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말기인 헌종 6년(憲宗 6, 1840)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제주 화북진으로 유배를 떠나던 길에
초의선사(草衣禪師)가 머무르던 일지암(一枝庵)에 들렀다. 9월 22일 저녁 해거름이 들기 시작하는 때 들러 하룻밤을 묵은 뒤, 유배지로 추사가
떠나가자 눈물로 헤어지며 화북진도를 그리고 낙관 없이 그림을 끝맺노라고 밝혀 두었다. 김정희가 유배자인 제주 화북진 가는 길에 잠시 들러
초의선사와 하룻밤을 보낸 뒤, 추사와의 이별을 애통해하며 그린 걸작이며, 마음을 그린 것이기에 심화(心畵)라고 할 수 있다.
이
그림을 그린 초의선사는 ‘제주 화북진도(濟州華北津圖)’라고 제명(題名)을 달았으나, 물론 이 그림은 제주 화북진의 실제 그림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 그림에서 초의선사가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제주 화북진이 아니라, 추사의 유배지 화북진을 모티브로 삼아 ‘유배’로 인해 서로 떨어져
있으면서 지기(知己)를 그리는 마음이었다.
그리하여 서로를 그리고 경모하는 마음 하나를 유장(悠長)한 강과 강물 한 줄기로 그렸다.
하나의 물줄기는 그 당시의 시류와 흐름 속에 떠맡겨진 두 사람의 운명을 나타낸 것일 수도 있고 두 사람을 하나로 이어주는 마음의 강이다.
이 그림 속의 배 두 척과 배를 탄 두 사람은 추사와 초의선사 두 사람이다. 격류 속에 삿대를 들고 분주하게 젓는 사람은
추사일까? 일견, 물흐름이 완만해진 곳에서 배를 띄우고 조용히 고기를 낚는 어옹(漁翁)을 초의선사라고 보겠지만 사실은 그 어옹이 바로 추사이다.
초의선사는 오히려 격랑 속에서 허우적대는 배의 주인이 자신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비록 매를 맞아 유배길을 떠나는 고단한
몸이지만 그 뜻이 크고 훌륭한 군자로서 마음이 오히려 평온한 쪽이 추사이고, 추사야말로 이 그림 속의 한가한 어옹일 것으로 표현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처럼 편안한 어옹이 되어 세속 일을 잊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희망도 실었다. 그리고 이들 둘을 잇는 마음의 전령으로서
갈매기인지, 하여튼 물새떼를 적당히 배치하였다.
초의선사는 정약용, 김정희 등과 교분이 두터웠으며 추사의 나이 30대 때부터 평생을
지기(知己)로 사귀었다고 한다. 해남 대흥사(大興寺)에 머물다가 후에 대흥사 동편 계곡에 일지암을 따로 지어 은거하다시피 했다. 초의선사는
의순(意恂)으로 알려져 있으며 전남 무안 출신으로 성은 장씨이고 어렸을 적 이름은 중부(中孚)였다. 15세 때 탁류에 떨어져 죽을 고비를 맞았을
때 주변에 있던 승려가 건져줘서 살게 되었는데, 바로 그 승려가 출가할 것을 권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대선사(大禪師)로서
우리나라의 다도(茶道)를 정립하였으며 특히 그의 동다송(東茶頌)은 차의 멋과 맛을 잘 설명한 저술로 알려져 있다. 다도를 세운 선사답게 그의
선사상은 다선일미(茶禪一味) 사상이라고 한다. 즉 초의선사는 평생 좌선하는 일에만 매달리지 않고 일상 생활 속에서 멋을 찾고 불법을 구하고자
했으며 제법불이(諸法不二)라 하여 차와 선이 둘이 아니며 시와 그림이 둘이 아니고 시와 선이 둘이 아니라고 했다. 이 그림의 발제(跋題)에
붙여진 설명은 다음과 같다.
“도광(道光) 20년(1840) 9월 20일 해가 저물려는데 추사(秋史) 공이 빈도(貧道, 초의선사)의
처소인 일지암에 들러 머무셨다. 추사공은 9월 초 2일에 한양을 떠나 이날 늦게서야 해남에 도착하였다. 이에 앞서 추사공은 잡히어 영어(囹圄)에
묶인 몸으로 죄 없이 태장(笞杖)을 맞은 일이 있어서 몸에 참혹한 형을 당하였으므로 안색이 초췌하였다.
그런 중에 제주 화북진에
유배를 보낸다는 명을 받아 길을 가다 틈을 내어 잠시 일지암에 이른 것이다. 추사공과 나는 평소 신의가 두터웠으므로 서로 사모하고 경모하며
경애하는 도리를 잊지 않았는데, 갑자기 지나는 길에 머무르게 되니 불행 중에 다행한 일이다. 산차(山茶) 한 잔을 들며 밤이 새도록
속진(俗塵)의 세상 돌아가는 형세와 달마대사의 관심론(觀心論) 및 혈맥론(血脈論)에 대해 담론을 하였는데, 앞뒤로 모든 뜻을 통달하여 빠짐 없이
바로바로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몸에 입은 형벌로 말미암아 상처가 많았는데도 매번 군은(君恩)의 무거움을 칭송하고 백성들이 처한
괴로움을 자신이 겪는 괴로움인 것처럼 무겁게 여기니 참으로 군자라 할 만하다. 하늘은 어찌하여 군자를 보호하지 않고 땅은 어찌하여 크나큰 선비의
뜻을 기르지 않아 이처럼 곤란한 지경에 떨어지게 하여 기회를 빼앗아 버린단 말인가. 탄식하고 또 탄식할 일이다.
이튿날 공이
유배지로 떠남에 공의 원망스런 귀양길에 눈물 흘리며 비로소 제주화북진도 한 폭을 베껴 빈도의 충정을 나타내는 바이다. 도광 20년 9월 23일
초 의순(意恂)은 낙관(落款)하지 않고 합장(合掌)하고서 그리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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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