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날까지...
동양 3국, 한의학의 골격을 이루는 동의보감!~
경남 밀양 얼음골.
한 여름에도 싸늘한 냉기가 흐르는 이곳.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 바로 이곳 얼음골 동굴에서 일어났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한 스승이 제자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줬다.
제자를 위해 기꺼이 해부용 모델이 됨으로써
제자가 몸 안의 오장육부를 익히고 해부술을 익히게 하려는 것이었다.
목숨과 바꾼 큰 가르침이었다.
스승의 살신성인.
눈물을 머금은 제자의 해부는 시작되고
그 제자는 마침내 조선 최고의 명의가 된다.
바로 명의 허균과 그 스승의 전설 같은 이야기.
과연 허준은 정말 스승을 해부했을까?
"우리 역사에서 가장 오래 읽히고 있는 책은 뭘까요?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에 간행되어 지금까지 읽히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출판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널리 3국에서 읽히고 있는 책,
바로 허준이 지은 <동의보감>입니다.
동의보감은 한방에서 교과서처럼 쓰이는 책,
아마 우리 역사에서 이렇게 거듭 해서 간행되고 읽히고 있는 책은 흔치 않을 것입니다.
우리 역사상 가장 최고의 베스트셀러입니다.
그런데 이 동의보감은 출판 당시부터 인기를 모았습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에게 의학을 알려준 중국은 물론,
일본까지도 자존심은 아랑곳 하지 않고 이 책을 구하려고 애를 썼다고 합니다.
과연 이 동의보감, 어떤 책일까요?"
1995년 11월 14일.
장쩌민 중국 국가 주석이 우리나라를 국빈으로 방문했다.
이날 국회연설에서 정쩌민은 한국과 중국의 오랜 우호관계를 예를 들면서 인사말을 시작했다.
"우리 양국은 2천 년 전부터 서로 왕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유교는 중국의 문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17세기에 편집된 동의보감도 우리 양국 교류사에서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뜻밖이었다.
장쩌민이 2천 년에 걸친 한국과 중국의 오랜 교류를
예로 든 것 중에 하나가 허준의 동의보감이었다.
허준의 동의보감은 1613년 출간되었다.
그후 중국의 사신들은 조선에 오면 의례껏 동의보감을 챙겨가곤 했다.
지금까지 동의보감은 중국에서 이십여 차례 간행되었을 정도로 중국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엔 당시 동의보감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는 내용이 실려 있다.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박지원은 동의보감의 책값이 너무 비싸 책을 사지 못하고
단지 서문만을 베껴 올 수밖에 없었다고 적고 있다.
그 때 박지원이 중국에서 베껴 온 것이
1763년 중국에서 처음 간행된 중국판 동의보감의 서문,
능어가 지은 서문에는
"동의보감을 보급하는 일은 천하의 보배를 나눠 갖는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최근 상해에서 발간된 상해본 동의보감.
이렇게 동의보감은 근래에 들어서도 중국과 일본에서 계속 출간되고 있다.
당시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동의보감은 지금도 동양3국에서 고전으로 꼽히고 있다.
그것은 과연 무엇 때문일까?
동의보감은 전체 스물다섯 권이 한 질로 되어 있다.
그런데 무엇보다 그 스물다섯 권의 체계가 놀랍도록 일목요연하다.
먼저 동의보감은 크게 다섯 개의 편으로 나눠져 있다.
이전의 의서들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아주 독창적인 방법이었다.
"당시의 의서들의 목차들은 대부분 질병을 중심으로 하는 것들입니다.
질병을 순서대로 놓고서 그것에 따라 살피는 것이 대부분의 양식이었는데,
허준은 동의보감에서 아마 최초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종합의서로써는.
최초로 질병에서 몸으로 시각 전환을 근본적으로 이룬 것이구요,
바로 그것이 근대적인 유형과 공교롭게도 비슷한 부분입니다."
-신동원 박사, 서울대 강사, 과학사
전체 25권 중에
목차가 2권이나 되는 동의보감.
다섯 개의 큰 분류 아래
다시 부위별로 항과 목을 달고
그 아래 각각의 질병에 따른 처방을 싣고 있다.
배가 아픈 환자의 경우
일단 외형편,
그리고 다시 복항을 찾으면 된다.
이렇게 사전식으로 된 동의보감은 언제든 손쉽게 질병에 대한 처방을 찾을 수 있다.
당시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 크게 인기를 얻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실용성 때문이다.
이러한 편리함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동의보감이란 책은 우리 한방에 절대적인 책입니다.
현대 진료에 있어서도 동의보감이 기본적인 체계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과거에 비해 현대는 질병이 다양하기 때문에
어떤 부분은 과거의 동의보감을 중심으로 보완해서 넣어 진료를 하고 있습니다.
치료도 마찬가지입니다.
치료방식도 동의보감을 중심으로 해서 어떤 부분은 보강을 해서 치료하는 실정입니다."
- 류봉하 교수, 경희대 한방병원 진료부장
40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한의학의 골격을 이루며 영향을 미치고 있는 동의보감.
동의보감의 독특한 편제는 이미 편찬 당시 중국과 일본에서 다투어 발행되며 세계성을 얻었던 것이다.
2. 현대 인체도와 다르지 않은 동의보감의 신형장부도!~
그러나 허준 이전에 이미 해부도는 보편화되어 있었다!~
"이렇게 동의보감은 당시에 동양의학 전체를 간편하게 정리한 의학 백과사전입니다.
또 무엇보다도 당시까지 동양의학을 주도하고 있던 중국을 능가하는 획기적인 결과물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중국에서는
이 동의보감을 백성을 보호해주는 신선의 경전이요,
의사들의 비법을 담은 문서라고 극찬을 했을 정도였습니다.
20세기에는 독일에서도 출판이 되었고
또 영역본도 간행이 될 정도였습니다.
그 우수성을 대변해주는 것이겠지요.
이런 동의보감에 저자 허준은 당대 최고의 의사였습니다.
자, 이것은 당대 허준이 그린 인체도입니다.
이 인체도를 살펴보면 당시 허준은 그 누구보다도 인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 이 동의보감은 상당한 수준의 의과의술 부분도 담겨 있습니다.
과연 허준은 인체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일까요?"
동의보감의 첫페이지에 나오는 신형장부도.
인체의 장기와 각각의 특징을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는 이 인체도는 물론 해부도다.
동의보감을 좀더 깊이 들어가보면 허준은 오장육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장기에 대한 묘사는 거의 정확하며 해부를 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설명도 자세히 되어 있다.
'위는 명치와 배꼽 사이에 있다.
인두에서 배꼽 사이의 길이가 한 자 여섯 치이고
늘어나면 길이가 두 자 여섯 치다.
음식물은 서말 다섯 되가 들어갈 수 있다'고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매달린 박 같이 생겼다고 묘사한 쓸개에 대한 관찰은
현대의학에 비추어봐도 놀라운 경지를 보여준다.
"간에서 담즙을 만들어서 쓸개에 고였다가 장으로 분비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한의학에서는 담낭은 청정지관이라고 해서
'담즙분비'라는 것은 절대 기록된 바가 없고 청정한 것이 고여 있다고만 했는데,
동의보감에서만 유일하게
담즙이 간에서 생성되어서 모여있다가 배설한다고 설명한 것을 봐서
역시 과학적인 관찰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 김병윤 박사, 전 경희대 한의대학장
동의보감에 있는 그림들은 목곽으로 거칠게 찍혔지만 내용은 비교적 섬세하다.
세세하게 묘사된 장기들의 위치며 숫자, 모양새는 놀랍도록 정교하고 정확한 편이다.
이렇듯 허준의 신형장부도는 현대의 인체도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그만큼 허준이 인체 내부를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장을 단순하게 그린 형태로 해서 다 그 해부학적인 모습을 다 보여주려고 합니다.
그런 실체에 대한 인식을 굉장히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허준에게서 읽을 수 있어요.
그것이 서양의 근대의학 그 길로 걸어나간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제까지 걸어왔던 길에 비추어 봤을 때는
몸의 특성에 대한 해부적인 분석이나 신체적인 특징의 강조들은
이전에 비해 남들보다 월등히 강조하고 있다는 것은 큰 특징의 하나입니다."
- 신동원 박사
동의보감엔 외과술도 상세히 나와 있다.
탕약 짓고 침이나 놓을 것 같은 한방의학서라는 고정관념을 크게 깨트리는 부분이다.
그 한 예로 복부가 파열되었을 경우 치료법인 장두상치법.
뱃가죽파열로 장이 밖으로 나왔을 때 삼이나 상백피로 실을 만들어 화예석을 바르고 봉합한다,
요즘 같은 시절에도 큰 수술에 해당하는 외과처치법이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외과적인 봉합을 할 때면 뽕나무 껍질로 만든 상백피를 쓰며
큰 수술의 경우에는 초오산으로 마취를 시킨다.
초오산은 진통제, 마취제 효과를 낸다.
극약에 가까운 마취제인 초오와 다른 약재들을 섞어 마취제인 초오산을 만드는 것이다.
수술이 끝난 뒤엔 소금물을 복용시켜 깨어나게 했다.
"이 약물은 주로 옛날에 전쟁터에서 화살을 맞거나 아니면 외부 상처를 입었을 때
외과 수술용으로 마취를 시킨 다음 칼로 그 상처 부위를 드러내고 뼈를 맞춘다든지 조직을 꿰맨다든지
그런 통증을 없애주는 그런 약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 김성룡, 경희대 본초학 교실 연구원
당시 한의학에서 쓰던 구침 중엔 단순한 침이 아니라 외과수술에 쓰던 것들도 들어있다.
"우리나라엔 전통적으로 9침이라 하여 아홉까지 침을 사용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장침, 대침, 호침을 비롯해서 참침, 피침 이런 종류를 많이 썼는데
주로 참침과 피침은 곪은데를 째서 피고름을 뽑아내는, 서양으로 말하면 메스와 같은 침이 되겠습니다."
- 김쾌정, 한독약품 의약사료실장
임진왜란과 같은 전란을 겪으며 수많은 사상자를 치료해야 했고
그에 따라 조선의 외과술도 발달했다.
이 과정에 허준도 상당한 수준의 외과술을 익혔을 가능성이 크다.
3. 서양의 해부도와 다른 동양의학!~
신형장부도는 정(精), 기(氣), 신(神)을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허준은 인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허준의 뒤에는 대단한 스승이 있었습니다.
오래전부터 구전되어온 허준의 설화에는
제자를 위해 몸을 내어준 스승의 아주 감동적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허준은 스승의 시신을 해부해봄으로써 마침내 의학적인 완성에 이룬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엄격한 유교사회였습니다.
그런 우리의 전통의식에 비추어 봤을 때
사람의 몸을 해부한다는 것은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의학적인 대의나 스승의 큰 뜻이라고 할지라도 우리의 윤리의식이나 정서로 봤을 때
허준은 스승의 시신을 해부할 수 있었을까요?"
서구에서 근대적인 해부학이 처음 시도된 것은 16세기 이탈리아에서였다.
그러나 당시 서양에서도 해부를 한 사람은 악마로 취급했다.
해부학을 의학으로 처준 것은 아주 근세로 들어서이다.
동양의 해부학은 먼저 중국에서 시작되었다.
가장 일반적인 의학입문서로 1575년 씌여진 <의학입문>에도 장부도가 그려져 있다.
중국 최고의 고서인 <황제내경>에도 해부도가 보일 뿐아니라
중국에선 이미 10세기 전후에 인체의 부분별 장기의 모습을 그린 인체도들이 선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해부 기록이 나오는 건 이익의 <성호사설>.
'시신을 세 번 해부한 후에 의술에 정통했다'는 전유형의 기록이 보인다.
괴산군수를 지니고 벼슬이 참판까지 올랐던 전유경은 우리나라 최초의 해부학자인 셈이다.
"전유형이
시신을 세 번 해부한 연후에
의술에 정통해졌다."
도쿄 국립박물관.
이렇게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을 전후로
인체에 관한 해부학적인 성과들이 축적되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인들이 가져갔다는
조선의 동인(조선시대 인체모형)은 그 시기 조선의 의학 수준을 대변한다.
해부는 아니지만
그 시기 인체의 기, 경락과 혈을 표시하고 있는데 상당히 높은 수준에 이르고 있다.
70년 후에 만들어지는 일본의 동인.
속이 훤히 드러나 보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역시 인체해부와는 무관하다.
조선의 것이든 일본의 것이든 이 동인들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인체 내부에 있는 장기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동양에서 말하는 인체 원리를 담고 있는 것이다.
몸을 정(精)과 기(氣), 그리고 신(神)의 결합으로 보는 동양의학.
기의 흐름을 중시하는 동양의학의 몸을 표현한 것이다.
"동양의학에서 이야기 하는 신형하고,
서양에서 말하는 신형하고 다르다는 것을 아셔야 해요.
몸에 대한 신형해부도가 있는데
그 신형해부도가 실제 하고 맞지 않잖습니까?
우리의 상상이 많이 들어가 있는,
신형이라고 하면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신, 귀신할 때 신(神)자, 그리고 정, 정기할 때 정(精)자, 기(氣), 혈(血),
그런 건 우리 눈에 하나도 보이지 않는 거예요.
단지 눈에 안보이지만 깊이 들어가보면
그것이 인체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라는 겁니다.
그것을 그림으로 보여줄 수 없으니까 신형장부도라 하여 만들어 놓은 것이지
사실은 그 형체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몸 속에 정, 기, 신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만든 것이지
그 형체를 만든 게 아니예요."
- 박찬국 교수, 경희대 한의대
당시 동양사람들이 보는 인체는 정, 기, 신을 담은 그릇,
허준이 그린 신형장부도 역시 서양의 신형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실제로 허준이 그린 신형장부도엔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장부들도 묘사되어 있다.
삼초는 세 군데 가상적인 신체기관일 뿐이다.
"삼초
상초는 위의 위쪽,
중초는 위 부근,
하초는 단전"
"그림에서 허준이 무엇을 중시하고 있는가 그것이 굉장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 인체장부도를 보았을 때 허준은 척추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정(精),
이른바 인간의 에센스라 할 수 있는 정을 표현하기 위해 인체해부도를 그렸을 뿐입니다.
그 인체해부도에 있는 위장이니 간장이니 표현한 것이
서양의 해부학적 지식을 얻기 위해 그렸다기보다는
인체에 가장 중요한 정(精)을 척추를 중심으로 표현함으로써 신장으로부터 뇌의 이르는 길까지,
'정(精)이 움직이면서 인간을 활동하도록 한다'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허준의 해부도는 서양에서 말하는 해부도와 질적으로 다릅니다."
- 김 호, 서울대 강사, 역사학
조선에서 해부는 금기시 되는 일이었다.
임진왜란 때 해부를 했던 전유형은 이괄의 난에 연루해 사형당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가 시신을 해부해 천벌을 받은 것이라 말한다.
그런 조선에서 허준은 과연 해부를 할 수 있었을까?
게다가 유학적 소양이 높았던 허준이 과연 스승을 해부할 수 있었을까?
"명도라는 것과 장부도라는 것들이 쭉 내려왔으니까
이미 허준 선생 당시에는 많이 보편화되어 있었겠지요.
다만 어떤 것을 기준으로 해서 그렸느냐라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가 되는 것이지,
그 때 당시 허준 선생이 스승의 몸을 해부했다고는 보지 않아요. 그건 소설적인 이야기겠지요."
- 정우열 교수, 원광대 한의대
허준이 그린 신형장부도는
허준보다 30년 앞서 출간된 중국의 <의학입문>,
그리고 유성룡의 <침경요결>의 장부도와 닮아 있다.
4. 허준의 스승 유의태는 실존인물인가? 전설인가?
유의태?~ 유이태?~
"지금까지 허준이 해부를 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결국 당시 조선의 유교적인 정서를 감안한다면
실제로 허준이 스승의 몸을 해부했다는 건 거의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허준의 동의보감 앞에 실은 이 인체해부도는 허준이 직접 해부를 해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문헌을 통해 전해진 해부도를 인용했을 가능성이 훨씬 역사적인 사실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허준이 스승의 몸을 해부했다는 이야기는
명의 허준에 대한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과 입을 통해 전해지면서 설화적인 살이 붙었다고 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허준에게 자신의 몸을 내눴다고 전해지는 유의태,
그를 추적해보면 허준의 이야기의 실마리를 좀더 잘 알 수 있지 않을까요?
허준에게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 그의 스승에 대해 알아본다면
모든 것을 좀더 확실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자, 그러면 허준과 그의 스승에 대한 이야기가 남아 있는 얼음골로 가서 다시 시작해보겠습니다."
스승 유의태가 제자 허준에게 몸을 내줬다는 밀양 얼음골.
이 일대에는 약초가 많아 허준이 자주 다녀가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원한다는 약사여래가 모셔진 이곳 천왕사.
그 옛날 이 절의 주지가 허준의 스승 유의태와 친했다고 한다.
"우리가 전설로 듣기로는
유의태 선생님이 허준에게 병에 대한 모든 것을 가르치기 위해 내 몸을 해부하라 하셨고
허준은 안 하려고 하다가 스승이 간곡하게 하니까 여기서 해부를 했다는 그런 전설이 있습니다."
- 김외출(65세), 밀양 산내면 얼음골 주민
허준의 스승 유의태를 찾아서 유의태의 활동 무대였다고 하는 경남 산청으로 향했다.
허준의 스승이라고 하는 유의태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먼저 유씨 가문을 찾아갔다.
그들이 보여준 족보엔 허준의 할아버지 허혼(許混)의 이름이 보인다.
우연히도 이곳은 허준의 외할머니인 진주유씨의 친정 가문이었다.
하지만 취재팀은 유씨족보에서 허준의 스승이라고 하는 유의태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취재팀은 이 가문 어디에서도 유의태의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다.
허준의 스승 유의태는 정말 있는 것일까?
전설 속에 만들어진 가공의 인물은 아닐까?
그런데 같은 경남 산청에서 비슷한 이름이 있었다!
이름은 유이태!
죽어가는 사람도 살린다는 산청의 명의 유이태였다!
"죽을 병도 벼락같이 낫게 해. 우리 할아버지가 침주면 아무 병이나 나아.
그러니까 중국 천자 병을, 죽을 것을 유이태 할아버지를 불러대면 낫는다 해서 할아버지가 불려가 낫게 했어요."
- 유근돌, 83세, 유이태 10대손
유의태와 경상도식 발음조차 비슷한 유이태.
이 집안 사람들은 자신의 10대조 할아버지 유이태가 허준의 스승이라고 믿고 있었다.
"허준이가 밑이지. 제자지. 제자가 되어서 밑에서 배워서 그래 했지. 어른들 말씀이 그렇대...."
그는 분명 실존했던 인물로 후손들이 그의 무덤을 돌보고 있었다.
그는 원래 거창 사람인데, 이곳 산청으로 옮겨와 터를 잡았고, 의원으로 이름을 날렸다고 전해진다.
그의 의술은 널리 알려져 임금이 그를 부를 만큼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그러나 왕의 부름을 받고도 응하지 않아 그를 처벌하라는 말도 나왔다고 조선왕조실록에 전한다.
그만큼 의술의 경지가 높았던 유이태.
그가 바로 허준의 스승일까?
그가 만든 저서도 전해진다.
유이태의 의서(마진편).
그런데 유이태는 허준이 죽고 난 뒤에 태어났다.
"유이태는 실제로 조선 후기 마진편이라고 하여
홍역치료서를 저술한 당시에 굉장히 유명한 의사였습니다.
홍역 뿐아니라 산부인과 의사로도 능해
많은 백성들을 치료해주고 그럼으로써 18세기에 명성을 날린 분입니다.
허준의 스승으로 소급해서 보기보다는
오히려 18세기의 마진편을 지은 유이태로 보는 것이 더 역사적 사실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소설상에선 허준의 스승으로 보고 있고
또 어떤 논문에서도 허준의 스승으로 보고 있는 것은
잘못된 역사적 사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김 호 서울대 강사.
4. 중인 신분의 허준!~
선조의 총애로 당상관에 오르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허준의 스승은 경상도 산청의 유의태!
그런데 경상도 산청 땅에는 유의태 대신 유이태가 살고 있었습니다.
조정의 부름을 거부하면서 백성들을 진료한 명의 유이태는
중국 천자의 병을 낫게 했다는 그런 전설을 만들어내기까지 했던 대단한 의사였습니다.
그러나 경상도 산청의 유이태는 조선 숙종 때 사람입니다.
허준보다 100여 년 뒤의 사람으로서 허준의 스승이 될 수는 없는 인물이겠지요.
왜 이렇게 허준에 대한 이야기는 확실한 것이 없을까요?
그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고 어떻게 활동했는지 왜 이렇게 전하는 바가 없을까요?
조선 최고의 의학자, 의성으로까지 추앙받는 그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대부분 전설이나 소설적인 이야기입니다.
역사에서 그가 소외받은 이유가 무엇인지, 또 진실은 무엇인지,
역사 속에서 명의 허준에 관해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991년 9월 30일.
역사에 제대로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은 허준.
경기도 파주군 하포리.
91년 이전까지만 해도 허준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실제 존재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91년 민통선 안에서 발견된 허준의 무덤은
문인석은 쓰러져 뒹굴고 무덤은 형체도 알아보기 어려웠다.
무덤은 파헤쳐져 푹 꺼져 있는 상태였다.
누구도 알아보기 힘든 기억 속에서 그를 세상으로 끌어내려는 발굴이 시작됐다.
10년 동안 허준의 흔적을 찾아 헤맨 한 역사가의 노력 덕분이었다.
한 역사가의 노력으로 허준의 실체가 수백 년만에 그렇게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허준 묘(경기도 파주군 하포리)
"허준의 비석을 찾았을 때 보니까 여기 양평이란 두 글자 보이죠?
허준 선생이 양평분이고, 그리고 여기 호성공신이예요, 호자 깨어져 나갔죠?
여기 또 준자가 보이죠? 허자가 깨어져 나갔지만, 이 몇 글자로 허준 선생의 묘라는 것이 밝혀지죠.
그분이 양평분이고 호성공신이었고 그리고 휘자가 나오죠.
그래서 이 자리가 허준 선생 묘라는 것이 틀림없다, 이 비석으로써 최종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 이양재, 서지학자
양평군 허준.
잊혀져 있던 과거 속에서 드러나 이제 새 단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나마 알려져 있는 것도 명확하지 않다.
심지어 묘비에 적혀진 허준의 출생연도조차도 의문스럽다.
그는 1547년생이 아닐 가능성이 더 높다.
허준의 출생연도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가지고 있는 진주박물관.
임진왜란 관련 자료들 속에서 취재팀은 우연히 단서 하나를 찾아냈다.
이 그림은 1604년 공신들의 모임을 그린 것이다.
허준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모시고 의주까지 피난을 갔었고
그 공으로 호성공신에 칭해졌고
때문에 허준도 이 자리에 참석했다.
그림 한쪽 옆엔 공신들의 인적사항이 적혀 있다.
물론 허준도 적혀 있다.
그런데 여기서 허준의 출생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7년이나 빠른 기해생(1539년생)으로 나와 있다.
"1604년의 기록을 근거로
기해생을 연도로 확인해보면 1539년이 허준의 출생연도임이 분명하고
또 실록에 1615년에 사망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서 77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음을,
허준이 1539년에 태어나 1615년에 사망한 것으로 보는 게 사실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 김 호 서울대 강사
왜 이렇게 허준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시피 한 걸까?
족보에도 그에 대한 기록은 부실하기만 하다.
"만일에 이분이 서자가 아니었다면 이 족보에 자세히 다 나온다구.
언제 나시고 언제 돌아가시고 무엇을 하셨는지 다 나오는데
옛날에 서자는 홀대를 했잖아요.
그러기 때문에 자세히 안 나오고 허술하게 나오는 거죠.
유명하신 분이지만 집안에서조차 홀대를 받으신 거죠. 집안에서조차.
그래서 이 할아버지의 후예가 많질 않아요.
그건 왜 그러냐면 옛날에 서자들은 제사를 지낼 때 마루에도 올라가지 못했지요.
그냥 땅바닥에서 제사를 지냈어요.
집안에서 괄시를 받으니까 실제로 내 할아버지를 알아도 집안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들어가는 거죠.
그만큼 서자에 대한 차별, 괄시가 심했다는 거죠."
- 허 찬, 양천 허씨 대종회장
정일품 당상관.
최고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허준.
그러나 허준은 족보에조차 반듯하지 못한 서자였다.
적서의 차별이 심했던 조선사회에서
주로 중인직이 종사했던 의원은 허준이 선택할 수 있었던 한길이었는지도 모른다.
전남 담양군.
허준에 대해 보이는 것은 한 유학자의 개인 일기, <미암일기>
선조 때 이조참판까지 지냈던 미암 유희춘이 11년간에 걸쳐 쓴 친필 일기다.
"22일을 보면 허준이가 다녀갔다는 기록이 나타나 있습니다.
허준이 자주 다녀갔음을,
미암일기 1권에서 5권까지 허준에 대한 이야기가 상당히 많이 나옵니다."
- 이해섭, 담양 향토문화회장
1567년부터 씌여진 이 미암일기엔
허준의 방문 기록을 포함해 그나마 허준에 대한 이야기가 씌여 있다.
"1568년 2월 20일 허준이 왔다."
이때부터 허준은 두 달에 한 번꼴로 유희춘을 방문한다.
허준은 외삼촌인 김시흡의 소개로 유희춘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미암일기에 자주 등장할 정도로 유희춘과 특별한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미암일기엔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유희춘은 1569년 윤 6월 3일.
이조판서 홍담에게 허준을 내의원에 천거해주도록 부탁한다.
그리고 허준은 내의원에 들어간다.
결국 허준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의과를 거쳐 내의원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허준은 젊은 시절부터 이미 전라도 지역에 심약,
즉 약을 수집해 중앙에 올려보내는 일을 할 정도로 의원으로서 이름을 얻고 있었다.
내의원에 들어간 허준은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와도 같았다.
왕실의료기관이었던 내의원은 당시 최고의 의약과 의술을 모두 접할 수 있는 앞선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허준은 당대 최고 의관이었던 양예수를 만난다.
역사적으로 보면 허준의 진짜 스승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흐름으로 보면 양예수가 당시 명의입니다.
누대에 걸쳐 의원을 지냈고
또 양예수가 <의림촬요>라는 책을 썼고
의림촬요라는 책이 당시 금나라, 원나라 의술을 잘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싫든 좋든 양예수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 않았나 봅니다."
- 박찬국 교수
허준에 대한 선조의 신뢰는 특별했다.
평소 딸들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선조가 천연두를 앓던 정안옹주에게 보낸 한글편지.
십여 일에 걸친 편지에 허준에 이름이 여러 차례 거명되고 있다.
대부분 '허준의 처방이니 그대로 따르라'는 내용이다.
허준이 광해군의 천연두를 치료하자
선조는 허준에게 당상관으로 벼슬을 올려준다.
그러자 사간원은 장작 3개월간에 걸쳐
허준의 벼슬을 취소하라는 상소를 올린다.
중인 신분에 의원에 불과한 허준에게
감히 당상관이란 높은 벼슬을 줄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1608년 선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또 다시 허준에 대한 탄핵의 문제가 불거진다.
선조의 건강이 좋지 않은데도 강한 약을 함부로 써서 왕을 죽게 하였으니 처벌하라는 것이었다.
결국 광해군은 허준을 파직시키고 귀양보낸다.
그러나 광해군의 배려로 멀리 가지 않고 도성 밖으로 귀양 간 허준은
그후 2여 년 동안 귀양과 복귀를 되풀이 한다.
그 와중에도 허준은 십여 년간 편찬에 매달렸던 의서를 마침내 완성했다.
바로 <동의보감>이었다.
허준은 의서를 편찬한 후 동의보감이라 이름 지었다.
중국의 <남의>나 <북의>에 버금가는 의서라는 당당한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이렇게 허준은 우리 한의학의 뿌리를 만들었다.
5. 명의 허준이 민중의 사랑받는 이유!~
우리 산천의 향약으로, 단방처방, 한글 언해본 의서!~
"허준의 동의보감은 1598년부터 장작 14년간에 걸쳐 완성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허준의 동의보감은 전문의학서입니다.
당시 양반사회의 필독서로 꼽히기도 했지만
일반 대중들이 볼 수 있는 그런 의서는 아니었습니다.
또 허준은 당시 왕실의 의사로서 일찌기 어의로 발탁됨으로써
일반 민중들과 접촉할 기회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허준은 일반 민중들에게 높은 칭송을 받았습니다.
또 당시 어느 책에도 기록되지 않은 허준에 대한 이야기가
일반 민중들 사이에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살을 붙여가며 허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서는 바로 동의보감에 있습니다."
임진왜란에 기근과 역병까지 겹쳐 국가적인 대비책이 절실했던 1596년.
선조는 허준과 내의원에 의서 편찬을 명령했다.
허준은 우리나라 의서는 물론 중국의 의서들까지 포함해 500여 권의 의서에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치료와 처방만을 골라냈다.
그것을 간추려 정리한 것이 동의보감 25권으로
거기엔 중요한 고전의서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처방의 끝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혔고
허준은 자신의 경험을 덧붙이기도 했다.
그 모든 취사선택은 허준의 의학적 판단에 따른 것이다.
"당시까지 있던 의서들을 전부 망라해서 만든
실용적 의서로써는 대표적인 의서라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의사들이 자기들 공부하는 것보다 치료하는데 바빠서 연구를 할 수 없었는데
그 사람들이 치료하는데 적당한 의서로 만들어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양이 좀 많기는 하지만 의원들이 보기에는 별 무리가 없고 또 각 방면에 관한 의서이기 때문에
의원들이 보기에는 적당한 실용의서였다 이렇게 보여집니다."
- 손홍렬 교수, 청주대 역사교육과
동의보감이 완성되자 광해군은 그 보급에 나섰다.
형편이 어려운 때라 훈련도감 활자로 급히 찍어냈고
그후 목판으로도 거듭 출판되었다.
동의보감은 특히 중앙의 의료 혜택이 미치지 못하는
지방에선 대단히 환영받았다.
1648년에 마련된 강릉의 약국계 규정에도 동의보감 내용이 발견된다.
"동의보감이 배치되었던 걸로 확인되고 있구요,
이 동의보감은 일체 타인에게 빌려줄 수 없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당시 동의보감을 상당히 귀중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이규대 교수, 강릉대 사학과
편제의 실용성 이외에도
동의보감엔 특기할만 한 내용이 적지 있다.
급성간염이 전염된다는 사실을 허준은 이미 알고 있었다.
"황달이 전염된다,
다시 말해 급성간염이 전염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의학적으로는 2차대전 전후해서
전쟁터에서 군사들이 황달에 전염되는 것을 보면서 보고된 적이 있습니다만
근래 간장질환에 대한 검사법이 개발되면서
확실한 원인 바이러스가 발견되었습니다만,
허준 선생님은
이미 400년 전에 황달이 급성간염에 전염된다는 것을 간파했다는 사실,
이건 정말 역사적인 관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김병운 박사, 전 경희대 한의대학장
당뇨병의 소변이 달다고 하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허준은 직접 소변의 맛을 봤다는 이야기가 된다.
"동의보감이 중국의 의서를 그냥 가져다 베낀거다,
이렇게 평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러냐면 물론 동의보감에 있는 처방이 중국의 의서에 있지만
실제로 우리 백성들에게 임상적으로 써보고 거기서 좋은 처방들을 골라서 썼단 말이죠.
실제로 환자들을 거쳐서 검증을 했다는 것은
바로 우리 백성들, 우리 민족 체질에 맞는 실증적인 처방을 했다는 것이고
단순히 남의 것을 베낀 것이라 말할 수 없고 실증의학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요."
- 정우열 교수
"동의보감에 와서 한국의 한의학이 성립되었다,
우린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물론 중국의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게 삼국시대부터니까 천여 년 되었지만
그때 와서 우리가 비로소 한국의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성립되지 않았느냐 보고
그전에는 그러니까 중국약을 수입하고 중국의학을 연구하는데 많은 심혈을 기울였죠.
그러다가 동의보감이 완성됨으로써 한국의학이 정립이 되었고,
정립이 되면서 그 뒤로는 우리나라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분들이
동의보감을 공부하면 됐지, 중국의학을 공부하는 경우가 적어졌기 때문에
중국과의 교류가 좀 소홀해지지 않았나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 박찬국 교수
동의보감의 탕약편을 보면 650가지의 약재 이름이 한글로 나란히 적혀 있다.
또 동의보감에서 처방하는 90%의 약재가 향약이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재들인 것이다.
이전까지는 당약이란 이름으로 비싼 중국 약재를 썼지만
동의보감 이후론 우리 약재로 대체, 쉽고 싸게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에서 쓰는 약재들은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된 당약이었다.
동의보감에서는 중국에서 수입해온 약재일 경우 반드시 '당약'이라는 표시를 달았다.
당시 당약의 경우 약값이 무척 비쌌다.
때문에 일반 민중들은 약 한 첩 제대로 먹기 어려웠다.
목숨이 달려 있어도 여간해서 약을 사먹을 수 없었다.
만기요람을 보면 당약 중 하나인 완청은 3.73그램의 약이 쌀 10말에 버금가는 가격이었다.
같은 중량의 금값보다도 더 비싼 약이 있을 정도로 당약의 값은 비쌌다.
당시 일반 민중들에게 당약은 그림의 떡이었다.
"허준이 동의보감 저술에서 밝히고 있듯이
당시 수입약, 즉 당약의 약값이 너무 비싸고
또 여러가지 약재를 처방하면 가격이 올라가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런 고가의 약을 쓴다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특히 임진왜란이 끝난 후 모든 어려운 상황에서
그런 비싼 당약을 수입한다거나 일반인들이 쓴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실제로 정부에서도 동의보감을 비롯해 의서들을 출간할 때에 그 정신은
비교적 값싼 약재로도 효과를 높힐 수 있는 걸 추구했습니다.
그것만 보아도 당시 약재의 이용이 얼마나 제한적이었는지,
심지어 양반들 경우도 약을 한 번 먹기 위해서 약재계를 해서
누구는 당귀를, 누구는 천궁을, 이런 식으로 계를 해서 약을 모아서 복용할 정도로
약값이 고가였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 김 호 서울대 강사
이런 형편을 잘 아는 허준은 동의보감에 과감하게 단방치료를 넣었다.
말 그대로 한가지 약재로만 병을 치료하는 처방이다.
고급약재를 수십 가지 넣어 짓는 처방에 비해 자연히 약의 효과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단방엔 바로 민중들을 생각하는 허준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여러가지 약재들을 섞어 고급처방을 받을 수 없는 민중들에겐 무엇보다 희소식이었다.
계를 들어서까지 몸보신 약을 먹을 수 있는 소수보다는
목숨이 달려있어도 약 한 번 쓸 수 없는 민중들을 향한 배려였다.
"동의보감이 만들어진 때가
임진왜란이 끝나고 기아선상에서 허덕이고 질병이 만연할 때였습니다.
동의보감의 단방약재와 처방이 그때 아주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현재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 류봉하 교수
허준은 동의보감을 통해 약과 현실에서 소외된 일반 백성들,
아파도 약 한 번 먹기가 하늘에 별 따기인 대부분 민중들에게 기회를 줬다.
또 우리것을 찾은 허준으로 인해
이름없는 우리 산, 우리 들의 약재들도 비로소 이름을 얻게 되었다.
소외된 자들의 아픔을 알았던 의사 허준의 마음 씀씀이였다.
당시 의서는 특권층의 것이었다.
결코 한문을 모르는 일반 민중들의 것이 아니었다.
허준은 그런 한문을 모르는 일반 민?들을 위해 많은 한글 언해본 의서들을 간행했다.
비로소 일반 백성들도 쉽게 의서들을 접하게 되었다.
오로지 의술의 한길.
그 곧은 삶을 통해 허준이 우리에게 전해준 것은 민중에 대한 사랑이었다.
"이렇게 약과 의술이 특권층의 전유물과도 같았던 시대에
허준의 동의보감에는 의료혜택에 소외된 일반 백성을 배려하는
그런 허준의 의학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이런 허준의 의학정신은
훗날 정조 때 강명길의 제중신편, 혹은 이제마의 사상의학 등 다수의 의학서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허준은 결코 민중을 잊지 않았습니다.
동양의학들이 만나는 최고의 성과를 이뤘지만 허준은 늘 민중을 위한 약을 잊지 않았습니다.
허준의 의학정신, 그 중심은 바로 민중이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허준의 정신을 높이 사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 유인촌의 역사스페셜의 보고(비 내리는 주말 오후입니다!~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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