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순수의 내린천 화가 최용건
<자화상>
작가 소개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교직에 계시던 부친을 따라 강원도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 후 다시 서울로 유학 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동양화 전공)을 졸업했다.
1996년 여름 도회생활을 청산한 뒤 백두대간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진동리에 '하늘밭 화실'을 열고 살다가
라다크로 훌쩍 떠났다. 저서로는「흙에서 일구어낸 작은 행복」「조금은 가난해도 좋다면」「하하하」등이 있다.
<평화와 행복의 이르는 언어>
도시의 삶이란 얼마나 지략적인가?
지략적인 삶이란 남를 희생시켜야만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경쟁구조의 사회에서 오는 필연적인 생존방식이다.
안타깝게도 대저 그러한 삶의 이면에는 반드시 씻을 수 없는 원죄가 내포되어 있어,
우리는 죽는 그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내내 마음이 괴롭지 않을 수 없다.
모름지기 삶이란 지략을 떠나 지혜로워야 하는 법이다.
지혜란 사랑과 자비로 가득하여 우리들을 상생의 길로 인도하는 길이기에 그렇다.
그러기 위해선 때때로 지혜로운 자들과 함께 어울려 삶의 방식을 새로이 익혀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 동안 나는 듬직한 방태산이 바라다 뵈고, 아침가리 물이 흘러 내리는 진동계곡에서 생활하면서
평화와 행복에 이르는 비늘같이 반짝이는 삶의 많은 언어들을 학습하였다.
이는 아마도 나에게 끊임없이 선의를 가지고 속삭여주는 지혜로운 자연환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 나는 그 연장선에서 히말라야를 찾기로 하였다. 다름 아닌 북인도의 히말라야 산속에서 둥지를 틀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아간다고 하는 라마크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이 몹시 궁금했었기 때문이다.
< 내린천 화가 최용건의 솔바람 에세이 ' 하하하' 에서 >
<자연과 순수의 화가 최용건의 예술 세계>
<발레리나>
<세 여인>
<스톡마을의 두 할머니>
<스피톱 곰파>
<최용건의 내린천 일기>
동양화, 한국화
2000.4.24
가끔씩 동양화는 무엇이며, 한국화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
얼마 전에는 나의 홈페이지를 인터넷 웹 검색 프로그램에 등록하면서 홈페이지 분야를 한국화라 하여 신청하였더니
관리자로부터 동양화와 한국화의 차이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었다.
동양화는 알겠는데 한국화는 또 무엇인가라는 요지의 질문이었다. 그만큼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동양화니 한국화니 하는 개념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판단의 혼선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애당초 중국, 일본을 포함한 한국사회에서는 동양화니 한국화니 하는 그림에 대한 뚜렷한 명칭이 없었다.
다만 서예와 그림을 함께 통칭하여 서화(書畵)라 일컬었었고 아울러 서화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그냥 서화가라 칭하곤 했었다. 그러니까 서예와 분리된 화가라고 하는 독자적인 명칭이 나타나게 된 것은
서구문물과의 접촉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 식민지치하 때 본격적으로 서구문화의 유입이 시작된 우리나라로서는 나라의 주권을 상실한 비극만큼이나 화단의 역사도 비운의 역사였다 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 이웃 중국만 하더라도 서양으로부터 유입되어 온 그림인 서양화에 대하여 일찍이 자기네 나라의 그림을 국화(國畵)라 불러오고 있으며, 일본 역시 그네들의 전통적인 회화를 일러 일본화라 불러오고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하여 우리 나라는 어떠했는가? 조선화(한국화)라고 하는 주권국가로서의 이미지가 담겨져 있는 명칭을 붙일 수 없어 그저 막연하고도 일반적인 지역 개념으로서의 명칭인 동양화라 부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말 할 것도 없이 창씨개명(創氏改名) 등을 강압적으로 추진하면서 우리의 민족혼을 말살시키고자 했던 식민치하에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결과였다.
그러던 것이 해방 후 20 여 년이 지난 1970년대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일부 식자들에 의하여 우리도 스스로의 정체성과 그에 걸 맞는 이름을 가져야겠다고 해서 뒤늦게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한국화라고 하는 명칭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림의 본질상, 동양화와 한국화의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답변일 것이다. 한마디로 동양화가 한국화이고, 한국화가 동양화인 것이다. 근래에 들어서서는 점차 동양화란 명칭보다는 한국화란 명칭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는 추세이다.
그러나 바야흐로 글로벌시대인 2000년대로 접어 든 요즘, 작품을 분류하는 데 작화(作畵)에 사용한 화구(畵具)만을 조건으로 하여 한국화니 서양화니 분류하는 것도 필경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겠다. 그저 오늘 날 이 땅 위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정서를 유감없이 잘 대변해 줄 수 있는 그림이라면 그것이 곧 우리의 그림이요, 한국화가 아니겠는가? 분석적인 시각보다는 통합적인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려는 넉넉한 그림. 나아가 의식의 수리적 전개 내지는 고착화가 아니라 의식을 자유롭게 해방시켜줄 수 있는 그림... 그런 그림이라면 우리는 한국화라 해도 좋을 것이다.
초대면시에 사람들이 나의 신상에 관하여 궁금해하면 진동리에 사는 ‘화가’입니다 라고 답변을 하여준다.
나아가 좀 더 궁금해하면 ‘묵화를 그리지요’ 라고 친절하게 답변을 하여 주곤 한다.
<3인의 나팔수>
* 오두막
울진의 불영 계곡으로 귀농한 선우네 가족의 열렬한 환대에도 불구하고 오두막 벽체가 터질까 몹시 조마조마하였다.
김밥 속에 앉아 있는 듯 이야기 도중 기침 한 번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가면춤 추는 승려>
* 낙숫물
지붕으로부터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면 껌 씹는 소리 같은가하면,
할머니 연시 먹다 씨앗 내뱉는 소리 같기도 하고, 아니면 부부지간 티격태격 싸우는 소리 같기도 하다.
정말 이 비가 그치면 하루하루 추위가 뼈 속 깊숙이 못을 박듯 파고 들 테지.....
<라마유르 마을>
* 육신이 쇠하면
2000. 4. 23
앞산에 활짝 핀 진달래를 바라보며 파종을 하였다.
세월은 정말 흐르는 물과도 같아 개천의 얼음장 갈라지던 때가 엊그제 같은 데 벌써 방태산 정상의 잔설이 사라지려 한다.
올해도 봄이 되니 어김없이 바쁘다. 밭갈이를 마친 후 비닐멀칭도 끝내놓았고, 감자를 파종하다 말고 파종구를 이랑이에 꽂아놓고서는 밭두둑에 걸터앉아 잠시 노래를 불러 보기도 하였다. 학창시절에 즐겨 부르던 카나다의 민요, '록키산에 봄이 오면 나는 돌아가리라...' 왠지 잔설이 아련하게 남아 있는 방태산을 바라보려니 가슴이 울렁거려 이대로만 앉아 있을 수 없어서 였다. 목련꽃 나무 가지를 옮겨 앉는 이름 모를 새들의 노래 소리처럼 나의 목청에도 자못 물기가 오르는 것만 같다.
되돌아보면 철없던 어린 시절부터 가슴속에는 아득한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절실했었나 보다. 그러니 오늘 이 시간,
인적이 드문 개천가 밭두둑에 걸터앉아 방태산을 바라보며 노래를 부르고 있지...
귀를 기울여 보면 내린천을 향하여 흘러내리는 물소리 부산하고, 물까마귀들 나래를 퍼덕이며 계곡을 따라 내려가는 소리 어지럽다. 그런가 하면 하천부지 풀숲에는 온갖 종류의 잡새들이 날아와 둥지를 틀고 있다. 만물이 약동하는 봄이 온 것이다.
노동으로 육신이 고단해지니 관절 깊은 곳으로부터는 삐~걱 거리는 소리와 함께 바람에 널문 여닫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육신이 쇠하면 사랑도 미움도 사라지는 법. 오로지 지혜로움만 남아 하루하루를 자연과 더불어
<이방인>
* 별
담배도 못하지, 술도 못하지, 가끔씩 가슴이 답답해 올 때면 고무신을 끌고 밖으로 나가
밤하늘의 별들을 올려다보는 일이 나의 몇 안돼는 낙중의 하나다.
언제나 봐도 밤하늘은 아름답고 신비하기만 하다.
지천으로 흩어져 반짝이는 크고 작은 별들은 아마도 태곳적으로부터 지금까지,
산과 들에서 그리고 강가에서 풍장을 당한 수많은 뭍짐승들의 희디 흰 뼈골들이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어 반짝이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여 본다.
<갯바위>
* 가을일기
구름이 걷히자 하늘이 파랗게 드러났다. 그동안 아내에게 오십견통으로 미루어왔던 팔베개를 다시 해주어야겠다.
<인도의 여름 휴양도시 심라>
* 책하지 말라
웃음이란 행에서 불행을 차감한 잔액, 곧 이윤이다. 그러니 실없이 웃는다 책하지 말라,
나는 지금 열심히 삶의 이윤을 창출하고 있는 중이니까. ‘푸하하하하하...
* 퇴각하는 구름처럼
비가 내리고 있다. 짐짓 가을을 느끼게 하여주는 빗방울의 찬 기운이 살갗을 꿰뚫어 뼈를 시리게 한다.
그동안 여름하늘을 얼룩지게 했던 구름들이 서서히 물러가며 에메랄드 빛 파란 하늘이 드러나고 있다.
환절기로 접어드니 숲으로부터는 노루와 까마귀 떼들의 울음소리가 자주 들려온다. 특히 노루 울음은 허공을 향해 가죽채찍을 급하게 휘두르는 소리 같은가 하면, 허무를 토해내는 소리 같기도 하다. ‘커억~ 커억~’ 하고 들려오는 노루의 울음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꽤나 당혹스러웠다. 노루가 주는 귀엽고 순한 인상과는 달리 울음소리가 매우 거칠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까마귀 소리는 절박하다. 계절을 겨울로 곤두박질치게 할 만큼 급하고 깊다. 먹빛보다도 창윤하면서 깊게 들려오는 그 울음소리에 때로는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다.
깊은 산 속에서나 들을 수 있는 낯선 소리들……. 생경한 환경들이 있어 하루하루의 삶이 신선하기만하다. 술을 마시지 않아도 기분은 한 옥타브 높은 곳에서 노닐며, 담배를 피우지 않아도 나는 영혼의 호수에 파랑을 일으킬 만큼 깊은 숨을 들이쉴 수가 있다.
환절기다. 퇴각하는 구름처럼 세상의 변방을 떠돌고 싶다.
<출처;blog.joins.com/a3421영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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