姓氏의 원류를 찾아서 종가기행 ⑬
20대 종손 이주백(李柱白) 씨
3대가 한 집에… "조상 묘소 40여 기 지켜온 것에 자긍심"
광성군(廣城君) 이극감(李克堪)의 조부인 탄천(炭川) 이지직(李之直)이 지은 ‘유거(幽居)’라는 작품에 ‘하이소장일(何以消長日) 신시사수항(新詩寫數行)’이라는 구절이 있다. ‘어떻게 긴긴날 보내나, 두어 줄 새 시나 써보는 수밖에’라는 내용이다.
포은 정몽주의 제자요 문과에 급제해 목민관으로 일하다 청백리에 뽑힌 이지직이 살아온 삶의 궤적을 감안하면 행간에 유유자적의 격조가 느껴진다.
이지직의 아들 3형제와 차남의 다섯 손자 모두 문과에 급제했다. 더할 나위 없는 집안의 성취이다. 이 가문을 예전엔 ‘광주 이씨(廣州李氏) 둔촌가(遁村家)’라 불렀으며 반가(班家)의 부러움을 샀다.
다섯 아들 형제가 문과에 급제한 예는 고려 시대 단양 우씨 우현보(禹玄寶)와 조선 시대 전의 이씨 이예장(李禮長) , 순흥 안씨 안충후(安忠厚) , 함양 박씨 박홍린(朴洪鱗) , 남원 윤씨 윤서(尹曙) , 광주 이씨 이인손(李仁孫) 등 1,000여 년 동안 여섯 집에 불과하다.
‘격조’ 있는 명문가 광주 이씨의 성세(聲勢)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충북 괴산군 불정면 삼방리 연지에 사는 광성군 이극감의 종손을 찾아 먼저 도착한 곳은 종손의 둘째아들이 운영하고 있는 식당이었다. 그곳에는 20대 종손 이주백(1933년생) 씨와 차종손 이광희(李光熙, 1958년생) 씨가 함께 외객을 맞았다.
필자는 무엇보다 광양군(廣陽君) 이세좌(李世佐), 탄수 이연경(李延慶), 임진왜란 때 3등공신에 책봉된 광남군(廣南君) 이광악(李光岳) 장군이 바로 이극감의 직계 주손(胄孫: 맏손자)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한 집안에 이렇게 훌륭한 인물들이 여럿 배출된 예는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가문의 최고 명예는 문묘(文廟)에 배향되는 것이며 그 다음이 나라에서 불천위로 인정받는 일이다. 그리고 나라에 공을 세워 군(君)에 봉해지는 것이 있고 선비들로부터 선생으로 추앙 받는 것도 매우 명예로운 일로 여겨졌다.
그런데 광주 이씨 집안은 이 모든 것을 골고루 갖췄을 뿐 아니라 직계로 여러 사람이 봉군(封君)이 된 자랑스런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특히 이연경은 화담 서경덕 등 조선 중기의 대학자를 배출한 이로 사림의 존경을 받은 이다. 그의 종손 역시 이주백 씨라는 말이다.
점심을 먹은 뒤 묘소와 종가 그리고 불천위 사당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근자에 이장(移葬)한 이연경의 묘소는 집 근처에 있고, 이극감의 묘소는 집에서 수십 리 떨어진 곳에 모셔져 있다. 묘소 아래에는 이봉재(二峯齋)라는 다소 퇴락한 재사가 과수원 중간에 자리잡고 있다.
종손은 전형적인 농업 경영인이다. 조상과 땅이 소중한 줄만 알고 평생을 순박하게 살아온 삶의 흔적과 무게가 고스란히 몸에 배어 있었다. 종부인 순흥 안씨와 4남 2녀를 두고 있다.
자연스럽게 농사 이야기로 대화가 시작됐다. 그는 벼농사와 담배, 고추를 골고루 지어보았지만 돈을 벌지 못했다고 한다. 자식 교육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뜻대로 하지 못했다고 회한을 토로한다.
종손이 되는 과정을 묻기 위해 “길사(吉祀)’를 지내느냐”고 했더니 그 용어 자체를 모른다고 답했다. 3년상을 난 뒤 '종손 취임식'과 같은 제사를 지낸 지 오래라 그 예(禮)마저 없어진
때문이다.
농촌에 묻혀 종가 지켜나갈 차종손
차종손 이광희 씨는 고등학교만 졸업했지만 문중 일은 물론 농촌 문제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른 시기 부친을 대신해 종무를 보았고 타 문중의 종중 운영 모범 사례도 배워 그렇게 실천하려는 열정도 넘쳤다. 그러나 종가의 희생으로 내린 결단을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을 뿐더러 호의의 일부를 곡해하기도 한 뒤로는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한다.
그는 종가에서 40여 기나 되는 조상 묘소를 단 하나도 실전(失傳)하지 않고 관리하고 있는 것에 대해 무한한 자긍심을 갖고 있다. “땅 팔아 서울로 간 사람 치고 잘된 사람을 못 보았습니다.” 그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가식이 아닌 진심으로 조상을 받들고 있는, 천상 평생 농촌에 묻혀 종가를 책임질 사람으로 보인다.
처음의 화제로 돌아와 농사에 대해 물었더니 자신 나름의 ‘농부 철학’을 외객에 강의한다. “농사를 2만여 평 짓고 있습니다. 그런데 땅 2만평을 경작하면 1만평 정도는 버린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합니다.” 도시인에게는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랬더니 “운이 좋으면 2만평 모두 풍년이 들 수는 있겠죠. 그러나 한 가지 작물만 지을 수는 없잖아요. 만약 흉년이 들면 완전히 알거지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작물의 작황이 좋으면 다른 한 가지는 형편없으니 자연히 땅의 절반은 포기하는 셈이지요”라고 자세하게 부언한다.
확고한 철학이 있으니 농사로 돈을 좀 벌었겠다고 하자 “빚이 2억이 넘습니다. 트렉터만 세 대를 샀어요. 작년에는 100마력짜리 트렉터를 7,100만원 주고 샀는데 이 모든 것이 빚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산 농기계 값만 3억원이 넘어요”라고 한숨을 길게 내쉰다.
빚만 자꾸 쌓이는 농촌의 어두운 현실을 알리고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투쟁에 나서게 됐고 지난 5·31 지방선거 때는 기초의원 선거에도 출마했다. 그러나 그마저 좌절감만 맛봤다.
요즈음엔 상심을 털기 위해 하나뿐인 아들 교육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극감의 22대 종손이 될 그는 현재 초등학교 5학년이다.
“결혼은 ‘거짓말이 서 말’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농촌에서 종택을 지키는 종손들은 결혼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고 아들의 장래에 대해 걱정하는 차종손은 “중매 형식을 통한 연애로 맞은 부인이 묵묵히 부모를 모시고 종가 제사 등을 감내하는 것이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라고 한다. 자신의 결혼은 그마나 천운이었다는 말이다.
그는 종가가 여러 번 도난 당한 뒤 남은 문중 유산에 대한 보존에 골몰했다. 그러다 천안에 독립기념관이 개관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에 유물을 기탁했다. 임진왜란 때 공신으로 책봉된 이광악 장군이 쓰던 칼이며 받은 교지 등이 포함되어 있다.
현재 집안에는 일부 교지(敎旨)와 은제(銀製) 세공 작은 향로 두 점만 보관하고 있다. 이 향로는 직계 조상들의 불천위 제사를 위해 국왕이 하사한 물품이 아닌가 생각된다.
새로 지은 양옥 종가에서 이극감의 20, 21, 22대 종손 3대가 함께 모여 사는 모습 속에는 옛 것을 계승하는 자부심과 사람 사는 정이 물씬 풍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