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손에 이르러 이원(李原, 1368-1429)은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해졌고 좌의정을 지냈을 뿐 아니라 청백리로도 명성이 높았다. 그는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처남이자 태재(泰齋) 유방선(柳方善, 1388-1443)의 장인이기도 하다. 그의 여섯째아들에 이증(李增)이란 이가 영산현감을 지내다 안동으로 낙향했다. 안동의 고성 이씨 입향조인 이증은 당시 지역을 대표하던 12인과 함께 유향계를 조직해 향촌사회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이증의 셋째아들이 임청각 이명이다. 이명의 여섯째아들인 반구옹(泮鷗翁) 이굉(李肱)은 부친인 임청각의 유지를 받들어 집을 맡았다.
이는 임청각 재세시‘여섯째아들에게 재산을 의탁한다’는 유명(遺命)에 따른 것이다. 여섯째집이 잘 된다는 느낌이 있을 정도로 임청각의 가세(家勢)가 좋았다. 다시 대를 이어 17대손인 석주 이상룡에 이르러 3형제였다가 그 이하 양대의 외동을 거쳐 20대에 이르러 다시 6형제의 번성함을 이루었다.
그러나 석주 대에 이미 일제에 국권을 침탈당해 가운이 기울었고, 해방 이후에도 독립운동가의 후예로서 핍박과 경제적 고통을 겪었다. 혁혁했던 임청각 종가 사람들이 학교 월사금을 내지 못해 거리로 내몰렸고, 고색창연한 임청각 종가는 건물 등기마저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광복 60년이 지난 오늘날, 임청각 종가의 슬픈 현실이다.
"국내에 살았던 사람들도 냉대를 받았습니다. 제가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났기에 당한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만주에서 환국 후, 조선총독부로부터 불령선인(不逞鮮人, 창씨개명에 따르지 않는 좋지 못한 조선사람이란 뜻으로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사용한 말)으로 지목 받아 늘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자로 유치장을 밥먹듯이 드나들었고, 형님들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아 국내에서 학교도 못 다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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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중 피난지 충남 아산에서 퇴각하지 못한 인민군 패잔병을 동네 청년들이 죄의식 없이 죽창으로 찌르는 장면을 목격한 후 분단 민족의 비애에 너무 상심한 나머지 아버지는 그만 곡기를 끊고 돌아가셨습니다. 저희 형제들은 학교를 다니기 위해 고아원으로 갔습니다. 그동안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쥐죽은 듯이 엎드려 살았습니다."
박도라는 이가 답사와 후손들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쓴 ‘민족반역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라는 책에서 읽은 내용이다. 인용한 내용은 종손의 작은아버지인 이항증 씨의 뼈아픈 증언이다. 21대 종손 이창수 씨는 선친의 아우로 5형제 중 살아 계신 이항증, 이범증 두 작은아버지에 대해 무한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숙질(叔侄, 숙부와 조카) 간을 ‘유부유자(猶父猶子)’라고 하는데, 이는 ‘아버지 같고 아들 같다’는 의미의 말이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이러한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드물다. 미풍양속이 무너진 때문이다. 그런데 임청각의 종손은 달랐다. 필자는 종손이 사는 서울 사당동 아파트를 찾아가 그를 만나면서 숙부들에 대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심을 읽을 수 있었다. “저는 두 작은아버지가 아니면 오늘이 없었을 것입니다. 종손으로서 해야 하는 많은 일을 말없이 처리해주실 뿐만 아니라 가문의 역사나 제반 범절에 이르기까지 가르침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래서 숙부이시지만 저는 아버지 같이 생각하고 따르고 있습니다.”
사당동에서 생활하는 종손의 거실에는 ‘원군지량(遠群之量)’이라는 휘호 액자 한 점이 걸려 있었다. 종손의 집안 어른이며 안동 출신으로 현재 한국 서단(書壇)의 원로인 유천(攸川) 이동익(李東益) 선생이 쓴 예서 작품이다. ‘무리에서 우뚝하게 빼어난 도량을 가지라’는 축원이 담긴 휘호다. 유구한 역사와 명문가의 종손으로서 맞닥뜨릴 여러 어려움을 풀어가자면 넓은 도량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종손은 이철증(李哲曾) 씨의 장남으로 태어나 백부인 이도증(李道曾) 씨의 후사를 이어 임청각 종통을 계승했다. 종손의 기억으로는, 초등학교 다닐 때 한복 바지저고리에 도포를 입고 임청각에서 할아버님들의 신주를 모셔놓고 고유(告由)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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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청각은 3대 독립운동 유공자 가문, 항일독립운동 가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보다 앞서 조선 시대에는 나라에 알려진 명문가였으며 조선 중기에 안동으로 낙향한 이후에는 지역을 대표하는 반가였다. 이 집은 종손의 21대조를 필두로 3세(世)에 걸쳐 티끌 세상에서 벗어나 자신의 성정(性情)을 기르고 고결함을 지키려고 고향으로 물러난 역사를 갖고 있다.
이는 당시의 미담으로 전해져 ‘고성이씨삼세유허(固城李氏三世遺墟)’라는 비석(영의정을 지낸 귀록 조현명이 글을 지음)을 세워 그 뜻을 기렸다. “만약 고조부께서 위패를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저는 사회에 나와서 지금처럼 활동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거꾸로 그것이 고조부 덕분인 것 같습니다.”종손의 말을 들으면서 그 어렵던 집안의 아픔을 삭히며 임청각을 반듯하게 만들기 위해 숙부들의 가르침을 받들고 정성을 다해 노력하겠다는 그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종손은 경주 김씨와 결혼해 아들 이강민(李綱民, 1997년 생)과 딸 하나를 두고 있다.
임청각 이명(생몰년 미상) 본관은 고성(固城), 호는 임청각(臨淸閣)
벼슬 버리고 안동 낙향… 도연명 같은 고결한 삶 살아
임청각 이명은 의흥현감을 지내다 벼슬을 버리고 부친이 낙향해 터전을 잡아둔 안동으로 내려와 임청각이라 자호하고 도연명의 고결한 삶을 닮고자 했던 인물이지만 안타깝게도 생몰년이 미상이다. 그의 부친인 이증(李增, 1419-1480)을 기준으로 짐작할 뿐이다. 그의 둘째아들이 1510년에 진사에 합격한 뒤 1514년(중종9)에 문과에 급제했으며, 다섯째아들인 무금정(無禁亭) 이고(李股)가 1516년 진사에 합격했으며, 여섯째아들인 반구옹 이굉이 1533년에 진사에 합격했다.
청풍군수를 지낸 무금정 이고는 아들을 두지 못했으나 그의 사위가 퇴계 이황의 문인인 함재 이해로, 그 아들이 대구 서씨 약봉 서성이다. 약봉의 후손은 삼대 정승, 삼대 대제학을 배출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명문인데, 후사가 끊긴 무금정의 제사를 지낸 일화가 미담으로 전해온다. 1557년(명종12)임청각 분재기에 보면 삼촌질녀부(三寸姪女夫)로 유학 서해가 참여해 수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임청각의 종통은 그 아랫대에서 맏이에게 내려가지 못했던 것 같다. 장자인 요는 비안현감과 초계군수를 지내 임청각을 떠나 있었고 분재 당시 이미 임청각과 아들이 세상을 떠났고 손자는 어린 상태였다. 그래도 재산을 줄 수 있었으나 제사를 맡길 입장은 되지 못했다. 그리고 다른 아들들 역시 사정이 있어 종통은 여섯째아들인 반구정 이고에게 넘어간 것이다. 이는 근자에 발견된 분재기에 명시되어 있는 내용으로, 그간의 의문을 풀어준다.
임청각 사람들은 자연과 벗하며 참 즐거움(眞樂)을 추구한 이가 많다. 임청각과 그의 아들 반구옹 이구, 손자 어은(漁隱) 이용으로 이어지는 삼대가 벼슬을 버리고 안동 낙동강변으로 자리잡아 은거했다. 이들이 호로 쓴 임청각(臨淸閣)이나 무금정, 반구옹, 어은, 허주(虛舟)는 물론 임청각의 형님 귀래정(歸來亭) 이굉(반구옹과 동명?)까지 한결같이 벼슬길에서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역량을 지녔음에도 이를 버리고 자연과 즐겨 벗했다. 지금도 이들이 살던 곳에는 제택(第宅)이나 정각(亭閣)이 남아 시공을 초월해 그 흔적을 더듬을 수 있다.
임청각 자료를 보면서 필자가 가장 놀란 문서는 1913년 6월 석주 이상룡이 임청각을 매매할 때 작성한 작은 문서 두 장(한 장은 주변의 택지와 산)이다. 말로만 듣던 종가를 팔아 독립운동을 했다는 증거인 셈이다. 임청각은 고성 이씨 안동 입향 이래의 대종택이다. 세칭 99칸 와가로 지금까지 60여 칸이 남아 문화재(보물 제182호)로 지정된 집이다. 일제 때는 국보 제303호로 지정되기도 했는데, 일제는 이 집 앞마당으로 중앙선 철로를 가설해 정기를 끊었다. 모순된 이 두 일을 보면 저들이 국보로 지정한 의도가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석주 이 상룡은 이 집의 주인이자 임청각 17대 종손으로 보수적 유림 지역에서 가장 먼저 단발을 시행했으며 노비해방도 단행한 선각자였다. 그는 빼앗긴 나라를 찾는 것이 우선이며 종가와 조상 제사는 그 다음 문제라고 생각했다. 당시 유림에서는 ‘나라를 빼앗긴 것과 나의 도(儒學)를 지키는 것은 별개’라고 생각해 더욱 성리학 연구에 몰입한 이들도 있었다. 이들과 비교하면 석주의 선택은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빼앗긴 나라에서 그저 묵묵히 사는 것은 하루를 살아도 욕이라고 생각하고 1911년 1월 5일 가솔을 이끌고 만주로 가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도산 안창호의 추천을 받았고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에 이른 독립운동의 큰 어른이다. 그러나 자금이 부족하자 2년 뒤 외아들 동구(東邱) 이준형(李濬衡)을 귀국시켜 매매대금 900원에 임청각 제택을 매매하기에 이른다. 매도인은 중화민국 회인현 항도천에 거주하는 이상희(李相羲, 석주의 異名)였으나 그 아들이 매매를 대행했다.
이 증서에는 의문점이 없지 않다. 먼저, 일제의 우선 감시 대상이었던 석주 이상룡이 자신의 집을 팔아 독립군 군자금으로 쓰고자 했다면, 일제는 당연히 이를 막았을 것이다. 또한 이를 은밀히 진행했다 하더라도 문중 중심 유림사회였던 당시를 생각해 본다면 종손이 위패를 없애고 종가까지 판다는 것은 용납받기 어려운 것임에, 비밀이 유지될 수 없었을 것이다. 석주의 선택은 범 문중 또는 유림의 이해나 지지를 받기 어려운 것이었다.
다음은 매매 대금 문제인데, 당시 물가를 기준으로 볼 때 수십칸의 와가 매도 대금이 900원에 불과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문서도 치밀하지 못하다. 매도인 석주 이상희의 도장도 급조한 목도장이고 매수인이 모두 일가인 이 씨며, 그중에 이종하(李鍾夏)라는 한 사람만 역시 급조한 듯한 목도장으로 날인하고 있다. 그리고 매매 이후의 문제인데, 매수인의 신원이 확실하지 않다는 점이다. 정상적이라면, 이 당시 매수인들의 후손들에 의한 상속이나 매매가 이루어졌어야 했다. 그러나 해방 이후 환국한 석주의 아들 동구 이준형이 이 집에 돌아와 살았으며, 그 이후 일가 인사들이 연명으로 임청각 제택에 대한 등기를 해 오늘에 이르렀다.
가설이긴 하지만, 이 문서가 일제의 눈을 속이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마련된 일종의 ‘명의신탁(名義信託)’이 아니었을까 한다. 독립군 군자금 마련은 극도의 보안을 요하는 일이다. 일제가 집을 팔아 자금을 확보해 군자금으로 충당하게 두었을리 만무하다. 부친의 명으로 국내에 돌아와 유림 사회에서 비밀리에 자금을 마련했고, 이것이 그 최소한의 증빙 자료로 삼기 위해 급조한 매매증서가 아니었을까?
임청각 사람들 중에 11대 종손으로 허주 이종악(李宗岳, 1726-1773)이 있다. 허주는 임청각을 잘 닮은 이라는 생각이 든다. 주목되는 두 작품이 있다. 하나는, 허주부군산수유첩(虛舟府君山水遺帖)이다. 임청각 주인인 그는 너무나 좋아하는 다섯 가지 취미가 있었다. 고서(古書), 탄금(彈琴), 화훼(花卉), 서화(書畵), 주유(舟遊)에 대한 벽(癖)이다. 주유와 서화의 벽을 동시에 설명할 자료가 산수첩이다. 산수첩은 1763년 4월 4일 그의 벗들과 낙동강에 배를 띄우고 5일간 봄나들이를 했을 때 그 주변 경치를 12폭 그림으로 담은 것이다. 이 그림은 그가 남긴 허주문집에 실린 당시에 지은 시들과 함께 감상하면 그 참맛을 느낄 수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
다른 하나는 허주인장(虛舟印章)이다. 이 첩은 고려대학교 석주문고에 소장되어 있는데, 개인 인보(印譜)로는 역사가 깊다. 모두 300과의 인장이 찍혀 있는데, 이는 자신의 허주 인장은 물론 표암 강세황 등 명인, 구사당 김락행 등 지역 유림들의 인장을 인문(印文)으로 남기고 있다. 그가 서각 분야에서도 일가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앞부분에 장첩된 친필 전서(篆書) 글씨는 그의 서법 분야의 성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허주유고를 읽고서 남은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허주의 아들이 기록한 선고의 일화에 보면 ‘하루는 서울에서 선친의 친구가 임청각 사랑방에 오셨다. 선친이 인사를 하라고 해서 그냥 목례를 했다. 나중에 선친께서는 엄히 나를 나무랐다. 그래서 내가, 큰절을 하면 서울 손님이 서울에서는 쓰지 않는 예절이라서 놀라실까봐 그렇게 했다고 아뢰었더니, 너는 안동 사람이므로 안동인의 예를 실천하면 그뿐이다 라고 엄히 책망하셨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여기서‘안동 예법’이 나온다. 당시 서울에서는 어른에게 큰절을 하는 것이 일상화되지 못했던 모양이다.
임청각은 허주 같은 종손이 있었기에 학문과 자료, 예법의 중심이 되는 게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석주 이상룡은 이들을 모두 남긴 채 거국음(去國吟)을 읊조리며 나라를 떠났다. 이후 이들 자료 역시 수난을 당했다. 상당 부분은 산실되었고 그나마 남은 것도 보관이 온전하지 못해 훼손되었다. 이를 당시 고려대학교에 재학중이던 계부(季父) 이범증(李範曾, 1944년 생)씨가 수습해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에 무상으로 기탁했다.
귀중하고 방대한 자료를 기탁받은 고려대학에서는 사례금을 건냈으나 일체 이를 물리치자 부득이 유고 형태로 남았던 석주 선생의 문집을 영인본으로 간행하고 석주문고를 만들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허주인장과 같은 책 역시 그렇게 수습된 것이다. 20대 초반의 대학생이 어떻게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필자는 이를 명문가의 자손으로 명문가의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이항증 씨는 이후 교육계에 투신해 현재 중앙중학교 교장으로 후진 양성에 모범을 보이고 있다.
임청각 사람들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가 이항증(李恒曾, 1939년생) 씨다. 그는 말없이 임청각의 정상화를 위해 부심하고 노력하고 있는 ‘외유내강(外柔內剛)’형 인물이다. 초년에 온갖 고생을 했던 그는 수십 년간 임청각의 미스터리와 왜곡된 모든 것을 바로잡기 위해 치밀하게 조사해 왔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이 임청각 소유권 정상화 문제다. ‘선비로서의 자존심’으로 선택했던 항일과 그 목적 달성을 위해 결행했던 임청각 매도, 그리고 이후 당초 의사가 왜곡되어 임청각 연명 등기를 낳았고, 이는 오늘날까지 정리되지 못하고 있다고 그는 개탄했다. 아직도 선열(先烈)의 집 소유권조차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고 있는 게 이 시대 종가들의 현실이다. 일제가 임청각 문중을 철저하게 파괴하기 위해 앞마당에 가설한 중앙선 철로의 우회 문제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임청각 사람들
반구정 이굉(李肱, 1414-1516) 6째 아들 예빈시 별제,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반구정을 짓고 은거.
어은 이용(李容) 손자 후릉참봉 지냄, 벼슬을 버리고 은거.
청옹 이후영(李後榮, 1649-1711) 7대손 문과급제 병조정랑 지냄
허주 이종악(李宗岳, 1726-1773) 11대 종손
석주 이상룡(李相龍, 1858-1932) 17대 종손 건국공로훈장 단장(1962)
동구 이준형(李濬衡, 1875-1942) 18대 종손 건국훈장 애족장(1990)
소파 이병화(李炳華, 1906-1952) 19대 종손 건국훈장 국민장(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