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암 강세황
표암 강세황 자화상
시대를 가로질러 세상 껴안은 '표암'
詩 . 書 . 畵 '三絶'의 유려한 화풍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단원 김홍도를 모를 리 없다. 그러나 김홍도의 스승이 누구이며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아는 사람은 의외로 드물다. 그의 스승이 무명의 평범한 인물이어서가 아니라 단지 제대로 소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홍도가 어린 시절 고향인 경기도 안산에서 모시고 공부했던 스승은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1713-1791)이다. 그는 시 . 서예 . 회화에 모두 빼어났던 삼절(三絶)로 18세기를 조선을 대표하는 문인이었다. 문화사적으로 제자인 김홍도와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발군의 인물이었다. 그야말로 그 스승에 그 제자였던 셈이다.
그의 맑고 우아한 시문, 물 흐르듯 유려한 행서, 다양한 분야의 그림들은 한결같이 강세황 자신만의 특성을 잘 드러낸다. 특히 표암의 회화는 남종화풍의 사의산수화(寫意山水畵)를 비롯하여 진경산수화, 산수인물화, 풍속인물화, 화조화, 사군자화, 초상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를 아우르며 그의 폭넓은 관심과 자유롭고 진취적이었던 작화태도를 보여준다. 30대에 제작된 '지상편도'와 '산수도권' 등 그림과 글씨들은 그가 이미 청장년기에 독자적인 화풍과 유려하고 힘찬 사체를를 확립하였음을 말해준다. 40대에 개성을 여행하고 그린 '송도기행첩'은 그가 중년기에 진경과 서양화법에 깊은 관심을 지녔음을 드러내며 특히 서양의 원근법을 당대 누구보다 앞장서 수용했음을 보여준다.
말년인 70세 때의 '자화상'은 얼굴의 살결과 수염의 사실적인 정밀묘사와 눈동자의 기운 생동하는 표현이 압권이다. 조선 후기 화단의 새로운 경향인 남종화의 정착, 진경산수화의 유행, 풍속화의 발달, 서양화법의 수용 등은 김홍도, 신위, 최북 등에게 영향을 미치며 당대의 화단을 대표했던 강세황과 직간접적으로 깊이 연관되어 있다. (안휘준 서울대 교수)
18세기의 영 . 정조대는 아름다운 시대였다. 진정으로 우리를 소중히 여기는 자존의식이 강했고, 진정한 자존을 위해 자기와 남을 돌아보는 지혜가 있었다. 보수와 진보가 서로 엇갈려 교차하며 진솔한 삶의 현장에서 만났고, 상층의 귀족과 하층의 서민이 진실한 인간의식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며 의미있게 소통했다. 표암 강세황은 시서화(詩書畵)의 예술 형식을 통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표암은 18세기의 한가운데를 온몸으로 가로질러 살았다.
30년간 김홍도 가르쳐
진보적인 노론이 집권하자 보수적인 명문가의 막내였던 표암은 서울의 기와집을 나와 안산의 초가집에서 30년의 처절한 밑바닥 삶을 살았다. 그 속에서 표암은 생생한 삶의 현장과 꾸밈없는 인간의 진실을 경험했다. 시대가 비록 자신을 버리고 비켜갔지만, 표암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고 인간 속으로 들어가 천품으로 타고난 시서화를 통해 새롭게 태어났다.
가령 1747년6월, 표암은 복날을 맞아 친구들과 함께 개장국을 끓여 소주와 노래를 즐긴 뒤 귀남이라는 아이 종까지 묘사한 풍속화를 그리고, 장쾌한 행서로 '그윽한 정자의 우아한 모임(玄亭勝集)'이라는 제목을 써넣었다. 그리고 다시 "자세하게 그림으로 옮겨서 돌려보고 자랑하네"라는 시를 지어 친구들의 시와 함께 유려한 행서로 아름답게 장식했다.
일상의 생생한 삶 속에서 상하(上下)와 고금(古今)은 물론 아속(雅俗)까지 융합된 새로운 시서화가 태어났던 것이다. 그것은 일상의 삶에 대한 진실한 믿음과 사랑을 말해준다. 표암은 선배들이 일구었던 진경산수화와 풍속화의 전통을 더욱 진솔한 삶의 자리에서 끌어안고, 다시 어린 단원 김홍도를 30여년간 가르치며 정조대왕의 절대적인 후원에 힘입어 최고의 풍속화가로 길러냈다. 그리고 손자뻘의 지체 낮은 화원에 불과한 단원의 풍속화를 보고 최고 입신의 경지라고 극찬하는 단원론과 풍속화론을 선물했다.
이것은 단순히 '실학(實學)'이라는 이름 아래 서구 근대의 열등한 아류처럼 이분법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영 . 정조대의 두터운 깊이와 따스한 숨결을 말해준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그동안 서양화법을 구사한 대표적인 작품처럼 소개돼 왔던 표암의 '영통동구(靈通洞口)'도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사실 이 그림은 영통동구를 지나가다가 "웅장하고 거대한 돌들이 어지럽게 널렸는데, 크기가 집채만하고 푸른 이끼가 덮여서 보자마자 눈이 아찔한" 광경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의 매력은 거대한 바위에 널린 하찮기 그지없는 이끼까지 포착한 현실적이고 정취적인 문인의 시적 감각이지, 결코 기계적이고 물리적인 서양화법의 견고한 시각적 질서가 아니다.
청나라 황제도 극찬
물론 표암은 서양화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영통동구'는 서양화법의 초점(焦點) 투시법과 음영법을 시도한 것도 아니고, 그것이 잘 보이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시점을 좁히지 않는 우리의 산점(散點) 투시법과 한 면이 밝으면 다른 면이 어두운 음양적 명암법을 통해 형사(形似)를 넘어선 전신(傳神)의 경지를 지향하고 있다. 따라서 이 그림의 특징을 서양화법으로 읽는 것은 정당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참신한 작품을 오히려 미숙하고 어설픈 아류로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시대로부터 버림받았던 표암은 그러한 정신적 초월의 내공으로 자신을 단련하며 현실을 견딜 수 있었다. 그 결과 만년에는 영조와 정조의 탕평정치로 벼슬길에 나간 뒤, 청나라 황제의 극찬을 받을 정도로 국제적인 안목을 키우고 추사 시대에 더욱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새로운 예술세계의 문턱까지 이미 넘어서고 있었다. 그림을 통해 사람을 보고, 사람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것은 우리의 오랜 예술 전통이었다. (강관식 한성대교수)
18세기 명작 '강세황 초상화', 정조의 지시로 19일만에 완성
'표암 강세황 초상화의 제작 비용은 400만원(요즘 시세), 화가 일당는 8만원 + 숙식제공'.
조선시대 초상화의 제작과정을 자세히 적은 기록이 발견됐다. 재료 구입비에서부터 제작기간 . 구입처 . 인건비 . 사례비 . 배접 장인의 이름까지 꼼꼼히 밝히는 문서가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문건의 제목은 '계추기사(癸秋記事)'. 18세기 문인예술가 표암 강세황 초상화 '강세황 칠십일세상(姜世晃七十一歲像 . 보물 590-2호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제작노트로, 그의 셋째아들 강관이 적은 것이다.
'계추기사'는 한국 미술사에서 초상화 명작으로 꼽히는 '강세황칠십일세상'이 조선 후기의 유명한 초상화가 화산관 이명기(李命基)의 작품임을 확인해 주면서 그간 미상이었던 그의 탄생 연도를 1756년으로 밝히고 있다.
그림은 표암이 기로소(耆老所 . 정2품 이상 벼슬을 한 70세 이상 문신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된 기구)에 들어가게 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정조가 '초상화를 그리라'는 전교를 내리면서 제작됐다. 그림과 그림을 넣는 궤를 완성하는 데 총 19일이 걸린 초상화 제작과정을 표암의 3남 강관이 1783년 음력 8월 7일 행서체로 꼼꼼히 기록했다. 다음은 이태호 교수의 논문 '조선 후기 초상화의 제작 공정과 그 비용'에 등장하는 '계추기사' 풀이 요약에 따르면, '계추기사'에 명시된 비용은 총 37냥이며 표암측이 당대 명문가에서 최고급 중국산 비단 배접 도구와 재료를 빌려다 쓴 뒤 사례비를 전달했다고 친다면 전체 초상화 제작 가격은 50냥 안팎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를 쌀값 기준으로 환산하면 요즘 돈으로 400만원 정도라는 설명이다. 그리고 이명기가 열흘간 표암 집에 머물며 받은 사례비 10냥을 환산해보면 일당은 8만원이라고 계산한 이교수는 이명기가 표암 초상을 그릴 당시에는 불과 28세여서 사례비가 적었던듯 하다고 덧붙였다.
조선후기 화가 조희룡은 저서에서 '그림값으로 300냥을 받은 단원이 200냥으로 매화 분재를 구하고 80냥으로 술을 들여와 잔치를 열고 20냥은 살림에 보태라고 집에 주었다'고 언급했다는 것. 또 요즘으로 치면 이명기가 국가 공무원으로서 어명을 받아 그렸기 때문에 사례비가 적었을 수도 있다.
이태호 교수는 '계추기사'는 조선 후기 초상화 제작 과정을 상세히 밝히고 있을 뿐 아니라 표구 기술사 연구의 첫 장을 여는 귀중한 자료라고 설명했다. (조선일보)
벽오청서도
영통동구
연강제색도
녹죽
백석담도
표암 선생1713(숙종 39)~1791(정조 15)은 사연이 많은 분인데 아버님이 예조판서(문교부장관)를 할때 형님이 과거에서 부정을 저질렀답니다다. 체면이 소중했던 조선에서 이런 민망한 꼴을 당하면 , 형제는 물론 사촌, 심하면 팔촌 형제까지도 덩달아 시험을 보지 못했지요. 부끄러워서... 그것도 평생 시험을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선비지만 벼슬할 길이 없고, 그럴 생각도 아예 못하니까 그저 학문과 시서화, 거문고 등에 마음을 붙이고,그래서 김홍도의 선생님이 되었던 거지요.
그러나 벼술만 없을 뿐 실력은 오히려 쟁쟁해서 , 이를테면 오늘날 한 시대를 이끌어 가는 최고의 예술 평론가와 비슷한 분이셨습니다. 당신이 직접 자기 초상 자화상을 그리신 거에요. 이 분이 원래 이렇게 재주가 많았던 선비랍니다. 강세황 선생의 글에 보면 '내가 몸집도 작고 얼굴도 잘 생긴 편이 못돼서 사람들이 종종 나를 앝잡아 보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 내 안에 있는 대단한 학식과 기특한 포부가 있다고 자부하는 까닭에, 그런 말에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고 써 놓은 것이 있을 정도로 학술과 예술이 뛰어나신 분이었다고 합니다.
그림에 스스로 지은 화제를 자필로 쓴 것이 재미있어 올리게 되었습니다.
[저사람 누구인고? 수염과 눈섭이 새하얀데
머리에는 사모를 쓰고 몸에는 평복을입었으니
이로써 마음은 산림에 가 있으되 조정의 벼슬아치가 되어있는 것을 알겠도다.
가슴속에는 수천권의 책을 읽은 학문이 있고,
또 소매속의 손을 꺼내어 붓을 잡고 휘두르면
태산, 화산,승산,형산,항산 등 중국의 오악을 뒤흔들 만한 실력이 있건마는
사람들이 어찌 알리요?
나 혼자 재미있어 그려봤다!
노인네 나이는 칠십이고 노인네 호는 노죽인데
그 초상화 제가 그리고 , 찬문도 제가 썼다]
즉, 북치고 장구치고 혼자 다 했다고 너스래를 떨었다네요.
이렇게 장난스럽게 그릴 수 있는 그 분의 밝은 성격은, 그의 부친이 70이 다 되어서 얻은 3남6년중의 막내이기에 천성이 밝은 데다 사랑도 많이 받고 자란 이유인가 봅니다. 오주석의 "한국의 美" 중에서.
<출처;http://cafe.daum.net/hknetizenbonb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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