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화

[스크랩] 소치 허련展 -15-

회기로 2009. 7. 19. 23:08

 

 

모란이 피기까지는 붓을 놓지 않을테요
 
추사 김정희가 가장 사랑한 '문인화의 대가' 소치 허련展
화가로 최고 경지 올랐지만 외로운 말년, 모란 그려 팔아
'그림으로 돈 벌지 않는다' 문인화가 불문율 과감히 깨
 
1839년, 전남 진도에서 상경한 만 31세의 무명 화가가 지금 서울 통의동에 있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저택 대문을 두드렸다. 청년의 이름은 소치(小癡) 허련(許鍊·1808~ 1893). 체계적인 미술 교육도 받은 적 없고, 고향 바깥 넓은 세상에 자신의 존재와 필력을 알린 적도 없는 시골뜨기였다. 추사가 실력 하나 보고 소치를 문하에 거두면서, 붓 하나로 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천재 소치의 경력이 시작됐다.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에서 내년 2월 1일까지 《소치 이백 년, 운림 이만 리》전(展)이 열리고 있다. 소치는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1843~1897)과 더불어 19세기 후반 조선 회화의 양대 산맥으로 꼽힌다.

이번 전시에는 소치의 묵화(墨畵) 70여 점이 걸린다. 소치가 세운 화실인 운림산방(雲林山房)을 이어간 허씨 집안 여섯 후손의 작품 40여 점도 함께다. 허형(許瀅)·허백련(許百鍊)·허건(許楗)·허림(許林)·허문(許文)·허진(許鎭) 등이다.
이동국 서울서예박물관 학예사는 "소치는 추사가 가장 사랑한 제자이자, 문인화로 최고의 경지에 오른 화가"라고 했다. 추사는 "난을 치는 법은 예서를 쓰는 법과 가까우니, 반드시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있은 다음에야 될 수 있다"고 했다. 추사는 정치적 부침을 함께 한 엘리트 제자들을 제치고 시골에서 올라온 소치에게 사랑을 쏟았다. 소치 면전에서는 "자네는 천리 길에 ㄴ겨우 세 걸음만 옮겨 놓은 것과 같네" 하고 엄격한 얼굴을 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압록강 동쪽엔 소치만한 화가가 없다"고 극찬했다.

소치는 추사의 후의에 온몸으로 답했다. 추사가 제주도에 귀양갈 때 따라가서 집중적으로 그림을 배웠다. 추사의 귀양살이가 끝난 뒤에는 추사의 날개 밑에 깃들어궁에 출입하며 헌종(재위 1834~1849)의 귀여움을 받았다.

그러나 헌종도 죽고, 추사도 죽고, 소치가 자신의 뒤를 이을 것으로 기대했던 장남마저 요절했다. 외로운 늙은이가 된 소치는 일흔이 넘도록 전국을 떠돌며 부유한 중인들의 주문을 받아 부귀의 상징인 모란을 숱하게 그렸다. 별명이 '허모란(許牡丹)'이었다고 한다. '미술은 어디까지나 여기(餘技)이며 그림을 팔아 돈을 벌지 않는다'는 문인화가들의 불문율을 뒤로 한 셈이다.

이번 전시에 나온 소치의 작품 〈산수〉, 〈일속산방도〉, 〈모란〉이 그의 복잡한 정체성을 보여준다. 〈산수〉는 선비들의 관념적인 이상향을 그린 전형적인 문인화이고, 〈일속산방도〉는 다산 정약용의 제자가 살던 집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그린 실경(實景) 산수화이며, 〈모란〉은 더 설명할 필요 없이, 붓 자국마다 감칠맛이 도는 꽃 그림이다.

현대의 미술사가들은 "말년으로 갈수록 태작이 많다"고 소치를 마땅찮게 평가하기도 한다. 그래도 관람객 눈앞에 활짝 피어 오른 모란은 탐스럽기 그지없다. 월요일은 휴관, 어른 5000원. (02)580-1284

 
소치 허련의〈모란〉. 그는 외딴 시골에서 나고 자랐으나 추사에게 발탁돼 왕의 마음을 사로잡는 화가가 됐다. 스승이 숨지고 스승의 세력마저 스러진 뒤 소치는 전국을 방랑하며 숱하게 모란을 그렸다. 부유한 중인들이 그의 모란꽃 그림을 다투어 샀다(왼쪽), 소치 허련의〈산수〉. 조선조 문인화가들의 마음에 깃든 관념적인 이상향을 그린 그림이다(오른쪽). /서울서예박물관 제공

 

<대폭산수>일제강점기의 대수장가 박창훈이 1941년 경매회에 출품한 '대폭산수' 4점 중 하나로 호방하고 활달한 허련 산수화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왼)
<완당선생해천일렵상> 완당 김정희의 제주도 유배시기(1840~48) 모습을 북송(北宋) 소식의 해남도 유배 모습을 빌어 표현하였다.(오른)
올해는 조선 남종화(南宗畵)의 거장인 소치 허련(1808~1893)이 탄생한지 200주년이 된다.
추사 김정희가 “압록강 동쪽에는 이만 한 그림이 없다”〔鴨水以東 無此作矣〕고 극찬했던 애제자 허련은 19세기 회화사의 한 주류를 형성했을 뿐만 아니라 화가로는 드물게 <소치 실록> 등 자신이 살았던 시대를 치밀하게 기록한 ‘19세기 조선 화단의 증언자’이다.
허련은 조선 말기 회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추사의 사의적(寫意的, 외형에 집착하지 않고 내면의 뜻을 그리는)인 남종화적 경향을 자신의 고향인 호남지방에 전수한 ‘조선 남종화의 마지막 계승자’로 불린다.
허련은 격변하는 시대의 흐름에 개의치 않고 남종화에 전념, 화맥이 넷째 아들 미산 허형(1862~1938)을 시작으로 손자인 남농 허건(1908~1987), 족손인 의재 허백련(1891~1977) 등 5대에 걸쳐 이어졌으며, 이들이 중심을 이룬 호남화파는 한국 근ㆍ현대 전통회화사에서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허련은 당대 최고의 학승인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와 역시 당대 최고의 서화가로 불린 추사 김정희를 스승으로 모시며 이름난 화가로 입신했다.
청년 허련은 초의선사 문하에서 3년여 간 꾸준히 시학(詩學) 불경, 그림과 글씨 등을 연마해 그림에 대한 인식과 기초적인 화법은 물론 세계관을 정립했다. 28세 때 겸재 정선, 심사정과 함께 조선 후기 ‘삼재(三齋)’ 중 한명으로 불렸던 윤두서의 <공재화첩>을 접하고 허련은 “비로소 그림 그리는 데에 법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감탄하며 이를 교과서로 삼았다.
허련이 평생의 스승 추사 김정희를 만난 것은 32세 때인 1839년 봄이었다. 초의선사가 윤두서의 작품을 모사한 허련의 그림을 보여주자, 김정희는 그림 솜씨를 칭찬하며 빨리 서울로 올라오라고 권유했다. 이것이 허련의 첫 상경길이 되었다.
남종화 '묵모란' (위)
<선면산수도> 특유의 마른 붓으로 호방하게 그려낸 일종의 은거도 계열의 그림으로서 허련의 작품 가운데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유교적 소양을 닦고 경전을 읽으며 글을 쓰고 짓는 일을 일상사로 여겼던 문인적 사유체계를 그대로 보여준다. 1866년 작.(아래)
허련은 그림으로 쌓은 명성을 토대로 당대 최고의 명망가부터 지방 유지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교유했다. 위로는 헌종을 배알해 임금이 건넨 붓과 벼루로 그림을 그렸고, 흥선대원군, 고위 관료 권돈인, 무인 출신 신관호, 윤두서의 후손인 윤종민, 정약용의 아들 정약연ㆍ정학우, 당대 최고의 세도가인 안동 김씨 문중의 좌장 김흥근, 난초 그림을 잘 그려 화가로도 유명한 민영익 등과도 묵연을 나누었다. 임금이 지방 출신의 한미한 화가를 가까이 한 것은 극히 예외적인 일로 당시 허련의 명성이 얼마나 드높았던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허련이 이처럼 명사들과의 교유에 집착한 것은 문화적 소외 의식과 신분 상승에의 갈망 때문이었다. 끊임없이 중앙 문화계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했던 허련은 명사들과의 교유 내역을 세세히 기록으로 남겼다. 자서전인 <몽연록-소치실록>과 <속연록-소치실록>은 그러한 기록의 결정체다.
이 책은 유년기에서 노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의 다사다난했던 내용을 기록한 전통시대 화가의 보기 드문 자서전으로 심지어 임금이 수라상을 드는 장면까지도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당시 조선 사회와 문화계의 단면을 생생히 보여준다. 화가이면서도 당대의 문화계 풍경을 치밀하게 기록한 허련은 ‘19세기 조선 화단의 증언자’라 부를 만하다.
추사 김정희에게 전수받은 남종화에 평생을 매진했던 허련은 스승을 극진히 모신 것으로도 유명하다. 김정희가 9년간 제주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3번이나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 도합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스승을 모셨다. 유배지에서 스승을 모시며 그림과 글씨를 연마한 허련의 실력은 날로 늘었다. 이는 김정희가 초의선사에게 보낸 다음의 글에서 확인된다.
「허치(許癡)는 날마다 곁에 있어 고화 명첩(古畵 名帖)을 많이 보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 지난 겨울에 비하면 또 몇 격(格)이 자랐습니다. 스님으로 하여금 참증(參證)하지 못하게 된 것이 한(恨)입니다」
추사 김정희는 실제 모습을 모방하는 형사(形似)에 그치지 않고 가슴 속의 이상과 의지를 반영하는 사의적(寫意的) 회화를 그릴 것을 강조하여, 조선 말기 회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김정희가 황공망과 예찬의 화풍으로 대변되는 중국 남종화를 모범으로 삼아 18세기 이후 조선에 유행했던 진경산수화를 비판하였다면, 허련은 이러한 김정희의 회화관을 받들어 남종화에 일생을 바쳤고 이를 고향인 호남 지방에 전파했다.
때문에 그가 고향 진도에 건축한 운림산방은 오늘날 호남 남종화의 성지로 불린다. 허련이 거처했던 화실 이름에서 비롯된 운림산방의 화맥은 넷째 아들 미산 허형(1862~1938)을 시작으로 손자인 남농 허건(1908~1987), 족손인 의재 허백련(1891~1977) 등 5대에 걸쳐 이어졌으며, 이들이 중심을 이룬 호남화파는 한국 근ㆍ현대 전통회화사에서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소치 허련이 한국 회화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사뭇 각별하다.
허련 연구 전문가인 김상엽 박사는 허련의 회화활동과 작품을 통해 19세기를 보는 인식의 전환이 요구된다고 말한다. 우리 역사에서 18세기가 ‘조선시대의 르네상스’, ‘영ㆍ정조 문예부흥기’ 등 화려한 수사로 예찬되어 왔던 시대인 반면 19세기는 화려한 18세기의 퇴화된 시대 정도로 폄하되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
“허련이 활동한 19세기는 상층문화의 저변화, 서화의 보편화를 이룬 시기로 이러한 사회적 변화의 양상을 허련은 그의 ???서화제작 방식, 작품 경향 등을 통해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김 박사는 허련이 말년에 방랑에 가까운 주유를 하며 주변의 요구에 따라 거칠게 대강 그려준 묵모란 등의 그림은 당시 사회가 희구한 회화작품 수집욕구의 반영이고 이에 대한 허련의 대응이야말로 당시 서화제작 방식의 단면을 보여주는 예라고 해석한다. 허련의 회화활동과 무수한 기록은 시대적 변화상을 그대로 반영해 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조선시대의 화가 가운데 지방 출신으로서 중앙 화단에 진출하고 또 중앙 화단의 인정을 받은 후 지방 곧 자신의 고향에 영향을 준 화가는 허련이 유일하다. 또한 가장 많은 그림을 남기고 가장 많은 여행과 가장 많은 기록, 가장 폭넓은 인적 교류를 한 화가로 평가할 만하다.
김상엽 박사는 “19세기 회화사는 김정희류의 문인화풍의 흐름이 주류를 이룬 가운데 허련의 한 세대 뒤인 장승업 류의 장식적인 화원화풍이 하나의 흐름을 이룬다”며 “허련은 당시 화단의 주류를 이루면서도 사회의 변화상을 몸으로 보여준 독특한 위상을 가진 화가”라고 평했다.
헌종이 허련에게 직접 하사한 [시법입문]과 헌종의 도장. 임금이 일개 신하에게 이런 책을 준다는 사실 자체가 전례가 없다.(위·왼)
소치실록(위·오른)
<청완도> 16-17세기 스페인의 초기 정물화와도 같은 작품이다. 단지그릇이나 과일을 나열하는 방식을 넘어서 그림을 보는 이와 정면으로 응시하는 듯 한 구도의 작품이다. 우리나라 청완도(그릇류 그림) 사상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허련이 노년기에 비슷비슷한 작품을 양산하기도 했지만 이렇듯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아래·왼)
<채씨효행도> 우리나라 그림 가운데 최초로 표현된'도깨비 그림'이다. 지금까지 도깨비라면 대개 뿔나고 험악하게 생긴 일본식 도깨비인'오니'로 이해해 왔는데 이것은 우리 전통과는 다른 왜곡된 이해이다. 우리나라의 도깨비는 괴물의 형상이 아닌'도깨비불'을 의미하였다. <채씨효행도>의'귀화전도'의 도깨비, 도깨비불 그림은 최초로 그려진 도깨비 형상이라는 점에서 미술사 및 민속학적 중요성이 크다.(아래·오른)
■ '소치 허련'의 삶을 일대기 형식으로 엮어

허련이 남긴 각종 기록류, 주변 인물과의 일화를 통해 허련의 삶을 일대기 형식으로 엮었다.작가의 대표작 감상과 해설에 그치기 쉬운 여타 전통예술서와 달리, 이 책은 오원 장승업(1843~1897)과 더불어 ‘조선 말기 화단의 두 거장’으로 불렸던 허련의 삶을 일대기 형식으로 흥미진진하게 되살려낸다.
때문에 명성 높은 화가로서의 면모뿐 아니라, 스승에겐 충실한 제자였으나 가족에겐 무심했고 심지어 중혼重婚도 했으며 능력에 따라 자식을 편애했던 허련의 인간적 일면도 엿볼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따론 한량처럼, 때론 구도자처럼 남종화에 전념했던 19세기 화가 허련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인 김상엽은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한국미술사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과 예술철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미술연구소 연구원, 영산대학교 겸임교수, 고려대ㆍ연세대ㆍ이화여대 강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문화재청 인천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 인천대학교 강사로 있다.
한국미술사학회 정회원, 사단법인 유도회 이사, 소치연구회 간사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소치 허련>(2002), <경매된 서화-일제시대 경매도록 수록의 고서화>(공편, 2005), <삼국지를 보다-인문과 그림으로 본 한·중·일 삼국지의 세계>(편저, 2005) 가 있다.
 
■ '남종화의 거장 소치 200년' 기획 특별전이 있었다.

국립광주박물관(관장 조현종)은 소치 허련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여 그의 예술세계를 종합적으로 조명하는 기획특별전 ‘남종화의 거장 소치 허련 200년’을 7월 8일부터 8월 31일까지 개최했다.
이번 특별전에는 150여점에 이르는 소치선생의 서화 뿐 아니라 당대 명사들의 유묵(遺墨)이 처음 공개된다. 또 조희룡, 이한철, 전기, 유재소, 박인석 등 동시대를 살며 예술적 교감을 나눈 화가들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아 19세기 우리나라 예술계를 거의 온전하게 재현되었다.
전시구성은 제1부 가계와 생애, 제2부 학연, 제3부 묵연, 제4부 연운공양(煙雲供養)으로 나눠 구성했다. 1부는 허련의 가계와 생애, 주요 활동 등을 각종 기록과 자료 등을 살피도록 했다. 2부는 허련의 인생과 작화(作畵)에 절대적인 도움을 준 두 스승 초의선사(1786-1866)와 추사 김정희(1786-1856)와의 각별한 인연을 조명했다.
3부는 헌종(재위 1834-1849)을 비롯 권돈인, 신관호, 민영익 등 허련을 후원한 왕공사대부들의 작품과 함께 조희룡, 이한철, 전기, 유재소, 박인석 등 동시대를 살며 허련과 예술적 교감을 나눈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된다. 4부는 허련의 예술세계를 다룬 공간으로, 남종산수화를 비롯하여 사군자, 모란, 글씨 등 다양한 작품을 전시했다.

 

 

소치 허련의 작품 세계

 소치 허련(小癡 許鍊, 허유라고도 함 )   

  본관 양천(陽川). 자 마힐(摩詰), 호 소치(小癡) ·노치(老癡). 전남 진도(珍島) 출생. 후에 연(鍊)으로 개명하였다. 서화를 김정희(金正喜)에게 사사하고 벼슬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글 ·그림 ·글씨를 모두 잘하여 삼절(三絶)로 불렸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묵죽(墨竹)을 잘 그렸다. 글씨는 김정희의 글씨를 따라 화제에 흔히 추사체(秋史體)를 썼다. 작품으로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 《추강만교도(秋江晩橋圖)》 《만산묘옥도(晩山택屋圖)》 《산교청망도(山橋淸望圖)》 《동파입리도(東坡笠履圖)》 《산수병풍(山水屛風)》 《산수도》 《노송도병풍(老松圖屛風)》 《묵해도(墨海圖)》 《괴석도쌍폭(怪石圖雙幅)》 《포도도(葡萄圖)》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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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치 허련 초각산수도 (草閣山水圖)  종이에 수묵담채 / 31×23㎝

 


묵죽


추사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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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옥산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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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수    종이에 수묵 | 30×21.5㎝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마힐(摩詰)이며 호 소치(小癡)ㆍ노치(老癡)이다. 후에 연(鍊)으로 개명하였다. 서화를 김정희에게 사사하고 벼슬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글ㆍ그림ㆍ글씨를 모두 잘하여 삼절로 불렸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묵죽(墨竹)을 잘 그렸다.
글씨는 김정희의 글씨를 따라 화제에 흔히 추사체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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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치허련 묵죽도 
종이에 수묵 | 91×27㎝玉林蕭蕭竹數竿 두어줄기 소슬한 고운 대나무
風枝露葉帶淸寒 바람가지 이슬 잎 청량한 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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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림 산방  

소치(小癡) 허유(1809-1892)는 처음 이름은 허련(許鍊)이었으나, 후에 중국 남종 문인화의 대가 왕유(王維)의 이름을 따서 허유라고 개명하였다.   스승인 김정희로부터 "압록강 동쪽에 그를 따를 자가 없다. 나보다 낫다"는 칭찬을 듣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고향인 진도로 돌아가 운림산방(雲林山房)을 마련하고 작품 제작에 몰두하였다. 그는 산수화 외에도 모란, 사군자, 연꽃, 괴석, 노송, 파초 등 다양한 소재를 능숙한 필치로 구사하였다. 그의 화풍은 아들인 미산(米山) 허형과 손자인 남농(南農) 허건(許建), 그리고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등으로 이어져 지금까지도 호남 화단의 중요한 맥을 이루고 있다.

선면산수도는 허유가 만 57세 때인 1866년 여름에 그린 것으로, 만년에 살던 진도의 운림산방(雲林山房)을 소재로 한 것이다.
방석도산수도는 허유가 그리고 김정희가 발문(跋文)을 썼다. 깔끔한 느낌을 주는 마른 붓질의 수묵에서 문인화다운 품위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묵모란은  바위의 강한 표현과 모란의 부드러운 표현이 조화를 이룬다.   
 
남화(南畵)의 대가(大家) 소치(小痴) 허유(許維)

1809년(순조 8년) 진도에서 태어난 소치는 허각(許珏)의 5남매 중 장남으로 본은 양천(陽川), 자는 마힐(摩詰), 이름은 연(鍊)이라 불렀는데 뒤에 유(維)로 바꿨다. 소치는 동학란이 일어나기 이태전인 1893년(고종 30) 여든여덟의 나이로 장서(長逝)하기까지 임금이 쓰는 벼루에 먹을 갈아 그림을 그렸고, 이하응(흥선대원군), 권돈인,문영익, 정학연 등을 비롯한 숱한 권문세가 및 그의 스승이었던 추사(秋史) 김정희, 초의대사(草衣大師) 등과 어울리면서 주유천하(周遊天下)했던 이조 말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의 대가이다. 흔히 소치를 시(詩), 서(書), 화(畵)의 삼절(三絶)이라 부르거니와 일찍이 추사는 소치를 일러『압수이동(押水以東)에는 소치를 따를 자가 없다』고 말했다.

서원은 철폐화고 쇄국양이(鎖國壤夷)의 고집을 부렸던 석파(石坡=대원군 이하응)는 스스로 시, 서, 화의 한 경지를 이룩하고서도 70살에 이른 노치(老痴: 소치가 노년에 스스로 부른 호)를 만나는 자리에서 「소치는 서화의 대방가」라 추기면서「평생에 맺은 인연이 난초처럼 향기롭다(平生結契 其奧如蘭)」라고 싯귀를 단 묵란을 쳐 소치에게 주었는가 하면 당대 제일가는 시인이었던 유산(酉山) 정학연(다산 정약용의 아들)은 『속계(俗界)를 초월한 자품(資稟)이 있는 뒤에야 그림의 삼매(三昧)에 들어갈 수 있다. 이 세계에 이른 것은 소치 한사람 뿐이다.』라고 단언했다.

유산은 생전에 소치와 깊은 우의를 나누었는데 화재에 앞선 소치의 정신내면(精神內面)에 깊이 원숙한 인간미를 보았을 것이다. 소치는 28살 되던 해(헌종 1년) 두륜산의 초의 밑에 들어가 그림 수업을 시작한다. 추사가 소치의 예술 세계를 이룩해 준 스승이라면 초의는 화엄의 길을 잡아주고 인생의 눈을 트여준 스승이라고나 할까? 사복사(司僕寺)의 말을 타고 장안을 활보하였고 말년(79살)에는 명예직이기는 하나 통정대부(通政大夫)를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얽매지 않는 꾸밈없고 담백한 인생을 구사했던 것은 초의의 영향이 지대했을 것이다. 소치는 그의 자서에서 『소시절에 내가 초의 선사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내가 그렇게 멀리 돌아다닐 생각을 했겠으며 오늘날까지 이처럼 고고(孤苦)하고 담적(談寂)하게 살아올 수 있겠습니까』라고 술회했던 것이다.

초의는 대종사(大宗師)이면서 덕망과 학식이 뛰어났고 글과 그림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는데 특히 그의 저서 가운데 동다송(東茶頌)은 오늘날 우리 다도(茶道)의 뿌리를 찾게 한 역작(力作)으로 평가된다. 대흥사의 일지암에 기거하면서 초의의 지도를 받던 소치는 고산의 유택(遺宅)인 녹우당에서 빌려온 공제(恭齊: 윤두서의 호, 숙종조 1688~?)와 락서(駱西: 윤덕희의 호, 공제의 아들)의 화첩을 보고 대단한 감명을 받게 되는데 어느 정도인가 하면 『침식을 잃을 정도로 이들 그림을 모사하는데 혼신을 쏟아 부었다』고 나중에 술회했다.

빗기내(斜川里) 궁벽한 산골의 촌뜨기 소치에게는 개안(開眼)의 깨우침을 주었으리라. 그러기에 그의 초기 작품들은 공제가 락서의 영향을 깊게 받고 있으며 이들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중국 화원체의 화풍이 짙게 배어 있는 것이다. 벽진(碧津: 벽파진의 옛이름)을 건너기 수차례, 햇수로 5년여를 소치는 초의의 그늘에서 보내게 된다. 초의는 소치가 모사한 그림들을 추사에게 보냈는데 소치의 그림을 본 추사는 『시골에 썩히기 아까우니 당장 한양으로 보내라』고 할만큼 한눈에 소치의 화재를 인정했던 것이다. 당시의 추사는 남종문인화를 꽃피운 인물인데 금석학(金石學)에 있어서의 학문적 깊이는 청조(淸祖)에까지 널리 알려진 거학(巨學)으로 특히 오늘날까지 추사체로 회자(膾炙)되는 독자적인 서체를 만들어 냈다.

소치의 작품세계를 말하자면 추사의 작품을 알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리만큼 결정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잠시 추사의 작품세계와 당시의 화단을 둘러 본다면 추사의 화풍이란 감각적 채색 위주의 북종화(北宗畵)와는 달리 작품의 내재적(內在的) 정신적 깊이를 중시하는데 흔히 말하는 서(書), 권(卷), 기(氣)라는 문기를 생명으로 하였다. 추사가 처음 소치에게 이르기를 『자네는 그림에서 서격(書格)을 터득했다고 보는가. 우리나라에서 옛 그림을 배우려면 공제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네. 그러나 신운(神韻)의 경지는 결핍되었네』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신운이란 사물의 본질을 투시하고 높은 정신세계에 이르는 관조의 상태, 말하자면 문기라 해도 좋을 것이다. 추사가 지향하는 바는 이를테면 대상의 형상화가 아닌 정신세계의 형상화인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화면에서 필선(筆線)이나 조형(造形) 등의 수식(修飾)은 가능한한 절약되고 단순해지면서 추상적(抽象的), 십학적(拾學的) 중화미가 추구되는 것이다.추사말년에 이르러 이런 경향은 더욱 두드려지게 되는데 이조 5백년 회화사의 최대 걸작으로 치는 세한도(歲寒圖)를 보면 황망한 들판에 서너 그루의 고목과 덜렁 집 한채를 그려넣고 나머지를 여백으로 가득채움으로써 모든 군더더기를 떨쳐 버린 무한의 정신세계, 나아가 선의 경지에 이르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소치가 공제의 산수를 묘사하던 수습단계에서 방황자구벽계청장도(倣黃子久碧溪靑장圖), 선면산수도(扇面山水圖: 서울대 소장)를 그렸던 초기 추사 문하의 방작들도 뛰어났으나 서서히 추사에 물들어 그렸던 묵란, 묵목단, 묵송 특히 괴석도 등에서 수절한 재기가 들어나며 적거(謫居)한 추사를 찾아 다니며 그렸던 작품「세한도」도 추사 유배 당시 그린 그림에서 마침내 절약되고 간결한 필선의 그림등 문인화의 맛이 물씬 나는 수작들이 나왔다. 당대의 문인들이나 사대부들 간에 추사의 이런 화풍이나 서체가「완당바람」이라 일컬을만큼 유행을 본 것은 시대가 요구하는 취향에 들어 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추사가 등장하기까지의 화단은 강렬한 개성으로 산수화와 풍속화에서 새로운 경지를 보인 단원(檀園) 김홍도내지 현제(玄齊) 심사정(沈師正), 현물감이 충만한 진경산수를 그렸던 겸제(謙濟) 정선(鄭繕) 등 영, 정조조에 사실적 중화적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서서히 퇴락해 가던 시절이다.

소치는 추사의 집에 머물면서 중국남화의 대가들의 그림을 묘사했는데 주로 묘사한 것은 황대치(黃大痴), 왕잠(王岑), 예운림(倪雲林) 등의 작품이다. 특히 황대치의 오진(吳鎭), 왕몽 등과 함께 원말 4대가 중의 한 분인데 이들에 의해 남종문인화의 바탕이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 형조참판의 막중한 자리에 있던 추사는 소치의 소을 맞잡아 난을 치는 법을 가르치는 등 파격한 정성을 쏟았는데 소치라는 호도 이때 추사가 지어준 것으로 황공망의 호인 대치를 본뜬 것이다. 추사는 소치가 묘사한 그리을 자랑삼아 방문하는 사람마다 나누어 주었기로 소치의 그림 솜씨는 두어달새 장안에 널리 알려지게 되고 훗일 어전에 나아가는 영광을 입는 실마리가 된다. 소치가 추사 밑에서 수업한지 5개월여에 추사는 외척들의 권력다툼 등살에 제주도 외딴 정포에 유배(헌종 6년)되는 비운을 맞는다. 추사는 유배되는 길에 대흥사의 초의를 처음 만나게 되고 대웅전의 현판횡액을 써 줌으로써 그의 족적(足蹟)을 남기게 되는데 두 거인들의 무쌍과 회한은 별나게 착잡했으리라.

이듬해(소치의 나이 34세) 2월에 소치는 노련한 사공도 물길을 꺼리는 험한 바다를 건너 제주도 귀양처로 추사를 찾게 되는데 소치는 뒤에 그의 자서에서 『삶과 죽음이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운명을 하늘에 맡겼다』고 술회하고 있다. 험한 바다보다 상거한 추사를 찾은 관계로 나중 더 험한 지경(권력다툼의 와중)에 휩쓸릴런지도 모를 위험을 무릅쓰고 바다를 건넌 것은 스승에 대한 사랑이나 예술에의 집념만이었을까?

소치는 헌종 9년, 13년 등 모두 세 번에 걸쳐 바다를 건너 위리(圍籬: 탱자울타리) 안의 추사와 더불어 그림을 그리고, 시를 읊고, 글씨를 쓰는 등 소일하다 추사의 소개로 당시 해남진 우수사(右水使)였던 신관호(申觀浩)를 알게되고 신관호가 환조(還朝)할 때 같이 올라와 추사와 더불어 당대의 명필이며 영상(領上)이던 권돈인(權敦仁)의 집에 머물게 된다. 소치가 헌종이 훈련대장을 시켜 내린 당선이나 선첩에 그림을 그려 바치길 수차례 헌종은 마침내 소치의 그림끝에 전례없는 영광을 내렸고 권상공은 이 화첩을 「소치목록」이라 제첩하여 헌납했다. 권상공은 이 해 관직을 뜨자 소치를 동소문 밖 그의 산장으로 데려다 소치로 하여금 시를 선창케 하고도 스스로 화답하는 등 소치를 지극히 아꼈는데 언젠가는 당선(唐扇)에 『그대가 소치로써 이름을 일시에 떨치니 사람들은 자구(子久: 황대치의 자)를 곧 그대의 스승으로 알고 있네』라는 시를 써 주었고 나중 추사는 이 당선(중국에서 나는 부채) 뒤에 화답하는 시를 써 보냄으로써 소치를 감읍(感泣)케 했다.

소치가 40세 되던 해 다시 상경하여 신관호의 집에 머물면서 그림을 그려 헌종께 바쳤는데 헌종은 소치를 궁으로 들게 했다. 상민이 상감을 알현한다는 법도가 없었기로 소치는 곧 훈련원의 무과초시(武科初試)를 거쳐 상감이 친히 납신 춘당대(春塘台)의 회시(會試)에 응시, 참방(參榜: 合格)하게 된다. 사장(射場)에서 소치는 침을 발라 화살에 새겨진 이름을 지워 버리고 활잡은 손을 거꾸로 쥔채 살을 날리는가하면 전독(箭篤)도 허리에차지 않고 편전(片箭)을 쏘았기로 선전관은 당장 소치를 압송하여 훈련대장에게 발고했는데 훈련대장은『그 사람은 심문하지 말라. 그렇게 쏘도록 하였노라』고 두둔했다. 이를테면 뒷전으로 등과한 셈인데 어떨든 헌종은 따로 3백질(三百秩)의 재화를 내려 객지에서 겨울을 나게 하였고 이듬해 정월 비로소 헌종을 배알했다.를 반갑게 맞아들인 뒤 좌우에 대립(待立)한 별관들에게 먹을 갈 게 한 뒤 친히 양털붓 한 자루를 내어주면서 그림을 그리도록 했다. 소치는 당선(唐扇)에 매화를 치고『향기는 꽃술에도 없고 꽃받침에도 없으니 뼈속에 사무치는 이 향기 받치오니 님이 감상하소서』라 화제를 달았다. 헌종은 소치와 무릎을 맞댈 듯 앉은채 소동파(蘇東坡)의 진품(眞品) 책첩(冊帖) 끝에 고목과 괴석을 그리게 하는가 하면 황대치의 두루마리 산수를 마주잡아 펴 감상하기도 했다. 또 유배된 추사의 지내는 모양이랄지, 고승 초의에 대한 이야기랄지, 진도 민속에 이르기까지 차근차근 물어본 뒤 어필(御筆)로 제독(題篤)하고 어장(御障)을 누른 시법입문(詩法入門) 4권(남농 소장)을 하사했다.

 

소치는 그후 네차례나 입궐하여 고화를 품평하고 수많은 화첩에 그림을 그려 바쳤으나 이 해 헌종이 23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자 소치는 과천(果川)의 추사 광주(廣州)의 권돈인, 정학연 등을 찾아다니며 표표(漂漂)히 떠돌다 49세 되던 해(철종 9년) 진도로 내려와 운림산방(雲林山房)을 세운 뒤 칩거(蟄居)한다. 운림산방은 예운림(倪雲林)의 호를 따 지은 것이라고도 하나 첨찰산을 깃봉으로 수많은 봉우리가 어울러진 빗기내의 깊은 산골은 아침 저녁으로 연무(煙霧)가 운림을 이루었을 터이고 연화부(蓮花賦)를 지었던 소치의 시상으로도 운림이란 당호가 걸맞었을 법하다.

 

소치는 나이 70세 되던해(고종 15년) 운현궁의 석파(石坡)를 만남으로써 그의 40여년에 걸친 화필교우의 대장정(大長征)을 마무리하게 되는데 석파나 소치나 서로 얼마나 만나기를 염원했는지는 다음 대화로 짐작할 만하다.

석파: 『소치가 이승에서 나를 알지 못하면 소치가 못되지요』

소치: 『이승에서 원하던 것은 이제 다 하였습니다.』

소치는 「카리스마」적 권력에 집착했던 석파가 아닌 난을 치는데는 따를 이가 없었던 문인화의 거봉으로써 석파를 면전했을 것이다. 소치는 중화사적으로 볼 때 서울지방에서 조소림(趙小林) 안심전(安心田)의 영향으로 북종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비하여 전남지방에서 남화의 골격과 명맥을 이어준 것을 높이 평가될 만하다. 그의 아들 미산 허영에 이은 의제 허백련, 미산의 아들 남농 허건, 손(孫) 임전(林田) 허문(許文) 4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화풍의 뿌리를 둔 수많은 가지들은 소치의 운림산방을 정신적 고향으로 살아 오늘날 전남은 물론 서울 등 각지에서 정력적인 작품활동을 함으로써 한국 화단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은 대단한 것이라 할 것이다.

운림산방은 한때 피폐(疲弊)했다가 해방 한해전 손 남농에 의하여 잃었던 토지가 회수되고 일부 건물들이 복원되었던 것인데 1980년 일부도비 보조와(1천 1백만원), 남농의 사재(私財: 4천여만원)를 들여 매몰된 연지를 다시 파고 삼간 두실(斗室) 소허암(小許庵: 원당이 글을쓰고 소치가 핵함)을 세움으로써 족손(族孫) 허연(許演: 전 시립박물관장)의 「남화의 굵은 뿌리깊이 내리시고 삼절의 맑은 향기 대이어 감도는 곳 보소서. 운림산방의 신묘하신 가락을」라는 싯귀로 터질 듯한 감회를 새롭게 하고 있는 것이다.


차 한잔에 말년의 고독을 달래고

초의선사에게 다도 익히고 추사에게 서화 배워 … 고향 진도에서 차·그림 벗삼아 삶을 마무리하다.

전남 진도는 삼별초의 한이 서린 섬이다. 지금 나그네가 넘고 있는 고개 이름도 왕고개다. 왕 무덤이 있는 고개인데, 삼별초가 주군으로 섬긴 왕온은 소수의 삼별초 군사로 1만여명의 여몽연합군에 맞서 10여일 동안 격렬하게 항전하다 이곳에서 죽음을 맞았다.

나그네는 왕고개에서 발길을 돌려 상록수림이 울창한 첨찰산으로 달린다. 전남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첨찰산에는 고찰 쌍계사와 운림산방(雲林山房)이 돌담을 사이에 두고 있다. 운림산방은 소치 허련이 말년에 은거한 작업실이다. 소치 가문은 이곳에서 아들 미산 허영, 손자 남농 허건으로 대를 이어 남종화의 진경을 보여준다.

소치는 조선 순조 9년(1809)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초년부터 해남의 윤선도 고택에 초동(樵童)으로 들어가 살면서 그림과 인연을 맺는다. 윤선도 고택에는 문인화가 윤두서의 그림과 화첩이 있어 전통 화풍을 익힐 수 있었다. 어린 소치가 차를 알게 된 것은 윤선도 고택에서 가까운 대흥사 일지암의 초의선사를 찾아가 살면서부터였다. 초의는 시서화에다 차까지 능한 선사였는데, 암자의 자잘한 일을 돕는 동자가 필요했던 터라 소치를 맞아들였다. 어린 소치는 그림을 배우기 위해 초의가 시키는 대로 다 했다. 봄이 되면 하루 종일 산에서 야생 찻잎을 따야 했고, 초의가 찻잎을 가마솥에서 덖어 내놓으면 그것을 비비고 말렸다. 지방 관리나 추사 김정희 같은 손님이 오면 마당 한쪽에서 주전자 밑에 솔방울을 모아 찻물을 끓이는 일도 소치가 도맡아했다.

궁중화가 되고 벼슬도 지중추부사 올라 따라서 소치는 20대에도 다도 공부만 했을 뿐, 그림 수업은 깊게 하지 못했다. 그에게 전기가 온 것은 초의가 소치의 재주를 알아보고 한양의 추사에게 소개한 뒤부터였다. 소치는 31세 때인 1839년부터 추사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서화를 배웠는데, 추사에게서 중국 대가들의 구도와 필법을 익혔다. 그는 원나라 말기 산수화의 대가인 대치 황공망의 화풍을 익힌 뒤 자신의 호를 소치라고 했는데, 이때 추사는 “압록강 동쪽으로 소치를 따를 만한 화가가 없다”거나 “소치 그림이 내 것보다 낫다”고 평했다. 1846년에는 권돈인의 집에 머무르면서 그린 그림을 헌종에게 바쳐 여러 차례 왕을 알현한 뒤 궁중화가가 되었고, 벼슬도 지중추부사에까지 올랐다. 시서화에 뛰어나 삼절(三絶)로 칭송받았으며, 당시 교유한 인물로는 해남 우수사 신관호, 다산의 아들 학연, 민승호, 김흥근, 흥선대원군 이하응, 민영익 등이 있다. 그는 스승인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 가 있는 동안 초의가 제다한 차를 가지고 위험을 무릅쓰고 세 번씩이나 바다를 건너가 스승을 위로하기도 했다. 추사가 1856년에 죽자, 소치는 다음해 한양을 떠나 고향 진도로 돌아와 운림산방을 짓고 은거한다. 자신의 이름도 남종화와 산수수묵화의 효시인 중국의 왕유를 본떠 허유라고 개명한다. 서울대박물관에 소장된 그의 대표작 선면산수도(扇面山水圖) 등이 삼절로 칭송받던 한양생활의 작품이 아니라 말년의 서화인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작가에게는 사교의 시간보다 사색과 고독의 시간이 더 적실한 것이다

소치에게 차 한잔은 말년의 고독을 달래주는 도반(道伴)이었을 터다. 곤궁해진 그에게 차는 1892년 84세로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한 감로수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가 아들에게 남긴 유서의 한 대목이 더욱 그런 생각을 들게 한다.

‘자고로 이름난 사람들을 보아라. 죽을 때까지 불우하여 곤궁하게 지냈다. 내가 일세에 삼절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나 내 분수에 넘치는 일, 어찌 그 위에 부귀를 구했겠느냐.’

가는 길

진도대교를 건넌 다음 진도읍으로 가서 의신면 쪽으로 직진하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상록수림의 첨찰산과 소치가 은거했던 운림산방이 나온다.   (끝)

      
                                저녁, 숲, 별빛        
 
 
 
<출처;empas.jsm0123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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