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산 홍씨 옛 영화가 가득한 그곳
[오마이뉴스 서부원 기자]
마구 불리고 대충 지어진 것 같은 마을 이름 하나에도 허투루 넘길 수 없는 선조들의 사연이 깃들어 있습니다. 전남 나주시 다도면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도래마을'이 꼭 그렇습니다. 언뜻 보면 촌스럽기까지 한 '도래'라는 마을 이름이 지어진 내력인즉슨 이렇답니다.
묵직한 산을 등지고 너른 들녘을 끼고 있는, 한눈에 봐도 안온한 느낌을 주는 이곳은 본디 고려시대 남평 문씨들이 들어와 일군 마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조선 초에 강화 최씨가, 그 뒤 조선 중종 때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풍산 홍씨들이 화를 피해 낙향해서 정착했다고 합니다.
섞여 사는 가문끼리 그 흔한 송사 한 번 없이 화목하게 지내면서 남도에서 손꼽히는 반촌(班村)이자 집성촌으로 뿌리 내렸습니다(비록 지금은 풍산 홍씨들이 대부분이지만). 이 세(川, 즉 세 줄기라는 의미에서) 가문마다의 맥(道)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면서 이뤄졌다 하여 도천(道川) 마을이라 이름 지었는데, 천(川)의 우리 말이 '내'인 까닭에 '도내'가 되었고, 말하기 쉽도록 '도래'로 굳어진 것이라 합니다.
지금도 백 가구 가까이 살고 있는 제법 규모가 큰 집성촌답게 마을 입구부터 예스러운 멋을 뽐내는 것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족히 200년 남짓은 됐음직한 당산 나무와 목탑처럼 겹으로 쌓아올린 지붕이 도드라져 보이는 정자 건물과 연못 등 이것들은 모두 이 마을의 '랜드마크'입니다.
동서 방향으로 곧게 뻗은 마을길 좌우로 맨 먼저 만나는 건물이 '양벽정'과 '영호정'입니다. 앞의 것은 이곳의 양반들이 외부 인사들과 교류하며 풍류를 즐겼던 곳이며, 뒤의 것은 지금은 비록 허물어질 듯 퇴락했지만, 이 마을 아이들의 학교로 사용된 곳이라고 합니다.
앞쪽으로 연못을 두고 삼신산을 상징하는 인공섬을 쌓고 겹지붕의 문간채에 야트막한 흙담을 둘러치는 등 잔뜩 멋을 부린 '양벽정'은 길을 사이에 두고 이웃하고 있는 큼지막한 '영호정'과 함께 영화로웠을 이 마을의 과거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긴 마을을 감싸고 있는 뒷산 이름도 이 마을의 풍요로움을 상징하듯 '식산(食山)'입니다.
마을길을 따라 산책하듯 걸어 올라가면 그 끝에 풍산 홍씨의 종택인 '홍기응 가옥'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넓지 않은 곳에 기와지붕이 빼곡하여 오밀조밀한 느낌을 줍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여느 곳과는 사뭇 다르게 문간채, 사랑채, 안채, 사당 등을 一자형으로 배열하되 각각의 건물 사이에 담을 둘러 세워 놓아 각각 독립공간처럼 꾸며놓았습니다.
게다가 군데군데 화단을 조성해 두는 등 담이 없어도 좁다할 만한 곳에 온갖 장식적인 요소를 다 갖추고 있으니 집이 아니라 정원 같기도 하고, 어쨌든 조금은 답답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집 전체, 아니 마을 전체가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탓에 햇볕마저도 비껴서 드는데, 그런 까닭인지 이 집의 사랑채와 안채는 모두 남향을 절충한 ㄱ자형입니다.
여느 곳에서는 보기 힘든 것이 또 있습니다. 사랑채의 일부를 '장서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과거 어느 양반집에 서책들이 없었을까마는, 얼마나 많았으면 아예 현판을 따로 써서 걸어두었을까 싶었습니다. 더구나 장서각의 위치가 사랑채의 한 가운데, 햇볕이 가장 잘 드는 곳이기에 더욱 그랬습니다.
사랑채를 나와 담을 따라 돌아가면 요새처럼 안채가 자리합니다. 부엌에 딸린 부속 건물을 빼고도, 기둥 사이의 간격이 꽤 넓은, 정면 여섯 칸짜리 대형 건물입니다. 여주인의 공간인 안채의 규모는 그 집의 재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때, 풍산 홍씨의 종택으로서의 위치는 이 건물을 통해서 비로소 드러난다고 하겠습니다.
정원 같은 이 집은 지금 가재도구 등을 모두 밖으로 끄집어 내놓아 매우 어수선합니다. 보수공사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도래마을에는 세 채의 문화재 지정 전통 가옥이 있는데, 바로 이웃한 '홍기헌 가옥'도 함께 한창 보수중입니다. 초가지붕의 문간채와 안채 보수는 대충 마무리된 듯한데 한눈에 봐도 너무 새뜻해 아직 손을 대지 않은 사랑채와 전혀 어울리지 않고 어색합니다. 조만간 새단장하게 될 '홍기응 가옥'의 모습을 미리 보는 것 같습니다.
나머지 한 채는 문간채를 나와 흙담으로 된 야트막한 고샅길을 돌아가면 곧장 만날 수 있습니다. '홍기창 가옥'입니다. 보아 하니 이곳은 지금 사람이 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출입문은 굳게 잠겨 있습니다. 그것도 녹이 슬대로 슬어 열쇠를 꽂아도 도무지 열릴 것 같지 않은 자물쇠는 사람의 발길이 끊어진 지 한참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잠긴 출입문 너머로 집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옛집다운 고즈넉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안동의 하회마을이나 경주의 양동마을처럼 마을 전체가 문화재로 지정, 보호되지 않고 있어서인지, 군데군데 마을의 전체적인 분위기에 썩 어울리지 않는 말끔한 현대식 건물들이 '알 박혀' 있습니다. 게다가 마을 안까지 여러 채의 비닐하우스가 들어와 있고 나뭇가지처럼 뻗은 마을길 모두가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어, '관리'되고 있는 세 채의 전통 가옥이 외려 낯설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아직도 우리 주변에서 집성촌이라는 이름으로, 민속촌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전통 마을이 제법 남아 있습니다. 그곳에는 땅의 역사가 숨 쉬고 선조들의 삶을 날 것 그대로 엿볼 수 있어 그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저 유명한 하회마을이나 양동마을처럼 철저히 보호, 관리되고 있어 예스러운 멋을 그대로 간직한 곳도 그렇지만, 한때 남도의 내로라하는 반촌이었지만 퇴락한 채 몇몇 옛 집들만이 덩그러니 남아 과거를 짐작케 해주는 이런 마을도 한 번쯤 찾아볼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모해가는 전통 마을의 요즘 현실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을을 뒤로하고 나오면서 만난 마을 주민 한 분의 말씀 한 구절이 오래 남습니다.
"이조(조선)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근방 나주, 영암에까지도 풍산 홍씨의 위세는 대단했지. 번듯한 집들도 많았고. 그러나 지금은 아무 것도 아니야. 뭐가 있어야지..."
▲ 도래마을 전경. 뒤로 보이는 마을을 감싸안은 산이 '식산(食山)'이다. |
ⓒ2006 서부원 |
묵직한 산을 등지고 너른 들녘을 끼고 있는, 한눈에 봐도 안온한 느낌을 주는 이곳은 본디 고려시대 남평 문씨들이 들어와 일군 마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조선 초에 강화 최씨가, 그 뒤 조선 중종 때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풍산 홍씨들이 화를 피해 낙향해서 정착했다고 합니다.
섞여 사는 가문끼리 그 흔한 송사 한 번 없이 화목하게 지내면서 남도에서 손꼽히는 반촌(班村)이자 집성촌으로 뿌리 내렸습니다(비록 지금은 풍산 홍씨들이 대부분이지만). 이 세(川, 즉 세 줄기라는 의미에서) 가문마다의 맥(道)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면서 이뤄졌다 하여 도천(道川) 마을이라 이름 지었는데, 천(川)의 우리 말이 '내'인 까닭에 '도내'가 되었고, 말하기 쉽도록 '도래'로 굳어진 것이라 합니다.
▲ 마을 입구 양벽정 앞에 조성한 연못. 삼신산을 상징하는 듯한 인공섬이 이채롭다. |
ⓒ2006 서부원 |
▲ 외지인들과 교류하며 풍류를 읊던, 마을 입구에 선 양벽정의 모습. |
ⓒ2006 서부원 |
▲ 한때 학교(교실)로 사용되었다는 영호정의 내부 모습. |
ⓒ2006 서부원 |
앞쪽으로 연못을 두고 삼신산을 상징하는 인공섬을 쌓고 겹지붕의 문간채에 야트막한 흙담을 둘러치는 등 잔뜩 멋을 부린 '양벽정'은 길을 사이에 두고 이웃하고 있는 큼지막한 '영호정'과 함께 영화로웠을 이 마을의 과거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긴 마을을 감싸고 있는 뒷산 이름도 이 마을의 풍요로움을 상징하듯 '식산(食山)'입니다.
마을길을 따라 산책하듯 걸어 올라가면 그 끝에 풍산 홍씨의 종택인 '홍기응 가옥'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넓지 않은 곳에 기와지붕이 빼곡하여 오밀조밀한 느낌을 줍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여느 곳과는 사뭇 다르게 문간채, 사랑채, 안채, 사당 등을 一자형으로 배열하되 각각의 건물 사이에 담을 둘러 세워 놓아 각각 독립공간처럼 꾸며놓았습니다.
게다가 군데군데 화단을 조성해 두는 등 담이 없어도 좁다할 만한 곳에 온갖 장식적인 요소를 다 갖추고 있으니 집이 아니라 정원 같기도 하고, 어쨌든 조금은 답답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집 전체, 아니 마을 전체가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탓에 햇볕마저도 비껴서 드는데, 그런 까닭인지 이 집의 사랑채와 안채는 모두 남향을 절충한 ㄱ자형입니다.
▲ 남향을 절충한 듯한 ㄱ자형의 홍기응 가옥의 사랑채 모습. |
ⓒ2006 서부원 |
▲ 홍기응 가옥의 사랑채 정면에 내걸린 장서각 현판. |
ⓒ2006 서부원 |
사랑채를 나와 담을 따라 돌아가면 요새처럼 안채가 자리합니다. 부엌에 딸린 부속 건물을 빼고도, 기둥 사이의 간격이 꽤 넓은, 정면 여섯 칸짜리 대형 건물입니다. 여주인의 공간인 안채의 규모는 그 집의 재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때, 풍산 홍씨의 종택으로서의 위치는 이 건물을 통해서 비로소 드러난다고 하겠습니다.
정원 같은 이 집은 지금 가재도구 등을 모두 밖으로 끄집어 내놓아 매우 어수선합니다. 보수공사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도래마을에는 세 채의 문화재 지정 전통 가옥이 있는데, 바로 이웃한 '홍기헌 가옥'도 함께 한창 보수중입니다. 초가지붕의 문간채와 안채 보수는 대충 마무리된 듯한데 한눈에 봐도 너무 새뜻해 아직 손을 대지 않은 사랑채와 전혀 어울리지 않고 어색합니다. 조만간 새단장하게 될 '홍기응 가옥'의 모습을 미리 보는 것 같습니다.
나머지 한 채는 문간채를 나와 흙담으로 된 야트막한 고샅길을 돌아가면 곧장 만날 수 있습니다. '홍기창 가옥'입니다. 보아 하니 이곳은 지금 사람이 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출입문은 굳게 잠겨 있습니다. 그것도 녹이 슬대로 슬어 열쇠를 꽂아도 도무지 열릴 것 같지 않은 자물쇠는 사람의 발길이 끊어진 지 한참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잠긴 출입문 너머로 집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옛집다운 고즈넉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 홍기응 가옥의 사랑채 옆 흙담을 따라 안채로 걸어오르는 길. |
ⓒ2006 서부원 |
아직도 우리 주변에서 집성촌이라는 이름으로, 민속촌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전통 마을이 제법 남아 있습니다. 그곳에는 땅의 역사가 숨 쉬고 선조들의 삶을 날 것 그대로 엿볼 수 있어 그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저 유명한 하회마을이나 양동마을처럼 철저히 보호, 관리되고 있어 예스러운 멋을 그대로 간직한 곳도 그렇지만, 한때 남도의 내로라하는 반촌이었지만 퇴락한 채 몇몇 옛 집들만이 덩그러니 남아 과거를 짐작케 해주는 이런 마을도 한 번쯤 찾아볼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모해가는 전통 마을의 요즘 현실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을을 뒤로하고 나오면서 만난 마을 주민 한 분의 말씀 한 구절이 오래 남습니다.
"이조(조선)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근방 나주, 영암에까지도 풍산 홍씨의 위세는 대단했지. 번듯한 집들도 많았고. 그러나 지금은 아무 것도 아니야. 뭐가 있어야지..."
출처 : 나의 사랑 한국한문학
글쓴이 : 인간사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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