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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南陽 洪氏 - 74년 만에 귀향해 종택짓고 절개지킨 名家의 얼 계승

회기로 2011. 2. 28. 21:06
南陽 洪氏 - 74년 만에 귀향해 종택짓고 절개지킨 名家의 얼 계승
[주간한국 2006-06-07 14:57]  

姓氏의 원류를 찾아서 종가기행 ⑦
남양 홍씨 16대 종손 홍대교씨, 초등학교 교장을 정년 퇴임… 마을 난개발 막기에 앞장


경북 봉화군 문수산 아래 산수유 마을이 있다. 봄에는 노랗게 산수유가 물들고 가을에는 마을 전체가 발갛게 불탄다. 산수유 고목은 10여 그루가 넘는데, 여름에는 느티나무처럼 시원한 그늘을 만든다.

그래서 마을이 산수유를 품고 있는지 아니면 산수유가 마을을 안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자연과 하나가 된 평화스러운 곳이다.

마을의 생김새도 또한 특이하다. 앞뒤가 산으로 꽉 막혀 있다. 이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마을명에 막힐 두(杜)자가 들어 있다. ‘막힌 마을’이다. 그러니 앞이 트여 있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이방인에게 신기한 것은 그 막힘으로 인한 답답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편안함이 가슴 속에 스며들 정도다. 행정명으로는 봉성면(鳳城面) 동양리(桐陽里)며 더 작게 가르면 후곡(後谷)마을, 또는 뒤뜨물이다.

400년 전 이곳에 터를 잡은 이가 절의를 상징하는 숭정처사(崇禎處士)로 이름 높은 개절공(介節公) 두곡(杜谷) 홍우정(洪宇定)이다. 두곡은 연산군 무오사화 때 화를 입은 참의공 한(瀚)의 5대손이요 선조 때의 명신 문장공(文莊公) 홍가신(洪可臣)의 손자이기도 하다. 명신(名臣)의 자손에 명절(名節)이 난 경우이다.

필자는 10여 년 전 안동상공회의소에서 발간하는 잡지에 두곡 선생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근자에 만전당 홍가신의 유촉지를 찾으면서 다시 한번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래서 우선 두곡 홍우정의 종손을 찾아 나섰다.

16대 종손은 홍대교(洪大敎, 1939년생)씨로 안동사범학교 10회 졸업생이며 평생 초등학교에 봉직하다 2000년 8월 교장으로 정년퇴임한 원로 교육자다. 42년 5개월을 봉화에서만 근무했다는 종손의 외가는 안동 부포의 진성 이씨요 처가는 경주 양동(良洞)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선생 종가다.

진외가(陳外家: 아버지의 외가)는 안동 하회 묵계댁(默溪宅)이다. 그러니 종부가 회재 종가(종손 이지락의 고모부가 홍대교다)의 종녀(宗女)라는 말이다. 영남 명문가의 통혼(通婚)의 범위가 얼마나 넓었는지 짐작케 해준다.

종손의 부친 홍성원(洪性源)은 1975년 73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선친은 글씨에 뛰어났는데 태백오현(太白五賢)의 한 사람인 각금당 심장세 선생의 묘비문과 두곡 선생의 문집 석판본을 썼을 정도였다고 한다.

여느 종가가 그러하듯이 두곡 종가에도 한때 가난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한국전쟁 때는 소개령마저 발동돼 험준한 산악지대였던 이 마을에 남아 있기조차 어렵게 되었다.

소개령으로 지금 살고 있는 봉화초등학교 앞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이사온 것이 74년 전. 이제 환고향(還故鄕)이다. 평소 종손은 조상이 살던 마을로 돌아가 선조의 얼을 계승해야겠다는 의지가 강했는데 그 숙원을 푼 것이다.

선조의 얼 계승은 마을에 종택을 짓는 일로 시작했다. 옥류암 정자 옆에다 터를 다져 토종 목재로 25평의 아담한 한옥을 지었는데 이제 완공을 앞두고 있다. 몇 번씩이나 ‘74년 만의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 그동안의 한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옥류암은 홍우성 선생이 두곡마을 맑은 샘물이 흘러내리던 문수산 기슭에 은거하며 지었던 정자. 그런데 이 옥류암에는 현판이 없다. 누군가 그 현판을 떼간 것이다. 도난당한 옥류암 현판은 미수 허목이 특유의 유려한 필치로 쓴 가로120cm, 세로 60cm나 되는 대작이다.

그런데 필자는 일전에 서울 인사동 모 골동품 수집가의 방에서 몸통과 생이별한 옥류암 현판을 상면할 수 있었다. 두곡의 평생 지기(知己)였던 원두표(元斗杓, 자 子建)의 멋스러운 시 한 편을 새긴 아담한 현판도 함께 만났다.

"옥류천 가 처사의 암자, 그 청유(淸幽)함은 영남에서 으뜸일세, 연꽃이며 구기자, 국화며 매화와 송죽을 심었는데, 도연명이 은거했던 그곳 보다 멋있어" 친구가 살고 있는 옥류암을 노래한 시이다.

수집가가 그것을 구입한 사연을 들어보니 글씨가 너무 좋아 내용도 모르고 경매장에서 거금을 주고 산 것이라 했다. 그러나 수집가의 마음이야 이해되지만 아무리 좋은 글씨라도 응당 그것이 있어야 할 곳을 떠나 외롭게 존재한다면 그 진가는 떨어지는 것.

아름다운 신록의 숲속에서 울음 우는 뻐꾸기 소리와 물 소리에 귀 기울이며 사라진 현판을 애타게 기다리는 옥류암 정자가 한없이 처량하게 느껴졌다.

“일찍 신학문을 접하고 평생을 초등 교육에 봉사하느라 한학이나 보학(譜學)에 정통하지 못했다”는 종손은 “타 문중과의 교류도 폭넓지 못해 아쉽다”는 회한도 덧붙였다. 하지만 종택 사랑방 한 켠에 마련된 서책이나 문서 더미들을 보며 그런 말이 겸사(謙辭)라 생각이 든다.

17대 종손이 될 맏 자제에 대해 물었다. 종손은 부모로서 자식의 扁?지도를 잘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올해 마흔네 살인데요, 제가 평생 교직생활을 했으니 자식은 넓은 세상에 나가 잘 살라고 이공계(영남대 공업화학과)로 보냈어요. 지금은 수원에 살고 있지요. 지나고 보니 인문학을 배우도록 하는 건데···.”

자식에 대한 걱정은 종가의 종손도 예외일 수 없지만 자식이 자신을 이어 종택을 지켰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근저에 깔려있는 것이다. 종손의 선친도 외동, 자신도 외동이라서 가까운 핏줄이 6촌이라는 말도 했는데, 집안이 고적(孤寂)해 걱정이라는 의미다.

“우리 선조께서는 정말 깨끗하게 사셨습니다. 서울에서 이곳 태백 산중으로 내려오실 때 가재도구 하나도 가져오시지 않았어요. 그것은 우리에게 선조께서 쓰시던 유품이 하나도 없다는 것으로 증명됩니다.”

덧붙여 종손은 “두곡은 우리 선조의 호와 똑같은 마을인데 참 산 좋고 물 맑은 곳입니다. 개울에 가보면 아직도 가재가 살고 있으니 말해 무엇하겠습니까?”라고 자랑한다.

가재가 사는 마을이라는 말을 들으니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어릴 적 가재를 잡은 기억까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나도 산골에서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두곡은 세파에 오염되지 않고 깨끗하게 보존된 마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내 종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어요. 관에서 마을에다 무슨 전원단지를 만든다고 야단입니다.” 분노를 내뿜는다.

종손의 말에 따르면 봉화군은 ‘대도시 전원생활을 꿈꾸는 은퇴자들을 위한 파인토피아 전원단지 조성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5만~ 6만평 규모에 막대한 국비와 군비를 투자한다는 마스터 플랜이다.

민간자본을 유치해 단지 내에는 도로, 상하수도, 주차장, 오폐수처리장, 클럽하우스, 바비큐장, 한방웰빙체험장 등을 설치할 계획이라고도 한다. 사업 기간은 2007-2009년.

조용하던 마을은 이제 거대한 개발의 회오리가 닥칠 운명이다. 종손의 분개를 보니 주민의 동의를 모두 얻지 못한 것 같다.

종손은 그래서 요즈음 잠이 안온다고 했다. 말도 안 되는 사업을 구상한 군 당국과 공무원을 향한 원망이 대단했다. “모든 것을 걸고 마을을 지키겠다”며 반대의지도 결연하다.

개발을 하면 선대(先代) 토지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종가에 막대한 금전적 보상이 따르겠지만 종손은 그것이 중요하지는 않다고 한다.

현대인이 편하게 살고자 아름다운 자연을 누더기로 만든다면 이곳을 찾아와 은둔한 조상들에게 볼 면목이 없다는 것이다. 환경훼손의 불의를 거부하는 종손에게 만전당과 두곡 선생의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음을 보았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피는 못 속인다’고 말했는가 보다.





출처 : 나의 사랑 한국한문학
글쓴이 : 인간사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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