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1년 6월에 대관사(大官寺)의 우물 물이 피가 되었고, 금마군(金馬郡) 땅에 피가
흘러 그 넓이가 다섯 보(步)가 되었다. 왕이 죽었다. 시호를
무열(武烈)이라 하고, 영경사(永敬寺)의 북쪽에 장사지냈으며
묘호(廟號)를 올려 태종(太宗)이라 하였다.
다음은 김춘추의 죽음에 대한 기록입니다. 통상 죽음 앞에 용의 출현이나 피와 호랑이 같은 내용이 나오는 사례는 매우 많습니다.
무언가 은유적인 표현으로 어떠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일종의 힌트만을 남겨놓아 추리할 여지를 남겨둔것 같이요. 저는 삼국사기에 김춘추의 죽음은 정상적인 죽음이 아니라 대관사에서 백제 멸망에 전사한 신라장수들의 넋을 위로하던중 일어난 암살이며, 그 배후세력은 고구려나 백제가 아닌 아들 김법민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증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다음은 김법민이 왕에 즉위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입니다.
원년(661) 6월에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하던 인문(仁問)과 유돈(儒敦)
등이 돌아와 왕에게 고하였다.
황제께서 이미 소정방을 보내 수군과 육군 35도(道)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하고, 마침내 왕께 명하여 군사를 일으켜 서로 응원하라고 하였습니다.
[왕께서] 비록 상복을 입고 있는 중이지만 무거운 황제의 칙명을 어기기는
어렵습니다.
사실상, 김법민의 일생일대에 왕의 자리를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인물은 동생 김인문입니다.
실제로 당나라에서는 김법민 보다는 당나라에서 오래 생활해온 김인문을 매우 총애하고
훗날 나당전쟁때는 김인문을 신라왕위에 앉혀서 신라전쟁에 활용하기도 하였을 정도입니다.
아마, 김춘추가 죽기직전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멸망직후 부터 태자자리에 있던 김법민의
정통성 확보보다는 오히려 김인문을 신라 왕위에 올려 내분을 노릴 계획을 해왔을 것입니다.
그게 가장 효과적인 내부분열을 노리는 방법이기도 하였고요. 손쉽게 신라를 차지할수 있었던
카드를 보유한 것입니다.
중요한것은 김춘추가 죽고 나서 그 시점에 김인문이 당나라에서 복귀하였다는 것입니다.
김인문의 세력들이 힘을 키워 자신의 왕위즉위에 걸림돌이 되기 전에 김법민은 아버지 김춘추를
죽여놓아야 했던게 아닐까요???
또한, 고구려나 백제가 김춘추를 암살했을것이라는 주장도 간혹 나오는대요. 그 점에 대해선
백제 분서왕의 경우처럼 낙랑 자객에게 암살당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이를 통해 볼때
제 아무리 신라라고 하고, 역사가 승자의 편이라고 하더라도, 신라 외부의 적이 김춘추를
암살했다면 필시 그 기록을 남겼을 것이며, 그에 대한 책임도 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내용이 없었으며 고구려는 그당시 북한산성 공략에 심혈을 기울였을 시기라
오히려 백제쪽이 그당시 접경지역이었던 익산 주위에서 암살시도를 했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이나, 만약 백제가 김춘추 암살을 시도했다 한다면, 오히려 그 혼란을 틈타
총공세를 해야 하나 반대입니다. 오히려 김춘추가 죽고 나서 백제는 신라군의 총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패배하고 말죠.
또한, 김법민이어야만 충분히 아버지를 암살하고도 그 기록을 은폐할수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그가 정말 아버지를 암살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긴다면 그당시 병권을 쥐고 있었던
김유신이나 김춘추와 동고동락한 수많은 사람들의 반란에 휩싸였겠죠. 그래서 김법민은
다른 사람 몰래 아주 은밀히 김춘추를 제거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더더욱 수상한 점은 김법민의 즉위 이후 행보입니다. 보통 즉위직후, 왕이 타국을 침범하는 것은 내부의 결속력을 강화하기위해서이죠. 아무래도 이시기 김법민은 김춘추의 죽음이 뭔가 꺼림직한 내부의 분위기를
외부로 돌리고자 이러한 정벌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것도 아무리 당나라의 요구가 있다 하더라도
왕이 죽은지 겨우 한달밖에 안된 시점에서말이죠.
또한, 김춘추 즉위 때와는 다르게 김법민 즉위시기엔 반란이 잦습니다.
박도유의 반란이나, 수세의 반란, 대토의 반란등 매우 잦았습니다. 물론 이러한 인물들은 모두
백제나 당나라의 개입으로 인한 반란이었지만, 그만큼 김법민에게 불만이 많았다는 점입니다.
특히나 김법민은 김진주,진흠이 백제부흥운동 진압에 병을 핑계로 출진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일족이 죽임을 당합니다. 물론 전쟁시에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죽게되는것은 당연하지만
반란을 일으킨 대토같은 인물도 가족들은 천인신분으로 강등시켰다고 한 점에서 볼때
반란만큼 큰잘못도 아니며, 설령 죽임을 당하더라도 일족을 전부 제거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김법민에게 있어 김인문 일파의 제거 구실로써 이들과 일족을 전부 제거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김법민의 이러한 행보는 점점 김인문을 압박하였을 것이고 결국 그는 당나라라는 타국의 땅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죠. 여러모로 김인문에게 있어 신라내부에 정치적 입지가 약화된 것에는
김법민의 이러한 행동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나라가
김인문을 신라왕위에 책봉하고 전쟁을 일으켰음에도 당나라의 예상보다 반란이나 내분이
효과적으로 먹히지도 않았던 것이고요.
사료의 부족으로 김춘추의 죽음의 이유는 어디까지나 추론일 뿐, 진실은 알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느 왕의 죽음 앞에 용이나, 피 같은 불경한 내용이 개입된 경우처럼 은유적으로나마
왕의 죽음뒤엔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고 알리기 위한 왕을 죽인자들의 최소한의 양심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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