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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09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회기로 2009. 7. 16. 22:52

[2009 경남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주름-전명희


주름은 길이다. 수없는 마음들이 오고 가고 수없는 사연들이 흘러가고 흘러오는 길.

내 얼굴에도 숱한 길이 있다. 가족과 친구와 이웃과 정을 나누고 더 크고 원대한 배움을 익히며 타인과의 사랑과 이별을 겪으며 그 길은 세세 갈래로 나뉘고 다져졌다. 동경과 꿈이 배어 있고 격정과 한숨이 녹아 있고 슬픔과 울분이 스며 있다. 그중 눈가의 주름은 내 얼굴의 군소의 길 중에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길이다. 그 길은 타인의 사연이 흘러오는 것을 일부러 막아서는 듯한 험한 둔턱을 끼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히 평범한 이웃들은 그 길을 선호하지 않을 것이다. 억세고 심술궂기까지 한 그 길에는 언제부턴가 타인의 발길이 뚝 끊긴 듯도 싶다.

화장을 잘 하지 않는 내가 그래도 그 길만은 조금 시간을 들여서 파운데이션이라도 펴 바르곤 하는데 마찬가지다. 이미 나 있는 길은 기초화장에 색조화장을 아무리 정성껏 해도 두툼한 심술의 장애물을 가려낼 길이 없이 도드라져 보인다. 외출이라도 할 양이면 거울 앞에 서는 시간이 길어진다. 아무리 해도 그 길 때문에 전체적인 인상이 좋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여보, 나 수술할까 봐요. 눈 밑이 너무 사나워 보여서 영 신경 쓰여요.”

“생긴 대로 살지, 뭘.” 남편은 아내의 이 심각한 고민이 그저 우습고 하찮아 보이기만 하는 것일까.

눈 밑 지방을 제거하는 수술이 있다기에 혹해 있다가 마침 얼마 전 미용실에서 펼쳐본 잡지책에 수술 전과 수술 후의 비교 사진을 보니 사뭇 마음이 끌려서 넌지시 화두를 꺼내본 것인데 역시 남편의 화법은 완곡하면서도 강하다. 남편이 그러라고 해도 아마 평생 성형외과의 문을 두드릴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말이라도 한마디 “그래? 나는 괜찮지만 그렇게 마음에 걸리면 한번 알아 봐요.” 했더라면 두고두고 뿌듯해 하지 않았을까. 뿐이랴, 남편을 자랑스러워하고 신뢰하는 마음이 그 전보다 몇 배는 두터워졌을 것이다.

하기는 나도 이 ‘말 한마디의 진정!’을 소홀히 하고 남편을 서운하게 할 때가 종종 있다. 남편의 속마음이 아내의 기탄없는 칭찬 한마디 듣고 싶어 하는 줄 뻔히 알면서도 그 한마디에 끝내 인색하여 나보다 다섯이나 많은 점잖은 남편을 삐돌이 아이처럼 만들어 버릴 때가 있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니 그동안 남편이 너그럽지 못한 아내에게 얼마나 조바심을 내고 심기가 불편했을지 짐작이 가고 많이 미안해진다.

새삼 부부지정의 밀도를 되돌아보게 하는 눈 밑의 길은 언제부터 생긴 것일까.

십여 년 전 장애 아동들을 돌보는 직장을 다닐 때이리라. 지금은 그 주변이 얼마나 번화하게 변했는지 모르지만 그때엔 시골 마을에서 꽤 깊숙이 들어간 산 밑에 덜렁 그 건물 하나 있었다. 주변으로 봄에는 진달래, 여름에는 보드란 자귀나무 꽃들이 지천에 흔하게 피었다. 가을에는 감나무와 밤나무가 툭툭 열매를 내던지며 우리들을 유혹하던 곳이었다. 그중 어느 가을이 문제였던 것 같다. 외출이 가능한 아이들 몇을 데리고 주변의 산을 산짐승처럼 뛰어 다녔다. 예쁜 나뭇잎도 따고 밤도 줍고 떫은 감을 따서 방안에 걸어둘 욕심으로 자꾸 깊숙이 깊숙이 아이들을 몰았다. 그날 유독 커다란 잎에 원색의 붉은색 단풍물을 들인 나무들이 많았었다. 그 색이 너무 강렬해 감히 잎을 따거나 만지지는 않았지만 그 곁을 수도 없이 스치고 지나쳤던 게 결국 화근이었다. 그날 밤부터 얼굴과 목에 붉은 빛이 돌며 좁쌀만한 돌기가 돋아 나오기 시작하더니 이내 오른쪽 볼 쪽이 벌겋게 부어올랐다. 주변에서는 병원에 다녀오라고 채근했지만 나름의 소신만 가지고 차차 괜찮아지려니 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토록 어리석고 무모한 태도를 고집했는지 스스로 아연할 지경이지만 그 때로선 아마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곳 아이들은 모두 장애아들이었다. 정신지체 1급부터 뇌성마비 1급, 증상이 가벼운 아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심각한 장애를 가진 중증 장애아들이었다. 사지가 뒤틀린 채 평생을 누워서 살아야 하는 아이도 있고 제 몸을 학대하여 하루가 멀다 하고 피를 보는 아이도 있고 눈만 끔벅끔벅 누워서 떠주는 밥을 받아먹을 힘이 없어 임의로 입을 벌리고 먹여야 되는 아이도 있었다. 고릴라 같은 큰 덩치에 문턱이고, 기둥이고 가리지 않고 꽈당, 꽈당 넘어져 머리와 얼굴이 상처로 울퉁불퉁 길이 난 채 헬멧을 쓰고 사는 아이도 있었다. 그 아이들과 함께 살면서 겨우 얼굴에 난 부종과 돌기 때문에 병원을 다닌다는 것이 왠지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스스로 낯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약국에서 바르는 약으로 며칠을 버티다 보니 그럭저럭 가라앉기는 했지만 그 때 이후 눈 밑에 이상한 주름이 생겼다. 살이 부었다가 갑자기 부기가 빠지면서 늘어진 피부가 주름으로 고정돼 버린 것이다. 그날 그 유별난 원색으로 나를 유혹했던 나무는 옻나무였음을 나중에 알았다.

눈가의 주름이 곱고 순한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웃을 때 특히 이 주름이 진가를 발휘한다. 두 눈을 중심으로 마치 은은한 꽃 두 송이가 살포시 피어나고 동시에 얼굴 전체가 하나의 화사한 꽃처럼 피어난다. 꽃 같은 고운 길로 닦이기까지 그들의 생애 또한 그렇듯 순정하고 포근하고 너그럽게 끌어안지 않았을까. 자신보다는 타인을 먼저 생각하고 가까이 있는 이웃들에게 보기만 해도 힘이 되고 아름다운 자극을 심어준 삶을 살아오지 않았을까. 눈가의 길이 순하고 섬세한 이에게는 알 수 없는 그런 믿음과 넉넉함과 고요한 포용력이 느껴진다. 그런데도 이 소중한 주름을 일부러 돈을 들여 없애려고 안달을 하는 사람을 보면 마음이 답답해진다. 현재의 자신을 부정함은 물론 애써 가꾸고 닦아온 연륜과 알뜰한 삶의 흔적까지 지우려는 어리석음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주름은 인생이다.

내가 세상에 어떤 걸음으로 걸어 나갔는지를 뚜렷이 보여주며 살아온 세월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인생 자체다. 주름이 유독 험하고 거칠고 크고 깊숙한 사람들에게는 그 달려온 인생 또한 순탄하지 않았음이 느껴진다. 그인들 타인이 쉬어 가고 싶은 아늑하고 평탄한 길을 만들고 싶지 않았으랴. 이따금씩 쉬어가며 돌아볼 여유도 없이 숨가쁘게 달렸던 그들의 역경과 굴곡 많았던 삶에 경의를 표하며 이제라도 온유하고 다감하고 여유로운 일만 생기기를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웃으면 더 밉살스럽게 일그러지는 내 눈가의 주름. 이제라도 살뜰히 보듬어 줘야겠다. 누가 보면 참 심술궂다, 밉상이다 하겠지만 한때의 순수한 소명감으로 불우한 이들과의 정을 나눴던 젊음의 흔적이 아닌가. 거울을 볼 때마다 그때의 순수한 동기를 흠모하며 현재의 나를 돌아보리라. 그때 이후 특이할 만한 주름(길)이 생기지 않았음은 더 이상 뜨겁고 진솔함이 아닌 적당 적당히 살아왔음을 의미함이 아니런가.

이제는 주름이 생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련다. 주름은 나 자신을 이웃에게 데려가고 이웃을 나에게로 오도록 하는 정다운 길이기 때문이다. 대신 크고 눈에 띄는 길보다는 작고 약해서 큰길에선 함부로 나다닐 수 없는 연약한 마음들이 터놓고 오갈 수 있게 가능하면 좁고 가늘고 부드러운 길을 만들리라. 그러기 위해선 지금보다 더 세밀한 마음의 정도(精圖)로 내 안을 재정비하고 지금보다 더 투명하고 정갈한 축척으로 영혼의 지도를 기록해야 하리.

거울을 보며 내 삶이 배어 있는 주름들을 본다. 어떤 의미로도 깊이와 연륜이 묻어나려면 아직 멀었다. 그것이 아닌 데에야 삶의 어떤 한가함과 나태는 물론 투정과 한숨조차 스스로 용납해서는 안 되리라.



[2009 매일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왈바리 - 주인석

  
  사는 일은 뚜렷한 공식도 방법도 없다. 스스로 부딪히고 깨지며 웃고 우는 가운데 버려지기도 하고 선택되기도 하여 쌓이는 것이다. 삶의 조각이 크다고 좋은 모양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작다고 쓸모없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작은 조각 하나가 인생을 무너지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얘는 기형이라요.”


  쿵 하는 소리로 기겁하는 내게 금방 해산한 사람답지 않게 싱글싱글 웃으며 말한다. 끄응 힘을 주며 일어서는 남자 엉덩이 밑에 시커먼 것이 툭 떨어진다. 여자 몸의 진통 끝에 탄생은 보았어도 남자 밑으로 뭣이 쑥 빠지는 일은 생전 처음이다.

  정말로 머리와 몸이 한 덩어리다. 여자들의 손에서 짭짤하고 매콤한 대우를 받아야 할 것이 제 구실을 못하니 남자 엉덩이를 붙잡고 있나 보다. 말 못하는 것일지라도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건망증 심한 주인을 만나는 바람에 옹기 팔자 뒤웅박 팔자가 됐다. 뚜껑이 떨어지지 않아 벙어리 옹기가 된 것이다. 그래서 옹기 구실을 못하고 의자 신세로 살게 되었다. 옹기를 만드는 여러 과정 중에 절대 잊어버리면 안 되는 한 가지가 있단다.

  처음 흙으로 빚어 그늘에 말린 그릇은 물그릇이라 한다. 건아작업을 거쳐 잿물을 입히고 환을 친다. 환을 칠 때는 난초 잎도, 학도, 자잘한 꽃무늬도 일렬로 새긴다. 신이 사람의 쌍꺼풀이나 볼우물을 그려 넣듯이. 환치기가 끝나면 마지막 강정을 한다. 이때는 건아와 달리 햇볕에서 바짝 말린다. 이때부터 이름은 날그릇으로 바뀐다.

  날그릇은 가마서리가 끝나면 1천300℃의 뜨거운 불 속에서 옹기가 된다. 이때 웅심 깊고 넉넉한 옹기가 되기 위해서는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왈바리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 왈바리는 가마서리 때 옹기 몸과 뚜껑 사이에 놓거나 몸과 몸을 켜켜이 쌓을 때 반드시 넣어야 하는 완두콩 크기의 돌이다. 왈바리 넣는 것을 잊어버리면 옹기끼리 붙어서 제 구실을 할 수 없는 모양이 된다.

  왈바리는 옹기의 심장이 제 기능을 할 수 있게 도와 매끈하고 까무잡잡한 피부의 건강한 옹기로 탄생시킨다. 제 무게보다도 수십 배가 되는 뚜껑을 이고 나흘간 가마 속에서 참아내는 왈바리는 작아도 얼마나 다부진지 모른다.

  왈바리는 원래 경상도 사투리로 말괄량이를 뜻한다. 자그마한 말괄량이 손에 커다란 옹기의 탄생이 달렸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옹기의 덩치로 보나 쓰임새로 보나 어느 하나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이는데 그렇게 큰 탄생의 비밀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생각이 이쯤 미치자 우리 집 옹기의 흠이 떠올라 슬쩍 웃음이 난다.

  내 별명은 어릴 적부터 왈바리다. 나이 차 많은 막내로 태어났으니 왈가닥일 수밖에 없었다. 늘 혼자 놀고 스스로 터득해야 했다. 그나마 큰 흉터가 없는 것이 참 다행이다 싶을 때도 있다.

  모내기가 한창인 늦봄이었다. 일꾼들을 위한 잔치국수를 준비한 엄마는 커다란 가마솥에 멸치 육수를 냈다. 엄마가 고명으로 쓸 거섶을 준비하러 나간 사이 가마솥 뚜껑에 올라앉았다. 따뜻한 기운이 엉덩이를 간질거렸다.

  가마솥 배꼽을 돛대처럼 잡고 엉덩이를 반쪽씩 달싹거리며 놀았다. 그러다 조금씩 흔들었다. 살짝살짝 뚜껑이 밀리면서 재미있는 뱃놀이가 되었다. 신이 난 나는 돛대를 좀 더 세게 흔들었다. 그때 그만 배가 미끄러지면서 커다란 파도에 휩쓸려 육수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국수 삶다가 애 삶을 뻔했다며 놀란 엄마, 심장이 제 박동 수를 찾기도 전에 또 일을 냈다. 싸리나무로 장난감 지게를 만들다가 나무는 가만 두고 애꿎은 손만 내리쳤다. 몸에 피가 거의 다 빠져 나갈 쯤 발견되어 또 한 번 엄마를 기겁시켰다. 그 일 때문인지 아직도 악성빈혈로 고생한다.

  파리한 얼굴의 나는 약을 달고 살았다. 어느 날 뒤뜰의 감나무가 꼭 나처럼 생겨 보였다. 핼쑥한 이파리 터실터실한 줄기가 내 얼굴과 입술을 꼭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감나무에게 내 약을 억지로 다 먹였다. 나중에 엄마한테 들켜 엉덩짝이 불나게 맞기도 했지만 그 후로도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모험심은 끝나지 않았다.

  내가 머물다 간 자리는 늘 왈가닥 소리가 났는데 오빠는 조용하고 침착한 성격에 무게감까지 있다. 오빠 본보라는 말을 고린도전서 13장처럼 들으면서 자랐지만 타고난 성미를 바꾸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내가 자잘한 돌이라면 오빠는 옹기였고 속에 웃기 돌까지 품고 있다. 내가 어부렁하다면 오빠는 실속파다. 그래서 오빠는 실수하는 법이 없고 손해 보는 일이 없다.

  집안에 일이 생기면 엄마는 내게 바리바리 전화를 한다. 그러니 내가 왈바리를 면치 못하고 사는 것은 당연하다. 일이 이쯤 되어도 오빠는 입을 꾹 다물고 말이 없다. 애가 터져 죽을 지경이 와도 오빠의 입은 열리지 않는다. 어찌 보면 무관심 같고 달리 보면 곰삭아 해결되길 기다리는 것 같기도 하다.

  왈가닥 성격인 나는 일처리를 하면서 속이 1천300℃ 이상 끓어오르지만 끝날 때까지는 뚜껑을 이고 참는다. 일이 끝나고 나면 왈바리는 땅에 버려지고 모든 공은 옹기한테로 돌아간다. 옹기는 모든 걸 혼자 이루어 낸 척 장독대 중간을 차지하고 묵직하게 앉아 있다.

  말괄량이가 있어 정숙한 사람이 더 참해 보이듯이 온몸을 던진 왈바리의 희생이 있어 옹기가 돋보이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왈바리 없이는 제구실을 할 수 없는 운명의 옹기이기에 비밀을 숨기듯 굳게 입을 다물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를 왈가닥이라고 배척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칭찬할 수도 없는 오빠의 입장이 이와 같지는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옹기 마을을 다녀간다. 옹기의 장점은 극찬하지만 옹기를 탄생시킨 왈바리의 존재를 알고 가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의자가 된 옹기를 보고서 왈바리의 존재를 알게 된 나도 이전에는 세상을 보는 눈이 뭇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어쩌면 우리 주변에도 옹기 같은 사람보다는 왈바리 같은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때론 와글거리며 우왕좌왕할 때도 있지만 그들의 소담스런 삶이 모여 따뜻한 사회가 존재한다.

왈바리를 쓸쓸히 내려다보고 있는 옹기를 보니, 삶은 크고 모양 나는 것도 좋지만 작고 못나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 더 아름답게 보일 때가 있다. 왈바리 몇 조각을 주웠다. 나도 모르게 버린 내 삶의 조각들을 줍듯.


부산 부일신춘
[신춘문예 - 수필] 달 - 박월수

그날은 배꼽마당이 들썩거리도록 말 타기를 하고 놀았다. 배가 촐촐할 무렵 친구는 내 손을 잡고 자기 집으로 이끌었다. 친구의 어머니는 호박전을 굽고 있었다. 금방 구운 호박전은 달콤하고 고소했다. 노랗고 동그란 모양이 달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 달이 반달이 되고 하현달이 되고 눈썹달이 되어 내 속으로 사라졌다.

몇 개의 달을 삼켰는지 모른다. 어스름 녘이 되어 달처럼 부른 배를 안고 집으로 왔다. 달을 닮은 호박전을 먹을 때부터 아래가 이상했었다. 이제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싫고도 궁금한 무엇이 내 몸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석에 숨어서 아무도 몰래 아랫도리를 내려 보았다. 낮에 먹은 호박전 빛깔이 끈끈하게 묻어 있었다. 아침이 되어 제일 먼저 살펴본 샅에서는 붉은 달빛이 흥건했다. 울컥 서러움이 밀려들었다.

뒤꼍 뚜껑 덮인 대야에서 몰래 훔쳐본 어머니의 서답이 떠올랐다. 달빛보다 더 붉은 물에 담겨있던 서답은 한 번도 앞마당 빨랫줄에서 하얗게 펄럭인 적이 없었다. 언제나 뒤꼍에 낮게 엎드려 달빛 아래서만 말랐다. 결코 다른 빨래와 함께 섞인 적 없는 그것은 어린 내 눈에도 부끄러움이었고 남에게 숨겨야 할 비밀이었다.

앉은뱅이책상 서랍 속에 꼭꼭 숨겨둔 흔적을 반나절도 안 되어 어머니께 들켰다. 어머니는 달거리가 시작된 거라고 했다. 여자라서 겪는 불편이며 부끄러움이니 참아야 한다고도 했다. 달마다 한 번씩 며칠에 걸쳐 하게 된다는 마지막 말은 울고 싶은 나를 적잖이 안심시켰다. 내 속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달빛을 날마다 경험하며 살 수는 없다고 절망하던 참이었다. 어머니의 말이 끝나고 왜 여자는 부끄러워야 하고 숨겨야만 하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뒤꼍의 뚜껑 덮인 대야를 생각하니 나도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오후 내내 반짇고리 곁에 앉아 하얀 소창을 만지작거리던 어머니는 개짐이란 걸 만들어 내게 주었다. 뒤꼍에서 몰래 훔쳐 본 어머니의 서답이랑 참 닮았었다. 내 것이 좀 작았을 뿐. 샅에 차는 물건이라 했다.

셋이나 되는 오빠들 틈에서 풀썩거리며 자란 나는 억지로 여자가 되어야했다. 달을 지날 때 마다 개짐이 지닌 부피가 부담스러워 치마를 입고 견뎌야 했으며 달거리의 아픔도 참아야 하는 줄만 알았다. 여자보다 남자가 더 많은 우리 집에서 아무 눈에도 띄지 않게 모아둔 서답을 씻느라 밤에 몰래 깨어있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는 어머니의 자궁처럼 포근한 유년의 배꼽마당과 결별했고 달을 닮은 호박전을 유난히 싫어하게 되었다. 내가 잉태의 신비를 경험하기 전까지는.

달콤 쌉싸래한 신혼의 어느 날, 여름 땡볕에 제 몸을 둥글게 말아 키운 감자를 삶았다. 오지게 잘생긴 놈을 골라 입안에 넣다가 울컥 신물이 올라왔다. 빙빙 어지럼증이 생기더니 하늘이 노랬다. 달을 본지가 언제인지 헤아려 보곤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내 안에서 새 생명이 움을 틔운 것이다. 세상이 다 내 것이 된 양 좋았다. 몸속의 아이가 톡톡 발길질을 하던 날은 숨이 멎을 것 같은 경이로움에 휩싸이기도 했다. 말갛게 숨 쉬던 달빛이 치마 아래로 축축하게 번지던 날 아이의 첫 울음 소릴 들었다. 서 말의 붉은 달빛을 쏟은 후에야 아이를 낳는다는 우리 어머니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처럼 나도 그만큼의 달빛을 쏟은 후 비로소 엄마가 된 것이다.

우주가 내 품에 와서 안긴 듯한 잉태와 출산의 기쁨을 가슴 뻐근하게 누려보고서야 알 게 되었다. 내게로 들어 온 달의 소중함과 내 안에서 느끼는 귀찮지만 달콤한 비밀은 건강한 여자에게만 허락된 의무이며 축복이라는 것을.

예전엔 가뭄이 심하면 붉은 혈이 선명한 여자의 개짐으로 깃발을 만들어 기우제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생명의 상징인 물을 여자의 달거리로 불러오려 했다는 건 잉태의 근원이 거기에 있다고 믿은 때문이었으리라. 그런 이유로 지금껏 내가 알던 것과는 달리 여자의 달거리는 신성한 것으로 여겨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조상들은 달의 정기를 받으면 여성의 생산력도 높아진다고 믿었다. 보름달이 뜨기를 기다려 '강강술래'나 '월월이청청' 같은 놀이를 여자들만 즐긴 것을 보면 말이다.

나는 이제 내가 처음 달을 보았을 때의 어머니 나이가 되었고 엉덩이에 살이 통통하게 오르고 젖무덤이 봉긋하게 부푼 딸은 그때의 내 나이가 되었다. 둥근 호박전 빛깔을 가진 달과 제 몸의 붉은 달빛도 그 아이는 보았다. 빠르게 시간이 흘러 그 아이가 우주와 소통하게 될 날을 나는 손꼽아 기다린다. 달이 가져다 준 몸의 신비를 우주를 품에 안으므로 온전히 이해하게 되는 날 비로소 그 아이도 생명의 경이로움을 온 몸으로 받들고 지켜가게 되리라.

그때쯤이면 아마 나는 달의 몰락을 경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시기에 겪게 된다는 끝 모를 우울과 나른함으로 힘든 날들을 맞을 수도 있다. 혹은 쓸쓸함과 불안함이 엄습해 와서 밤마다 잠 못 들고 뒤척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서 뜨고 지던 달의 기억들이 모여 이루어진 아이와, 그 아이의 아이를 보면서 순하게 견디어 낼 것이다. 이미 오래전에 달이 준 의무와 축복을 누린 후 참다운 *완경(完經) 을 이룬 내 어머니처럼.

출처 : *♡*여신이시스*♡*
글쓴이 : 포세이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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