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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성이씨 종택 -- 펌

회기로 2010. 6. 2. 17:07
한국의 명가③]자존과 풍류로 지켜온 500년 선비 가문의 기개

고━성━이━씨━종━택━ 臨淸閣

                                                  조용헌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한국의 전통 고택을 답사하면서 느끼는 소감은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 처음에는 단조롭다는 느낌이 온다. 어떤 집을 보아도 그 집이 그 집 같다. 기와에 마루, 담장, 안채와 사랑채, 대문 등이 비슷비슷해 별다른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다. 다양성과 개성을 기대했던 사람에게는 실망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그 나물에 그 밥이구먼!’ 하고 중얼거리게 된다.

하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좀 더 다녀보면 집마다 다른 느낌을 얻을 수 있다. 우선 같은 구조로 된 집이 한 집도 없다는 것이다. 명문 고택들의 구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붕어빵처럼 똑같이 찍어낸 집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문의 위치, 안채와 사랑채의 배치, 행랑채의 배치, 부엌의 구조, 정원의 모습 등이 전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구례 운조루(雲鳥樓)는 툭 터진 전망을 즐기기 위한 루(樓)가 특징이고, 하회마을의 양진당(養眞堂)은 사랑채에서 안채로 연결되는 통로가 독특하며, 논산의 윤 증 고택은 사랑채 담장을 일부러 설치하지 않았고, 해남의 녹우당(綠雨堂)은 안채와 사랑채의 방향이 서로 다르고, 봉화의 충재 고택은 거북이 형상의 돌 위에 자리잡은 청암정(靑巖亭)이 일품이다.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집터다. 배산임수를 골격으로 하되 그 세부적인 조건은 집집마다 전부 다르다. 웅장한 터, 방정한 터, 편안한 터, 낭만적인 터, 소박한 터, 강직한 터가 있다. 집 전체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와 표정이 모두 다른 것이다. ‘도덕경’에 나오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표현이 한옥이 지닌 성격을 표현하는 데 적절하지 않나 싶다. 이렇게 다른 이유는 지금처럼 전국적 조직을 가진 대기업이 시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그 집을 짓는 집주인들의 각기 다른 문화적 취향과 실용적 목표가 반영되고 그 지방 목수들의 실력과 주특기가 모두 다르다 보니 한 집도 똑같은 집이 지어질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전통 고택 감상법은 세세한 부분의 차이를 발견하는 데 있고, 그 차이를 추적해 올라가면 그 집안에 내려오는 정신적 가풍과 집터의 차이로 귀결된다.

경북 안동시 법흥동에 자리잡은 임청각(臨淸閣). 조선초기인 1519년에 지어졌으니 500년의 역사를 지닌 고성(固城) 이씨(李氏)의 종택으로 대지 1,000평에 70칸 규모다. 500년의 역사는 대하소설을 쓰는 데 충분한 소재를 제공하고도 남는 시간이다. 보통 60평생만 살아도 회한에 찬 표정을 지으면서 자기 인생을 소설로 쓰면 몇 권은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하물며 500년의 역사를 지닌 집안이라면 어떻겠는가. 그 기쁨과 슬픔, 성공과 좌절을 겪으면서 흑백시대와 컬러시대가 배합되게 마련이다. 임청각의 500년 성쇠(盛衰)는 어떠하였는가.

먼저 임청각이 자리잡은 터를 살펴보자. 뒤로는 산이 있고 앞으로는 강물이 흐른다. 교과서적인 배산임수의 터다. 뒷산의 이름은 무엇인가. 영남산이다. 태백산 줄기가 남쪽으로 내려와 문수산이 되었고, 이 문수산이 다시 200리를 달려와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맺힌 산이 해발 250m 가량의 영남산이다.


훼손된 유산, 臨淸閣의 아름다움

집터 앞으로 흐르는 물은 낙동강이다. 태백산 황지에서 발원하여 400여 리를 흘러왔다. 낙동강은 강폭이 임청각 앞에 이르러 병목처럼 좁아진다. 무산(巫山) 때문이다. 무산은 임청각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앞산에 해당하는데, 바로 강 건너편에 있다. 산이 그리 높지도 않고 험하지도 않은 적당한 높이의 산이다.

장갈령으로부터 서쪽으로 수백여 리를 달려와 열두 봉우리가 되어 그치니 이것이 무산이다. 낙동강은 이 무산과 임청각 사이를 통과하면서 강폭이 좁아진다. 작은 협곡을 형성하는 셈이다. 추측건대 무산이라는 이름도 양쯔(楊子) 강의 무협(巫峽)을 염두에 두고 붙인 것 같다. 강폭이 좁아지다 보니 임청각에서 보면 낙동강이 그리 큰 강으로 보이지 않는다. 큰 강이 주는 위압감이 덜 느껴진다는 말이다. 안동댐이 들어서기 전에는 물이 ‘S’자로 흐르면서 중간중간에 하얀 모래사장을 만들어 놓았다. 그 모래사장 사이로 만년이 넘게 푸른색을 띠며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의 서정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집터가 앉은 방향은 해좌(亥坐)다. 해좌는 동남향이기는 하지만 남쪽에 가까운 방향이다. 햇볕은 충분한 좌향이다. 이 집 사람들은 날씨가 화창한 봄날 마루에 한가하게 앉아 무산 앞으로 흘러가는 벽수(碧水)를 바라보면서 인생을 생각했을 것 같다. 햇볕이 강물에 부딪쳐 생기는 은빛들의 반짝거림을 관조하는 한가함 말이다.

임청각에서 고개를 우측으로 돌리면 두 줄기의 물이 합수(合水)되는 곳이 나온다. 즉, 무산의 끝머리에서 낙동강과 반변천(半邊川)의 물줄기가 합쳐진다. 반변천은 일월산에서 시작해 영양·진보·청송의 물이 합쳐져 안동대 앞으로 흘러 안동 시내의 무산 앞에서 낙동강과 만나는 것이다.

이 만나는 지점을 와부탄(瓦釜灘)이라고 부른다. 옛날에는 와부탄 주변에 넓은 백사장이 형성되어 있어 하얀 갈매기들이 무리지어 놀았다고 한다. 그 아름다운 풍광을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인근에 콘크리트 건물들이 들어서 그 경치가 망가지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일제때 임청각 앞으로 중앙선 철도를 놓는 바람에 임청각이 지니고 있던 낭만적 풍광은 절단나고 말았다.

이러한 훼손을 목격할 때마다 낭만적인 풍경은 그 나라 국민의 의식수준과 비례한다는 생각이 든다. 미 의식을 갖추지 못한 백성은 아름다운 풍경을 결코 소유할 수 없다. 의식수준과 미학은 비례한다. 앞으로 후진국가에는 인간을 감동시키는 장엄한 경관이 남아 있기 힘들 것 같다. 먹고살기 위해 달려드는 콘크리트와 포크레인의 난입을 어떻게 막는다는 말인가. 빵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나라에서나 풍경다운 풍경이 보존될 전망이다.

문명과 이기(利器)의 훼손이 거의 없었던 100년 전이라고 상상하면, 임청각의 풍경은 한 폭의 산수화 그 자체였을 것 같다. 청산과 푸른 강물 그리고 백사장이 연출해 내는 풍광은 가히 신선이 살아도 될 만큼의 격조가 느껴진다. 조선 땅의 이름난 명문 고택들을 많이 구경하였지만 임청각만큼 아름다운 국세를 발견하기도 쉽지 않다.

그동안 구경해본 고택 가운데 주변 국세가 인상적인 곳은 두 군데다. 전남 구례의 운조루와 이곳 안동의 임청각이 그곳이다. 운조루는 백두대간이 3,000리를 달려와 마지막 결국(結局)을 맺은 지리산을 뒷산으로 하고 있다. 웅장하다. 앞으로 넓게 펼쳐진 들판 너머로는 맑게 흐르는 섬진강이 부드럽게 감아 돈다. 운조루에 서면 왠지 호방함이 느껴진다. 웅장한 지리산을 뒤로 하고 앞으로는 풍요로운 들판이 열려 있는가 하면, 들판 너머로는 수·화·목·금·토 오행을 두루 갖춘 화려한 안산이 받쳐주고 있다. 풍수적 조건을 두루 갖춘 운조루에 가면 한국 산세를 대표하는 남성적인 호쾌함을 만끽할 수 있다.


임청각이 주는 분위기는 운조루와 사뭇 다르다. 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렵다. 굳이 표현한다면 인생을 달관하게 만드는 유장미(悠長美)라고나 할까. 그 유장한 아름다움은 집 앞에서 넘실넘실 흘러가는 푸른 강물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푸른 산 사이를 끝없이 흘러가는 푸른 강물을 바라보노라면 세간사에 대한 욕심이 잊혀질 것 같다. 마음이 쉬어야 비로소 산수의 품에 안길 수 있다. ‘리버 사이드 호텔’이나 ‘강가의 아틀리에’라는 이름도 강이 주는 정서적 효과를 알기 때문에 지은 이름 아닌가. 아름다운 산수는 아름다운 인물을 낳는 법. 임청각의 아름다운 산수는 결국 예술가 한 사람을 낳고야 말았다.


虛舟 李宗岳의 예술적 기질

임청각의 11대 종손이었던 허주(虛舟) 이종악(李宗岳·1726~73)이 바로 그 인물이다. 그의 예술적 기질은 ‘허주부군산수유첩’(虛舟府君山水遺帖)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240년 전인 1764년 4월 화창한 봄날 허주는 자신이 살던 집인 임청각 앞에서 뜻이 맞는 집안 친척, 동지들과 함께 배를 띄웠다. 뱃놀이를 하기 위해서였다.

호도 ‘빈 배’라는 뜻의 허주라고 했던 것처럼, 허주는 평소 뱃놀이를 즐겼다. 그 코스는 임청각에서 시작해 낙산(樂山) 선찰(仙刹)에 이르는 왕복 60km에 달하는 반변천 주변의 절경들이었고, 뱃놀이를 하면서 마음먹고 그린 산수화첩이 허주부군산수유첩이다. 이 산수유첩은 그동안 묻혀 있다 2003년에야 비로소 세상에 공개되었다. 정신문화연구원에서 펴낸 ‘허주 이종악의 산수유첩’(서화명품특선 1)과, ‘명가(名家)의 고문서(古文書)’(기탁고문서 특별전 1)가 그것이다. 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전문위원으로 있는 김학수(金鶴洙)에 의하여 산수유첩과 임청각의 고문서들이 상세하게 소개됐다.

이를 보면 허주는 반변천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 12지점을 배로 통과하면서 그때마다 그 장면들을 그림으로 묘사하였다. 1.동호해람(東湖解纜:임청각 앞 동호에서 닻줄을 풀다) 2.양정과범(羊汀過帆:돛대를 펴고 반변천 상류쪽의 양정을 지나다) 3.칠탄후선(七灘候船:칠탄에서 배를 기다리다) 4.사수범주(泗水泛舟:사수에서 뱃놀이를 하다) 5.선창계람(船倉繫纜:선창에 배를 매다) 6.낙연모색(落淵莫色:노을질 무렵 낙연폭포를 감상하다) 7.선사심진(仙寺尋眞:선찰사를 방문하다) 8.망천귀도(輞川歸棹:망천리에서 작별하고 배로 돌아가다) 9.운정풍범(雲亭風帆:돛대에 바람을 싣고 백운정을 지나다) 10.이호정도(伊湖停棹:이호에서 정박을 하다) 11.선어반조(鮮魚返照:선어연에서 뒤를 돌아보다) 12.반구관등(伴鷗觀燈:반구정에서 민가에 켜진 등불을 바라보다). 이상 12폭 그림이다.

12곳에 등장하는 동호·양정·칠탄·사수·낙연 등의 이름은 안동 반변천 주변에 실재하는 지명이다. 12곳은 전망이 가장 좋은 뷰-포인트(view point)이기도 하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요즘도 안동의 중등학교 미술교사들이 이 일대의 그림을 그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찾아가는 곳이라고 한다. 옛 사람이나 요즘 사람이나 절경을 보는 안목은 비슷한 것이다.

허주는 음력 4월4일 출발하여 반구정에 도착한 다음 안동 민가에 달아 놓은 초파일 등불을 그렸다. 그리고 임청각에 돌아왔을 테니 4월9일에 일정을 마감한 셈이다. 총 5박6일 간의 뱃놀이 일정이었다고 여겨진다. 임청각 앞의 동호를 출발하면서 지은 시를 보자. 같이 가기로 해놓고 갑작스러운 일 때문에 떠나지 못한 집안 친척을 아쉬워하는 심정이 묻어 있는 시다. 한번 가면 다시 오지 않는 인생인데, 일 때문에 제대로 한번 놀아 보지도 못한다는 애석함이 배어 있다. 고금을 막론하고 바쁜 사람은 여전히 바쁘다.

쌍쌍이 벗을 삼아 푸른 이끼 밟으며

(相伴雙雙踏綠苔)

이른 아침 마을 어귀에서 배를 띄우네

(平明解纜小城常)

아쉬워라 영은 숙부 세상일에 여념없어

(却憐嶺隱多關事)

강산은 절로 있건만 눈조차 떠지지 않네

(自在江山眼不開)

외로운 돛단배는 물길 따라 선경을 찾아 나서니

(孤舟遂水覓仙源)

곳곳의 풍광에 묵은 번뇌가 사라지네

(到處烟光滌惱煩)

강가에 봄이 다했다 말하지 말게나

(莫道汀洲春已盡)

바위틈에 핀 꽃 지면 녹음이 가득할지니

(巖花落後綠陰繁).

(김학수 역)

반변천 연안인 임하·임동·길안면 일대의 12곳 중간중간에 배가 정박할 때마다 경치를 감상하고, 때로는 미리 기별을 받고 기다리던 친구들과 시와 술을 주고 받았는가 하면, 선유(船遊)에 동참한 18명의 동지들과 거문고를 타면서 풍류를 즐겼다.

돛 하나 달고 앞뒤로 노를 저어 가는 작은 배였지만, 그 여행의 질을 추측해 보건대 18세기 낙동강 크루즈 여행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변의 맑은 강물과 하얀 백사장, 기암절벽을 보면서 시와 글씨를 주고받고, 거문고 소리에 귀 기울이는 풍류를 상상해 보라. 조선시대 상류층의 놀이문화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요즘의 놀이문화라고 해봐야 골프장과 룸살롱이 거의 전부 아니던가. 골프채와 양주병 그리고 노래방 기계를 가지고 노는 유흥과, 시를 짓고 거문고를 퉁기는 뱃놀이는 품격과 격조에서 현격하게 차이가 난다. 우리는 놀 줄도 모른다. 놀이 중에는 뱃놀이가 최고라고 한다. 여행해본 사람들 이야기가 크루즈 여행을 여행의 마지막 단계라고 하는 말도 있지 않은가.


왜 뱃놀이를 최고로 여기는가

왜 뱃놀이를 최고로 여기는가.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배를 타면 주변 풍광이 흘러가고야 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 그렇게 보는 것 아닌가 싶다. 시속 90~100km로 달리는 자동차 여행은 너무 빠르게 지나친다. 주변 풍경을 제대로 인식하기도 전에 휙휙 사라져 버리고 만다. 여운을 느낄 시간이 없다. 이에 비해 배는 천천히 지나간다. 뱃전에 앉아 사라지는 풍경들을 바라보노라면 우리 인생도 저렇게 사라지고 만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주체인 나와 객체인 대상이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여유가 중요하다. 교감을 나누지 못한 대상이 사라져 버리면 아쉬움이고 뭐고 없지만, 교감을 나눈 대상이 사라지면 아쉬움과 여운이 남게 마련이다. 한번 지나가면 다시 못 본다는 아쉬움이다.

그 아쉬움은 공간과 함께 시간도 역시 떠나 보낼 수밖에 없다는 철리(哲理)를 수용하게 만들어 준다. 그렇다! 모든 것은 저렇게 흘러가는 것이다. 흘러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대상에 집착하는 마음이 풀어진다. 마음이 한가해진다. 이것이 휴식 아니겠는가! 선유(船遊)의 장점은 달관의 단초를 제공한다는 데 있다.

뱃놀이가 주는 또 하나의 즐거움은 전망이다. 배를 타면 평소에 볼 수 없는 각도에서 경관을 바라볼 수 있다. 밑에서 위를 볼 수 있고, 안에서 밖을 볼 수 있다. 위와 밖에서 보는 것과, 밑이나 안에서 보는 관점은 서로 다르다. 뒤집어볼 수 있으므로 평소 보이지 않던 다른 풍경이 나타난다. 측면으로만 보던 기암절벽의 숨겨진 정면을 감상할 수 있다. 그 새롭게 나타나는 경관이 사람을 끌어들인다.

허주는 또한 거문고의 명인이기도 했다. 행복한 삶의 조건은 두 가지다. 하나는 자연을 가까이 하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악기를 하나쯤은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갖춘 삶이면 대체로 행복하다. 허주는 뱃놀이를 할 때마다 거문고·서책·다기(茶器)를 반드시 싣고 다녔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거문고는 필수였다. 허주의 거문고 연주 실력은 당시 안동 일대에서 널리 회자될 만큼 일품이었다. 그가 얼마나 거문고를 사랑했는가는 그가 평소 애장하던 거문고에 친필로 각인한 ‘서금배’(書琴背)라는 금명(琴銘)에 나타난다.


일생토록 한 일이 무엇이길래 머리는 이미 백발이 되었는가

네가 없었던들 나는 벌써 속물이 되었겠지

강물 위로 비치는 달빛은 밝게 빛나고 강정의 밤은 깊어만 가는데

오직 너의 소리만이 내 마음을 알아주누나

내 마음을 알아줄 이 네가 아니면 그 누구리

잠시도 너를 내 곁에서 떨어지게 할 수 없네.

(成何事 頭已白 不有爾 我幾俗 江月明 江夜深 惟爾音 知我心 知我心 非爾誰 不可使爾 須臾相離)

(김학수 역)

거문고 뒷면에 ‘내 마음을 알아줄 이 네가 아니면 그 누구리’라고 새겼던 허주. 알아줄 사람이 없다고 여겼던 그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260년 전에 살았던 한 인간의 고독을 발견할 수 있다. 임청각 99칸 장원의 주인이었던 허주가 이처럼 절절한 고독을 느끼며 살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겉보기에는 하등 부족한 것이 없었을 것 같은 풍족한 삶인데도 말이다.


남인 푸대접 시절의 애환

그림을 그리고 거문고를 좋아하고 틈나는 대로 배를 타고 놀았던 그의 이면에서는 좌절감과 고독이 엿보인다.

18세기 초반 정치상황을 보자. 안동 일대의 남인들은 1728년 영조 4년에 발생한 무신란 이후 정치적 출세가 봉쇄당한다.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중앙 고위직에 오를 수 없었다. ‘남인 푸대접 시절’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다 1762년 영조 38년에 한 가닥 희망이었던 사도세자가 참변을 당하자 허주는 벼슬을 완전히 단념하고 일생 강호의 처사로 산림에 묻혀 살 것을 결심한다.

사람이 심한 좌절을 겪게 되면 그 상실감과 울분으로 인하여 폐인이 되는 수가 많다. 정치적 좌절에 대응하는 노선은 두 가지다. 하나는 주색잡기로 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도를 닦거나 예술에 심취하는 길이다. 준비가 안 된 사람은 대부분 전자의 길을 밟는다. 소수가 후자의 길을 간다.


허주는 후자의 길을 밟았다. 후자의 노선은 이 집안 선조들이 미리 닦아 놓은 길이기도 하였다. 인생은 벼슬을 통한 입세간(入世間)의 길도 있지만, 벼슬을 스트레스로 여기고 산수에 돌아와 노니는 출세간(出世間)의 길도 있게 마련인데, 허주의 조상들은 이 양쪽 길을 모두 알고 있었던 듯싶다. 살다 보니 두 길을 모두 아는 사람이 인생의 고수요, 복 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임청각의 족보를 따져 올라가 보면 불가(佛家)와 선가(仙家) 사상에 심취했던 조상들이 유달리 많다. 고성 이씨 임청각 가계도를 보면 제일 위에 고려 말의 행촌(杏村) 이 암(李癌·1297~1364)이 나온다. 그는 공민왕대에 고위 관료를 지냈으며, 우리나라 상고사의 귀중한 자료인 ‘한단고기’의 ‘단군세기’편을 저술한 학자이기도 하다.

1세 단군 왕검으로부터 47세 단군 고열가까지 2096년 동안의 단군의 재위 기간과 역사를 기록해 놓았다. 그는 고위 관직에 있었지만 말년에는 벼슬을 버리고 강화도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단군세기’는 그가 강화도에 은둔하던 1363년에 썼다고 되어 있다. 행촌 때부터 선가적 은둔의 기풍이 있었던 것이다.


고려 후기 국사(國師)를 지낸 각진국사(覺眞國師·1270~1355)는 고성 이씨로서 행촌의 삼촌이다. 각진국사는 16국사를 배출한 송광사(修禪社)의 13세 국사였다. 그는 전남 백양사의 유명한 비자나무 숲을 조성한 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비자나무 열매는 기생충 가운데 촌충의 구제약인데, 주민들의 구충제로 사용하기 위해 심었다고 한다.

백양사는 고성 이씨였던 각진국사와의 인연으로 인하여 고성 이씨의 원찰이 되었다고 한다. 조선조에 들어서도 임청각의 고성 이씨들과의 인연이 이어졌다. 지금도 고성 이씨들이 백양사에 가면 대접이 후하다고 한다. 행촌의 동생도 운암대사(雲庵大師)라는 고승이었다고 하는데 자세한 생몰 연대는 알 수 없다. 행촌 자신도 선가에 심취하였고, 동생과 삼촌은 당대의 불교 고승이었으니 집안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짐작된다.


임청각 옆에는 17m 높이의 7층 벽돌탑이 서 있다. 통일신라시대 사찰인 법흥사의 탑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들어서도 고성 이씨들이 사찰의 전탑을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놓아둔 것 역시 선대의 호불(好佛)하던 유풍과 관련이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눈앞에 보이는 현실세계가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눈에 불을 켜고도 아둥바둥 살 수밖에 없지만, 세간을 떠나 산림으로 돌아가는 출세간의 세계가 또 하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가고 물러서는 데 여유가 있다. 현실세계를 환상과 꿈으로 보는 불교는 이런 점에서 사람을 여유 있게 만든다. 그라운드를 넓게 보는 사람만이 직장과 서울을 버리고 낙향을 감행한다.

행촌의 손자가 이 원(李原·1368~1429))이다. 세종때 좌의정을 지냈는데, 세조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자 고향으로 낙향해 버린다. 이 원의 여섯째아들이 영산현감을 지낸 이 증(李增·1419~80)이다. 안동과는 인연이 없었던 고성 이씨들이 이 증 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안동과 인연을 맺는다. 안동으로 이사한 것이다.


고성 이씨 가문의 귀거래사적 전통

이 증의 둘째아들인 이 굉(李퍂)은 1513년 개성유수를 사직하고 경치 좋은 와부탄 옆에 귀래정(歸來亭)을 건립한다. 매우 아름다운 정자였다. 셋째아들인 이 명(李?) 역시 형님을 따라 와부탄 일대의 아름다운 경치에 매료되어 1519년 의흥현감을 사직하고 법흥동에 임청각을 건립한다.

임청각의 창건주는 이 명이다. 귀래정이나 임청각이나 모두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따온 이름이다. ‘임청’(臨淸)이란 표현도 귀거래사의 ‘동쪽 언덕에 올라 긴 휘파람 불고, 맑은 물가에서 시를 짓는다’(登東皐而舒嘯 臨淸流而賦詩)는 구절에서 차용한 것이다. 이 명의 아들인 이 굉(李肱)도 산수간에서 유유자적하던 선대의 핏줄을 이어받는다. 귀래정 옆에 ‘갈매기와 벗한다’는 뜻의 반구정(伴鷗亭)을 건립한 것이다.

이 굉의 아들인 이 용(李容)도 반구정에서 만년을 보낸다. 조부인 이 명, 아들 이 굉, 손자 이 용. 3대가 벼슬을 버리고 반구정에서 은거한다. 이를 기리기 위해 반구정 앞에는 ‘고성이씨삼세유허비’(固城李氏三世遺墟碑)라는 비문이 세워졌다. 말하자면 3대 귀거래사 실천 기념비인 것이다. 3대 과거급제가 아니라, 3대 모두 귀거래사를 실천한 집안이 고성 이씨가문이다. 허주의 예술적 자질은 바로 이러한 집안 분위기에서 숙성되었지 않나 싶다.


경상도에서는 전라도와 달리 선비들의 그림이 별로 전하지 않는다. 전라도는 해남의 윤고산(尹孤山) 집안이나 진도의 허소치(許小痴) 집안처럼 문인화를 남긴 집안이 상당수 있다. 이에 비해 안동을 중심으로 한 퇴계 문하에서는 선비가 그림 그리는 것을 꺼려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 대신 유교 경전 공부에 치중하였다. 경전에 치중하다 보니 자연히 금욕적이고 엄숙한 학풍이 대세를 이루었다. 음악과 미술 같은 예술적 소양이 발휘되기는 어려웠다. 그러므로 경상도에서는 문집 발간은 다른 지역보다 훨씬 많지만, 예술과 풍류 쪽에는 별다른 문화유산을 남기지 못하였다.

음식만 해도 그렇다. 안동에는 ‘헛제삿밥’이라는것이 있다.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서도 제삿밥을 해 먹는 관습이다. 전라도에서는 결코 구경할 수 없는 밥이 헛제삿밥이다. 전라도는 들판이 넓고 해산물이 풍부했기 때문에 푸짐한 음식이 먹고 싶으면 평소에도 한 상 떡벌어지게 차려 먹을 수 있었다. 굳이 제사라는 명분이 필요없었다. 그러나 안동 일대는 사정이 달랐다. 깊은 내륙지방이어서 생선도 귀할 뿐 아니라 산간지역이어서 농사도 부족하였다. 자연히 내핍하고 절제하는 음식문화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경상도 사람이 전라도에 가면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올라오는 수십 가지 반찬 수에 놀라고, 전라도 사람이 경상도에 가면 그 단출한 밥상에 놀란다. 자장면이나 짬뽕은 영호남이 평준화되었지만, 반찬 가짓수가 유동적인 한정식이나 백반은 요즘도 상당한 격차가 있다.

교통과 물류가 발달한 요즘도 음식문화가 서로 다르니 조선시대에는 이보다 훨씬 달랐다고 보아야 한다. 경상도에서는 평소 반찬 수십 가지가 올라오는 푸짐한 한정식을 먹는다는 것은 호사스러운 사치로 인식하는 전통이 내려온다. 경제적으로 풍족한 양반집이라고 할지라도 주변에 굶는 사람들을 의식해야 했기 때문에 자기 먹고 싶은 대로 밥을 못 해 먹었다는 말이다. 밥과 국을 포함해 그릇이 총 7개 올라오는 7첩반상이면 상객에 대한 대접이었다고 한다.

영남에서 밥다운 밥을 먹으려면 제사 때나 가능했다. 평소에는 부담이 되었다. 제사는 유교의 핵심의례였기 때문에 제삿밥을 푸짐하게 해 먹는 것은 하등 부담이 없었다. 제사는 음식을 푸짐하게 준비할 수 있는 공인된 명분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나온 메뉴가 헛제삿밥이 아닌가 싶다.

도덕적 원칙과 절제를 강조하는 퇴계의 주리학풍(主理學風)과, 물산이 부족한 산간지역이었던 안동일대의 지역적 특성을 감안할 때 허주와 같은 뛰어난 예술가가 배출되었다는 것은 이례적이다. 그는 주위사람들로부터 고서벽(古書癖)·탄금벽(彈琴癖)·화훼벽(花卉癖)·서화벽(書畵癖)·주유벽(舟遊癖)이라고 하는 오벽(五癖)이 있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풍류를 즐기고 예술을 사랑하였다.

조선시대 이름난 선비들의 취향을 보면 고서를 좋아하고 글씨와 그림을 좋아하는 선비는 많이 있었다. 보편적인 취향이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거문고를 특별히 좋아했던 인물을 찾아보면 임백호(林白湖·1549~87)가 생각난다. ‘일검일금천리인’(一劍一琴千里人)이라고 스스로를 규정하였던 그는 가슴에 한 자루의 칼과 거문고를 품고 전국의 명산대천을 방랑하였다.


풍류의 마지막 경지는 주유벽

방랑의 동반자는 거문고였던 것이다. 허주는 거문고를 거쳐 화훼에까지 들어갔다. 각종 수석과 분재, 분재 가운데서도 특히 매화 분재(盆梅)를 좋아해 어디에 명품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반드시 가서 구하였다고 한다. 화훼를 넘어 주유에까지 도달한 선비는 더더욱 드물다.

오벽 중에서도 주유벽은 풍류의 마지막이자 최고의 경지다. 과문의 탓인지는 몰라도 조선 후기에 주유벽의 경지에까지 진입한 인물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하였다. 풍류의 본고장인 담양의 소쇄원 출입 인사 가운데도 주유벽이 있었다는 인물은 듣지 못하였다. 오늘날 생각해 보면 오벽은 조선시대 선비가 추구할 수 있는 풍류의 5대 장르라고 볼 수 있다. 그 5대 장르를 모두 섭렵한 인물이 허주다. ‘오벽’의 보유자였던 임청각 11대 종손 허주는 분명 이색적인 인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오벽이 가능하기까지는 경제적 기반과 정치적 좌절도 물론 작용하였겠지만 정신적 측면, 즉 허주 개인의 취향과 집안의 가풍도 영향을 미쳤다고 판단하는 것이 온당한 평가이리라. 임청각에 내려오는 귀거래사 가풍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인지 임청각 후손 가운데 벼슬에 높이 올라간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임청각 전체 건물 가운데 유명한 건물이 군자정(君子亭)이다. 평면이 ‘정’(丁)자형 누각으로서 정원 내에 있는 내정정자(內庭亭子)다. 정면 2칸이고 측면 1칸인데, 온돌방이 옆에 붙어 있다. 군자정은 그 낭만적 전망으로 해서 조선시대 전국의 많은 명사들이 다녀가고는 하였다. 정자 내부에 높이 걸려 있는 ‘임청각’(臨淸閣)이라는 현판 글씨는 퇴계의 글씨다.

퇴계 외에도 여러 명사들의 글씨가 걸려 있다. 그 가운데 몇 년 전부터 꼭 보고 싶었던 글씨가 임진왜란때 3부자가 함께 순절한 호남의 의병장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1533~92)의 글씨였다. 전국적으로 손꼽히는 보학자(譜學者)인 고홍석(高洪錫·72) 선생은 전남의 창평 고씨로 제봉의 후손이기도 한데, 고선생으로부터 임청각 군자정에 제봉의 글씨가 시현판(詩懸板)으로 걸려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동안 의성 김씨인 학봉 종택과 제봉 집안이 교류가 있었다는 것만 알고 있었는데, 고선생의 제보에 의해 학봉 집안과의 교류 이전에 당시 임청각 주인과 제봉이 서로 절친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번 답사에서 군자정에 올라가자마자 곧바로 제봉이 쓴 시현판이 어디 있는지부터 물어보았다. 이날 고택을 안내해준 임청각 후손 이항증(李恒曾·65) 씨가 문제의 현판을 가리킨다. ‘제임청각’(題臨淸閣)이라는 제목이었고, 말미에는 고태헌(高苔軒)이라는 서명이 있다. 고태헌은 고경명의 별호다. 시는 당시 임청각의 낭만적이고 흥겨운 분위기를 전해준다.

훤출한 누각 초여름 더위 식혀 신선하니 조망이 새롭고(快閣凌 眺望新)

산에 머금은 축축한 이슬비는 나를 다시 머물게 하는구나(藏山小雨更留人)

회갑잔치 주야로 이어지니 즐겁기 그지없고

(華筵卜夜歡悰洽)

경사가 겹쳤으니 즐거움이 진진하도다

(勝事聯編喜氣津)

운수가 마을을 에워싸니 한폭의 살아 있는 그림이요(雲水抱村開活畵)

갖은 악기 빠른 가락 손님들 흥을 돋운다

(絲簧咽座擁嘉賓)

시를 지은들 소용없고 주인 이름 다 아는데

(題詩不用知名姓)

옛날 천태산 신선도인 하계진임에랴

(過去天台賀季眞)

전라도 사람 고경명이 경상도 안동의 임청각까지 와서 남긴 시 현판이 어떻게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말인가. 두 사람은 사돈 간이었다. 같이 서울에서 벼슬할 때 친교가 있었고, 그 인연으로 임청각 주인의 딸과 제봉의 큰아들인 준봉(?峰) 고종후(高從厚)가 혼인했던 것이다. 제봉이 사돈집이었던 임청각에 들른 시기는 임진왜란 1년 전인 1591년 신묘년 늦은 봄이다. 59세였던 제봉이 동래부사를 그만두고 곧바로 고향 광주로 가지 않고 서울로 가면서 중간에 들른 것이었다.(高洪錫,‘충의와 효열’, 66쪽)


임청각, 과연 어떤 건물인가

제봉의 사돈은 당시 환갑을 맞은 나이였으니 1531년생일 것이고, 여기에 해당하는 주인을 역대 임청각 가계도에서 찾아보면 이 명의 증손자인 이복원(李復元)이다.

제봉은 이복원의 삶과 풍모를 천태산 도인 하계진에 비유했다. 하계진은 누구인가. ‘고문진보’(古文眞寶)에 보면 이태백은 ‘술을 앞에 놓고 하계진을 생각한다’(對酒憶賀監)는 오언율시에서 그를 풍류남아라고 불렀고, 두보는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에서 그를 술 좋아하던 여덟 명의 신선 가운데 한 명으로 부를 만큼 당대의 풍류도인으로 여겨지던 인물이었다.

봄날의 찬란하였던 회갑연이 지난 다음해에는 임진왜란이라는 난리가 발생한다. 인생의 앞일은 알 수 없다. 하계진의 풍류를 읊었던 고경명은 칼을 들고 전쟁터로 나가 둘째아들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임청각의 사위이자 제봉의 큰아들인 고종후는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한다. 삼부자 모두 나라에서 불천위를 받았고, 고종후의 부인이자 제봉의 큰며느리인 고성 이씨는 이복원의 큰딸이었다. 400년이 지난 지금도 고씨 집안에서 기제사를 모신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생했을 때는 호남이 큰 피해를 입었는데, 이때 제봉의 넷째아들인 고순후(高循厚)가 동생 고용후(高用厚)를 포함하여 80여명의 가속을 거느리고 안동 임청각으로 피난한다. 80명 가운데 10명은 가족이고 70명은 딸린 노복들이었다. 노복들까지 이끌고 큰형수의 친정댁으로 간 것이다. 하지만 임청각에는 당시 명나라 군대가 머무르고 있어 얼마 있지 못하고 떠나야만 하였다.

임청각을 떠난 고씨 일가는 안동의 몇몇 명문가를 전전하며 피난살이를 하였다고 한다. 풍산의 예안 이씨 시은당(市隱堂) 이 진(李珍) 집에도 머물렀고, 금계의 학봉 종택(宗宅)에서도 몇 년간 머물렀다. 몇 달 있다 고순후는 광주로 되돌아갔지만 고용후와 가속 일부는 안동에 남는다. 뒷날 1618년 여름 제봉의 막내아들 고용후는 안동부사가 되어 당시 경상감사였던 백사(白沙) 윤 훤(尹暄)과 함께 임청각을 방문한다. 이때 만난 임청각의 후손이 이복원의 셋째아들 이 적(李適)이다. 회갑연에 지었던 제봉의 시를 보고 백사 윤 훤이 차운하여 지은 시가 임청각에 같이 걸려 있다.(고홍석, 68쪽)

임청각은 어떤 건물인가. 중앙선 철도가 놓이면서 현재 70칸 정도로 축소되었지만 원래는 99칸 규모였다고 한다. ‘택리지’에 보면 고려 공민왕의 글씨가 걸려 있는 영호루(暎湖樓)와 함께 임청각이 안동의 명승지라고 소개되어 있다.

조선시대부터 임청각은 인구에 회자되는 저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임청각의 전체적인 구조는 ‘용’(用)자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이 이색적이다. 처음 지을 때부터 일부러 용자 형태에 맞게 지었다. 용자는 ‘일’(日)과 ‘월’(月)을 융합한 글자라고 한다. 일과 월은 곧 양과 음을 합하였다는 의미를 지니므로 상서롭게 여긴다. 그래서 임청각은 내정(안마당)이 4군데가 된다. 용자의 네모진 공간 4군데마다 마당을 설치해 놓았다.

건축 전문가들에 의하면 임청각은 임란 이전에 지은 집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민가라고 한다. 임란 이전에 지은 집과 이후에 지은 집은 차이가 있다고 한다. 우선 건축 자재인 목재의 질이 틀리다.

임란 이전에는 시간을 두고 목재를 충분히 말린 재료를 썼고, 이후에는 사회가 어수선해 대충 말린 재료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또 하나는 건축 기술자의 문제다. 임란 이후 목수와 도공을 비롯한 기술자들이 귀해졌다. 기술자들을 왜군이 포로로 잡아갔기 때문이다. 임란 이후에는 그래서 이전 시대에 비해 건축 기술이 떨어졌다. 기술자도 부족하고 전후 복구의 어수선한 상황이어서 빨리빨리 대충 지을 수밖에 없었다.

반면 임청각은 임란 이전에 지은 집이어서 목재도 제대로 말린 것을 사용하였고, 일급 기술자들이 시공한 집이라는 측면에서 고건축 전문가들의 주목을 받는다. 또 하나 이색적인 부분은 단청이다. 군자정의 천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희미하게 단청의 흔적이 남아 있다.


임청각의 우물방과 영실

조선시대 민가에서는 단청이 금지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손인 이항증 씨의 설명에 의하면 임란 이전에는 민가 주택에도 일시적으로 단청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지은 것이 군자정이라는 설명이다. 우리나라 민가에 단청의 흔적이 남아 있는 사례는 군자정이 유일하다.

일제때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이 지은 ‘조선(朝鮮)의 풍수(風水)’(최길성역, 민음사)에도 임청각의 풍수가 소개되고 있다. 3명의 재상을 배출하는 영실(靈室)이 있고, 도적의 넋을 잃게 하는 남문(일명 退盜門)이 있고, 불사(不死)의 칸(間)이 있는 집으로 소개되고 있다.

영실이라면 신령한 방이다. 다른 말로는 산실(産室)이라고 한다. 기운이 특별하기 때문에 이 방에서 신혼부부가 합궁해 아이를 출산하면 비범한 인물이 나온다는 것이다. 양동 마을의 서백당에도 3명의 혈식군자(血食君子)가 배출된다는 산실이 있고, 내앞의 의성 김씨 대종택에도 산실이 있다. 이 방에는 외부인이 함부로 출입할 수 없고 며느리들이 주로 사용한다.

임청각의 후손들은 3명의 재상이 배출된다는 이 산실을 ‘우물방’이라고 부른다. 산실 바로 앞 2m 정도 지점에 우물이 있는 탓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우물의 정기를 받으면 비범한 인물이 나온다는 것이다. 풍수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 우물은 혈구(穴口)다. 뒷산에서 내려온 지맥은 보통 혈구 앞에서 멈추게 마련이다. 지기(地氣)가 혈구를 지나칠 수 없으므로 혈구 앞에는 지기가 뭉쳐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영기가 어려 있는 터는 거의 그 앞에 우물이나 작은 연못과 같은 혈구가 배치되어 있게 마련이다.

임청각의 우물방은 혈구 코앞에 자리잡고 있어서 교과서적인 명당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우물방에서는 인물이 태어났는가. 약봉(藥峯) 서 성(徐·1558~1631)과 매산(梅山) 류후조(柳厚祚·1798~1876) 그리고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1858~1932)을 포함한 9명의 독립유공자를 꼽을 수 있다. 임진왜란때 선조를 업고 피난간 서성과, 흥선대원군 집정시 폐정개혁의 선봉에 섰던 좌의정 류후조는 모두 임청각의 외손들이다. 이들의 어머니가 고성 이씨로 친정인 우물방에 와서 해산하였으니, 우물방 영천(靈泉)의 정기를 받은 셈이다.

우물방은 근대에 들어와 석주를 비롯한 독립운동가 9명을 낳은 방으로 더 유명하다. 명실상부한 독립운동가의 산실이다. 신돌석 장군 휘하에서 의병운동을 시작한 이상동(李相東·1865~1951), 만주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지낸 이봉희(李鳳羲·1868~1937), 만주 서로군정서에서 활약한 이승화(李承和·1876~1927), 만주 유하현 경학사에서 활동하다 1942년 일제의 팽창에 실망하여 자결한 이준형(李濬衡·1875~1942), 신흥학교 군관 양성 자금조달과 비밀결사 신흥사에서 활약한 이형국(李衡國·1883~1931), 서로군정서 특파원을 지낸 이운형(李運衡·1892~1972), 재만 한족노동당 중앙집행위원을 지낸 이광민(李光民:1895~1946), 압록강 연안 일본 경찰 주재소와 세관을 무장 공격한 이병화(李炳華·1906~52)가 모두 임청각의 후손들로 우물방의 정기를 받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사람들이다.

임청각 독립운동사의 서막을 이끈 인물은 석주 이상룡이다. 그는 임청각의 종손이었다. 일본의 침략이 시작되자 그는 400년 전통을 잇는 종손임에도 불구하고 집안을 팔아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석주는 1896년의 의병활동에서부터 1907년 협동학교 설립, 한일합방 이후인 1911년에는 친척 50가구를 인솔하여 대거 만주로 망명하였다. 만주에서는 경학사(耕學社) 설립과 신흥무관학교 운영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냈다.


양반 출신 사회주의자들의 운명

조선의 저명한 명문가 집안으로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집안을 꼽는다면 백사 이항복의 후손인 이회영 집안과, 임청각의 이상룡 집안이다. 만주에서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 설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집안이 바로 이 두 집안이다. 명문가는 어떻게 보면 기득권을 가장 많이 가진 집안이라고 볼 수 있는데, 만주 독립운동이란 그 기득권을 모두 포기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안동지역의 많은 양반 집안 후손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임청각을 포함하여 내앞의 의성 김씨, 진성 이씨, 전주 유씨 등 안동의 명문 집안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상 외로 많은 이들이 독립운동한다고 만주에 가서 풍찬노숙하는 고생을 하였다. 모두 내로라 하는 집안들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자존심 때문이다.

제대로 된 양반은 자존심을 먹고사는 인간이다. 일제 아래에서는 그 자존심을 유지할 수 없다고 보았으니 눈 내리는 만주로 간 것이다. 언뜻 생각할 때 인간은 빵 문제만 해결되면 행복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명문 후손들의 만주행이 그 사실을 말해준다. 임청각이 바로 그러한 집안이었다.

지금도 만주 하얼빈 아성시에 살고 있는 노인네들은 대부분 석주 선생과 같이 올라간 안동 사람들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러나 명문가 집안 후손들의 독립운동은 의외로 일반에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1990년대 들어서야 겨우 알려지기 시작한 편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항일운동을 한 사람들은 만주로 갔고,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하다 보면 대체적으로 사회주의 노선을 걷게 마련이다. 항일운동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자연스러운 대세였다.

그러니 양반 출신 사회주의자들은 해방 이후 설 자리가 없었다. 이북의 김일성 정권에서는 숙청당하거나 소외당했고, 이남의 반공정권에서는 공산주의자로 내몰렸다. 이북과 이남 양쪽에서 모두 소외되어 파묻혀 버리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이들이 주목받지 못한 이유다.

평소에는 선(仙)·불(佛)의 웅혼한 세계관을 품고 풍류를 즐겼지만, 나라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상황에 이르자 집안마저 버리고 눈 내리는 만주로 갔다. 이 집안은 종손 3대가 독립운동을 하였다. 400년 전에는 3대가 벼슬을 버리고 귀거래사를 하였다고 해서 ‘삼세유허비’를 세웠지만, 400년 후에는 지손도 아니고 직계 종손 3대(이상룡­이준형­이병화)가 세상을 버리고 독립운동을 하였으니 앞으로 새로운 삼세유허비를 세워야 할 상황이다.

귀거래사 3세가 독립운동 3세로 포장만 바꿔 다시 나타난 격세유전(隔世遺傳)이란 말인가. 한 대만 독립운동을 하여도 3대가 고생을 한다는데, 이 집안은 3대가 줄줄이 독립운동을 하였으니 그 고생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다. 그 투철함과 강인함이 어디서 유래하는가. 석주의 직계 증손자가 은행에서 근무하다 퇴직하고 집안 일을 하고 있는 이항증(李恒曾)과 이범증(李帆曾) 형제다. 현재 서울 중앙중학교 교장으로 있는 이범증 선생으로부터 이와 관련하여 집안에 내려오는 뒷얘기를 하나 들었다.

“허주공의 아들이 의수(宜秀)입니다. 부인이 유(柳)씨였습니다. 전주 유씨였죠. 우리는 통상 유씨 할머니라고 부릅니다.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었다고 합니다. 대가 끊길 상황이었죠. 그런 상황에서 남편이 병들어 목숨이 위독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유씨 할머니가 ‘내가 남편 대신 죽어 염라대왕 명부를 바꿔야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할머니는 바늘 한 쌈(24개)을 입에 털어 넣고 자진하였습니다.

그러자 기적적으로 남편이 소생하였다고 합니다. 다시 장가를 들어 아들을 낳았어요. 대를 이은 것이죠. 그 유씨 할머니의 첫째딸이 하회 류씨 집안에 시집가 낳은 아들이 정승을 지낸 류후조 대감입니다. 류후조 대감의 여동생이 의성 김씨 봉화의 해저 종가로 시집가 딸을 낳았습니다. 이 딸이 봉화 닭실(酉谷)의 안동 권씨 관행당 종가로 시집가 딸을 낳습니다. 이 딸이 다시 임청각으로 시집옵니다. 여기에서 아들을 3형제 낳았는데, 모두 용 같고 호랑이 같고 봉황 같은 아들들이었습니다. 그 큰아들이 바로 석주 이상룡입니다. 고성 이씨 집안에서는 유씨 할머니의 희생정신과 강인한 결단력이 돌고 돌아 석주 할아버지에게까지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혈맥이 이어진 것이죠.”

임청각은 일제가 1930년대 후반 중앙선 철도를 놓으면서 그 아름다운 풍광이 망가졌다. 철도 노선이 마당 앞으로 지나가도록 한 것이다. 한 시간에 두세 차례 매연을 내뿜으며 기차가 지나다니는 통에 낭만적인 서정은 사라져 버렸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의 집을 절단내자는 의도가 엿보이는 조치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1944년부터 철도 선로반원들의 합숙소로 징발되었다. 해방 이후에도 이 합숙소는 계속되어 1975년까지 32가구가 북적거리며 계속 거주하는 바람에 수백 년의 품격이 손상되었다. 1975년에 정부에 의해 합숙소가 철거되면서 현재 상태나마 되찾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후손들은 여기 저기 동가숙서가식하면서 사는 삶이 계속되었다. 종손 3대가 독립운동을 했으니 후손들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만주에서부터 시작된 독립운동가 가족들의 신산스러운 삶이 석주의 손자며느리인 허 은(許銀­1907~97) 여사의 구술기록인 ‘아직도 내 귀에는 서간도 바람소리가’(정우사, 1995)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허 은 여사는 임청각의 19대 종손이자 석주의 손자인 이병화의 부인이다.


임청각, 민족정기의 도량 될까

또한 구한말 전국 13도 의병 연합부대의 군사장을 맡은 왕산(旺山) 허 위(許蔿·1855~1908)의 재종손녀이기도 하다. 허 은 여사의 6남1녀 중 항증과 여동생은 한때 고아원에서 생활해야만 했다. 위로는 형 4명이 있었지만 생활고와 울분으로 인해 일찍 세상을 떠야만 하였다. 남은 두 아들과 딸 하나가 있었다. 항증은 수업료를 내지 못해 중학교 졸업장도 받지 못하였다.

군 제대 후에는 자신이 있던 고아원에서 총무 생활도 하고, 여기저기 실직자로 돌아다니기도 하였다. 어떻게 해서 간신히 야간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친척 소개로 1972년부터 은행에 다닐 수 있었고, 은행원 봉급으로 형님들이 남긴 조카 9명을 거두어야만 하였다. 고아원 원장 같은 생활의 연속이었다고 회고한다. 1993년 은행을 퇴직하고 나서는 임청각을 복구하고 관리하는 일에 매달리고 있다. 사생활이 없는 인생이었다.

그동안 동생인 범증은 형님의 도움으로 고려대 사학과를 마칠 수 있었다. 그것도 9년 만에 간신히 마칠 수 있었다. 집안의 유일한 대학 졸업자였다. 중앙중학교 교장실에서 인터뷰한 이범증 교장의 이야기다.


“임청각의 고서들은 임청각이 아닌 안동군 월곡면 도곡동 재사(齋舍)에 별도로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군 제대 후인 1972년에 제가 형님(항증)에게 5만원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 돈으로 트럭을 한 대 빌려 재사로 고서를 실으러 갔습니다. 트럭에 저희 집 고서를 몽땅 싣고 고려대도서관 앞에 펴 놓았습니다. 시골에 보관하면 자꾸 도둑맞을 것 같아 학교에 기증한 것입니다. 이 중에는 귀중본들이 상당히 있었다고 합니다. 고려대측에서 공짜로 이 책들을 받을 수 없다고 하면서 우리 집에 사례하려고 했습니다. 당시 김상협 총장과 현승종 도서관장이 총장실로 저를 부르더니 봉투를 하나 주더군요. 그 자리에서 열어보라고 해요. 봉투에는 수표 4장이 있더군요. 동그라미가 7개였습니다. 난생 처음 보는 1,000만원짜리 수표 4장이었어요. 4,000만원이었죠. 엄청난 금액이었습니다. 하지만 받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을 받으면 500년 된 조상의 유물을 팔아먹은 것이 되니 받을 수 없습니다’ 하고는 쏜살같이 도망나왔습니다. 유족들이 사례를 거부하니 그 대신 ‘석주유고’를 고려대측에서 출판해 주었습니다. 고려대 ‘영인총서 제1집’이 되었습니다. ‘석주유고’의 출판을 계기로 석주의 행적과 임청각이 학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던 것이죠.”


2002년 임청각은 직계 후손인 이항증·이범증 형제에 의하여 국가 헌납이 시도되었다. 임청각은 개인재산도 아니고 문중재산도 아닌 국가공유로 해야 한다는 정신에서다. 그러나 임청각은 서류상 등기자와 헌납자가 서로 다르다고 해서 지금은 법률적 정리가 진행중이다. 등기자와 헌납자의 명의가 같아야만 헌납이 가능하다고 한다. 일제때 석주를 비롯한 종손들이 만주에 망명해 있는 동안 1920년대부터 국내에서 새롭게 등기 제도가 시작되었고, 그 상황에서 임시방편으로 집안 사람 4명의 연명으로 등기할 수밖에 없었다.

세월이 80여 년을 흐르다 보니 초기 등기자 4명은 죽고 그 후손들이 70여 명으로 불어났다. 임청각을 국가에 헌납하려면 이 70명의 도장을 전부 받아야만 한다. 70여 명 가운데는 미국에 거주하는 사람도 있고 일본에 거주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을 찾아다니며 일일이 도장을 받아야 한다. 이항증 씨는 요즘 이 일로 인해 분주하였다.

유서 깊은 한 명문가가 직면해 있는 현실이었다. 후손들은 임청각의 국가 헌납이야말로 독립운동에 인생을 바친 선조들의 정신을 이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대를 앞서가는 정신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임청각이 민족정기를 함양하는 도량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바다.

녹음이 우거진 4월의 어느 날 강 건너 무산에 앉아 500년의 풍운을 간직한 임청각 건물을 바라보았다. 임청각 500년의 세월을 돌이켜보니 인간사는 과연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흥망과 성쇠, 서정적인 풍류와 피를 튀기는 치열함이 한 편의 대하드라마를 연출하고 있었다.


<趙龍憲 약력>

1961년 출생. 원광대 철학박사 불교민속한 전공.

지난 15년간 한.중.일 3국의 600여 사찰과 암자를 답사하는 과정에서 재야의 수많은

奇人.達士들을 만나 교류를 가짐.

그동안 음지에 갇혀 있던 천문.지리.인사에 관한 담론을 양지로 끌어올려 '학문적 시민권'을 얻도록 하는데 주력하고 있음.

저서로 '나는 산으로 간다' '사주명리학 이야기' 등이 있다.

출처 : 평해손씨 화랑회
글쓴이 : 손범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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