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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종가기행 ③] 南陽 洪氏 - "문중 땅 개발로 들어온 보상금 조상 받드는 일에 쏟겠다"

회기로 2011. 2. 28. 21:04
[종가기행 ③] 南陽 洪氏 - "문중 땅 개발로 들어온 보상금 조상 받드는 일에 쏟겠다"
[주간한국 2006-04-26 13:42]  

남양 홍씨 문중의 선현 만전당(晩全堂) 홍가신(洪可臣)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요 학자로 일반에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그래서 그를 떠올리는 데 도움될 역사적 사실 몇 가지를 먼저 나열해 본다.

홍가신은 첫째, 부여현감으로 백제의 충신들을 위한 사당을 지어 그들을 역사적으로 복권시킨 인물이다. 둘째, 홍주목사로 있을 때 임진왜란 중에 발생한 반란 사건의 주모자를 잡아 난을 평정한 인물이다. 셋째, 서애 류성룡의 절친했던 친구이며 충무공 이순신과는 사돈은 맺었던 인물이다. 또한 ‘태백오현(太白五賢)’의 한 분인 두곡(杜谷) 홍우정(洪宇定)의 조부이다.

종택을 찾으면 종손이 있고 사당은 물론 관련 유물 유품을 감상하거나 유적지도 둘러볼 수 있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동족 마을은 중심인물 뿐 아니라 후대(後代)에도 그에 못지않은 사회에 알려진 후손들이 배출되기도 했다. 큰종가, 작은종가, 대감댁, 영감댁, 새영감댁, 부사댁, 교리댁과 같은 칭호에 어리둥절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는 반촌(班村)을 찾아도 종택에서 종손을 만날 수 없는 경우가 더 많다. 이는 종손이 외처로 나갔거나 대가 끊겼어도 양자를 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불천위이면서도 제사조차 지내지 않고 있기도 하다. 이 경우라면 종택이라 해도 사당조차 보존하고 있지 않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우선은 그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제사를 모시거나 손님들을 안내하고 대접할 여건이 못 되는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는 판이하다.

문을 닫은 종가는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른 개발로 상당한 경제적 혜택을 받은 경우가 더 많다. 결국 조상의 얼을 계승해 선양하겠다는 종가 또는 문중적 의지가 부족하거나 후손 교육이 소홀해서 생긴 현상이다.

가풍(家風)이 무너졌고 종법(宗法)이 사라진 때문이다. 그 틈으로 종인들의 물질적인 이해 추구나 종손 보다는 내가 낫다는 일부 지손들의 왜곡된 선민의식이 침투했다. 종가를 위하고 종손을 높이는 것은 조상을 높이며 결국 나의 존엄성을 지키는 길이다.

지금 급속한 산업화와 정보화, 그리고 물질적 풍요 속에서 그런 ‘사람의 길’이 있는 것조차 잊고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만전당 홍가신의 종택을 찾아 충남 아산시 염치면 대동리를 찾았다. 이곳에는 홍가신의 종택과 묘소, 사당, 신도비 등 유물 유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특히 문장공 시호 교지와 부친과 부인의 교지 5점은 충남문화재자료 제310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답사를 통해 만전당을 처음 만난 곳은 그의 고향인 충남 아산이 아니라 부여였다. 부여는 만전당이 34살 때 현감으로 부임해 의열사(義烈祠)라는 백제의 충신을 기리는 사당을 건립했던 곳이다.

그리고 사후에는 목민관으로서의 공덕을 기려 후인들이 그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을 건립했고, 현재 그와 그를 존모했던 미수 허목과 그리고 정조를 도와 어진 재상으로 이름을 떨쳤던 영남 남인(南人)의 종장(宗匠) 번암 채제공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그 영당(影堂)의 이름이 도강(道江)이다.

마침 영당에서 춘향(春享)을 모시는 날이어서 세 문중의 후손들은 물론 지역 유림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 들 세 분 선현들이 희구했던 도(道)가 저 백마강처럼 길이 이어지기를 희망하며 명명했다는 구 국립부여박물관 옆에 자리잡은 도강영당은 지금도 향화(香火)를 이어오고 있었다.

이곳에서 만전당의 여러 후손을 만났는데, 모두 아산에서 이 행사를 위해 오신 분들이었다.

행사 당일 홍씨 문중에서는 박을수 교수(순천향대 명예교수)가 지은 만전당 홍가신 연구라는 두꺼운 양장본(2006년 3월 간, 글 익는 들, 616면) 여러 권을 참여 유림들에게 제공해 좌중의 부러움을 샀다. 모인 이들 모두 조상을 현양하려는 뜻이 있는 분들이라 더욱 그러했다.

누구나 낙화암을 둘러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낙화암은 어느 쪽에서 보아도 정겹다. 백제의 그 슬픈 역사에 대표적인 충신들이 있었으니 성충과 흥수 그리고 계백 장군이 그들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흥망은 유수하고 역사의 기록과 평가는 승리자들의 편에서 쓰여 졌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저들을 우러르고 기리지 못한 채 충혼들은 그저 길손들의 탄식에 매몰되고 말았다.

그렇게 흘러온 세월이 당시 까지 9백여 년이었다. 34살의 신임 부여 사또는 백제의 고도에서 망국의 역사를 읽다가 백제의 충신들을 만났고 그들을 추모하기 위해 이듬해인 선조8년(1575)에 사당을 건립해 조정의 공인을 받기에 이른다.

‘만고 충신’이라는 문자가 있거니와, 충신은 왕조가 바뀌어도 영원한 이름이다. 그 사당이 의열사(義烈祠, 충남 문화재자료 제114호)요 그곳에 모셔진 이가 백제의 충신 성충과 흥수, 백제의 명장 계백과 고려시대의 절신(節臣) 이존오(李存吾:1341-1371, 신돈을 탄핵)였다.

이 일에 먼저 박수를 보낸 이가 있었으니, 바로 동문수학했던 친구로 부교리(종5품 ? 직 있던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었다. 그런 인연으로 1581년 초여름에 홍문관 부제학(정3품 직)으로 있던 서애 류성룡은 ‘나의 벗 홍흥도(洪興道, 홍가신의 字)이 명을 받아 고을에 부임해 사당을 건립했다’고 의열사 기문을 쓰게 된다.

현재 이 사당은 고종 때 훼철된 이후 복원되어 1971년 현 남령공원인 부여읍 동남리 산 3번지로 옮겨지었는데 삼문(三門)과 9칸 맞배지붕의 건물에 이후 두 분의 선현을 추가해 현재는 모두 여섯 분을 배향하고 있다.

홍가신은 문과 출신이 아니다. 학문과 행검으로 추천을 통해 출사한 경우로 선비 지향의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래서인지 낙화암 기슭을 한가롭게 오가던 그의 행적이 한 폭의 동양화로 그려진다.

실제로 그는 작은 공부방을 낙화암 동쪽 기슭에 세우고 그 집 이름을 ‘이은(吏隱)’이라 이름 지었는데, 관청 소임을 보는 여가로 학도들과 함께 글을 읽거나 소요하던 거점으로 삼기 위함이었다.

행사를 마친 뒤 찾은 유적지는 충남 홍성읍이었다. 이곳은 그가 1594년(54세) 때 고을 수령으로 부임해 이듬해에 이몽학(李夢鶴:?-1596, 왕족 출신의 서얼)의 난을 평정한 유서 깊은 곳이었다.

그는 이 일로 일약 조정의 큰 상을 받았으니 영원군에 봉해짐과 동시에 청난공신 1등에 책록되어 그 혜택이 후손에까지 이어졌다. 홍성읍 서쪽에 있는 백월산(白月山, 해발 394m)은 홍성의 진산(鎭山)이다.

그 산 정상부근에는 홍성 지역 주민들이 수백 년 동안 신으로 모시고 있는 홍가신의 위패와 비단 옷을 입힌 목상(木像)이 안치되어 있다. 위패에는 백월산신지위(白月山神之位)라고 적혀 있다.

이 고을에서는 ‘홍성대감제’도 열린다. 2004년 12월 원인모를 화재로 사당이 소실되었던 것을 지난 2006년 3월 15일 군비로 개축 준공했다. 지금도 홍가신은 이 지역의 안녕과 평화를 가져다주는 상징으로 그 위치를 점하고 있다.

산을 내려와서도 홍성 지역의 그에 대한 존경을 엿볼 수 있는 곳은 홍성읍 대교리 아산 가는 대로변에 자리 잡고 있는 홍가신청난비와 비각(충남 문화재자료 제165호)이다.

만전당의 종택이 있는 마을에는 그의 묘소와 신도비 그리고 사당이 있다. 그의 신도비명은 조각 작품 측면으로도 일품(逸品)이다.

용주(龍洲) 조경(趙絅)이 비문을 지었고 의성인(義城人) 홍문관 교리(校理) 칠탄(七灘) 김세흠(金世欽)이 본문 글씨를, 대사헌(大司憲) 권규(權珪) 썼다. 산을 등진 평평한 자연석 바위 위에 홈을 파고 세운 신도비는 사면에 모두 비문이 새겨져 있는데, 한 줄에 80자나 되는 극도로 정제된 글씨에 총 4천여 글자로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이다.

본문 글씨를 쓴 칠탄은 안동 내앞(川前) 출신으로 학봉 김성일의 부친인 청계 김진의 후예로 당시 종반(從班) 가운데 월탄 김창석과 귀주 김세호와 함께 내앞 의성김씨 삼문관(三文官)으로 추앙받은 인물이다.

이제는 안동 지역에서조차 그 이름을 기억하는 이가 적은 칠탄 김세흠이 쓴 신도비를 충무공탄신 461주년기념 제45회 아산 성웅이순신축제(4.27-51)가 열리는 아산에서 만난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아산 염치면 대동리에서 종손을 만나지 못했다. 마을 일가 어른들은 종손은 외지에 나가 있다고 소개를 받았는데, 알고 보니 종택을 비워둔 지가 오래였다.

유가의 법도에는 종손은 봉제사와 접빈객을 해야 하는데, 지금은 접빈객이라는 한 축은 완전히 무너졌고 봉제사의 경우 불천위 제사에는 종택으로 와 초헌관으로 참사를 하지만 그것도 불완전한 것이 종손이 오랜 기간 동안 외처에 우거할 경우 위패를 옮겨 모셔야 하기 때문인데, 현재는 그렇게 하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법이 일부 무너진 상태다.

현 15대 종손은 홍익화(洪翼和, 1966년생)씨로 홍승만(洪承晩)씨의 3남 3녀중 장남이며 아직 미혼이다. 그는 2003년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선고(先考)를 따라 1986년에 안양시로 삶의 터전을 옮겼고 여러 사업에 손을 댔다 실패한 뒤 몇 해 전부터는 수산물 양식업에 종사하며 생계를 잇고 있다.

안양으로 오기 전 부친은 온양에서 슈퍼를 운영했다 한다. 노모인 의성김씨를 모시고 단신으로 생활하는 종손은 처음 만났어도 생활이 넉넉해 보이지는 않았다.

아산고등학교를 마친 뒤 상경, 건설회사를 다니다 철골 자재를 거래하는 자영업에 종사했으나 이후 경영이 여의치는 못했다는 종손은 이제 형편이 다소 나아졌다 한다.

종손에게 불천위 제사 때 요즘 제관이 몇 분이나 모이는가를 물었을 때 10분 내외라는 대답에 내심 놀랐다. 영남의 이름난 종가의 불천위제사 때 100여명 좌우가 되는 제관과 장면이 겹쳐졌기 때문이었다.

종손에게는 경제적인 어려움은 한으로 남아 있다. 선고께서는 돌아가실 때 무려 6가지나 되는 암으로 고생했다. 제반 경비를 6남매가 십시일반으로 갹출해 감당했지만 턱없이 부족해 수술조차 해보지 못하고 보내드렸기 때문이다.

만전당의 역사와 다른 문중에 대해 대화를 나누던 중 사십 초반의 종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 그의 조부, 그리고 양자를 왔다는 부친과 일정부분 관계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체계적인 문중교육이 이루어질 시간과 공간적 제약이 그에게 더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쉬움 보다는 편안한 모습만 발견되었다. 삶을 긍정하고 그저 불천위 제사에는 참사를 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바램이 있다면 근자에 아산 탕정 지역 개발로 얻어진 막대한 자금을 조상을 현양하거나 젊은이들이 문중 행사에 많이 참여할 매개체로 활용했으면 하는 정도만 피력했다.

‘사람이 구하는 것이 없으면 인격이 저절로 높아진다.’는 말이 있거니와 막대한 자금이 종중 공동 명의로 들어온 상황에서 어려운 사업 형편에도 종손임을 내세우며 조금의 권리도 주장하지 않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문중회의에 가서는 우선 경청부터 합니다.’ ‘부여의 영당(影堂)에는 여러 번 갔었는데, 저는 아버지가 계실 때는 가만히 있었고, 또 아버지도 문중 이야기에 대해서는 별로 하신 말씀이 없어요.’ ‘아산 종가에는 일 년에 한 네 번 갑니다.’ 그가 한 말 가운데 기억되는 주요한 것이다.

아는 분이 광물질로 수질을 개선하는 기술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한다. 그 사람을 따라 수산물 양식 사업에 손을 댄 종손은 ‘양식업은 탬퍼가 크니깐 재미가 있습니다.’라 한다.

그가 구사하는 유일한 영어 단어인 탬퍼의 의미가 명료하지는 않지만 하여튼 운이 닿으면 많이 번다는 뜻 정도로 이해했다.

그리고 판로를 우려하는 나에게 ‘잘만 키워놓으면 돈 가지고 와 서로 사려고 합니다.’ ‘새우는 수염이 긴 것이 싱싱한 것이니까요, 새우는 출하되고 나서 잘 살면 4, 5일입니다. 수염이 조금씩 잘리면서 죽거든요. 수염은 전문용어로 더듬이라고 해요.’ 종손을 만나 종가 이야기를 들으려다 수산물 양식 ‘전문’ 정보를 듣게 된 묘한 경우다.

부여에서 만난 아산 홍가신 종택 마을 어른들로부터 경북 봉화군 동성면 동양리 두곡(杜谷) 속칭 ‘뜨뜨물(띠디미) 홍씨’를 이야기하며 ‘당홍(唐洪)과 토홍(土洪)’을 입에 올렸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대부분이 봉화의 홍씨 마을을 다녀온 적이 있었으며 안동에 있는 ‘우무실(憂無谷)’의 홍씨 선대 묘소도 훤하게 알고 있었다.

봉화에서 인조의 굴욕을 한으로 안고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서울을 떠나 태백산중으로 터를 잡아 낙향한 다섯 사람의 고결한 조선 중 후기 문신 이 있었다.

이들 가운데 대표자라 할 두곡 홍우정의 조부가 바로 홍가신이라는 사실도 화제로 올렸다. 그 분들이 자긍심을 갖게 한 이름난 조상의 연고지이기에 도의 경계를 넘어 오지인 봉화와 안동을 아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개절공(介節公) 두곡(杜谷) 홍우정(洪宇定, 1596-1656)은 지금까지 고결한 선비로 추앙 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대명천지무가객(大明天地無家客)이요 태백산중유발승(太白山中有髮僧)이라’고 시를 읊조렸다.

이는 ‘밝은 이 세상에 집이 없는 사람이요 태백산 속에 머리 기른 중일세’라는 뜻으로 명나라의 세계에서 오랑캐인 청나라의 세계로 들어감에 세상을 떠나 산중에 마치 중과 같이 살고 있는 자신을 희화(戱化)한 것이다.

이 어록은 지조 있는 선비의 상징처럼 회자되었고 현재 뜨뜨물의 그의 옛집 터에 세워진 유허비 전면에도 적혀 있다.

두곡 홍우정의 이러한 지조는 그의 조부인 만전당 홍가신에게서 유래된 것임은 조금의 의심도 없다. 그리고 만전당의 증조부는 이조참의를 지냈는데, 연산군 때 무오사화(戊午史禍)에 희생된 역사가 있다. 만전당은 참의공파이다. 그의 가문에는 이처럼 면면히 이어진 충절의 정신이 있었다.

임신왜란 청난공신 1등

임진왜란을 맞아 공을 세운 이들에게 호성공신, 선무공신, 청난공신의 세 공신을 선조37년(1604) 6월 25일에 봉했다.

호성공신 1등에 이항복, 정곤수요, 선무공신 1등에 이순신, 권율, 원균이며 청난공신 1등에 홍가신이다.

일반에게는 호성공신과 선무공신이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이들 세 공신은 대등하게 처우되었다. 이를 통해 왜란 중에 일어났던 이몽학의 난이 당시 국가 존립에 치명적인 변란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출처 : 나의 사랑 한국한문학
글쓴이 : 인간사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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