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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종가기행 17] 眞一齋 柳崇祖 - 조선 중기 대표적 유학자… 정암 조광조의 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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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2. 28. 21:14
[종가기행 17] 眞一齋 柳崇祖 - 조선 중기 대표적 유학자… 정암 조광조의 스승 | ||||
[주간한국 2006-09-11 10:12] | ||||
전주 류씨 진일재 류숭조 1452년 (문종2)-1512년 (중종7) 자 종효(宗孝), 호 진일재(眞一齋) 석헌(石軒), 시호는 문목(文穆) 진일재 류숭조는 1452년 전생서령을 지낸 지성(之盛)과 안동 권씨 사이에서 태어나 1472년(성종3)에 진사, 1489년(성종20)에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사유(師儒, 선비들을 지도할 만한 학문과 인격을 갖춘 유학자)에 선임되었다. 장령(掌令)으로 연산군의 실정을 간하다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강원도 원주로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난 뒤 공조참의, 경연참찬관, 대사성, 황해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이중에 특히 성균관 직을 오래 맡았다. 수장인 대사성(大司成, 5년간 재직)을 비롯해 사성, 사예, 직강, 전적, 박사, 학정, 학록, 학유 등 모든 직을 망라했을 정도였다. 그는 성균관의 행정부터 교수 학습에 이르는 모든 직무에 정통했던 관료요 유학자였다. 당시 논자들의 말인 "경학(經學)은 류 대사성(柳大司成, 柳崇祖)에게 묻고 사학(史學)은 김 모재(金慕齋, 金安國)에게 물었다"와 대신들이 국왕에게 건의한 "성리학의 전수를 그만둘 수 없습니다. 그러니 연소한 문신을 뽑아 류숭조에게 나아가 수업하게 해야 합니다"라는 내용은 그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아울러 그가 성균관 직에 있으면서 이룬 역할은 단순히 인재양성에만 그친 것은 아니었다. '도학의 맥 수수(授受)'의 문제 때문이다. 그렇지만 조선 도학의 맥은 진일재 류숭조를 통하지 않게 그려졌다. '도학정치를 주장한 대학자 류숭조의 영향을 크게 받은 학자'로 조광조를 언급할 뿐 도학 정통성은 한훤당 김굉필로부터 이어진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이러한 학설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균관의 사범(師範)으로서 조광조를 지도했던 역사적 사실과, 도학의 맥을 계승하기 위한 그의 노력까지 망각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실록을 읽다가 흥미로운 기록을 발견했다. 진일재 사후 만5년 뒤인 중종12년 2월의 일이다. 경연에 입시한 조광조가 선비들의 습속을 바로잡을 것을 아뢰는 자리였다. 이때 돌연 조광조는 진일재를 평하고 나섰다. "신이 보건대 류숭조는 학술이 있었다지만 그의 사람됨이 거칠고 경박하여 유자(儒者)의 일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때 성균관의 서재를 더 넓히기를 주청하여 비록 (유생을) 많이 불러 모았지만 한갓 국고만 허비했을 뿐이었습니다." 조광조의 평에 중종은 "류숭조가 대사성일 때 과연 유생이 많이 모였다고 했다. 그러나 한갓 모으기만 힘써서 될 일인가? 모름지기 쓸 만한 사람으로 양성시켜야지, 단지 많이 모은 명성만 냄은 불가하다"라 하였다. 이렇게 국왕과 호흡이 잘 맞던 조광조는 참소를 입고 2년 뒤 죽임을 당했다. 이 대화를 음미해 보면, 조광조는 스승인 류숭조가 성균관 직에 있으면서 교육자로서 이룬 탁월한 업적에 대해 혹평한 것은 그가 갈망했던 이상적 왕도정치(王道政治)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오히려 조광조가 비판했던 성균관의 '양적 팽창'은 선비의 저변 확대로 후일 사림의 재등장을 가능하게 했다. 또한 조광조 같은 불세출의 인물도 류숭조의 성균관에서 비로소 길러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뒤집어 보면 이는 진일재의 기여와 역할이 컸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하지만 조광조의 영향력은 퇴계 이황을 거치면서 유림 사회에서는 절대적이었다. 그의 이러한 부정적 평가는 음으로 양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1872년 고종이 "칠서언해를 누가 지었나?" 라고 물었을 때 강관(講官) 김세균(金世均, 1806-1884)이 "류숭조가 집해(輯解)하고 문순공(文純公) 이황이 바로 잡은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대해 고종은 "류숭조에게 별호와 문집이 있는가? 어느 시대 사람인가?"라고 재차 물었다. 그때 김세균은 "사적인 별호로 석헌(石軒)이라 하고 진일재(眞一齋)라 하기도 합니다. 문집은 일찍이 본 적이 없습니다. 이 문순공과 같은 시대 사람인 것 같습니다"라고 답했다. 경연에 입시하는 신하는 당대 대표 학자다. 그럼에도 김세균이 말한 이야기를 보면 잘못된 내용이 있다. 첫째, 진일재의 문집 문제다. 실제로 그것은 진작 간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늦었지만 진일재 문집은 1808년(순조8) 경 호곡(壺谷) 류범휴(柳範休, 1744-1823) 등이 간행했다. 그럼에도 김세호는 본 적이 없다고 한 것. 영남과 중앙 정계와의 학문적 교류가 원활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진일재가 중종의 명에 의해 간행한 조선 성리학 연구의 주요 이론서인 대학잠(大學箴)과 성리연원촬요(性理淵源撮要)조차 소개하지 못한 것이다. 둘째는 진일재의 생애에
무지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퇴계보다 49년 선배이며 그가 가르친 조광조조차 퇴계보다 19년 선배다. 그런데도 김세호는 단순히 '퇴계와 동시대 사람'이라고 얼버무렸다. 진일재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온당하지 못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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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나의 사랑 한국한문학
글쓴이 : 인간사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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