姓氏의 원류를 찾아서 종가기행 ⑭
18대 종손 서용준(徐庸俊) 씨 - 이념 광풍에 아버지 잃고 집안 쇠락, 문중 도움으로 한때 정치 입문
경북 영주시 단산면 사천(沙川)1리에 있는 달성 서씨 집성촌은 18대에 걸쳐 선비의 전통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는 보기 드문 마을이다.
서씨들이 모둠살이를 하고 있고, 종손이 함께 살고 있으며, 아직도 문중의 법도가 살아 숨쉬는, 영남 반가(班家)의 풍조가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다. 마을 사람들은 종손의 도리를 논하고 지손으로서 종가를 보존할 대책에 다 같이 고민한다. 마을에는 골기와집이 여럿 있고 별당형 정자도 눈에 띈다.
종손은 서용준(徐庸俊, 1949년 생) 씨이다. 18대라는 말만 들어도 보학(譜學)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그 유구한 문중 역사를 단번에 짐작할 수 있다.
경북 북부 사람들은 이 마을을 ‘새내’라고 부르고 이곳의 달성 서씨들을 ‘새내 서씨’라고 말한다. 최근 이 마을과 이웃한 순흥 소수서원 옆에는 선비촌이 조성되었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새내 마을이야말로 선비의 정신과 역사를 간직한 진정한 '원조 선비촌'이 아닐까 한다. 그 이유는 이렇다.
깊이 있는 학문, 대 이은 문과급제
새내 서씨들은 여러 대를 이어오면서도 예(禮)를 지키며 남에게 몹쓸 일을 하지 않았다. 또한 글을 읽는 데 매진했고 문집을 내는 등 학문 활동도 꾸준히 이어왔다. 그 결과 생원이나 진사 나아가 문과에 급제한 자손들이 대를 이어 배출되었고, 지역의 덕망 높은 학자를 찾아가 그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그런데 일견 단순할 것 같은 이러한 것들이 그 실천을 염두에 두면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된다. 문과의 경우도 조선 시대 500여 년 동안 모두 1만여 명의 급제자를 배출했는데, 서울을 제외하고 전국에서 가장 많은 급제자를 배출한 안동에서조차 그 수는300여 명이 안 된다. 그러니 한 마을의 성씨들로 좁혀 보면 급제자는 극소수에 불과한 셈이다. 안동의 큰 문중도 500여 년간 20명을 넘어서는 곳은 드물었다.
그런데 새내 서씨들은 숙종 이후에야 정치적으로 복권됐음에도 불구하고2명의 급제자를 배출했고 생원과 진사만도 10명 이상이 나왔다. 그리고 새내 사람들 중 문집을 낸 이가 네 명이나 된다.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영의정을 지냈으면서도 문집을 남기지 않은 이가 허다함을 감안하면 이들의 선비 지향의 정도를 알 수 있다.
새내 서씨들은 입향조에 대한 자긍심도 대단하다. 종손의 18대조인 돈암 서한정은 험난한 고난의 길을 스스로 택했다. 그 길은 충신의 길이었다. 세조가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즉위하자 왕위찬탈의 불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단종과 운명을 같이 했다.
후손들도 그의 유전자를 타고난 때문인지 이 지역의 다른 권문세가 사람들에게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그 당당함을 유지했다. 그래서 향중에서는 ‘새내 서씨는 자존심이 강하다’고 입을 모은다.
글을 빌리지 않고, 양자를 하지 않으며, 재물을 남에게 빌리지 않았다는 소위 ‘삼불차(三不借)’를 문중의 자랑으로 여긴다는 영남 반가가 있지만, 새내 서씨들은 적어도 남에게 글을 빌리지 않는다는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종가는 예전엔 입구(ㅁ)자 집과 사당 그리고 별당형 정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게다가 집 사방을 정겹게 둘러싼 담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모든 것이 퇴락했고 사당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그나마 입구자 골기와집과 정자도 이제 그 생명력을 다한 듯 가쁜 숨을 내쉬는 형상이다. 그래서 급기야 500년 전통의 새내 서씨 종가에는 20여 평의 조그만 슬라브 양옥집이 대신 지어졌다.
할아버지 뒤이어 조상제사 받들어
종택의 쇠락한 역사는 종손의 집안사와도 너무도 닮았다.
새내 종가는 이 지역에서도 이름이 높았다. 문명(文名)이 있었고 가산 또한 대대로 부족함이 없었다. 현 종손의 조부인 서정례(徐庭禮) 씨도 뛰어난 글 솜씨로 주위에 알려졌다. 그러나 그 글을 널리 알리지는 못했고 향중의 타문중과 교류도 활발하게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종손의 부친인 서석현(徐錫鉉) 씨는 두뇌가 명석했지만 한국전쟁 직전에 사상범으로 몰려 즉결 처분을 받았다. 글밖에 모르던 한 청년이 시대를 잘못 만나 당한 허무한 죽음이었다.
당시 현 종손은 모친인 함양 여(呂)씨(75)의 태중에 있었다. 유복자(遺腹子)였다. 전쟁을 전후해 이 마을에서는 좌익이든 우익이든 간에 10여 명의 청년들이 이념문제에 휩쓸려 희생되었다. 그 참혹한 광풍(狂風)에서 새내 종가도 비켜설 수는 없었다.
완고한 조부 밑에서 전통적인 교육을 받았던 종손의 진로에 대해 문중에서는 신학을 해야 한다고 권유했다.
이는 조부의 뜻과는 다른 것이었으나 승중손(承重孫: 아버지를 할아버지보다 먼저 여의어, 할아버지 뒤를 이어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장손)이 될 현 종손은 마을 어른들의 손에 이끌려 대구 협성상고?졸업한 뒤 건국대학교 생물학과에 진학한다. 이때 문중에서는 등록금을 마련하고 방을 얻어주는 등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 일을 기획한 이는 앙산(仰山) 서정순(徐庭純, 1915-1985) 씨였고 소위 메신저 역할을 한 이는 서석호 씨였다.
서정순 씨는 심훈의 소설 ‘상록수’에 나오는 주인공 박동혁과 비슷한 삶을 산 이다. 그는 계몽주의 사조를 알고 실천했던 혁신 유림이었다. 처가에서 한학을 배웠고 독학으로 신학문을 했으며 농협운동과 지역 교육(영주시 교육위원회 의장 역임)발전에도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새내 마을의 옛 영화를 부활시키기 위해서는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것이 최우선임을 인식하고 종중의 재산을 할애해 서울에 학사(學舍)를 마련하고 될성부른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중도에 종가와의 갈등으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의 청사진의 첫발이 차종손을 서울로 유학시키는 것이었다. 그가 뿌린 씨앗은 자신의 아들과 손자, 증손자 3대를 서울대학교 동문으로 만들었고, 그 외에도 명문대학과 국가고시 합격자, 기업체 간부 등을 잇달아 배출하는 것으로 열매를 맺었다.
그러나 문중과 종손과의 관계는 순탄치 못했다. 이는 종손 조부(徐庭禮)의 욕심 때문이었다. 급기야 송사로까지 번졌다. 그러한 갈등 속에서도 장래 종손의 성취를 위해 문중 사람들은 희생을 감수했다. 그러나 완고한 조부 밑에서 아비 없이 어린 시절을 보낸 종손은 도시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문중 장학금으로 서울에 유학시킨 보람도 없이 대학 졸업 후 종손은 걸맞는 직장을 얻지 못했다. 그리고 28세에 봉화에 사는 함창 김씨(1951년 생) 규수와 결혼해 1남 1녀의 아버지가 되고, 오랫동안 서울과 새내를 오가는 생활을 계속했다.
문중에서는 종손의 생활 안정과 사회 적응을 위해 정치 지도자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택한 것이 종손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선거에 출마토록 하는 것이었다. 이 일 역시 문중 어른들이 발을 벗고 나섰다. 서정순 씨는 연설문을 썼고 서석호 씨는 선거기간 자동차를 대절해 지역을 돌며 유권자들과 열심히 접촉했다. 결과는 당선이었다. 새내 서씨들의 단결력의 승리였다.
그러나 종손의 정치인 삶 또한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왜 그랬냐고 물었더니 뜻밖에도 어색해 하며 “내가 수신제가(修身齊家)를 하지 못해서 모든 일이 그렇게 되었어”라고 말한다. 가정사의 아픔을 시사하는 말이었지만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그것을 가슴에 묻고 말하지 않겠노라고 한다.
담배는 많이 피워도 술은 입에도 못 댄다는 종손은 12년 전 위암으로 수술까지 받은 상태라 건강이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말은 안 해도 종손에게는 30세에 가까운 맏아들(徐祥勳)의 장래에 대한 수심이 겹쳐 있는 듯하다. 현재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그가 아직 미혼인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종가의 장래를 이제 걱정하는 문중 사람들도 이제는 얼마 남지 않았다. 저마다 자신의 삶과 생계 문제에 골몰하는 치열한 경쟁시대에 어느 누가 종가와 종손의 애환에 자신의 일인 양 관심을 가져줄까. 500년 종가의 앞날이 그렇게 밝아 보이지는 않는다. 왜 이제와서 그들이 쇠락한 것인지, 누구의 잘못인지 그저 답답할 뿐이다.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는데 한국인들의 뿌리인 종가가 자꾸만 허약해지면 정체성을 잃은 문중, 사회, 국가가 어디로 갈지, 그것은 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