節孝先生孝門碑銘 竝序
절효선생 효문비명 병서(김극일)
佔畢齋 金宗直 撰(점필재 김종직 지음)
成化十八年壬寅春間 前執義金先生孟 自淸道 遣其子驥孫馹孫 從余門學 且以書 索銘其先君子孝行之碑 其言 曰先公 諱克一 金海人也
성화18년(1482) 임인년 봄에 이전에 집의를 지낸 김선생 맹(孟)이 청도로부터 그 아들 기손(驥孫) 일손(馹孫)을 보내 나에게서 공부를 하게하고, 또 그 선조의 효행비문에 새길 글을 요청하여 말하노니 선공(맹의 부친)의 휘는 극일(克一)이고 김해사람이다.
金海 金官國始祖首露王 前史不詳 其所自出 以爲金卵 入金盒從天而降 遂以金爲姓 傳至十世 末王仇亥(衡)以其地 降附新羅 子孫皆從 大角干金庾信 乃其後也
김해는 금관국 시조 수로(首露)왕이 이전의 역사는 분명치 않으나 그 탄생한 것은 금알이 금합에 담겨져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여 김을 성으로 정했다. <후세에> 전해져 10세에 이르러 마지막 왕 구해(구형)가 그 땅을 가지고 신라에 항복하여 자손이 모두 따라 갔으니 대각간 김유신(庾信)도 그 후손이다.
居故國者世爲州史 高麗時 有名管者始應科目 登于朝 管 生文淑經德齋生 文淑 生伉都制庫判官 伉 生湑義興縣監 是 吾先公之考也
그 나라에 살면서 대대로 벼슬하였고 고려 때 이름을 날린 관(管)이 처음으로 과거에 응시하여 조정에 들어갔다. 관은 경덕재생 문숙(文淑)을 낳고 문숙은 도제고판관 항(伉)을 낳고 항(伉)은 의흥현감 서(湑)를 낳았으니 이분은 내 선공(극일)의 부친이다.
公 幼有至性 祖父閒居鄕里 凡有出入 必奉杖屨以隨 蛙步 未嘗離 祖父晩年 畜二妾 祖母朴夫人 有不協意 往往不食 公 纔八年 亦不食 待其飯亦飯 祖父日以琴歌飮博 自娛 或繼以夜 每食 公 手具饌羞 必有酒肉 與吾先妣 相警戒 思所以悅耳目樂心志者無所不至
공(극일)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지극해서 조부가 시골에 계실 때 언제나 출입하실 때는 반드시 지팡이와 신을 들고 따르며 모시고 개구리 걸음걸이를 하며 조금도 떠나지 않으셨다. 조부가 만년에 두 첩을 두어 조모 박부인이 뜻이 맞지 않아 자주 식사를 하시지 않으시니 공이 겨우 8살이었지만 따라서 음식을 먹지 않고 기다리다가 <조모가> 음식을 드시면 같이 먹었다. 조부가 날마다 풍류와 술을 즐겨 어떤 때는 밤까지 계속되어, <조부의> 식사 때마다 공이 손수 반찬을 올리되 반드시 술과 고기를 갖췄으며 내 어머니와 함께 서로 경계해서(신경을 써서) <조부의> 눈과 귀를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을 생각하고 마음을 즐겁게 해드리는 것을 끝이지 않았다.
永樂丙申春 祖母病疽良苦 公 親吮其血而愈 及秋 以他疾終 公勺飮不入口 幾至滅性 卜葬于豊角縣之境 距家三十里 仍廬其側 每朝夕尊後 必以草屨徒步 來省父所而返 雖隆寒暑雨 不少懈也
영락병신년(1416년) 봄에 조모가 종기를 앓아 고생하여 공이 직접 그 피를 입으로 빨아서 나았으나, 그 해 가을에 다른 병으로 세상을 뜨시니 공이 아무것도 입에 넣지 않아 거의 실성함에 이르셨다. 풍각현의 근방에 장사하니 집에서 30리 거리였다. 그 곁에 움막을 짓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예를 올린 후 반드시 짚신발로 걸어와 부친께 문안을 드리고 돌아가니, 비록 큰 추위와 더위와 비에도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越五年庚子 祖父寢疾 泄痢不常 公意其爲嗜酒爛腸所致 貯之器 埋于地 尋出嘗之 知必危大慽 及均(土/勿) 合窆于祖母之兆 哀毁踰前喪 每晨夕 伏墓側 逮闇不止 有虎來蹲其傍 不怕 飼之以祭所徹之食 去而復來 未嘗爲害 里人異之
그 후 5년 경자(1420년)에 조부가 병으로 설사(泄痢)하여 평상시와 같지 않아, 공이 생각하기를 술로 인해 위장을 상했는가 하고, 그릇을 쌓아서 땅에 묻었다가 꺼내 맛보고 위중함을 알아 크게 근심하였으나, 마침내 운명하니 조모 산소에 합장하고 슬픔이 이전의 상을 상했을 때 보다 더하였다. 매일 새벽에 묘 곁에 엎드려 그칠 줄 몰라 호랑이가 나와 그 옆에 걸터앉아도 두려워하지 않고 제사 지낸 음식을 먹이니 갔다가 또 왔으나 조금도 해치지 아니하여 동네 사람들이 이상히 여겼다.
自居廬以來 凡關家事 皆置不問 苴杖 不出洞口 旣服關 奉事祠堂 益虔 得異味節物 不薦則不敢食 待客應事 雖倉卒 未嘗坐父母平日之座 事二庶母 加於父在時 飮食衣服所資 畢給 及死葬送 盡禮 心喪至期 每遇時祭 必以紙牋祔焉
시묘한 이래로 모든 집안일에 관해서는 모두 버려두고 묻지 않았고, 풀 지팡이를 짚고(?) 동네 나 입구에 나가지 아니하시고, 상복을 벗은 후에도 사당을 받드는 일에 더욱 정성을 다하였다. 특별히 다른 음식이 있어도 권하기 전에는 감히 잡숫지 안하셨다. 손님을 대접하고 일을 처리함에 비록 급박한 일이라도, 부모가 평소에 앉던 자리에는 앉지 않았다. 두 분의 서모(계모)를 섬기는데 있어 부친이 살아 계실 때보다 더 잘해서, 음식과 의복과 용돈을 충분히 드렸으며, 죽어서 장사를 지내는 것에도 예의를 다하여 마음으로 상제노릇을 하고, 시제를 지낼 때마다 반드시 지방을 부쳤다.
公性 恬靜不求仕宦 公 外舅嘉善漢城府尹李公暕 方在朝 勸公仕 公辭以親老不願一日離也 遂終身白衣 惟日日淨掃一室 整冠危坐 讀小學書 敎子弟 必稱張公藝勉之 與里中人 作睦族稧 凡禍患相恤 冠婚相慶 春秋吉日 徵遂宴遊 俱有節目 鄕隣執友之死 必以情好隆殺 其吊賻 且不進酒肉 雖在婢僕賤微 亦然故 一旬肉食 不過二三日
공은 성품이 조용하여 벼슬을 하고자 하지 않았고, 공의 장인인 가선대부 한성부윤 이간(李暕)공이 조정에 있어서 공에게 벼슬을 권하여도 공이 부모가 늙어 하루도 떠날 수 없다하여 사양하였고, 마침내 평생을 백의(벼슬을 하지 않음)로 지냈다. 오직 날마다 방을 청소하고 의관을 정제해 꿇어앉아 소학 책을 읽었으며, 자제를 가르칠 때는 반드시 장공예(중국? 사람 이름)을 들어 권했으며, 마을의 사람들과 같이 목족계를 만들어 모든 어려움에는 서로 도왔으며, 벼슬과 결혼을 하는 사람에게는 서로 축하하고, 봄과 가을의 길일에는 모여서 같이 잔치를 벌이거나 놀되 절차를 정했고, 마을의 친구가 죽으면 반드시 정이 두텁거나 그렇지 않은 정도에 따라 부조하고, 또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아무리 노비나 천하가나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도 또한 그렇게 하여 10일에 고기를 먹는 날이 불과 2~3일 이었다.
享年七十六而卒 前郡守李椅俱實狀聞于朝 後郡守趙嶔 承朝旨旌其閭
향년 76세로 세상을 뜨시니, 전 군수 이의(李椅)가 실상을 준비하니, 조정이 이를 듣고 다음 군수 조흠(趙嶔)이 조정에 뜻을 받들어 정려문을 세웠다.
孟 今謝辭還故邱 慨公之行 不鑱于石 無以昭焯于後世 願君 筆之以慰我顯親之丹悃焉 宗直 拜以復曰孝爲百行之首 公之純篤 如是 盖與曾參黔婁 頡頏於千載矣 吾聞有德者 必有後 旣有先生 以爲之嗣而先生昆季之子又將嶄然出頭角 趾美其業者不一 是能有後矣 宗直 無狀 幸今謬玷太史氏列 記載其事也 況長者有命 敢辭諸 遂錄先生之書而繼之以詞曰
맹(孟)이 지금 벼슬을 하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공(극일)의 행적이 비석에 새겨져 있지 않아 후세에 밝힐 수 없음을 개탄하여, 원컨대 군(김종직)은 이를 기록해서 내 어버이 정성을 위로하라.’ 하니 종직이 절하고 회답하되 “효성은 백가지 행위의 근본이고, 공의 독실함이 이와 같으니 일찍이 삼검루(별이름?, 또는 증자와 검루?)와 함께 역사에 길이 오르내릴 것입니다. 제가 들어보니 덕 있는 이는 반드시 후손에 영향이 있다고 하니, 이미 선생이 이렇게 하고, 후손들도 그러하여 선생의 형제의 아들이 또 각기 두각을 나타내 그 사업을 이어받은 사람이 하나가 아니니, 이는 능히 영향이 있습니다. 종직이 볼품은 없으나 다행히 지금 오류와 흠이 있는 옛날의 역사와 씨족을 정리하여 그 일을 기록하고 있으니 하물며 장자(맹)께서 하신 명령을 감히 사양하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선생(극일)의 사실을 기록하고 계속해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人有懿行 孝莫爲先 誰無父母 鮮矣 克全 金官後裔 乃有斯人 髫齔秉誠 白首愈新 參乎不愧 婁也思齋 神物亦感 來衛其棲 二庶母終 心哀以期 玆皆大者 其餘可知 公藝百忍 公則裕如 一旬九蔬 豈勉强且 潛德有報 翳天之定 有子有孫 聲實俱稱 宜其引之 袞袞公卿 我作此詩 爲勤孔明
사람의 행동 중에 효도가 먼저이니 누가 부모를 모르겠는가. 능히 모두가 그럴 것이다. 금관의 후손 중에 이런 분이 나셨으니 어릴 때 지킨 효성 늙어도 새로워라. 증자에게도 부끄럽지 않고 검루도 공경한다. 신물(神物;호랑이)도 역시 감동해서 옆에 와서 보호했네, 두 서모 세상을 떠나니 기일에 마음으로 슬퍼하니 이것이 모두 큰 것이며. 나머지를 알 수 있다. 장공예를 본받아 백가지를 참았으며 공은 항상 여유로워 10일에 9일은 소찬으로 지냈으니 어찌 어지로 하거나 시킨 일이겠는가. 숨은 덕을 갚게 되니 하늘이 정한 것이요, 아들 손자 성실하여 칭찬이 자자하니 마땅히 이끌어 된 것이다. 높은 벼슬한 사람이 많이 났네. 내 이 글 지어내서 후학을 권면한다.
節孝先生孝門銘跋
절효선생 효문 명발(휘극일)
道州進士李君光義踵余門致其鄕父老之語曰永樂年間吾鄕有節孝先生先生之孝行載在三綱行實中先生旌閭之銘 實佔畢金先生筆先生之事蹟之傳世行後亦良足矣
도주(현재 청도)진사 이광의가 나를 찾아와 그 동네 어른들의 말을 전하기를 “영락년간(1403~1425년)에 우리 고장에 절효선생이 있었는데 선생의 효행이 삼강록행실에 실렸고, 선생의 정려 비문은 실제로 점필재 김선생(김종직)이 지었으니 씌어져 있는 선생의 사적을 후세에 전하는 것은 큰 의의가 될 것이다.
顧先生均(土/勿)殆二百餘載尙闕維樹之石具也 節孝之孫有濯纓公有三足堂而當佔畢時則濯纓尙少況曾孫三足堂乎二先生之不見錄於其文固也
되돌아 보면 선생이 가신지 200여년이 되어 오히려 새긴 글이 나무에 매어져있는 비석으로 되어버렸다. 절효의 후손에 탁영공과 삼족당이 있으나, 점필재 시절에는 탁영이 아직 어렸는데 하물며 증손 삼족당은 어떻겠는가. 두 선생이 그 글에서 빠진 것은 그럴 수 있을 것이다.
乃者吾鄕人士謀刻孝門銘以寓吾鄕戀德之誠如又擧濯纓三足補諸顯刻奚亶于節孝有光吾鄕之少子 後生咸知節孝之有此孫而濯纓三足之有此祖也 相率而戒子孫砥行立名世世無怠玆豈非吾鄕之一大功令也
이에 우리 고장의 인사들이 효자문에 글을 새기고, 우리 고장의 추모의 정성을 표하고, 그 탁영과 삼족을 넣어 보충하여 모두 나타내어 새기면, 진실로 절효가 빛날 것이다. 우리 고장의 소자 후생들이 모두 절효에게 이런 후손이 있고, 탁영과 삼족에 이런 조상이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서로 따르고 자손에게 훈계하고 행동을 가다듬고 이름을 세우는 일에 영원히 나태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이것이 우리 고장의 크나큰 사업이 아니겠는가.
汝其走京師謁薦紳先生文 敢以請余逡巡避席遜不敢當李君退而復來者再觀其意不得文不返鄕也 予遂感其堅懇按其所操狀節孝先生生丈夫子六人知名者四人第二朗卽執義孟孟生三子俱有文行次第取甲乙科如拾芥
너는 서울의 유명한 분에게 달려가서 선생의 업적을 추모하는 글을 받아오라하여, 감히 나에게 청하여 <나는> 뒷걸음치며 그 자리를 피하며 사양하면서 감당하지 못한다고 하였으나 이군이 물러갔다가 다시 와서 그의 뜻을 다시 보니 글을 얻지 못하면 돌아가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그 굳은 정성에 감복해서 가져온 글을 살펴보니 절효선생이 낳은 아들 6형제 중에서 이름난 이가 넷이요 그 둘째가 집의 맹(孟)이니 맹이 세 아들들을 두었고 극과 행실이 뛰어나고 갑을과를 겨자를 줍는 것같이 합격하였다.
長駿孫官直提學是生三足堂季馹孫卽濯纓先生也 濯纓受業於佔畢齋早以文鳴 成廟朝闡大對世所稱中興策者其文汪洋放肆若注江河所著濯纓集行于世
맏이 준손(駿孫)의 벼슬은 직제학이고 이 분이 이 삼족당을 낳고, 막내 일손(馹孫)은 곧 탁영 선생이다. 탁영은 점필재에게서 공부를 하고 일찍부터 문학이 소문났고 성종 때에 세상 사람들이 칭하기를 중흥책이라는 것을 널리 폈고, 그 글이 넓은 바다에 퍼지고 강과 하천에 물 흐르듯이 알려지고 탁영집이 세상에 전한다.
性簡亢棘棘其秉史筆也 直書不饒邪侫竟以此被東市至禍至今人讀戊午錄者無不泣數行
성품이 간결하고 단단하여 붓을 잡으면 있는 대로 쓰고 간사하고 아첨하는 것에는 너그럽게 하지 않아 마침내 참혹한 화를 입었으니 지금도 사람들이 무오사화에 대한 기록을 읽으면 울지 않고 계속 읽는 사람이 없다.
三足堂名大有字天祐 中廟初尙儒委任趙文正公公建議行賢良科淸道郡以先生推上擢拜地部朗兼春秋至正言皆辭 後宰漆原
삼족당의 이름은 대유(大有)이고 자는 천우이다. 중종 초에 숭상받는 유학자에게 부탁하여 조문정 공에게서 배웠다. 공이 현량과를 실시할 것을 건의하고 청도군이 선생을 임금께 추천하여 지부랑 겸 춘추의 벼슬을 받았으며 정언에 이르렀으나 다 사양하고 뒤에 칠원군수를 지냈다.
己卯冬禍作群小誣罷薦科 仁廟末命復科先生與李灘叟延慶申翰林遵美不就物論多之乃入雲門山築室于愚淵上號三足堂以壽卒 曺南溟植題其墓表曰
기묘년 겨울에 사화가 일어나 여러 소인들이 무고하게 과거를 없앴으나, 인조 말에 명령으로 다시 회복되었으나, 탄수 이연경, 한림 신준미와 함께 나가지 않으니 자연 말들이 많았다. 이에 운문산에 들어가 우연(愚淵;어리석은 연못이라는 뜻)위에 집을 짓고 삼족당이라 이름붙이고, 천수를 다하여 세상을 뜨니 남명 조식이 그 묘표를 쓰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辦局宏湥勿勿乎其仁也 言論激昻僩僩(人/間}乎其義也 可謂盡出三足堂人稟者矣 其他群行灼灼於薦目祥云
생김새는 아주 커서 인자함이 흐르고 말과 생각은 격앙되어 그 의가 당당하니 삼족당의 인품을 모두 나타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나머지 여러 행적은 천거인 명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噫節孝先生之孝感物之孝也 物之猛者莫如虎虎且感其誠孝馴如畜狗況昭昭之天豈不降監於是而與之百祿哉
아! 절효선생의 효성은 사물을 감동시킨 효성이니, 사물의 맹수도 호랑이답지 않게 그 정성과 효도에 감동하여 가축과 같이 길들였는데, 하물며 밝게 빛나는 하늘도 어찌 이를 살피시어 많은 복록을 내리지 아니하겠는가.
多男至於六丈夫六丈夫才且賢也 則天之報施善人驗矣 又況在孫濯纓先生出焉 在曾孫三足堂 又出焉天地精英之氣發毓於金氏一門至于三世奇哉奇哉
많은 아들이 6명이고 6형제가 다 현명하니 하늘의 보답으로 착한 사람을 준 것이 증거이다. 또 하물며 손자인 탁영선생이 뛰어났고, 증손에 삼족당이 있어 또 뛰어 났으니, 천지의 정예롭고 뛰어난 기운이 김씨 일문을 키워 3대 에 이르렀으니 신기하고 신기하다.
或以濯纓之不得死三足堂之不盡展布歸憾於天與時爲金氏食報之歉此則不然吾夫子不云乎志士不忘在溝壑勇士不忘喪其元在溝壑喪元君子何病隨所遭而爲吾所當爲
혹자는 탁영의 부득이한 죽음과 삼족당이 펼치지 못한 것을 하늘과 시운의 탓으로 한탄하여 김씨에게 보답이 흡족하지 않은 것이 이것이라고 하나 그렇지 않다. 그대의 부자(夫子)는 그렇다고 말하지 않는다. 뜻있는 선비는 개천이 있다[1]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용맹한 장사는 죽는다는 것을 잊지 않아, 그 근본에 개천과 죽음이 있으니 군자가 어찌 이를 따르거나 맞닥뜨리는 것을 근심하겠는가. 나로서는 당연하다 생각한다.
[1] 고난에 빠지게 된다는 뜻
固濯纓三足能盡吾所受於天之理者在詎不韙哉一時一身之不幸雖若天之薄乎賢者萬世之名永長存與天地不朽則其厚何如哉芝蘭焚而後香聞寶劍埋而後氣騰吾於濯纓三足亦云
진실로 탁영과 삼족이 능히 이를 다 겪었으니 그대가 하늘의 진리로서 받은 것이 어찌 바르지 않겠는가. 한때 한 몸의 불행이 비록 하늘의 인색함이라 하나, 어진 사람의 만세에 길이 남는 이름이 영원히 오래도록 천지와 함께 썩지 않으리니 그 후함이 어떠하겠는가. 난초는 불탄 뒤에 향기가 나고 보검은 묻힌 뒤에 그 기운이 드러나니, 당신네 탁영과 삼족당이 이와 같음이로다.
道州之士旣俎豆此三先生越百年如一日 又修前輩之未遑事以警一鄕俱可書
청도의 선비들이 이미 향사를 지내어, 3선생은 백년이 지났으나 하루와 같고[1] 또 앞의 선배들이 미처 겨를이 없어 <못한 것을> 챙겨서 한 마을에 경계가 되도록 이 글을 쓴다.
[1]하루 동안의 일과 같이 생생히 생각난다. 는 뜻
崇禎丙子後十三年 己丑二月日
숭정 병자후 13년 기축(1649년) 2월 일
資憲大夫議政府右參贊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同知春秋館事世子右賓客趙絅謹跋
자헌대부 의정부 우참찬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 동지춘추관사 세자우빈객 조경이 삼가 발문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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