것이지만 조선 후기에는 신분에 관계없이 널리 유행하였으며 중인(中人) 화가들도 남종문인화의 성장과 발전에 큰 몫을 하였다. 즉 조선 후기에 남종문인화는 하나의 화파(畵派)라는 개념보다는 양식적 특징인 '화풍(畵風)'으로 주로 이해되었다. 이점은 일본의 난가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13) 위의 논문, p. 56 참조.
14) <설중귀로도>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장진성, 「조선 중기 절파계 화풍의 형성과 대진(戴進)」, 미술사와 시각문화 9(2010), pp. 201-222 참조.

 

 

채애도(採艾圖) 윤두서

 

 

윤두서, 은일도.『해남윤씨가전고화첩(海南尹氏家傳古畵帖)』17세기말. 18세기 초 해남종가 소장. 도18 

 

 

조선 후기 남종문인화를 대표하는 화가로 윤두서(尹斗緖, 1668-1715),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이인상(李麟祥, 1710-1760)을 들 수 있다. 윤두서는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로 저명한 윤선도(尹善道, 1587-1671)의 증손이며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인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외증조이다. 1693년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으나 당쟁이 심화되자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과 시서화(詩書畵)로 생애를 보냈으며, 1712년 이후 만년에는 해남(海南) 연동(蓮洞)으로 귀향하여 은거하였다.


조선 중기에서 후기로 전환되는 시기에 활동한 윤두서는 말과 인물을 잘 그렸는데〈자화상 自畵像〉(윤형식 소장)은 그의 예리한 관찰력과 뛰어난 필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현재 해남 윤씨 종가에 소장되어 있는『해남윤씨가전고화첩(海南尹氏家傳古畵帖)』에는 나물을 캐고 있는 여인을 그린 <채애도(採艾圖)>, 목기를 기계로 깎고 있는 <선차도(旋車圖)> 등 조선 후기 풍속화의 유행을 예시하는 윤두서의 선구적인 작품들이 들어있다. 그러나 이 화첩에 들어 있는 윤두서의 산수화는 조선 중기 이래 유행한 절파 화풍으로 그린 작품들과 당시 부분적으로 소개된 화보를 바탕으로 그린 남종 문인화풍의 그림들이 대부분이다.

<의암임수도(倚岩臨水圖)>(도 18)는 소나무 아래에 서서 시냇물을 감상하는 고사(高士)를 그린 전형적인 절파 화풍의 작품인 반면 <수하모정도(樹下茅亭圖)>는 윤두서 자신이 소장하고 학습했던 『고씨화보(顧氏畵譜)』에 들어있는 문징명(文徵明, 1470-1559)의 작품을 바탕으로 한 그림이다.15)

 

15) 윤두서의 생애와 회화작품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박은순,『공재 윤두서-조선 후기 선비 그림의 선구자』(돌베개, 2010) 참조.

 

 

강상야박도(江上夜泊圖) 심사정 1747년. 국립중앙박물관.  도19 

 

 

심사정. 파교심매도(罷橋尋梅圖)

 

 

 

 

 

 

 

심사정 <촉잔도(蜀棧圖)>(간송미술관) 도20 

 

 

한편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은 할아버지인 심익창(沈益昌)이 역모 사건에 연루되면서 폐족(廢族)이 되어 문인이었지만 평생 직업화가와 같이 그림을 팔아 생활한 불우한 화가였다. 그는『개자원화전』과 같은 중국 화보를 열심히 학습하여 남종문인화의 구도, 준법, 수지법(樹枝法), 인물 표현법 등을 익혔다. 심사정은 명대 문인화가인 심주(沈周, 1427-1509)의 화풍을 공부하였으며 피마준(披麻皴)과 미점(米點)을 주로 사용한 남종문인화를 다수 제작하였다. 심사정의 대표작인 <강상야박도(江上夜泊圖)>(국립중앙박물관, 도 19)는 안개와 구름으로 뒤덮인 강변의 밤 풍경을 표현한 그림이다.
근경(近景)에 서있는 몇 그루의 나무들과 원경(遠景)의 운산(雲山) 표현은 모두『개자원화전』에 들어 있는 산수 판화들을 응용한 것이다. 심사정은 중년 이후 북종화법(北宗畵法)인 부벽준(斧劈皴)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남종화와 북종화를 종합한 매우 독특한 절충화풍을 구사하였다. <<경구팔경도첩>> (개인소장) 중 <망도성도(望都城圖)>의 바위 표현에 보이는 부벽준은 심사정의 북종화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한편 <파교심매도(灞橋尋梅圖)>(1766년, 국립중앙박물관)의 중경(中景)에 보이는 나귀를 타고 시동과 함께 다리를 건너는 인물을 크게 그린 것은 절파 화풍의 영향이다. 이와 같이 심사정은 남종문인화풍을 추구하면서도 부벽준 및 절파 화풍과 같은 북종화적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형성하였다.

아울러 심사정은 <촉잔도(蜀棧圖)>(간송미술관, 도20)와 같은 긴 두루마리 그림을 제작하였는데 <촉잔도>는 8미터가 넘는 대작으로 중국 사천성(四川省) 일대의 험난한 자연 풍경을 상상력을 통해 그린 파노라마식 산수화이다. 심사정은 끝없이 이어지는 험준한 산과 기암절벽, 드넓게 열린 강, 산 밑에 자리 잡은 마을 등 장대한 광경을 자신의 다양한 필법을 구사해 표현하였다.

<촉잔도>는 조선시대 산수화의 역사에서 거의 유례가 없는 장권(長卷)의 파노라마식 산수화로서 회화사적 의의가 크다. 아울러 <촉잔도>는 조선 후기 파노라마식 산수화의 최대 걸작인 이인문(李寅文, 1745-1821) 필(筆)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의 선례(先例)로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16)

 

16) 심사정의 생애와 예술에 대해서는 이예성,『현재 심사정 연구』(일지사, 2000) 참조.

 

 

강세황姜世晃 | 피금정披襟亭 | 1789년 | 비단에 수묵 | 147.2×51.2cm | 국립중앙박물관

 

 

강세황. 산수도권(山水圖卷)> 1749년. 국립중앙박물관. 도21 

 

 

강세황姜世晃 | 영통동구靈通洞口 |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중 | 18세기 | 종이에 담채 | 32.8×53.4cm | 국립중앙박물관. 도22

 

 

강세황. <벽오청서도(碧梧淸暑圖)>

 

 

강세황은 당쟁으로 인해 인생의 대부분을 야인(野人)으로 살았다. 60세가 넘어 비로소 관직생활을 시작한 강세황은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병조참판(兵曹參判) 등을 역임했으며 1784년에는 천추부사(千秋副使)로 연행(燕行)을 하는 등 만년에는 정치적으로 입신하였다. 그는 시서화 삼절로 그림뿐 아니라 회화 이론에도 밝았으며 뛰어난 감식안을 바탕으로 그림에 대한 많은 화평(畵評)을 남겼다.


아울러 강세황은 화평(畵評)을 통해 김홍도(金弘道, 1745-1806년 이후)를 비롯한 화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강세황은 정치적으로 불우했던 청‧장년 시절의 경험 때문이었는지 자신의 자아의식을 드러낸 자화상을 다수 남겼다. 산수화의 경우, 강세황은 <벽오청서도(碧梧淸暑圖)>(개인 소장)에서 볼 수 있듯이 『개자원화전』를 바탕으로 그림을 공부하였다. 이 그림은 『개자원화전』에 실려 있는 심주 그림을 방작(倣作)한 것이지만 청신(淸新)한 담채(淡彩)의 사용, 단아하고 격조 높은 분위기 등 강세황의 자유로운 해석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먹과 조화를 이룬 담채의 적절한 활용, 아취(雅趣)있는 화면 분위기, 절제된 필묵법을 특징으로 하는 강세황의 남종문인화풍은 <산수도권(山水圖卷)>(1749년, 국립중앙박물관, 도 21)에 잘 드러나 있다.

강세황은 남종문인화뿐 아니라 <도산도(陶山圖)>(1751년, 국립중앙박물관),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국립중앙박물관)과 같은 진경산수화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17)

특히 <<송도기행첩>>에 들어있는 <영통동구도(靈通洞口圖)>(도22)는 음영법(陰影法)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그림으로 조선후기에 유입된 서양화법의 면모를 보여준다. 조선 후기에는 음영법(陰影法)이나 원근법(遠近法)과 같은 서양화법, 즉 중국을 통해 수용된 서양화풍이 일부 진보적인 화가들에 의해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그 전래 시기는 아직 불분명하지만 적어도 17세기 말 경에는 서양화법이 부분적으로 알려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서양화법의 수용 양상은 <영통동구도> 외에 강희언(姜熙彦, 1710-1764)의 <인왕산도(仁王山圖)>(개인 소장), 명지대학교 LG연암문고 소장의<<심양관도첩(瀋陽館圖帖)>> 등에 잘 나타나 있다.18)

 

17) 강세황의 생애와 회화 작품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변영섭,『표암 강세황 회화 연구』(일지사, 1988) 참조.
18) 조선 후기에 수용된 서양화법에 대해서는 이성미,『조선시대 그림 속의 서양화법』(소와당, 2008) 참조.

 

 

수석도 [樹石圖] 이인상 지본수묵 (紙本水墨) 국립중앙박물관

 

 

이인상. <설송도(雪松圖)>(국립중앙박물관) 도23

 

 

이인상은 인조(仁祖) 시기에 영의정을 지낸 이경여(李敬輿, 1585-1657)의 현손(玄孫)이었지만 증조부인 이민계(李敏啓, 1637-1695)가 이경여의 서자였던 관계로 평생 서얼로서 불우한 일생을 보내게 되었다. 1735년에 진사시에 합격한 이후 이인상은 서울과 지방의 하급 관리로 생활하였다. 1752년 음죽현감(陰竹縣監)을 마지막으로 이인상은 1754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자신의 마지막 임지였던 음죽현 근처의 설성(雪城)에서 은거자로 여생을 보냈다. 이인상의 삶에 있어서 서얼이라는 신분적 제약은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인상은 각고의 자기 수련을 통해 높은 학식을 바탕으로 격조 높은 문인화의 세계를 개척하였다. 이인상은 기교를 배제한 담백하면서 졸박(拙撲)한 남종문인화를 추구하였다. <수석도(樹石圖)>(1738년,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차갑고 황량한 겨울 풍경 속에 세그루의 나무와 바위들이 그려져 있다. <수석도>는 간결한 구도 속에 경물의 핵심적인 모습만을 요점적으로 표현하려고 했던 이인상 산수화의 특징이 명확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몇 개의 윤곽선과 담묵으로 처리된 각진 바위의 모습은 간일(簡逸)한 화풍을 특징으로 한 이인상 산수화의 요체를 보여준다. 이러한 기법적 측면 이외에 이 그림에서 주목되는 것은 화면 전체에 퍼져있는 마치 비장감(悲壯感)이 감도는 듯한 차갑고 냉정한 분위기이다. 화면을 관통하는 적막하고 비장한 분위기는 서얼로서 사회적 냉대와 차별을 감수해야 했던 이인상 자신의 내면풍경을 보여준다.

 

한편 이인상의 <설송도(雪松圖)>(국립중앙박물관, 도 23)는 <설송도>는 매섭고 차가운 바람이 부는 곳에 자리 잡은 두 그루 늙은 소나무가 엄혹(嚴酷)한 겨울을 이겨내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뿌리를 앙상하게 드러낸 채 엄동설한의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강인하게 생명을 보전하고자 애쓰는 두 그루 소나무의 모습은 군자의 도덕적인 고결함과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불굴의 의지를 상징한다. 그러나 바위 위로 앙상하게 드러난 소나무의 뿌리는 사회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못한 체 떠돌이 같은 삶을 살아야 했던 서얼 지식인들의 뿌리 뽑힌 삶을 상징하고 있다. 문인의 깊은 내면세계와 자기성찰과 관련된 이인상의 작품들은 조선 후기 남종문인화의 높은 지적, 정신적 수준을 보여준다.19)

 

19) 이인상의 생애와 작품 세계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국립중앙박물관 편,『능호관凌壺觀 이인상李麟祥(1710~1760), 소나무에 뜻을 담다』(국립중앙박물관, 2010) 참조.

 

 

 

정선鄭敾 | 금강산도金剛山圖 | 1734년 | 종이에 수묵담채 | 130.8×94.0cm | 삼성미술관리움 도24

 

 

정선鄭敾 |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 1751년 | 종이에 수묵 | 79.2×138.2cm | 삼성미술관리움

 

 

정선 <비로봉(毘盧峯)>. 개인소장 도25 

 

 

조선 후기 산수화가 이룩한 가장 중요한 성과는 한국의 산천을 그린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발전이다. 정선(鄭敾, 1676-1759)은 조선(朝鮮) 중기에 유행하던 중국(中國)적인 화풍에서 벗어나 금강산과 수도 한양(漢陽) 일대의 경치를 사실적으로 표현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를 개창하였다.

즉 정선은 중국풍의 그림을 답습(踏襲)하던 전대(前代) 화가들의 관념산수(觀念山水)에서 벗어나 금강산(金剛山) 등 한국의 아름다운 산천을 직접 답사하고 사실적으로 표현함으로써 한국회화사에 있어 진경산수화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였으며 후대 화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20)

정선은 신묘년 풍악도첩(辛卯年楓岳圖帖) (1711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서 보듯 금강산 일대의 풍경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이후 정선은 금강산을 소재로 한 많은 진경산수화를 제작하였다. <금강전도>(1734년, 삼성미술관 리움, 도 24)는 정선이 이룩한 진경산수화의 높은 수준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미점을 적극적으로 구사하여 그린 토산과 우뚝 솟은 암산을 극명하게 대비시키는 한편 전체적인 경관을 부감시를 사용하여 역동적으로 구성한 <금강전도>는 진경산수화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금강산 그림들과 함께 정선은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1751년, 삼성미술관 리움)와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간송미술관)과 같은 작품에서 한양 일대의 명승지를 새로운 시각과 기법으로 표현하였다.

<인왕제색도>는 비가 온 후 개이고 있는 인왕산의 위용을 빠른 붓을 사용하여 실감나게 표현한 그림이다. 소나무 숲과 구름 위로 솟구친 거대한 바위 산의 웅장한 면모가 매우 잘 드러나 있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강희언(姜熙彦, 1710-1764), 김윤겸(金允謙, 1711-?), 최북(崔北), 김응환(金應煥, 1742-1789), 김석신(金碩臣, 1758-?) 등 많은 후대 화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한편 정선은 자신의 진경산수화를 찾는 수많은 사람들로 인하여 분주하고 바쁜 삶을 살았다. 즉 그림 주문이 너무 많아 때때로 이러한 그림 수요를 견디지 못할 정도로 정선은 피곤하고 고된 나날을 보냈던 화가이기도 했다. 정선은 그림 수요를 이루 다 감당할 수 없을 경우 간혹 아들 또는 마성린(馬聖麟,1727-1798년 경)과 같은 제자를 대필화가(代筆畵家 ghost painters)로 고용하기도 하였다.

이런 이유로 정선의 작품 중에는 잘 그린 그림도 있지만 성의 없이 대충대충 그린 작품도 상당수 존재한다.
개인 소장의 <비로봉(毘盧峯)>(도 25)은 거친 속필(俗筆)로 그려진 산의 모습에서 정선이 얼마나 급히 형식화된 붓질로 그림을 그렸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정선은 시간과 공력을 기울여 <금강전도>와 같은 뛰어난 그림을 그리기도 했지만 <비로봉>과 같이 무성의한 작품도 많이 남겼던 것이다.21)

 

20) 정선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최완수,『겸재 정선』(현암사, 2009) 참조.
21) 정선이 폭주하는 그림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성의 없이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해서는 장진성,「정선의 그림 수요 대응 및 작화 방식」,『동악미술사학』11(2010), pp. 221-236 참조.

 

 

 

김홍도. 시중대(侍中臺) . 금강산도8첩병풍(金剛山圖八疊屛風) (간송미술관) 도26 

 

 

김홍도 병진년화첩(丙辰年畵帖) 옥순봉(玉筍峯) 1796. 삼성미술관 리움. 도27 

 

 

 

김홍도(金弘道) 삼공불환도(三公不換圖) 1801년, 133.7 x 418.4 cm. 삼성미술관 리움

 

 

김홍도는 조선시대 최고의 화원 화가로 인물, 풍속, 화훼(花卉), 영모(翎毛), 도석(道釋) 등 모든 분야의 회화에서 탁월한 기량을 발휘하였다. 특히 <<단원풍속화첩(檀園風俗畵帖>>(국립중앙박물관)과 <<행려풍속도병(行旅風俗圖屛)>>(1778년, 국립중앙박물관) 등과 같은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김홍도의 풍속화는 조선 후기 회화가 이룩한 가장 빛나는 성취 중 하나였다. 김홍도는 산수화도 잘 그렸는데 중국풍의 일반산수화뿐 아니라 진경산수화 모두에 있어 많은 걸작을 남겼다. <<중국고사도8첩병풍(中國故事圖八疊屛風)>> (간송미술관)은 도연명을 비롯한 중국의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과 연관된 고사를 그린 병풍 그림이다.

이 중 <무이귀도(武夷歸棹)>는 복건성(福建省)의 무이산(武夷山)에서 강학(講學)하면서 생활하던 주희(朱熹, 1130-1200)가 기암절벽과 강이 어우러진 곳을 유람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기이하게 침식된 거대한 바위, 절벽 위의 소나무들, 급류를 헤치고 배를 타고 내려오는 주희 일행의 모습이 안정된 구도 속에 잘 표현되어 있다.

산수화에 대한 김홍도의 뛰어난 기량은 진경산수화인 <<금강산도8첩병풍(金剛山圖八疊屛風)>> (간송미술관) 중 <시중대(侍中臺)>(도26)에서도 발견된다. 높은 부감시를 사용하여 광활한 자연의 경치를 조망(眺望)적으로 포착하는 한편 대기원근법(大氣遠近法)과 같은 기법을 사용하여 크고 뚜렷하게 표현된 전경과 작고 흐리게 그려진 원경의 차이를 극대화하였다. 한편 김홍도는 <시중대>와 같은 장대한 스케일의 산수화뿐 아니라 <<병진년화첩(丙辰年畵帖)>>(1796년, 삼성미술관 리움)의 <옥순봉(玉筍峯)>(도 27)과 같이 매우 시정(詩情)적인 느낌이 드는 산수화를 그리기도 했다.

거대한 바위의 육중한 모습이 화면을 압도하는 김홍도 만년의 대작인 <<삼공불환도(三公不換圖)>>(1801년, 삼성미술관 리움)는 중장통(仲長統, 179-220)의 「낙지론(樂志論)」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표현된 산과 언덕, 논밭과 들판, 가옥과 인물들은 모두 한국의 산수와 풍속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삼공불환도>에 보이는 거대한 바위,안개에 쌓인 논밭, 대저택 안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인물들은 대가로서 김홍도의 면모를 분명하게 보여준다.22)

 

22) 김홍도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로는 오주석,『단원 김홍도-조선적인, 너무나 조선적인 화가』(열화당, 1998); 진준현,『단원 김홍도 연구』(일지사, 1999)가 있다.

 

 

이인문.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국립중앙박물관. 도28

 

 

왕휘. 중강첩장도(重江疊嶂圖). 1684년. 상해박물관. 도29

 

 

김홍도와 절친했던 동년배 화원이었던 이인문(李寅文, 1745-1821)은 중국풍의 관념적인 산수화를 즐겨 그렸다. 현재 남아있는 그의 작품 중 풍속화는 전혀 없으며 진경산수화도 매우 적다. 김홍도가 다양한 장르와 소재의 그림을 그린 반면 이인문은 <<산정일장호두병(山靜日長護頭屛)>>(간송미술관),<<고송유수첩(古松流水帖)>>(국립중앙박물관)과 같은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풍의 인물과 산수를 주로 그렸다. 아울러 이인문은 <대부벽준산수도(大斧劈皴山水圖)>(국립중앙박물관, 1816)와 <사현청유도(四賢淸遊圖)>(1820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북종화의 주요기법인 부벽준을 사용하여 거대한 바위와 암산의 표면을 처리하였다. 이인문은 심사정과 마찬가지로 남종문인화와 북종화법을 토대로 자신만의 독자적인 화풍을 형성하였다.

이인문의 대표작인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국립중앙박물관, 도 28)는 8미터가 넘는 대작의 두루마리 그림으로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자연과 그 속에서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는 다양한 인물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기암절벽(奇巖絶壁),광활하게 펼쳐진 강과 포구(浦口)들, 수많은 배들, 산성(山城)과 절, 산촌 마을, 강과 산 속을 오가는 사람들 등 이 그림 안에는 장대한 자연과 다양한 인간의 생활상이 파노라마와 같이 펼쳐져 있다.23) 일반적으로 ‘강산무진(江山無盡)’, ‘계산무진(溪山無盡)’, ‘만리강산(萬里江山)’, ‘천리강산(千里江山)’, ‘장강만리(長江萬里)’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 파노라마식 산수화는 오대(五代), 북송(北宋)시기에 활동한 연문귀(燕文貴, 약 970-1030년 경 활동), 굴정(屈鼎, 약 1023-1056년 경 활동), 왕희맹(王希孟, 1096-1119) 등이 주로 그렸으며 17세기에 활동한 왕휘(王翬, 1632-1717)는 전대의 강산무진도 계열의 작품들을 종합하여 장권(長卷)의 파노라마식 산수화를 다수 제작하였다.24)

상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왕휘의 <중강첩장도(重江疊嶂圖)>(1684년, 도 29)는 총 길이 16미터가 넘는 강산무진도 계열 산수화의 명작이다.25) 이인문의 <강산무진도>는 중국의 강산무진도 계열 작품들을 참고하여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 그 기원이 되는 작품은 알려져 있지 않다.

아울러 <강산무진도>는 중국의 파노라마식 산수화들과 내용과 양식에 있어 차이가 있어 이인문이 다양한 그림들을 섭렵한 후 자신이 스스로 창의적으로 개발해 낸 산수화로 여겨진다.

<강산무진도>의 선례가 되는 심사정의 <촉잔도>와 비교해 볼 때 <강산무진도>에는 수많은 인물과 포구, 산시(山市)가 등장하지만 <촉잔도>에는 오직 산과 강들만 나타날 뿐이다. 조선시대 회화의 전통에서 매우 희귀한 산수장권(山水長卷)인 <강산무진도>는 조선 후기를 개표하는 기념비적인 산수화라고 할 수 있다.

 

23) 이인문의 생애와 <강산무진도>의 회화사적 의의에 대해서는 오주석,『이인문의 강산무진도』(신구문화사, 2006) 참조.
24) 파노라마식 산수화의 기원과 발전에 대해서는 Sherman E. Lee and Wen Fong, Streams and Mountains Without End: A Northern Sung Handscroll and Its Significance in the History of Early Chinese Painting (Ascona,
Switzerland: Artibus Asiae Publishers, 1955); Wen Fong, Summer Mountains: The Timeless Landscape (New York: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1975) 참조.
25) 왕휘의 산수장권(山水長卷)에 대해서는 Wen C. Fong, Chin-Sung Chang, and Maxwell K. Hearn, Landscapes Clear and Radiant: The Art of Wang Hui (1632-1717) (New York: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2008) 참조.

 

 

Ⅳ. 조선 말기의 산수화

 

조선왕조 말기(약 1850-1910)에는 세도정치(世道政治)와 고종(高宗, 1863-1907년 재위) 시대의 정치적 혼란, 열강의 침입과 위협, 일본에 의한 국권의 상실 등 격동의 시대였다. 이 시기에는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진경산수화가 급속히 쇠퇴하고 형식화된 남종문인화풍의 산수화가 유행하였다.

19세기 중반 예단(藝壇)의 리더였던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진경산수화를 낮게 평가하였으며 서권기(書卷氣)와 문자향(文字香)을 바탕으로 한 남종문인화만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청대(淸代) 문인들과의 교유를 통해 얻은 고증학적 식견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화단을 남종화 지상주의적, 모화(慕華)적인 것으로 이끌었다. 김정희의 지나친 중국적 화풍에 대한 경도(傾倒)는 결국에는 한국적인 화풍의 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그의 사의(寫意)를 중시하는 남종문인화 우월주의적 태도는 <세한도(歲寒圖)>(1844년, 개인 소장, 도 30)에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김정희金正喜 | 세한도歲寒圖 | 1844년 | 종이에 수묵 | 23×69.2cm | 개인 소장. 도30

 

 

元 倪瓚 1372년. 容膝齋圖 軸紙本水墨畫 臺北:國立故宮博物院 도31

 

 

<세한도>는 김정희가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시기에 역관으로 저명했던 이상적(李尙迪, 1804-1865)으로부터 귀한 중국의 서책(書冊)을 선물로 받은 후 그 답례로 그려준 그림이다. 김정희는 갈필(渴筆)을 사용하여 텅 빈 초가와 주변의 송백(松柏) 나무들을 매우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단순한 구성, 주변 배경의 대담한 생략, 정제된 서예적 필법, 차갑고 적막한 화면 분위기는 김정희가 추구했던 남종문인화의 세계가 무엇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26) 그 동안 <세한도>에 대해서는 김정희의 제주도 유배생활과 관련하여 정치적 시련 속에서도 지조를 잃지 않고 고매한 정신을 유지하고자 했던 그의 내면세계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해석해 왔다.

그러나 <세한도>는 근본적으로 원나라 말기의 문인화가였던 예찬(倪瓚, 1301-1374)의 양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세한도>에 보이는 텅 빈 초가와 주변의 키 큰 나무들, 황량하고 적막한 화면 분위기 등은 예찬의 <용슬재도(容膝齋圖)>(1372년, 대만 국립고궁박물원, 도 31)와 같은 작품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예찬 양식은 명대 이후 많은 문인화가들이 추종하였으며 화보를 통해 조선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예찬의 산수화는 단순한 구성 때문에 문인화가들이 쉽게 방작(倣作)할 수 있었다. 김정희는 추사체(秋史體)와 같은 독특한 서체를 개발한 창의적인 서예가로 평가할 수는 있지만 화가로서의 재능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현전하는 김정희의 작품은 <세한도>를 포함하여 거의 예외 없이 단순한 구성을 지닌 매우 평범한 예찬 스타일의 산수화이다.
따라서 <세한도>에 대한 과대해석보다는 화가로서 김정희의 능력에 대해 보다 객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26) 김정희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국립중앙박물관 편, 『추사 김정희-학예 일치의 경지』(국립중앙박물관, 2006) 참조. <세한도>의 성격에 대해서는 박철상, 세한도-천 년의 믿음 그림으로 태어나다』(문학동네, 2010) 참조.

 

 

전기(田琦) 계산포무도(溪山苞茂圖). 국립중앙박물관 도32

 

 

조희룡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 간송미술관, 도33 

 

 

김정희의 예찬에 대한 존경은 이후 전기(田琦, 1825-1854)와 허련(許鍊, 1809-1892) 등 김정희의 제자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전기의 <계산포무도(溪山苞茂圖>(1849년, 국립중앙박물관, 도 32)에 보이는 텅 빈 정자들과 키 큰 두 그루의 나무들은 이 그림이 철저하게 예찬 양식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려준다. 한편 진도(珍島) 출신의 지방화가인 허련은 김정희의 각별한 배려 속에 남종화의 대가로 성장하였다. 허련은 예찬 및 황공망(黃公望, 1269-1354) 계열의 구도와 거칠고 소박한 느낌의 갈필법(渴筆法), 담청(淡靑)의 설채법(設彩法)을 즐겨 사용하였다.

허련의 <죽수계정도(竹樹溪亭圖)>(서울대학교박물관)는 전경에 키 큰 나무들, 중경에 대나무들에 둘러싸여 있는 텅 빈 정자, 원경에 강 건너의 산 등 전형적인 예찬의 산수화풍을 보여준다.27)

김정희가 주창한 남종문인화 지상주의와 예찬식 산수화의 존숭은 허련과 그의 아들 허형(許瀅, 1862-1938), 손자 허건(許楗, 1907-1987), 친족인 허백련(許百鍊, 1891-1977)으로 이어졌다. 중인 출신의 조희룡(趙熙龍, 1789-1866)은 김정희에게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전기, 허련과는 달리 자신만의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하였다.

조희룡의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간송미술관, 도 33)는 복잡한 화면 구성과 마구 찍은 것과 같은 거친 점들에 나타난 표현주의적인 필묵법에 있어 김정희-전기-허련으로 이어지는 단순하고 생략적인 그림과는 매우 큰 차이를 보여준다.

 

 

김수철(金秀哲). <송계한담도(松溪閑談圖)>. 간송미술관

 

 

장승업(張承業) . 방황자구산수도(倣黃子久山水圖) 삼성미술관 리움. 도35

 

 

장승업張承業 | 호취도豪鷲圖 | 19세기 | 종이에 수묵 | 55.4×135.4cm | 삼성미술관리움

 

 

19세기 중엽 경에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김수철(金秀哲)은 <송계한담도(松溪閑談圖)>(간송미술관, 도 34)에서 보듯 대담한 구성과 맑은 담채를 사용하여 마치 현대 수채화와 같은 새로운 감각의 산수화를 그렸다. '이색화풍(異色畵風)'으로 지칭되는 이러한 화풍은 김창수(金昌秀)의 <동경산수화(冬景山水圖)>(국립중앙박물관)같은 작품에도 나타나 있다. 준법을 배제하고 바위 표현에 있어 오직 윤곽선, 담채, 점들만을 사용한 점은 기존의 산수화와는 달리 간결한 구도와 대담한 필묵법을 추구했던 이색화풍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한편 조선 말기의 거장인 장승업(張承業, 1843-1897)은 산수, 인물, 영모, 화훼, 기명(器皿) 등 모든 화목에서 뛰어난 재주를 드러냈다. 그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몹시 가난하여 의탁할 곳이 없다가 수표교(水標橋)부근에 살고 있던 이응헌(李應憲)의 집에 기식하면서 글과 그림 공부를 하였다. 그는 40세 전후하여 화명(畵名)이 높아지면서 왕실의 초빙을 받아 화원으로 활동하게 되었으며 감찰(監察)이란 관직을 제수 받았다. 장승업은 술을 좋아하고 방만한 기질을 지녔으며 기행(奇行)을 일삼았는데 이러한 일탈적인 성격을 반영한 것인지 그의 산수화에는 기괴한 분위기가 나타나 있다.

<산수도(山水圖)>(간송미술관)와 <방황자구산수도(倣黃子久山水圖)>(삼성미술관 리움, 도 35)에서 볼 수 있듯이 장승업의 산수화는 강렬한 필묵법(筆墨法), 과장된 형태, 특이한 설채법(設彩法)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장승업의 화풍은 당시 중국에서 크게 유행하던 해상화파(海上畵派), 즉 상해 일대에서 활동하던 일군의 화가들이 그린 그림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다. 인천을 통해 유입된 중국 청나라 말기의 기괴하고 파격적인 화풍이 장승업의 개인 양식 형성에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그의 화풍은 안중식(安中植, 1861-1919)과 조석진(趙錫晉,1853-1920)에게 계승되었으며 근대 화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장승업은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중국풍의 그림을 주로 그렸으며 혁신적인 주제와 형식의 그림을 개발해 낼 수 있는 새로운 비전과 창의성을 지니고 있지는 못했다. 즉 그는 재주가 뛰어난 괴짜 화가였는지는 모르지만 시대를 앞서가는 창조적 화가는 아니었다. 장승업과 근대화단이 이루지 못한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산수화는 현재 우리 화가들의 몫으로 남아있다.

 

27) 허련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김상엽,『소치 허련』(돌베개, 2008) 참조.

 

 

 

안중식 | 백악춘효白岳春曉 | 1914년 | 비단에 채색 | 168.7×52.4cm | 개인 소장

 

 

 

 

논문에 이외의  이미지 출처 :

 

韓國歷代書畵家事典

Dictionary of Korean Painters and Calligraphers through the Centu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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