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초상
19세기의 전형적인 초상화 양식에는 몸체와 두부(頭部)를 비스듬히 돌려 정면을 향하는 다소곳한 모습들이 자주 보이며, 드가 자신의 모습을 그린 이 초상화 역시 전통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다.
20세 무렵에 그린 19세기 서구의 전형적인 옷차림새로 책상 위에 한 쪽 팔을 얹은 채 다른 한 손에는 밑그림 제작용 석묵(흑연)을 가볍게 쥔 모습이다. 이 작품을 제작하던 무렵 약관의 그는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르네상스 회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이미 고전주의 작가들 의 작품에 심취하여 그들의 작품을 차례로 모사한 바 있는 까닭에서인지 그리스-로마의 양식을 답습함으로써 극히 정적이며 차가운 느낌을 주는 고전 주의 회화의 경향이 이 작품에서 뚜렷이 엿보인다.
장갑을 낀 여가수
187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 드가는 카페를 자주 출입하는데, 그로부터 10년 후에는 드가를 평소 존경하던 로트랙 역시 이 집의 단골이 되어 수많은 명작을 남기게 된다.
드가는 카페에서 노래를 열창하고 있는 여가수를 이 작품에서 표현하고 있다. 드가의 여느 작품들과는 달리 이 작품은 가수 한 사람만을 아주 가까운 위치에서 본 것처럼 크게, 그리고 자세히 몸의 일부만을 그리고 있다. 예의 각광을 받고 열창을 하는 이 여가수는 오른 손에 검은 장갑을 끼고 있어 배경의 화려한 커튼과 극명한 명도 대비를 이룬다. 가수를 근접한 위치에서 올려다보며그린
이 작품과 같은 경우는 드가의 작품 중 그리 흔치 않다. 아무튼 고전주의의 영향을 받은 그가 전혀 상반된 동적이며, 현실감 넘치는 표현을 보이는 것은 아이러니한 현상이기만 하다.
화실에서의 자메 티소
1860년대의 드가는 '일본의 우끼요 에(浮世畵; 풍속화 판화)'의 영향으로 그의 회화는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지금까지 고전적인 좌우 균형을 이룬 안정감 있는 구도법에 익숙해 있던 드가는, 의도적으로 균형을 깨뜨린 것과 같은 불안정한 느낌의 '우끼요에'의 구도에서 새로운 회화 표현의 세계를 발견한 것이다.
전통적인 화법에서의 시각위치는 주로 관점자의 눈 높이인데 반 해, 드가가 이 작품에서 시도한 구도는 위에서아래를 향해 내려다보는 구도이다. 이로 인해 원근감과 공간 감이 확대되는 것이다. 이작품의 윗부분 벽면에 가로로 걸린 것은 일본의 풍속화이며,
이러한 풍속화는 유럽의많은 화가들이 이국 정서에 이끌려 자신들의 작품 속에 화제로서 끌어올리곤 하였던 것이다. 드가도 예외 없이 그것을 이 작품 속에 그리고 있는 것이다.
압상트
드가는 현실에서 보여지는 것을 조금도 그자신의 미관 (美觀)에 따라 임의로 변형치 않고 실제의 그대로를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현실을 파악하는 그의 관조력이 냉철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파리의 평범한 카페, 그 내부에 대리석 탁자가 놓이고 무표정하고 초라해 보이 는 여자와 다른 곳에 시선을 보내는 남자가 나란히 앉은 모습이다. '우끼요 에'의 영향이 짙은 이 작품은 제작된지 17년이나 지난 1893년에야 발표되었다.
인물의 뒤쪽에 보이는 거울과 탁자의 가장자리 선 등이 사선으로 기움에도 불구하고 인물이 차지하는 중감 (重感)으로 알맞은 균형세를 이루고 있다. 압상트 술 잔을 앞에놓고 앉은 여인은 창녀이고, 이 두 인물의 모델은 드가의 친구 데브탱과 당시 미모의 여배우인 엘렌 앙드레라고 전해진다.
무용 수업을 받고 있는 장면
빠 드 트르와(세 사람이 함께 추는 춤)를 연습하는 정경을 그린 이 작품 역시 벽과 바닥의 공간 대비가 큰 차를 보인다.
화면의 왼편 상단부에는 세 사람의 무희가 몸의 균형을 잡으려 하고 있거나 준비 자세에 임하고 있다. 그리고 오른편에는 지도 선생인듯한 남자의 모습이 보이는데, 그의 옆머리는 괴이하리만치 길쭉하게 보인다.
머리를 길게 늘여뜨린 오른편의 무희는 곧 이어 배우게 될 무용 자세를 홀로 연습하고 있으며, 화면의 전경(前景)에는 어느 부인이 신문을 보고 있는 모습이다.
어느 무희의 보호자인 듯한 이 여인의 무관심한 모습이 무용에 열중하는 다른 인물들과는 상반된 느낌을 갖게 한다. 가까이 그 리고 위에서 내려다본 듯한 시각 위치에서 포착한 구도가 특이하다.
분장실 속의 무희
이미 발레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 이모저모를 날카롭게 관찰한 바 있는 드가는 무희들의 생태와 그 이면에 이르기까지도 그의 회화에 관한 독특한 눈길을 보내기시작한다.
이 작품은 마치 무대 뒤의 분장실 근 처를 지나치다 조금 열린 문틈 사이로들여다 보이는 분장실의 무희를 그린 것이다. 현실의 세계를 포착한다는 점에서 볼 때 인상주의 화가들과 등질성을 보이 면서도 대상의 범위와 그 파악의 면에서는 전혀 다른 면을 드가는 보이는 것이다.
유난히도 세로가 긴 화면의 3분의 1가량을 출입문으로 하고, 그 나머지 화면만으로 분장실의 정경을 표현함은 명도 대비로써 주제를 강조하려 함이다. 문이 열린 틈 사이로 보여지는 분장실은 마치 출입이 금지된 내밀한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무용 시험
파스텔의 유연한 질감과 화려한 색채를 알맞게 표현한 이 작품은 인물의 특징, 파악의 방법이 자못 날카로움을 보인다
예의 작품들과는 달리 화면을 가득 메운 군사의 무희들이 자신의 발 동작을 살펴보는 모습이거나, 긴 양말을 고쳐 신은 모습이며, 보호자인 듯한 여인이 이를 지켜보고 있는 장면이다. 드가는 이 작품에서 인체의 동세,그리고 신체의 각 부분의 특징을 강조하여 날카로운 선묘를 구사하고 있다.
사각(斜角)을 이루는 지면의 불안정한 느낌을 보완키 위해 수직으로 곧 추선 인물을 두어 대각(對角)을 이루게 하며, 그 결과 V자 모양의 구도를 이룬다. 시험의 차례를 기다리며 준비중인 무희들의 새하얀 의상은 유연한 여체의 탄력을 뒷바침이나 하듯 유난히도 밝게 빛나 보인다.
가로 막대를 잡고 연습하는 무희
드가는 바닥에 중요성을 두는 드문 화가 중의 한 사람 이었다. 그는 멋진 마루를 자신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때로는 아주 높은 데서 무희를 포착하며 온갖 형태가 마루 면에 투영된다.마치 해변가에서 게를 내려다보듯 그것은 그에게 새로운 관점과 참신한구도를 안겨준다.
1876년에 이은 같은 주제의 이 작품은 예의 작품 에 비해 무희의 자세, 벽, 의상, 마룻바닥 등 구도보다는 색채 쪽에 치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각기의 작품마다에서 보이는 색다른 구도의효과라든가 섬세한 필체가 보이지 않고, 작은 필세로 전체적인 색조를 이끌고 있다는 것이다.
색채 또한 사실적인 느낌보다는 단순히 화면 조화에 치우치고, 마룻바닥의 질감 표현도 전과 같은 사실성을 잃고 있음이 보여지는 작품이다.
몸치장
19세기 말에 이르러서도 나체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은 성스러운 것이면서도 불순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나체는 조각상에만 한정되어 있었으며, 때로는 예외의 경우도 보인다.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 넘치는 여인의 나체에 대해서는 매우 보수적인 기색을 보이던 사람들도 대리석의 조각에 대하여는 이를 찬미하였다.
이 나상(裸像)은 목욕 후 하녀에게 머리 치장을 맡긴 채 허공을 응시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흔히들 드가는 르노와르처럼 여체의 탐욕스러운 느낌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무대 위의 무희
꿈의 날개를 펴 보이는 듯한 이 무희의 자태는 높은 시각에서 포착되고 있다. 커튼 뒤로 가리워진 남자와 무희들은 간략하게 생략된 묘사를 보이며, 주가 되는 무희 이외에는 자유 분방한 거치른 필치로 처리하고 있다.
배경의 오른쪽 저 멀리 산과 같이 펼쳐진 무대 장치는 전면의 공간감을 일층 확대시키며 무대 면과의 원근감을 강조해 주고 있다. 각광을 받고 있는 화려한 의상의 무희는 실제의 공연에 있어 주역인 듯하다.
이 작품에 관한 것으로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과 이 작품의 소장자였던 귀스타브 카이유 보트는 그가 임종하기 전 유언으로써 그의 소장 작품들을 나라에 기증키를 원하였지만, 그 당시의 보수적 성향 때문에 그것들의 대부분이 거절 당하였으나, 드가의이 작품만은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철저하게 집착하는 데상의 명수(名手)"
드가 (Hilaire-Germain-Edgar Degas,1834-1917) 1834년 7월 19일 프랑스 파리에서 출생 -- 1917년 9월 27일 파리에서 사망
프랑스의 화가. 본명 일레르 제르맹 에드가르 드가(Hilaire Germain Edgar De Gas). 파리 출생. 부유한 은행가 집안의 장남으로, 처음에는 가업을 계승하기 위하여 법률을 배웠으나, 화가를 지망하여 1855년 미술학교에 들어갔다. 거기서 J.A.D.앵그르의 제자 L.라모트에게 사사(師事)했고, 앵그르로부터도 직접 가르침을 받아, 평생토록 이 고전파의 거장에 대한 경의를 품게 되었다. 56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르네상스 작품에 심취하였다. 이 무렵부터 거의 10년간은 화가로서의 본격적인 수업기로 오로지 고전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65년 살롱에 《오를레앙시(市)의 불행》을 출품하였다. 그 후 자연주의 문학이나 E.마네의 작품에 이끌려, 근대생활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을 제작했는데, 74년부터 86년까지 인상파전에 7회나 출품 ·협력하였으나 그 후로는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그는 파리의 근대적인 생활에서 주제를 찾게 되자 더욱 재능을 발휘하여 정확한 소묘능력 위에 신선하고 화려한 색채감이 넘치는 근대적 감각을 표현하였다. 인물동작을 잡아 순간적인 포즈를 교묘하게 묘사하여 새로운 각도에서 부분적으로 부각시키는 수법을 강조해왔다. 경마나 무희, 욕탕에 들어가거나 나오려는 여성의 한 순간의 동작을 즐겨 그렸다. 이러한 그의 눈과 기량은 파스텔이나 판화에도 많은 수작을 남겼을 뿐 아니라, 만년에 시력이 극도로 떨어진 뒤에 손댄 조각에까지 더없는 걸작을 만들어냈다. 선천적으로 자의식(自意識)이 강한 성격 때문에 독신으로 보냈고, 그의 인간혐오증은 늙어갈수록 더하여 고독한 가운데 파리에서 83년의 생애를 마쳤다. 파리 인상파미술관에 소장된 대표작 《압생트》(1876) 《대야》(86)를 비롯한 많은 작품를 남겼다.
드가는 인상파 그룹에 참여하였으면서도 본질적으로는 인상파화가라고 할 수 없는 화가이다. 물체를 에워싸는 광선에 의한 분위기를 잡으려는 인상파를 맹목적으로 따르기보다는 어떤 의미에서 그는 엄격한 사실주의정신을 끝내 지켜 나갔다고 할 수 있다. 고전파의 대가인 앵그르를 숭배하였던 드가의 엄격하고 사실적인 대생은 고전의 명화의 영향이 아닌가 한다. 인상파 화가들이 야외에서의 외광 풍경에 몰두했던것과는 달리 드가는 실내의 인물 묘사에 주력했다. 정물화나 풍경화는 거의 그리지 않았으며 움직이는 인물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인간의 동작 가운데서도 특히 아름다운 동작인 발레를 많이 다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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