姓氏의 원류를 찾아서 종가기행 ⑥ - 타지 떠돌다 89년 불천위 사당 앞에 종택 짓고 정착
천성적으로 학문을 좋아하는 군주가 있었다. 그는 한 번 글을 읽었다 하면 100번을 채웠으며 병이 들어서도 멈춤이 없었다. 그런 영명한 군주 곁에 뛰어난 소장 학자들이 보필하고 있었으니 신숙주와 성삼문이 그들이었다.
호학의 군주인 세종대왕은 예전에 없었던 관청인 언문청을 설치하고 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우리 고유의 문자인 언문(諺文)을 연구하라고 명했다. 이들은 국왕의 놀라운 발상을 받들어 밤낮으로 연구에 매진하여 한민족의 문화 역량을 세계에 드날린 ‘한글 창제(創製)’를 이루어낸다.
그러나 당시 한글 창제는 사대부들에 있어서는 필요성도 효용성도 주목받지 못했다. 어려운 한자의 사용은 평민과 사대부를 가르는 벽이었으며 한글 창제는 이 벽을 깨려는 도전장이기 때문이었다.
한때 국보 1호로 바꾸자는 논의까지 일었던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이 바로 보한재 신숙주다. 창제 작업에 참여한 당시 나이가 27세. 지금으로 치면 대학교 졸업하고 군 복무 마치고 나와 취업 원서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닐 시기다.
그러한 때 신숙주는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고 인류 역사에 빛나는 위대한 업적을 이룬 것이다. 단순히 세종의 명에 의해 과제를 수행한 역할에 머문 것은 아니었다. 그의 독창적, 진취적 음운학 지식을 오롯이 담아 마침내 빛을 발하게 했다.
지난해 10월 문화관광부에서 선정한 이달의 문화인물에 신숙주가 선정됐다. 한국어문교육학회에서 주최한 학술대회에서 성균관대 임형택 교수는 “조선 시대에 국운이 가장 융성했던 15세기에 사대부 문화을 주도했던 대표적인 문인 엘리트로 신숙주를 꼽지 않을 수 없다”고 찬사했다.
그처럼 조선 초 최고의 엘리트였던 보한재 신숙주 선생의 종택은 경기도 평택시 청북면 고잔리(高棧里)에 있다. 서울서 1시간 거리며 요즘 미군기지 이전 터로 논란이 되고 있는 팽성읍 대추리와도 그다지 멀지 않다.
종손은 신효식(申曉植, 1929년) 씨로 이어온 대수는 17대이다. 종손은 4남 1녀를 두었는데 맏아들은 존호(尊浩, 1953년생)씨며 맏손자는 돈수(敦秀, 1983년생) 씨다.
현재 맏아들은 수원에서 건축일에 종사하고 있으며 고등학교만 졸업했다. 도저히 대학을 보낼 수 없을 정도로 가정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나머지 자식들은 고등학교조차 보내지 못했다며 종손은 그것이 평생의 한으로 남아있다고 한숨을 내뱉었다.
오랜 병환으로 10여 년을 거의 누워서 지내다보니 주름살이 깊게 패인 초췌한 모습이다. 종손에게 종가 이야기를 해달라고 말을 꺼내기조차 민망했다.
우선 종택이 평택에 자리잡게 된 사연부터 들었다. 현재 보한재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산 53번지에 모셔져 있고 종택 역시 그 지역에 있었다 한다. 종손은 고단한 몸을 일으켜 살아온 이야기를 한 꺼풀씩 풀어낸다.
“먹고살기도 힘들었습니다.” 종손의 이 한마디는 평생의 삶을 압축한 말이었다. 그간의 고단한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실린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찡해 온다.
“근자에까지 농사 1,800평을 지었는데, 개인 재산이라고는 밭 한 뙈기 땅도 없습니다. 그저 보잘 것 없는 종중 땅에 기대 농사짓고 살았온 셈이었죠. 그러던 중 97년에 오이 작목반 일을 보다가 반골(?)을 다쳐 줄곧 병원에 다녔지만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렇게 자리보전하고 있습니다.”
학력을 물으니 일제 시대 때 겨우 국민학교만 다녔고 한문은 7, 8세 때 조금 배운 것이 전부라고 한다.
종손의 부친인 신태우(申泰雨, 16대)씨는 고종27년(1890)에 태어나 보한재 종손으로 입후(入後: 양자로 들어감)했다. “아버지는 학자라서 집안일은 손 하나 대지 않았습니다”라고 종손은 회고한다.
그러니 집안은 말이 아니었고 자식들 교육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생활이 어려운 종가 살림 때문에 충주 등지로 옮겨 살았고 89년 이곳 평택 고잔리로 들어와 불천위 사당 앞에 집을 짓고 산 게 종택이 이곳에 자리잡게 된 이유라고 말했다.
이곳은 보한재의 맏아들인 신주(申澍)의 세 아들 중 셋째인 신종호(申從濩, 호 三魁堂)의 종택이 있던 곳이었다. 종손은 고령 신씨 삼괴당파 종중에 찾아와 새 보금자리를 튼 셈이다. 삼괴당파는 보한재 자손 중 저명한 종중으로 알려져 있다.
이 마을은 모진 한국전쟁 시기에도 손가락 하나 다친 주민이 없을 정도로 평온하게 지냈다. 정작 종손 자신은 참전용사였다. 제1훈련소에서 신병훈련을 마치고 강원도 속초로 배속되어 27사단 창설 때부터 복무했다. 다행히 전상을 입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일을 할 수 있었다.
종손은 이러한 모든 것들이 조상들이 뿌린 음덕(蔭德)과 적선(積善) 때문이라고 여기고 있다.
종손의 농사 솜씨는 이 지역에서도 정평이 날 정도였다. 종부인 함평 이씨의 증언에 따르면 성미가 불같았던 종손은 3대 독자의 귀한 몸이면서도 국민학교를 졸업한 뒤부터 쟁기를 지게에 지고 다니며 해보지 않은 농사 일이 없었다고 한다.
손재주가 뛰어나 동네사람들이 고장난 물건을 갖고 오면 그것을 죄다 손봐주기도 했단다.
만년에 뇌졸중에 걸려 더욱 고단한 삶을 살던 선친은 66세를 일기로 이곳에서 세상의 인연을 버렸다. 아직 묘소에 빗돌 하나 깎아 세우지 못한 것도 종손의 한으로 남아 있다는데 그 역시 질기게 따라다닌 가난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난한 살림에도 종부는 소반에 차를 타서 내온다.
“선친은 30, 40년 전에 이미 어려운 사람이 잘 곳이 없으면 데려다 재워주고 먹여주었어요. 저도 남 주는 것을 좋아해요. 족보를 보면 우리 종가에는 환갑을 지낸 사람이 없어요. 단명하는 집안이죠. 제가 여든 가까이 이렇게 오래 살고 있는 것은 우리 집안의 기록일 겁니다. 문충공 보한재 선조도 56세에 돌아가셨으니까요.”
종손은 조상들의 음덕에 무엇인가 보답을 해야 한다는 뜻은 가지고 있으나 자신의 말대로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어서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란다.
그래도 종손으로서 봉제사 접빈객의 책무를 한 시도 잊은 적은 없었다. 서가를 보니 보한재 선생과 관련한 서적은 물론 타 문중과의 교류 흔적을 보여주는 책도 보이지 않았다.
한우충동(汗牛充棟)이라고 할 정도로 다른 문중에서 간행한 책들까지 서가에 가득 채우는 다른 종택의 모습과는 판이하다. 정말로 이곳이 한글을 창제한 대학자의 17대 종손이 사는 종가가 맞나 싶은 생각으로 재차 족보를 손으로 짚어하며 확인해 보았다.
적선지가(積善之家)인 이 집이 어떻게 이처럼 가난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있을까? 보한재 종가뿐만 아니라 다른 종손들의 삶도 왜 그렇게 고단할까? 봉제사 접빈객의 부담이 너무도 큰 것일까? 권한은 없고 책임만 과중한 것이 아닐까? 그나마 문중 땅 매각 등 약간의 이권이 생기면 송사에 휘말려 마음고생까지 겪는 게 그들이다.
종손이 빨리 쾌유하기를 바란다는 말과 함께 보한재 종택의 문을 나서면서 생각해보는 오늘날 종가들의 슬픈 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