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자계서원(紫溪書院) [紫溪書院(자계서원) 전경]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김일손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중종 13년(1518)에 지은 서원이다.
선조 11년(1578)에 다시 지었으며,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광해군 7년(1615)에 다시 짓고 김극일과 김대유를 더하여 모셨다.
현종 2년(1661)에 '紫溪(자계)'라는 사액을 받아 나라의 공인과 경제적 지원을 받게 되었다.
고종 8년(1871)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24년에 복원되었다.
[紫溪書院(자계서원) 2]
지금 남아있는 건물로는 사당인 존덕사와 제사준비를 하는 전사청, 강당인 보인당, 신문, 영귀루, 동, 서재 등이다. 이 중 영귀루와 동재, 서재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영귀루는 서원에서의 여러 행사를 하고, 학생들이 모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惟直門(유직문)]
동재와 서재는 학생들이 공부하고 숙식하는 생활공간이다. 영귀루 옆에는 김일손이 심었다고 전하는 은행나무가 있고, 원정비, 신도비 등이 비각 안에 있다.
'연려실기술'등 수십 권의 문집이 소장되어 있으며, 유물로는 칠현금이 보관되어 있다.
지금은 교육기능은 없어지고, 매년 2월과 8월에 제사만 지내고 있다. 방문한 날 자계서원은 굳게 문이 잠겨 있었다.
[紫溪書院(자계서원) 3]
아쉽지만 밖에서 안을 향하여 사진으로 담아보았다.
[紫溪書院(자계서원) 4]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희생된 탁영 김일손(1464∼1498)선생과 부인에게 내린 교지 5종과 자계서원에서 의식이 있을 때 그 순서를 적은 글인 홀기 및 둔전답 등본이다.
김일손은 김종직의 문인이며, 1486년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낸 후 고향에 내려와 학문에 몰두하다가, 그 후 다시 벼슬길에 올라 이조정랑 등을 지냈다.
그러나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 때 조의제문을 史草(사초)에 실은 것이 문제가 되어 능지처참의 형을 받았다.
[紫溪書院(자계서원) 5]
그러나 중종반정이 있은 후 신원되어 홍문관 직제학을 추증받았으며, 이후 현종 때 도승지, 순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이 문적은 그가 죽은 후 도승지, 이조판서에 추증한다는 내용의 교지와 나라에서 시호를 내리는 내용을 담은 교지 및 그의 두 부인을 정부인에 올린다는 교지 등이다.
홀기는 자계서원에서 봄,가을에 제사를 올릴 때 쓰던 것이며, '둔전답 경자개양등록'은 서원의 전신인 紫溪祠(자계사)가 1578년 사액서원 이 되면서 종전의 둔전답을 고쳐 만든 등본이다.
한 개인의 가계사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회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紫溪書院(자계서원) 6]
우리나라 최초의 사화 피해자인 탁영 김일손(1464~1498)을 기리는 자계서원 전경 탁영이 생전에 심었다는 수령 500여 년의 은행나무 그의 올곧은 선비정신을 상징하듯 하늘 높이 자라고 있다.
[詠歸樓(영귀루)]
본관이 김해인 탁영 김일손은 이곳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17세까지 할아버지 克一(극일)로부터 소학, 동사강목, 사서 등을 배우고
이어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 김광필, 정여창, 강혼 등과 함께 학문의 깊이와 폭을 넓혔다.
23세 되던 해인 1486년(성종 17) 문과에 급제 벼슬길에 나아갔으며, 1491년(성종 22) 장래가 촉망되는 문신(文臣)에게 주어지는 賜暇讀書(사가독서)에 뽑혀 학문연구와 독서에 매달리는 영예를 누린다.
賜暇讀書 : 재능이 있는 문신들에게 문흥을 위해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한 제도.
밝고 투명한 사회를 만들어 보려던 선비 탁영은 35세라는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하고 만다. 그러나 훗날 바른 평가가 내려지면서 순조 대에 이르러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여기까지만 사진으로 담고 돌아서려는데... 마침 나오시는 할머님 한 분을 만났기에 여쭈어보았다. 자계서원 좀 들어가 보고 갈 수 없으시냐고 여쭈었드니, 흔쾌히 문을 열어주시겠다며, 잠깐 기다리라고 말씀하시곤 열쇠를 가져오셔서 서원옆을 통하는 작은 문을 열어주셨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정중히 드리고 들어가서는 다시 살펴보며, 사진으로 담았다.
[紫溪書院(자계서원)]
고종8년(1871년)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어 동, 서재만 남아 있다가 1924년 참봉 金容禧(김용희)가 중건하였다.
탁영 김일손 선생은 성종17년(1486년) 式年文科(식년문과)에 甲科(갑과)로 及第(급제)하여 藝文館(예문관)에 등용된 후 淸宦職(청환직)을 거쳐 吏曹正郞(이조정랑)이 되었다.
燕山君(연산군 4년, 1498년) '成宗實錄(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스승 金宗直(김종직)이 쓴 '弔義帝文(조의제문)'을 史草(사초)에 실은 것이 화근이 되어 慘禍(참화)당하였다.
이 사건을 戊午史禍(무오사화)라 한다.
중종 반정 후 燕山君(연산군 12년, 1506년) 도승지와 이조판서 양관 대제학에 追贈(추증) 되었다.
[紫溪書院(자계서원)과, 輔仁堂(보인당) 현판]
건물 배치 중심에 있는 輔仁堂(보인당)은 정면5칸, 측면2칸의 高床形(고상형) 집이며 겹처마 팔작 지붕에 활주가 있다.
가구는 5량가이며 연등천장에 우물마루를 깔고 공포는 익공계 이다.
영귀루(1699년重建)는 정면3칸 측면2칸으로 자연석의 초석상에 원주를 세워 樓柱(루주)로 삼고 마루를 놓아 다시 루를 가구 하였다.
가구는 5량가로 공포는 주심포계에 익공이 절충한 모양이다.
동재의 건축기법은 그 유례가 흔하지 않으며 청도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輔仁堂(보인당) 주축 선에는 詠歸樓(영귀루) 와 惟直門(유직문)이라는 三門(삼문)이 있고 보인당 동쪽에는 尊德祠(존귀사)와 전사청, 신도문이 따로나있다.
[東齋(동재)]
이 서원의 12동 건물중 영귀루와 동서양재가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영귀루 옆에는 탁영 김일손 선생께서 손수 심었다는 은행나무와 동쪽으로 탁영선생의 신도비와 節孝(절효) 김선생 旌閭碑(정려비)라 쓴 조부의 비가 있으며, 서쪽에 書院庭碑(서원정비)등이 있는 자계서원은 조선초기 역사와 건축을 볼 수 있는 곳으로 학자와 유림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다.
[西齋(서재)]
'紫溪(자계)'는 연산군 4년 무오사화(1498)로 金馹孫(김일손) 탁영이 처형되든 날 천지가 진동하고 벼락이 무섭게 치며, 갑작스럽게 폭우가 내려 기왓장이 날고 수목이 부려졌다고 하니 하늘도 그의 억울함과 인물됨을 알고 있었던가?
또한 그의 고향 앞을 흐르는 雲溪川(운계천)이 피로 물들고 3일이나 역류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雲溪(운계)를 紫溪(자계)라고 하고 雲溪書院(운계서원)도 紫溪書院(자계서원)이 되었다고 한다.
[尊德祠(존귀사) 전사청 들어가는 문]
선생은 학덕이 높고 충직한 기개의 청빈한 선비 였지만 또한 풍류와 낭만을 즐길줄아는 문사셨다 한다.
한때 낙향하여 鄭汝昌(정여창)과 더불어 遊覽(유람)과 뱃놀이 등으로 서정과 낭만을 찾기도 하였다. 이때 탁영이 지은 시의 한구절을 음미하면
쥐찬 소래기야 배부르다 자랑마라 청산에 앉은 학이 주린들 부를 소냐 이몸이 한가할진대 살쪄 무삼하리오.
이상적인 왕도정치 실현을 위해 그의 스승 金宗直(김종직)과 더불어 정치 일선 에서 맹활약 했으나 시운이 닿지않아 요절했기 때문에 그의 문인이 없는 것이 안타깝다. 탁영의 거문고 솜씨는 神琴(신금)으로 이름나 있었고, 풍류를 아는 문사였으니 천수를 누렸다면 큰 문인이 되었으리라.
[탁영선생이 심은 은행나무]
탁영 수식목이라는 안내판이 있었으며 2그루 다 탁영이 직접 심은 암나무라고한다.
두 그루 은행나무 사이에 탁영의 문학비가 서 있었다.
[탁영의 문학비]
푸른 물결 넘실넘실 노 소리 부드러워 소매에 찬 맑은 바람 가을인양 서늘하다 머리 돌려 다시 보니 참으로 아름다워 흰 구름 자취 없이 두류산을 넘어 가네
1489년(성종 20) 4월 29일 그의 나이 26세 때 섬진강에서 지리산을 읊은 詩(시)이다.
[수식목(手植木) 표석]
탁영 선생이 직접심었다는 수식목(手植木) 표석, 오늘날의 기념식수를 옛날에는 손수심었다는 뜻 수식으로 표현한 것 같다
17세에 사림파의 영수 金宗直(김종직)의 문하로 들어갔다. 22세 때 대과에 장원급제한 후 20대에 이미 명나라를 두 차례나 다녀오며 최고의 학력과 문장력을 갖추게 되었다.
우암 宋時烈은 뒷날 탁영을 가리켜 그의 문장은 양양대해같고 중국의 문호 韓禹製(한우제)에 비견하여 손색이 없다고 했다.
탁영이 춘추관 사관시절 전라도 관찰사 이극돈의 비행을 사초에 실었는데, 이를 알고 이극돈이 빼줄 것을 부탁하자
"나는 생명을 잃어도 그렇게는 할 수 없다" 며 거절하였다.
그 때 한양에서는 '오극(이극돈의 다섯 형제)과 싸워서 이겨내지 못한다'고 할 정도로 이들의 세력은 대단하였다.
날이 거듭될수록 사림파와 훈구파의 갈등은 골이 깊어 가고, 탁영에 대한 이극돈의 개인적 감정도 풀어질 길이 없었다.
그러나 탁영은 대쪽같은 성격으로 당시 훈구 세도가의 위세에 조금도 굴함이 없었다.
[紫溪書院(자계서원)에서 바라본 詠歸樓(영귀루)]
紫溪書院(자계서원)은 대구에서 그 옛날 산적들의 피해를 막기위해 여덟명 이상 모여 넘었다는 팔조령을 넘어 경북 청도군 이서면을 향해 달리다가 이서다리를 건너기 직전 오른쪽 길을 따라 들어가면 낮은 산자락 아래 서원이 보인다.
원래는 雲溪里(운계리)였는데 자계서원이 있다하여 書院里(서원리)가 되었다 하니 옛날 자계서원의 규모와 이 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紫溪書院(자계서원) 7]
생육신인 남효온과 더불어 죽림칠현의 한 분인 辛永禧(신영희)가
"그는 참으로 세상에 드믄 인재이며 조정의 큰 그릇이다." 라고 했을 뿐 아니라, 점필재 문하생으로 가장 촉망받던 3인방 탁영, 김굉필, 정여창 중에서 이른 바 선두주자였다고 할 수 있는 탁영 선생만이 왜 문묘에 배향되지 못했는지 아쉽기 그지없다.
[앞에서 본 詠歸樓(영귀루)]
저서로는 '탁영집', '會老堂記(회로당기)'등이 있으며 시호는 '文愍(문민)'이시다.
선생이 생전에 아끼든 거문고 일명 '濯纓琴(탁영금)'은 우리나라에서 악기로는 유일하게 '보물 제957호'로 지정되어 국립대구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그다지 높지않은 屛風山(병풍산)을 背山(배산)으로 앞에는 아름다운 계천이 흐르는 곳 양지바른 곳에 자리한 紫溪書院(자계서원), 그 옛날의 역사를 간직한 채 지금도 그 자리에서 고색이 찬연하게 버티고 서 있다.
역사가 되풀이 되는 한 우리는 언제나 그를 기억하며 그를 찾는 발걸음도 이어질 것이라 생각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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