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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48) 나라를 통째로 개혁하자던 실학자 정약용 下

회기로 2010. 1. 24. 19:11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48) 나라를 통째로 개혁하자던 실학자 정약용 下

ㆍ선각자의 혜안으로 역사와 백성을 보듬다

다산학의 산실 다산초당


유교의 창시자는 공자였다. 뒤이어 맹자가 태어나 공자의 인(仁)에 대한 사상을 계승하고 더 확대하여 의(義)를 첨가하여 유교의 중심사상으로 확립했으니, 바로 인의(仁義)의 세계가 경(經)으로 집약되었다. 대표적인 경은 공맹의 철학으로 사서육경(四書六經)에 수렴되었다. 진(秦)나라 때에 분서갱유라는 전대미문의 재앙을 만나 경은 대부분 일실되었으나, 한(漢)나라 때에 대부분 복원되고 새로운 주석으로 경의 의미가 새롭게 해석되었으니, 본격적인 경의 연구인 경학(經學)이 학문의 맨 윗자리를 점하게 되었다. 때문에 한문(漢文)·한자(漢字)·한학(漢學) 등으로 한나라 때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는 일에 인색할 수가 없었다.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귤동마을에 있는 다산초당. 이곳에서 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

           등의 저서가 이룩되고 다산학이 완성되었다. <사진작가 황헌만>


그러나 한나라 때의 경전해석학은 당나라에 이르러 매우 쇠퇴하여 불교의 연구를 따라갈 수 없었으나, 송나라에 이르러 정자(程子)나 주자(朱子)의 등장으로 유교의 부흥기를 맞게 된다. 정자의 철학을 계승하여 더 확대심화시킨 주자의 공이 너무 컸기 때문에 주자학(朱子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새롭게 성리학(性理學)적 논리로 해석한 유학이 한 때 동양사회를 지배하는 논리로 자리잡아 고려말엽에 한반도에 상륙하였다. 조선은 바로 주자학, 즉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정하고 국교(國敎)에 버금가는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정약용이 유배지 강진의 다산초당에서 사서육경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여 주자학과 병칭될 수 있는 ‘다산학’을 수립해내기 이전의 조선 사회는 주자학을 교조적으로 신봉하고 절대시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18년의 귀양살이에서 유배 초기 강지읍내의 사의재(四宜齋)라는 주막집 방에서 연구하고 강진읍내의 뒷산에 있던 고성사에서도 연구는 계속했지만,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귤동마을의 뒷산인 다산에 있던 윤씨들의 서재인 ‘다산초당’에서 다산학이 완성되었음도 부인할 수 없다. 관념적이고 사변적이며, 행위와 실천보다는 이론 위주의 학문인 성리학에서 관념과 사변적인 것보다는 실용적이며 실천적인 다산학을 연구했음은 조선 500년 온갖 학문 중의 금자탑이었다. 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 등 경세학이 이룩되고 경학인 다산학이 수립된 다산초당이야말로 다산학의 산실임에 분명하다. ‘다산초당’은 생가인 ‘여유당’과 함께 조선 학문의 금자탑인 다산학의 양대 보금자리였다.

다산초당을 둘러보자. 소유권도 연고권도 전혀 없는 남의 산정(山亭), 다산은 그 산정을 자신이 소유주인 양 경관을 참으로 아름답게 꾸몄다. 물을 끌어다가 비류폭포인 인공폭포도 만들고, 그 물이 고이는 곳에 연못을 파서 경치를 아름답게 단장했다. 흐르는 물을 받아 산자락에 계단밭을 일구어 미나리를 가꾸며 용돈도 벌고 반찬감도 장만했다. 바위 절벽에 ‘정석(丁石)’ 두 글자를 새겨 징표로 삼았고, 약천·다조 등 아름다움의 최상을 만들어 선비의 연구처로 삼았다. 귤동마을에는 가을이면 노랗게 유자가 익어가고, 마을 앞까지 밀려오던 구강포의 바닷물은 빠져나가면서 다산의 시름을 덜어주기도 하였다. 초당의 뒤 오솔길을 따라 걸으면 학승 혜장선사가 거처하던 백련사 절이 있어 답답한 가슴을 식히기에 넉넉하였다.

백성의 참 힘을 발견하다

강진 유배살이는 다산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시골의 무지렁이 백성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힘없고 가난한 백성들이 당하던 압제와 핍박의 생생한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른바 다산의 사회시 및 참여시라는 그 많은 시들은 그 속에 핍박받는 인민들을 해방시키자는 깊은 철학이 담겨 있었다. 그가 황해도 곡산도호부사 시절에 직접 판결했던 이계심(李啓心) 사건(시위 주도자를 무죄석방한 재판)이 머리 속에 담겨 있어, 백성들을 등에 업고 투쟁하면 이기지 못할 싸움이 없다고 주장했던 생각이나, ‘목위민유(牧爲民有·통치자는 백성을 위하는 일을 할 때만 존재이유가 있다’(<원목>)라고 선언한 그의 사상은 역시 백성들의 힘을 가장 구체적으로 발견해낸 선각자의 철학이었다. 19세기 후반의 농민전쟁이나 민란 및 민중봉기로 타오르던 횃불은 그런 역사적 평가에서 연유했다는 고찰도 필요하리라고 생각해본다.

다산은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강진읍내의 사의재에서 낮은 신분의 제자를 가르쳤다면 다산초당에서는 양반신분의 자제 18명을 가르쳐내, 이른바 ‘다산학단’이라는 학파를 형성해냈다. 쟁쟁한 제자들이 다산의 학문을 계승하여 망해가던 나라에 온갖 방법으로 복무(服務)했던 점은 또 다른 다산의 공로였다. 근래에 <다산학단문헌집성>이라는 자료가 책으로 간행되어, 이제야 본격적으로 다산이 조선후기 사회에 미친 학문적 영향도 제대로 밝혀질 기회가 오게 되었다.

조선 사람들은 조선시를 짓자

임진왜란 이후로 조선 사람들의 대부분은 일본을 ‘왜’라고 얕잡아보았고,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는 야만국이자 ‘뙤놈’의 나라라고 백안시하였다. 그러면서 조선인들은 한·당·송·명의 중국은 한없이 우월시하면서 시를 지어도 중국시, 글을 지어도 중국글을 지어야만 참다운 시이자 글이라고 고집하고 살았었다. 역사책을 읽어도 중국의 <사기>·<한서>·<송사> 등에 매달리면서 <삼국사기>·<삼국유사>·<고려사> 등은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자기 자신이나 자기 나라의 역사나 문학의 전통은 아예 백안시하고, 그저 미국이나 서양 학문과 사상에만 매력을 느끼는 현대인들과 어쩌면 그렇게도 닮았을 것인가. 중국의 모든 역사와 학문을 섭렵하였고 조선의 역사와 학문을 제대로 연구한 다산은 그렇던 당시의 지식인들 태도에 한없이 분노하면서, “나는 조선사람, 즐거이 조선시를 짓겠노라”(我是朝鮮人 甘作朝鮮詩)는 혁명적 선언을 감행하였다. 역사적 사실을 인용하여도 우리의 역사적 사실, 글을 지어도 우리식 글을 짓자는 그의 주장은 바로 오늘 우리나라 지식인들에게 고하는 주장이 아닐는지.

다산은 아들에게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에, “수십년 이래로 한 가지 괴이한 논의가 있어 우리 문학을 매우 배척하고 있다. 여러 가지 우리의 옛 문헌이나 문집에는 눈도 주지 않으려 하니 이거야말로 큰 병통이다. 사대부집안 자제들이 우리나라 옛일들을 알지 못하고 선배들이 의논했던 것을 읽지 않는다면 비록 그 학문이 고금을 꿰뚫고 있다 해도 엉터리일 뿐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의 역사책이나 옛날의 어진 이들의 문집이나 저서들을 탐독하도록 권장하였다. 겸하여 우리나라의 역사적 내용만으로 시를 지은 유득공(柳得恭)의 시가 중국에서 간행되었고 중국인들이 즐겨 읽는다는 것까지 첨부하였다.

‘가장 한국적인 것만이 가장 세계적이다’, ‘가장 조선적인 것만이 가장 보편적이다’라는 멋진 뜻을 다산은 익히 인식하고 있었으니 그의 혜안은 역시 높기만 했다. 내 나라, 내 민족, 우리 정서에는 눈을 감고, 세계화라는 잘못된 인식으로 밖으로 외국으로만 향하는 지식인들은 이점에서 한번쯤 다산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다산의 유적지를 다니면서

황해도 북쪽에 위치한 곡산(谷山)땅, 36세 때부터 2년 가까이 다산이 목민관으로 지낸 곳이다. 참으로 <목민심서>의 내용대로 청렴하고 정직하게 백성을 위해서만 선정을 베풀었던 곳이다. 지금은 갈 수 없는 북녘 땅이다. 경상북도 포항시 장기면 마현리는 1801년 2월부터 10월까지 다산이 귀양 살았던 쓰라린 곳이다. 18년 유배살이의 시리디 시린 강진은 다산학의 산실이다. 그가 나고 자랐으며 학문을 마무리하고 세상을 떠나 지금까지 묻혀있는 마현은 고향이자 영원한 안식처다. 17~18세의 젊은 시절, 사또 자제로 형제들과 함께 지냈고, 그곳의 학자나 학승들과 어울려 지냈던 전남 화순군 화순읍은 그의 이상과 꿈이 키워졌던 낙토였다. 천주교에 관계했다고 정치적 반대파들의 드센 공격 때문에 귀양살이처럼 턱없이 좌천되어 생활했던 충청남도 청양군의 금정도찰방으로 지냈던 유적지는 흔적도 없어졌다.

실학자, 사상가의 위상에서 더 높은 현자의 대접을 받아야 할 다산 정약용, 그가 남긴 저서도 귀중하게 여기며 간행하고 번역해야 하지만, 그의 유적지도 그냥 버려져서는 안 된다. 다산을 가장 깊이 연구하여 가장 정확하게 다산학을 재발견한 위당 정인보는 “다산선생 한 분에 대한 고구(考究), 곧 조선역사의 연구, 조선근세사상의 연구요 조선심혼(朝鮮心魂)의 밝혀지고 가리워졌음과 전체 조선의 성쇠존멸(盛衰存滅)에 대한 연구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조금도 과장이나 잘못 판단한 내용이 아니다. 그보다 더 많은 저술을 남겼고, 그보다 더 높은 수준의 학문적 대업을 이룩한 분이 또 누가 있는가.

때문에 필자는 40년에 이르도록 다산학에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다산이 그처럼 부패하고 부란(腐爛)한 조선사회의 개혁과 변화를 요구했듯이, 오늘의 우리 사회도 너무나 도덕성은 해이되었고 부패는 만연해있다. 세상이 썩고 부란해질수록 다산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해야 공직자들의 최고 덕목으로 다산이 그렇게도 강조했던 청렴정신을 회복할 수 있을까. 다산이 그처럼 강조했던 법과 제도의 개혁으로 정의로운 사람들이 대접받고 수사와 재판에서 억울한 사람이 없는 세상이 올 것인가. 내 나라, 내 민족, 내 역사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나와 우리를 제대로 알고 살아가는 세상이 올 것인가. 다산이 들었던 횃불을 다시 잡아 백성들이 주인이고, 민중들이 역사의 주체인 세상을 만들어야 하지 않는가. 그래서 다산의 유적지는 길이 보전되어야 하리라.

<박석무 | 한국고전번역원 원장, 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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