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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종가기행 ⑪] 西溪 朴世堂 - 조선 후기 대학자… 후생 가르치다 이단으로 몰리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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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2. 28. 21:10
[종가기행 ⑪] 西溪 朴世堂 - 조선 후기 대학자… 후생 가르치다 이단으로 몰리기도 | ||||
[주간한국 2006-07-05 16:18] | ||||
반남 박씨 서계 박세당 1629 (인조7) - 1703 (숙종29) 자 季肯, 호 西溪, 시호 文節 박세당은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문신이다. 고려 시대 학자인 박상충(朴尙衷, 1332-1375)의 10대손이며, 좌참찬 박동선의 손자요 이조참판 박정(朴炡)의 네째아들이다. 의령 남씨 남일성(南一星)의 딸을 배필로 맞아 태유(泰維)와 태보(泰輔), 태한(泰翰) 세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1629년(인조7년) 8월 10일 전라남도 남원부 관아에서 태어난 그는 네 살 때 부친상을 당했다. 소년 시절 고모부인 교관 남사무에게 글을 배운 뒤 처남인 남구만, 처숙부인 남이성(南二星) 등과 경서를 강론했다. 32세에 증광문과를 장원 급제했다. 그의 둘째아들 역시 문과에 장원 급제했으니 이처럼 부자가 겹경사를 한 것은 조선 시대에 드물었다. 그러나 그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21세에 모친상, 22세에 셋째 형 사망, 38세에 부인 사망, 55세에 중형(仲兄)사망, 58세에 장자 사망, 61세에 둘째아들의 사망이 이어졌다. 서계 박세당의 글을 읽다보면 그는 시대를 초월해 정신적으로 폭넓게 사유했던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40의 불혹(不惑) 나이에 말 그대로 세상의 부러움을 떨쳐버리고 자아 성찰의 길로 들어선 인물이기 때문이다. 수락산 석천동은 부친인 금주군(錦洲君)의 유업이 있던 곳이며 먼저 간 아내 의령 남씨가 잠든 곳이다. 채소밭에서 몸소 농사를 지으며 밤이면 삼간초옥에서 성현의 경전을 고증하며 심취했다. 그러나 이러한 학문 태도로 완성한 '사변록' 책은 왕명으로 조목조목 비판 받아 끝내 사문난적이라는 극단적 낙인이 찍혔다. 하지만 실록에 나타난 서계에 대한 인물평은 극단적이다. 숙종26년 8월엔 이조판서직이 내려졌다. 박세당은 벼슬이 낮은 때부터 성밖 교외에 살면서 권력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후생들을 가르치면서 사서를 주석하였다. 그는 주자와 다르게 해석한 것이 많았으니 이를 두고 이단(異端)이라고 말한 자도 있었다. 그러나 서계는 한갓 문사(文士)이지 이단자는 아니다. 삭탈관직되어 유배형에 처해진 그가 이인엽(李寅燁)이 상소하여 풀려나 석천동 정침에서 임종한 것은 그나마 천행이다. 숙종 실록에 박세당과 관련된 글이 115건, 사변록 글이 18건에 달하며, 숙종29년에만 10여 건이 실려 있다. 비난의 포문은 홍계적(洪啓迪:1680-1722)이 유생 108명과 함께 열었다. 이들은 박세당의 글이 성인을 업신여겼으며 정인(正人)을 욕했다고 단정한 뒤, 이경석 비문과 사변록을 거두어 불태움과 동시에 엄중한 벌을 내려달라고 청했다. 이에 대해 국왕의 조치는 신속했다. 즉시 삭탈관직과 함께 문 밖에 내치게 했고 유신(儒臣)들에게 조목조목 따져 잘못을 지적한 글을 올리게 했다. 김창흡 등이 가장 먼저 팔을 걷고 서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박세당의 제자인 수찬 이탄(李坦)과 이인엽(李仁燁) 등이 구명소를 올려 반박했다. 이탄은 후일 서계의 연보를 작성한 사람이며 이인엽은 상소로 서계가 유배에서 풀려날 수 있도록 한 이다. 서계는 1703년 (숙종 29년) 75세로 5월 21일 세상을 떠나 수락산 서편의 장자골에 잠들었다. 아들 박태보의 주선으로 그린 영정을 통해 62세 때의 생전 모습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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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나의 사랑 한국한문학
글쓴이 : 인간사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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