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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종가기행 ⑤] 慕堂 洪履祥 - 40여 년간 `청요직` 두루 거친 정통 관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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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2. 28. 21:05
[종가기행 ⑤] 慕堂 洪履祥 - 40여 년간 '청요직' 두루 거친 정통 관료 | |||||
[주간한국 2006-05-17 11:51] | |||||
1549년(명종4)-1615년(광해군7) 자는 君瑞 호는 慕堂, 시호는 文敬 조선 명종 4년(1549) 홍유(洪脩, 이름 글는 본가에서 술잔 유자로 읽고 있다)의 아들로 태어난 모당은 고양팔현(高陽八賢)-추강 남효온(1454-1492), 사재 김정국(1485-1541), 복재 기준(1492-1521), 추만 정지운(1501-1561), 행촌 민순(1519-1591), 모당 홍이상, 석탄 이신의(1551-1627), 만회 이유겸(1586-1663)- 의 한 사람인 행촌(杏村) 민순(悶純)의 제자다. 민순은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제자이며 대곡(大谷) 성운(成運),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과 함께 당시의 명유(名儒)로 추앙되었던 이다. 모당은 진사시를 거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1579년)했다. 그의 아우도 문과에 급제했으며 네 아들과 두 사위도 그랬다. 그는 정언, 수찬 직 등을 거쳐 문신으로서 더욱 자긍심을 갖게 했던 사가독서(賜暇讀書·유능한 젊은 문신들을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공부하게 하던 일)의 영예도 누렸다. 이 때 일송 심희수, 백사 이항복, 한음 이덕형이 함께 참여했다. 또한 이조좌랑과 정랑을 거쳐 경서를 교정하는 작업에도 참여했다. 이때는 모당이 36세가 되었을 무렵으로 그의 학문과 사람됨을 알아본 율곡 이이의 추천이 있었다고 한다. 1591년에는 직제학을 거쳐 동부승지가 되고 이조참의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예조참의로 옮겨 선조를 호가(扈駕·임금이 탄 수레를 모시고 따라감)하여 서행하였고 평양에 이르러 부제학이 되었다. 1593년 정주에서 대사간이, 이듬해에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좌승지에 이어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왜장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가토 기요마사(加淸正)의 이간을 계획해 추진하기도 했다. 1596년 형조참판을 거쳐 대사성이 되었으나 영남 유생에 대응해 성리학의 대가 우계(牛溪) 성혼(成渾)을 두둔하다 안동부사로 좌천되었다. 1607년 청주목사가 되고 1609년 대사헌과 부제학, 1612년에는 이이첨과 정인홍 일파에게 밀려 개성유수로 좌천되었다. 병으로 사임한 뒤 선영이 있는 경기도 고양 고봉산 기슭으로 돌아와 작은 집을 짓고 은거하다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모당이 벼슬했던 당시를 이해하기 위해 광해군 1년 때의 조정의 주요 관료를 볼 필요가 있다. 영중추부사로 한음 이덕형, 영의정에 오리 이원익, 좌의정에 백사 이항복, 우의정에 일송 심희수, 병조판서에 월사 이정구, 공조판서에 추포 황신, 동부승지에 이이첨이 있을 때 모당은 대사헌 직에 있었다. 참으로 쟁쟁한 인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조선 중기 사대문장가(四大文章家·월사 이정구, 상촌 신흠, 계곡 장유, 택당 이식)로 추앙을 받았던 15년 후배인 월사 이정구와는 인척 간이기도 하다. 모당은 문과에 급제해 40여 년간 관직에 있으면서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친 관료다. 그러나 그에게는 은둔군자의 피가 흘렀다.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는 20세 때부터 문하에서 글을 배웠던 정신적 지주인 행촌 민순이다. 유생들의 공격을 받았던 우계 성혼을 변호하다 불이익을 당한 일도 이러한 학맥 선상에서 이해해야 한다. 슬하에 6남 3녀를 두었다. 조선왕조실록의 홍이상 졸기(卒記)를 보면, 그가 최고의 ‘강관(講官)’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강관이란 경연(經筵)에 입시(入侍·대궐에 들어가 임금을 알현)하여 임금에게 경전을 지도하던 임무를 담당했던 관원이다. 당대를 대표하는 학식과 교수 방법을 지녔던 신하만이
누릴 수 있는 영예다. 그런데 모당은 강관 중에 최고라는 평을 받았으니 그가 학문에도 출중했음을 알 수 있다. 예조판서를 아홉 번이나 지내고 40년간이나 재신(宰臣)의 반열에 있었으며 붓을 잡기만 하면 문장이 되었던 월사 이정구조차 이러한 평을 받지는 못했다고 한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조정에서 부조묘를 내렸다. 충주시 금가면 하담리에 하강서원(荷江書院)에 배향했고 서원 서쪽 강가에 후학들이 그의 덕을 추모해 모현정(慕賢亭)을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담서원 주변은 예로부터 풍광이 빼어나 하담추월(荷潭秋月)은 충주팔경(忠州八景) 중의 하나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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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나의 사랑 한국한문학
글쓴이 : 인간사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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