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자료
[스크랩] 책들고 팔 벌린 세종대왕
회기로
2010. 1. 19. 23:19
서울시, 광화문 ‘세종대왕동상’ 설계안 확정
10월 9일 한글날 제막…지하엔 ‘한글기념관’
서울의 심장부인 광화문광장에 들어설 세종대왕동상 설계안이 확정됐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16일 세종대왕 동상 설계작으로 김영원 조각가의 작품
‘뿌리깊은 나무, 세종 대왕’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이 설계작은 기단(基壇) 위에 위치한 좌상 형태로, 두 팔을 벌리도록 표현해
백성과 소통을 중시하는 온화한 군주의 이미지를 형상화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동상은 한 손엔 책을 들고 있어 한글을 바탕으로 수준 높은 민족문화를 만들어낸
세종대왕의 정신을 살렸다. 동상은 가로 5.0m, 세로 5.0m, 높이 6.2m이고 기단은
가로 11.5m, 세로 9.2m, 높이 3.3m다. 동상과 기단을 합친 총 높이는 9.5m다.
이 동상은 이순신 장군 동상의 뒤편 약 250m 지점인 세종문화회관 앞에 설치되고
남쪽(시청 방향)을 향한다. 세종대왕 동상은 10월9일 한글날에 제막될 예정이다.
오 시장은 “용맹과 애국의 상징인 이순신 장군 동상과 더불어 창의와 애민의 상징인
세종대왕의 동상이 서울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대변하는 ‘문화 아이콘’이 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세종대왕 동상 하단 기단부 공간에는 대왕의 일대기와 업적,
한글 창제원리, 당시 과학 기술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영상 벽면이 조성된다.
동상 전면부에는 세종대왕 시대의 주요 과학 발명품인 해시계와 물시계, 측우기, 혼천의가
가로 1.0m, 세로 1.1m 의 인공연못 안에 강화 유리상자로 포장돼 설치된다. 세종대왕 동상
하부와 엘리베이터로 연결되는 지하보도엔 한글의 체계와 창제 과정을 시민과 관광객들이
관람할 수 있는 ‘한글기념관’이 들어선다. 강태성 심사위원장은 “광화문광장 일대의 도시
경관과 조화롭고, 심미감과 품격이 뛰어나며 세종대왕의 위대한 업적들을 알기 쉽게
표현한 점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말했다.
/곽명동기자 jobim@fnn.co.kr
한글 덕분에 문맹률 0%라는 경이적인 기록에 육박
중국정부는 20세기 초 90%가 넘는 문맹률을 최근에 가까스로 50%까지 줄여왔는데도
/곽명동기자 jobim@fnn.co.kr
한글 덕분에 문맹률 0%라는 경이적인 기록에 육박
중국정부는 20세기 초 90%가 넘는 문맹률을 최근에 가까스로 50%까지 줄여왔는데도
문맹률은 아프리카와 비슷하다. 아직도 세계최고 수준의 문맹률이다. 그것도 옛 한자만을
써왔으면 50%는커녕 그 절반이나 가능할지 생각하게 한다. 현재 읽고 쓸 줄 아는 미국인은
고작 79%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은 쉽고 간결한 한글 덕분에 문맹률 0%라는 경이적인
기록에 육박한다. 몇 년전 프랑스에서 세계언어학자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학술회의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한국의 학자들은 참가하지 않았는데, 그 회의에서 한국어를 세계 공통어로 쓰면
좋겠다는 토론이 있었다고 한다. (KBS1, 96. 10. 09).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세계가 인정하는 우리 글의 우수성을 정작 우리 자신이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1986년 5월, 서울대학 이현복 교수는 영국의 리스대학의 음성언어학과를 방문하였다.
그 때 리스대학의 제푸리 샘슨(Geoffrey Sampson) 교수는 한글이 발음기관을 상형하여
글자를 만들었다는 것도 독특하지만 기본 글자에 획을 더하여 음성학적으로 동일계열의
글자를 파생해내는 방법(ㄱ-ㅋ-ㄲ)은 대단히 체계적이고 훌륭하다고 극찬하였다.
그러면서 한글을 표음문자이지만 새로운 차원의 자질문자(feature system)로 분류하였다.
샘슨교수의 이러한 분류방법은 세계최초의 일이며 한글이 세계 유일의 자질문자로서 가장
우수한 문자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지난 1997년 10월1일, 유네스코에서 우리 나라
훈민정음을 세계 기록 유산으로 지정하기에 이르렀다. 언어 연구학으로는 세계 최고인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언어학 대학에서 세계 모든 문자를 순위를 매겨(합리성, 과학성, 독창성 등의
기준으로) 진열해놓았는데 그 1위는 자랑스럽게도 한글이다.
전세계 언어학자치고 이제 한글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만큼 한글은 가장 과학적이고 편리한
문자임을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한글은 과연 다른 문자와 비교하여 얼마나 우수한 문자일까,
위대한 문자일까?
첫 째는 만들어진 기간이다.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쓰여지고 있는 문자는 로마자와 한자인데,
이것들은 각기 3천년 이상에 걸쳐서 만들어졌다. 지금도 한자는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어쩌면 한자가 쓰이는 동안은 계속 만들어질 것이다. 불완전한 문자라는 말이다.
로마자가 불완전한 것도 두말할 필요 없다. 로마자 표기에 대해 우리 나라에서 유독 갈팡질팡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거의 완벽한 한글에 비해 로마자는 표현할 수
없는 음이 너무 많아서 어떤 수를 써도 한글로 쓴 것을 누구나 인정할 정도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 한글이 로마자보다 시원찮은 문자라면 오히려 한 번 정해진 로마자 표기에
모두들 감탄하기 바빠서 딴죽을 걸지 않았을 것이다.
로마자가 지닌 결정적인 약점은 모음이다. A, E, I, O, U 다섯 글자 밖에 없다. 이를 보완하는 게
반자음인 W, Y이다. 그러니 한글로는 간단히 표시되는 `ㅓ, ㅕ, ㅡ, ㅢ` 등은 원천적으로 표기
불가능하다. `ㅐ, ㅒ, ㅚ` 등도 불가능하다. 반면에 한글에는 모음이 무려 10개나 되는데다가
이를 응용하면 얼마든지 이중 모음을 더 만들어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이 모음을 발견하기까지
무려 3천년이 걸렸다. 그런데 세종대왕은 이를 불과 30년도 안 되어 완벽하게 창제하셨다.
(세종 25년인 1443년에 창제 완료하고 세종 28년인 1446년에 반포함.)
로마자는 멀리 이집트로 그 기원이 올라간다. 아직도 이집트 글자를 상형문자로 알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아니다. 그것은 표음 문자이다. 이를 밝혀낸 사람이 바로 로제타 돌을
해독한 저 유명한 언어 천재, 16살에 대학 교수가 된 샹폴리옹(Champollion)이다.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에서 가져온 로제타 지역의 괴상한 돌을 그 이전 사람은 모두
그림을 보고 추호도 의심없이 상형 문자로 알고 그 뜻을 읽어내려고 머리가 빠지고
벗겨지고 희어지도록 아둥바둥 애만 태웠다.
샹폴리옹은 그러나 그 아래 쓰인 그리스 문자에 힌트를 얻어 그것이 상형 문자가 아닌
표음 문자라는 과감한 가정을 하고 연구한 결과, 마침내 이를 다 해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부 동그라미가 왕을 뜻한다든지 하여 약간의 표의 문자적 요소도 있긴 있었다.
문제는 이 이집트 문자가 너무 복잡했다는 데 있었다. 그 그림을 일일이 외워서 그린다는 건
보통 사람으로선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데 이를 아주 간단히 바꾼 인종이 나왔다.
그가 바로 오늘날 중동 지역에서 나와 지중해를 휘어잡아 곳곳에 식민 도시를 건설한
페니키아인이다. 그들이 건설한 도시로 제일 유명한 게 바로 한니발의 카르타고이다.
이들 페니키아인들은 상업과 군사 중심의 인종이라서 복잡한 문자는 영 생리에 안 맞았다.
그래서 이를 대폭 간소화한 것이다. 거의 그림이라는 느낌이 안 드는 추상화한 문자를 만들었다.
이와 비슷한 것이 구약 성경을 기록한 셈족의 문자이다. 이것도 이집트 문자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두 문자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모음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 이름을 여호와라고 하다가 현재는 야훼라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하나님 이름을
입으로 감히 발음 못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그 발음을 잊어 버렸기 때문이다. 여호와나 야훼나
문자 상으로는 똑같다. 로마자로 표기하면 둘 다 `YHWH`이다. 사실 음운 현상에서 모음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많이 변하지만 자음은 거의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런 대로 사람들은 이런 문자를
큰 불편함 없이 쓸 수 있었다. 대신에 그 발음을 정확히 하려면 굉장한 교육을 받아야 했다.
보통 머리로는 거의 불가능했다.
모음을 발명하고 또 글자 모양도 더욱 간단하고 아름답게 만든 인종이 바로 저 유명한 그리스인이다.
이들 때문에 비로소 문자가 소리나는 대로 기록할 수 있었고 보통 사람도 누구나 약간의 교육을
받으면 바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인류 역사상 이건 정말 획기적인 일이었다. 말은 어차피 누구나
아는 일이고 이제 이를 약간의 노력을 기울이면 쓸 수 있고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문자 익히는 데 허비하는 시간 대신 생각하는 시간에 투자함으로써 인류의 지식과 지혜가
폭발적으로 늘어 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남한 정도 되는 그리스가 그 후 얼마나
찬란한 문화를 꽃 피웠는지는 삼척 동자도 아는 일이다. 그 원동력은 바로 자음에 이은
모음의 발명이었다.
이것은 후에 아라비아 문자가 발명됨으로써 수학적 지식에 날개를 달아 주었던 것과 유사한
엄청난 일이었다. 여담이지만, 그리스에서 나온 영어 단어 rational(합리적인)은 원래 구구단을
욀 수 있는 천재적인 머리를 가진 사람이란 뜻이다. 그만큼 문자로 기록한 구구단은 머리가
아플 정도로 외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라비아 숫자로 기록해 버리면 천치 아닌 한
누구나 몇 대 회초리만 맞으면 초등학교 2학년이라도 외울 수 있다.
그리스인은 이 모음을 발명한 게 너무도 자랑스러웠다. 그래서 알파벳의 제일 첫 자와 끝 자를
모음으로 장식했다. 그게 바로 알파(A)와 오메가(Ω)이다. 각각 `ㅏ`, ` ㅗ` 발음이다. 알파벳이란
말도 첫 두 자, 곧 모음 하나와 자음 하나를 일컫는다. 로마자로 말하면 에이비(AB)나 마찬가지이다.
알파베타(Alphabeta)라고 하던 것을 나중에 영어에서 알파벳(Alphabet)이라고 한 것이다.
표음 문자는 크게 셋으로 구분되는데, 페니키아문자 같은 자음만으로 된 것, 일본의 가나와 같은
자음과 모음을 함께 발음하는 음절 문자, 로마자나 한글 같이 자음과 모음으로 나누어 있는
알파벳(음소 문자)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음소 문자가 가장 발달한 것임을 두말할 필요 없다.
만약 음절 문자로 표현하게 되면 우리 나라같이 음이 다양한 말은 최소한 3천 자가 필요하다.
이렇게 완벽하지는 않지만 사람의 소리를 자음과 모음으로 구별하여 적는 데,
인류는 무려 3천년이 걸렸던 것이다. 그런데 세종대왕은 세종 즉위 후 바로 시작했다고
해도 불과 25년만에 그리스 문자를 압도하는 완벽한 문자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 건 세종대왕 혼자가 아니라 집현전 학사 모두가 오로지 이 일에만 매달렸다고 해도
경천동지할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인의 창의력이 세계에 우뚝 서는 순간이었다.
한글 창제는 요새 식으로 계량화하면 노벨상 100개에 해당하는 위대한 업적이라고 본다.
한글의 위대성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몇 개만 더 들자. 둘째, 소리와 발음 기관의 완벽한
연관성이다. 로마자는 소리와 문자는 전혀 별개이다. 그냥 약속일 뿐이다. 이집트에서 예를 들면
`소`할 때 `ㅅ` 소리가 나니까 `소`를 그려 놓고 이를 `ㅅ`이라고 하자라는 식이었다. 이것이 말이
다른 페니키아, 그리스로, 로마로 가면 아무 의미가 없다. 그냥 약속일 뿐이다.
그런데 1940년 영주 풍기의 희방사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됨으로써 한글은 발음 기관을
본떠서 만들었다는 것이 비로소 밝혀졌다. 이것은 세계 언어학자들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서양에서 음성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겨우 [d, t], [b, p], [s, z], [v, f], [g, k] 등을 짝지어
유성음 무성음을 구별해 놓고 득의만면하고 있었는데, 15세기초에 벌써 이런 것을 완벽하게
알아냈을 뿐만 아니라, [g, k]를 혀가 입 천장에 닿는 모양을 본떠서 아예 글자 모양과 비슷하게
[ㄱ, ㅋ] 더 나아가 된소리까지 표현하여 [ㄱ, ㅋ, ㄲ]까지 만들었던 것이다. [ㅋ, ㅌ, ㅍ, ㅎ]에서
보듯이 기본자 [ㄱ, ㄷ, ㅁ, ㅇ]에서 격음일 경우에 힘이 더 드는 걸 감안하여 줄을 한 두 개 더
그었던 것이다.이 원리를 응용하여 한글을 가르치면(이런 교재가 빨리 나오기 바란다.
마음만 먹으면 아주 간단히 만들 수 있다. 일주일 이내에 만들 수 있다고 본다.)
한글은 정말 배우기 쉽다. 어린이뿐만 아니라 머리가 굳어질 대로 굳어진 어떤 외국인에게도
금방 가르칠 수 있다. 사람은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에다가 새로운 것을 연관시키면 아주
쉽게 배우고 잊어 버리지도 않기 때문이다.
모음은 더욱 경이롭다. 천지인과 발음 기관을 같이 본떴다. 하늘은 둥그니까 간단히 아래 아 [·],
땅은 평평하니까 [ㅡ], 사람은 서 있으니까, [ㅣ], 세상에 이보다 더 간단할 수가 없다. 실지로
발음을 해 보면 전세계의 모든 발음이 [·]할 때는 입이 둥글게 크게 벌어진다. [ㅡ]는 입이 옆으로
벌어지면서 혀가 평평해진다. [ㅣ]는 혀가 앞으로 내밀어지면서 세워진다.
여기서 각각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등이 나오는데, 물론 처음에는 [ㅣ, ㅡ]에 앞 뒤
또는 위 아래에 `아래 아`자를 덧보탠 것이었다. 이것도 경이로운 것이 세계 모든 발음이 [ㅏ]
발음을 할 때는 반드시 숨을 내쉬게 되어 있고, [ㅓ]할 때는 숨을 들이쉬게 되어 있다. 그래서 각각
밖과 안에 `점`을 찍은 것이다. [ㅗ, ㅜ]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나는데, [ㅗ]는 반드시 아래로
내리쉬고, [ㅜ]는 아래에서 위로 치받치게 되어 있다.
놀라운 일은 하나 더 있다. 한글은 누가 보아도 자음과 모음을 구별할 수 있다. 왜? 모음은 반드시
가운데, 또는 오른쪽에 있기 때문이다. 로마자는 풀어쓰기 때문에 척 보고 자음과 모음을 구별할
수가 없다. 한글은 소리나는 단위가 음절로 되어 있다는 것을 그대로 활용하여 한 자 한 자에
자모를 붙여 놓아 소리 단위를 금방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로마자는 어지간한 전문가가 아니면 음절 구분을 못한다. 한글은 바보라도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바꿔 말하면 한글을 아는 사람은 바보라도 로마자 아는 천재와 같은 급이 된다는
말이다. 음소 문자이면서 음절 문자의 장점을 그대로 갖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컴퓨터가 나오면서 다시 위력을 떨친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아직 한글에서 뒤지는 이유는
이것은 컴퓨터가 나오면서 다시 위력을 떨친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아직 한글에서 뒤지는 이유는
바로 한글의 24자가 하나의 디지털로서 무한한 조합을 가능케 한다는 것을 간과하고 완성형을
택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찬진의 한글은 조합형을 택했던 것이다. 역시 똑똑한 조상 덕에
간단히 미국의 천재를 바보로 만든 것이다.
한국 정부가 완성형을 표준으로 삼은 일은 정말 개탄스런 일이다. 디지털이란 것도 기껏해야
[0]과 [1]이라는 두 문자를 이용한 이진법을 무한히 연결하는 것인데, 한글은 그 자체가 무한히
응용할 수 있는 24개의 디지털 기호이다. 지금은 겨우 워드 프로세서에 응용하는 정도이지만,
이를 잘 응용하면 엄청나게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있다고 본다.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세계를 휘어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한글이 이렇게 자음과 모음을 확실히 구별하면서도 음절 단위로 쓰게 됨으로써 정보화 시대에
또 하나의 경이적인 장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공병우식 자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원리는
바로 과학적인 한글의 장점을 그대로 이용한 것이다. 현재 널리 보급된 것과는 달리 왼손은
초성을 치고 오른손은 중성과 종성을 동시에 치는 원리이다. 한 글자를 한 번에 치는 방식이다.
그러면 아무리 손가락이 굳은 사람도 1분에 쉽게 3백 타 이상을 친다. 무려 1분에 1300타,
1400타까지 가능하다. 말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 쓸 수 있다.
속 기사는 전부 공병우식을 쓰고 있다. 속도가 생명인 정보화 시대에 이것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이것도 어리석은 위정자 때문에 공병우씨가 그렇게 평생을 애썼는데도 일반에게
보급되지 않았다. 2년 전인가 삼성에서 공병우식 자판을 만든다고 했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현재 방식으로는 아무리 빨라야 7백 타, 8백 타가 한계이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세종대왕은
한국의 바보도 외국의 천재와 비슷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는데, 서양 바보들에게 배워서 도리어
바보가 된 위정자가 서양 흉내내느라고 우리 좋은 것을 다 버렸으니 말이다.
한글의 위대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또 있다. 그것은 바로 표음 문자이면서 표의 문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글 전용을 해도 크게 불편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한글의 이 장점 때문이다.
그 이유는 한글은 음절 단위로 쓰기 때문에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음절 문자의 장점을 가질 뿐만
아니라, 어원을 밝혀 적을 수 있어서 표의 문자 구실도 제법 훌륭히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순수한 우리말과 한자말로 구별해서 설명하기로 하자.
우리말 -- 훈민정음 해례에서 종성부용초성법을 택해서 가능한 일이었는데, 조선 중기의
8종성법에서 한글학회에서 이를 다시 살린 건 정말 잘한 일이다. 예를 들어 보자. `나뭇잎`-이것을
소리나는 대로 `나문닙`이라고 적는다고 해 보자. 그러면 도대체 말로 할 때와는 달리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어원을 밝혀 `나무`에다가 관형격 조사 `의`에 해당하는 사이시옷 `ㅅ` 거기다가
주둥아리 입이 아니라 받침에 `ㅍ`을 써서 `잎`이라고 함으로써 척 보면 이것이 나무에 달린
잎이구나라고 알게 된다. 어원을 밝히기는 매우 어려운 일인데, 한글을 배우면 웬만한 것은
초등학생도 다 안다.
`이것을`-이것을 소리나는 대로 `이거슬`로 적는다고 해 보자.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이것을`은 `이것`과 `을`을 합한 것임을 아주 간단히 나타낸다. 뜻이 금방 머리가 들어오게 되어
있다. `있다`-이것을 `이따`라고 적는다고 해 보자. 이것도 마찬가지의 현상이 일어난다. 한글의
이런 장점은 뜻글자인 한자도 도저히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음성을 나타내되, 시각적인 효과로
뜻글자 구실도 훌륭히 해 내는 것이다.
한자말 -- 이것도 아주 잘 나타낸다. `천리만리`-이것을 `철리말리`라고 쓴다고 해 보자.
그러면 말할 때와는 달리 도대체 무슨 뜻인지 헤아리기가 머리가 아주 비상한 사람 외에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천리만리`라고 쓰면 초등학생도 `천 명, 만 명`, `천 개 만 개`
`천 원 만 원`의 `천, 만`이란 걸 알 수 있다. 선생님은 이런 걸 좀 가르쳐 주어야 한다.
한자까지 가르쳐 주면 더 좋지만, 그에 앞서 바보 학생도 알아들을 수 있게 이런 걸 가르쳐
주면 설령 한자를 모른다고 해도 말뜻을 아주 정확히 알 수 있게 되고 바보 학생도 천재가 되어
새로운 말을 척척 만들어낼 수 있다.대신 천재, 천사, 천국, 천치, 천성 등의 `천`은 `하늘,
타고난`의 뜻이 있다는 것도 꼭 알려 주어야 한다.
물론 한자를 곁들이면 더욱 좋고. 그러나 이를 꼭 한자를 병기해서 쓸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 정도만 가르쳐 주면 아주 정확한 언어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머리가
어느 정도 되는 학생들은 한자를, 한문을 꼭 가르쳐서 조상들이 한문으로 남긴 엄청난
정신적 유산을 계승하여 찬란한 문화를 꽃 피울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한글은 바보를
보통 사람으로 보통 사람을 천재로 만드는 경이의 문자이다. 한글의 장점은 연구하면
할수록 계속 쏟아져 나올 게 틀림없다. 널리 알려진 것은 이 글에서 생략하기로 한다.
마지막으로 한글은 누가 만들었을까.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나는 세종대왕이라고 본다.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이런 경이적인 창작품은 절대 여러 머리에서 나오지 않는다.
천재의 머리에서 나온다. 만유인력의 법칙이 위대하다고 수천 명의 머리를 합해서 나온 게
아니다. 상대성 원리가 신의 영역을 건드린 발견이라고 해서 일류 과학자 만 명의 머리를
합해서 나온 게 아니다. 고독하게 한 천재가 각각 발견한 것이다. 이런 것은 사람이
많을수록 오히려 방해가 된다.
둘째, 세종대왕은 두 가지만 스스로 했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훈민정음 창제와
작곡이다. 나머지는 누가 했는지, 그 본인의 이름이 거의 다 밝혀져 있다. 만약 세종대왕이
왕의 신분을 이용해서 자기 공으로 만들 생각이 있었다면, 이런 것도 대부분 `어제(御製)`란 말을
붙였을 것이다. 세종실록에 보면 매우 겸손했던 세종대왕이 음운학에 대해서만은 자부심이 대단했다.
말도 아주 직설적이었다. "너희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과 칠음에 자모가 몇 개 있느냐?
만약에 내가 운서를 바로잡지 않으면 누가 바로잡겠느냐?" "너희가 (이두를 정리한) 설총만
옳게 여기고 임금의 일은 그르게 여기니 어찌된 일이냐?"
셋째, 당시 학자들은 오로지 유학이었다. 집현전이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요새 식으로
말하면 이런 따위의 음성학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연구하는 걸 수치로 여겼다.
그런 상황에서 설령 연구에 일부 참여했다고 해도 창의력을 마음껏 발휘했을 리가 없다.
더군다나 한문 숭배가 종교의 수준까지 이르렀던 때이다. 실지로 신숙주, 성삼문이 만주로
음운학자 황찬을 만나러 가는 것은 한글 창제 이후의 일이다. 이들은 완벽을 기하려는
세종대왕의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황찬에게는 무슨 훈민정음에 대해 자문을 구하려는 게 아니었고 동국정운을 정확히
만들기 위해 중국 음운에 대해 물어봤던 것이다. 세종대왕은 왕자들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훈민정음을 거의 혼자 발명하신 듯하다. 설령 직접 창제하지 않으셨다고 해도 관계없다.
그분이 아니었으면 훈민정음은, 한글은 결코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니까.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뺀 것도 못난 위정자들 탓이라고 본다. 모든 공휴일을 다 폐지해도
한글날은 공휴일로 지정해야 할 것이다. 바보를 보통 사람으로 만들고 보통 사람을 천재로
만들어 주는 한글을 기리는 날을 공휴일로 안하고 도대체 무엇을 공휴일로 한단 말인가.
열심히만 일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한글 창제하는 것처럼 창의적으로 머리를 쓰면 열흘 놀고
하루 일해도 능히 선진국을 앞설 수 있는 법이다.
한자(漢字)는 원래 우리글[韓字]이다
언어는 사람들의 사상과 감정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다. 아마도 태초에 먼저 말이 있었고,
한자(漢字)는 원래 우리글[韓字]이다
언어는 사람들의 사상과 감정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다. 아마도 태초에 먼저 말이 있었고,
이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 문자가 발생했을 것이다.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는
말이 있다. 아이들이 말과 글을 배워가는 과정을 보면, 인류 역사에 문자가 발생하고
진화해온 과정을 상상해볼 수도 있겠다. 추측컨대, 문자는 아마도 먼저 그림문자의 단계를
거쳐 점차 추상화되고 소리의 변화와 결합하는 가운데 글자로서 완성되었을 것이다.
우리 민족에게는 본래 음양일체로 두 개의 문자가 있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한글만이 우리의 글이며, 한자(漢字)는 중국의 글이라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표의문자인 한자(漢字)는 원래 한자(韓字)이며, 표음문자인 정음(正音)과 더불어,
우리 민족의 두개의 문자 가운데 하나였다. 하루는 상제님께서 옥편(玉篇)을 불사르며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는 문자만으로도 능히 모든 사물을 기록할지니 앞으로는 쉽고
간단한 문자로 천하에 통용되도록 하리라.”하시고 “장차 우리나라 말과 글을 세계 사람이
배워 가리라.”하시니라. (道典 5:11)
한자에 담긴 우리 역사
한자(漢字)란 한(漢)나라의 글자라는 뜻이다. 이는 한나라 때에 이르러 해서라는 모양으로
한자에 담긴 우리 역사
한자(漢字)란 한(漢)나라의 글자라는 뜻이다. 이는 한나라 때에 이르러 해서라는 모양으로
완성된 글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한자는 한족이 처음 만든 문자는 아니다.
한자의 원형은 우리 동방족(동이족東夷族)이 창제한 것이다. 한자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큰 틀에서 볼 때, 한자는 처음에 그림문자에서 출발하였을 것이다. 한자의 기원을 흔히
갑골문에서 찾는다. 갑골문이란 거북이나 소의 뼈에 새겨진 문자를 통칭하여 이르는 말로,
정사를 판단하기 위해 점을 칠 때 사용한 것이라 한다. 중국의 고대 은 왕조(BC 1600~BC 1122,
상商나라)의 도성이었던 유적지 은허에서 다량 출토되어 은허문자라고도 불렀다. 그런데
고고학적 발굴 결과 이 갑골문이 처음 출현한 곳은 서요하 상류로 확인되었다.
이는 지금으로부터 5,500년 전의 것으로서, 이곳이 동방족의 주요 활동무대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갑골 점복은 처음에는 소 어깨뼈나 발굽뼈로 했으나 은나라 때부터는 거북 등뼈도 사용하였다.
이때 문자를 새기기 시작했다. 오늘날 많은 역사학자들은 은나라는 동이족이 세운 나라라는 자료를
제시한다. 나아가 갑골문 속에는 우리 민족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좬삼일신고좭 좬참전계경좭 좬천부경좭은 우리 삼성조 시대의 신교문화를 전해준 3대
경전에 속한다. 그런데 이 천부경이 갑골로 쓰여진 것이 발견되었다. 더구나 고려말 충신의
유품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농은 민안부는 고려말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
도은 이숭인, 수은 김충한과 더불어 6은으로 불린 충신으로서, 조선을 연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두문동(杜門同)에 은거한 72현 중의 한 사람이었다(도전 두문동 성수공사 5:328~9, 11:389
참조). 또 좬환단고기좭 좧태백일사좩에는 목은 이색 등이 천부경을 주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농은 민안부는 목은의 친구였으며 따라서 천부경을 이해하고 공유한 사람이었으리라고 짐작된다.
갑골문의 모사본으로 알려진 이 천부경 글자는 지금까지 발견된 갑골문에는 없는 글자들이
포함되어 있으니, 따라서 해독이 불가능한 글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은허에서 발견된
갑골문보다 더 오래된 것이 아니냐는 진단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한자의 뿌리는 배달국 태고문자
그런데 은나라가 갑골문을 사용하고 있을 때, 단군조선에서는 전문(篆文)이라 하여
한자의 뿌리는 배달국 태고문자
그런데 은나라가 갑골문을 사용하고 있을 때, 단군조선에서는 전문(篆文)이라 하여
약칭 단전(檀篆)이라고 불리는 문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문자들이 당시 사용된 토기에서
속속 발견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자들이 최초에 창조된 것은 언제일까?
지금까지 동북아지역에서 갑골문뿐만 아니라 수많은 고대 금문(金文: 고대 청동기, 토기,
갑골에 새겨진 원시 한자와 각화문을 통칭하여 일컫는 말)이 발견되었으며 여기에는 우리
민족의 역사적, 문화적 자취가 여실히 드러나 있다. 갑골문이 은나라 때에 국한된 것이라면,
그림문자로 출발한 금문은 어쩌면 전자(篆字)에 비견되는, 전서(篆書)의 원형이었으리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최초의 금문연구서인 『금문신고(金文新攷)』(낙빈기, 산서인민출판사,
1987년)의 저자인 낙빈기(駱賓基)는 금문의 해석을 통해 신농과 황제 등 삼황오제시대를
역사적으로 증명하였으며, 더욱이 이것이 동이족의 역사와 문화였음을 고증하였다.
이런 충격적인 내용 때문에 중국내에서는 금서(禁書)로 분류돼 왔었다. 기록에 전하는 중국
고대문자의 시조는 5500년 전 동이족 태호 복희씨라는 설과 4700년 전 창힐이라는 설이 남아있다.
역(易)철학의 시조인 태호 복희씨는 배달국 제5대 환웅천왕의 막내아들이다.
복희씨는 중원으로 이주하여 동아시아문명을 실질적으로 개벽한 문명의 개조이며 한자의
뿌리가 되는 육서(六書)의 원리를 만들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역사기록 의하면 그는
용봉(龍鳳)을 토템으로 하여 관명을 지었다고 하며 새로 만든 문자를 용서(龍書)라고 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후대 황제 헌원 때 ‘창힐’이라는 인물이 새 발자국 모양을 따서 조적서(鳥跡書)를
만들었는다고 하며, 현재 그의 고향 섬서성 백수현 사관촌에 그 비석이 남아있다.
즉 복희씨의 용서와 창힐의 조적서 등이 후대에 갑골문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리고
춘추전국시대 이후 진(秦)시황(BC221~210)이 중국대륙을 통일하면서 문자를 통일하고,
이를 고대문자와 구분하여 소전(小篆)이라 칭했으며(앞에 밝을 명明자 참조),
다시 한대(BC140~ )에 이르러 한자(漢字,예서)로 굳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최초의 한자연구서이자 사전격인 고전 『설문해자(說文解字)』(BC100, 9353자)가
정리되어 나온다. 그러면 복희, 창힐시대에 동방 배달에는 어떤 문자가 사용된 것일까?
배달국 문자를 만든 인물은 초대 환웅천황 때 신지(神誌) 혁덕으로 전해온다. 그는 사슴발자국을
보고 처음 문자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 녹도글자가 경남 남해군 양하리 금산 중턱바위에 있다.
환단고기 대변설에 이르기를, “남해현 낭하리에 계곡 바위 위에 신시의 고각(古刻)이 있다.
그 글에 환웅천황께서 사냥 나왔다가 제를 삼신께 드린다고 했다”고 전한다.
이것이 후대에 더 세련된 모습으로 발전된 바, 이것이 1942년에 <영변>지와 구한말
백두용(白斗鏞) 편, 『해동역대명가필보(海東歷代名家筆譜)』에 실린 신지 전자(篆字)다.
배달국에서 만들어져 고조선시대까지 사용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창성조적서비(鳥跡書碑)의
창힐문자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좬환단고기좭 좥삼성기좦에 의하면 창힐은 배달국 제14대
치우천황 때 문물을 배워갔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갑골문과 금문에 널리 전해오는
전자(篆字)는 기실 배달국의 녹도문이 전해져 여러 가지로 수정, 변형되어온 것으로 확인되는
것이다. 한자의 변천과정을 보면, 우리 것이 먼저고 우리가 중국을 가르친 스승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아사아문명의 뿌리가 한민족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아직도 모든 문물이
중국으로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처럼 가르치는 교육의 현장을 다시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출처: http://cafe.daum.net/illuw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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