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가 열전](9) 조선 중기 - 퇴계 이황 | ||||||||
해서나 행·초서가 보통인 당시기준으로는 선비의 로고타입을 상형으로 처리한 듯한 ‘山’자의 파격이 아니더라도 이런 예서체가 채택된다는 것 자체가 매우 탁월하고 또 이색적이었다. 고졸한 예서였지만 순후한 필획과 짜임새 또한 일견 여사 필이 아닌데, 도산서당이 만들어질 61세께에 쓴 것이고 보면 퇴계선생 글씨가 완숙의 경지로 들어갈 무렵이다. 도산서당이 어떤 곳인가. 퇴계선생이 임금의 무수한 부름도 거부하고, ‘명철보신’(明哲保身)의 뭇 비방도 다 무시하면서, 인심이 타락한 말세를 구하는 길을 오직 사림파 철학인 도학교육에서 찾은 곳 아닌가. ‘도산서당’은 설립자의 이런 의지가 담긴 친필 학교 간판인 셈인데 현존 예서편액으로 이보다 오래된 것이 없다. 하지만 아무도 이것을 퇴계의 글씨로 눈여겨보는 사람도 또한 없다. # 싱거운 풍월과 농묵초서
그런데 지금처럼 도학과 시·서가 소원하지 않았지만 문예를 도학 아래에 두는 시각은 퇴계 당시에도 있어왔다. 율곡 이이는 ‘문무책(文武策)’에서 ‘도(道)가 드러난 것을 문(文)이라 하니 문은 도를 꿰는 그릇(貫道之器)이다’라고 하면서 문예를 도가 체득되면 저절로 성취되는 부수적 산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 그 예다. 그러나 이것은 퇴계가 송언신에게 보낸 편지 중 ‘자제들의 가벼움이 걱정된다면, 경학(經學)으로 글을 생각하도록 가르치고, 글을 짓게 해서는 안된다’고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시문이나 글씨에만 빠져 도학공부에 방해가 됨을 경계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퇴계의 글씨는 너무나 큰 도학의 산에 가려 그 성취가 과소 평가되어왔던 것이다. 사실 ‘선생님께서 싱거운 풍월(澹薄風月)과 먹빛 짙은 초서(濃黑草書)를 그만 두신다면 도덕이 더욱 높아질 것입니다’라고 한 권응인의 증언을 빌리지 않더라도, 퇴계는 도학자 이전에 시인이자 서예가였다. 퇴계 스스로도 초년에 이미 ‘무릇 눈에 보이고 흥이 일어나면 문득 시를 짓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 읊조리기를 그치지 않는다’고 할 정도였다. 퇴계는 작고 한해 전에도 제자들이 쓴 글씨에 대한 시를 보고 ‘백두옹(白頭翁:퇴계 자신을 일컬음)으로 하여금 당장 붓을 들고 글씨를 쓰고 싶은(操●弄墨) 마음을 참을 수 없게 한다’고 고백한 바 있다. # 일(一)이란 곧 경(敬)을 말하는 것이네
이러한 글씨를 익히는 태도와 글씨관은 실제작품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퇴계가 말년에 쓴 ‘경재잠’(그림2)을 보자. 점획은 물론 글자마다 짜임새가 엄정단아할 뿐만 아니라 한 점 한 획에 순일함이 그대로 박혀있다. 이것은 행서나 초서(그림3)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짙은 먹빛과 납작한 결체가 특징인 말년의 퇴계 글씨를 역사에서는 ‘퇴필(退筆)’이라고 부르는데, 제자 조목은 이러한 퇴필을 ‘만년에 지은 것은 모두 화려함과 날카로움을 거두어들여 충담건오(沖澹健奧;맑고 내실이 있음)하고 단방진밀(端方縝密;단정하고 짜임새가 있음)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 맑은 기운과 단아한 짜임새를 가진 퇴필(退筆)
그런데 우리가 퇴계의 학문과 예술을 볼 때 유념해야 할 것은 그것이 공리공담이나 현실도피가 아닌 적극적인 현실참여를 통한 실천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도학이 자연의 이치를 생활 속에서 실천궁행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퇴필은 이러한 도학의 꽃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꽃은 순일(純一)하고 담박(淡泊)한 미감을 엄정 단아한 글꼴로 피워냈는데, 퇴계에게 있어서는 청정(淸淨)한 달이기도 하고 매화이기도 하였다. 고인도 날 못보고 나도 고인을 못 보았지만 고인이 가던 길을 우리가 따를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
“매화에 물을 주라” 퇴계 이황의 유언 | ||
퇴계의 생애 가운데 50, 60대 도학자로서의 역정을 저술 중심으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53세 때 ‘천명도설후서·부도’를 지은 것을 시작으로 ‘주자서절요’ ‘계몽전의’ ‘자성록’ ‘고경중마방’ ‘송계원명이학통록’ ‘심무체용변’ ‘심경후론’ ‘전습록변’ ‘성학십도’ 등 무수히 많다. 이 중 ‘이기호발설’을 중심으로 하는 주리적 정통론은 ‘주자서절요’ ‘사단칠정논변’을 통해 확립되었고, 거경궁리로 요약되는 퇴계 도학에서 심학의 문제는 ‘심경후론’과 ‘성학십도’에 집약되었다. 퇴계는 이들 저술을 통하여 성리설·예학·수양론·의리론 등에서 조선시대 도학 이념의 여러 기본영역을 확고히 정립하고 심화시켰던 것이다. 요컨대 평생 거경(居敬)과 궁리(窮理)로 일관한 퇴계의 생애와 학문은 스스로 지은 ‘묘갈명’에서 ‘학문은 구할수록 멀기만 하고 벼슬은 사양할수록 몸에 얽히네’라고 고백한 데서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실천궁행으로 역사에 사표가 된 퇴계의 참모습은 최후의 순간에 더욱 빛이 난다. 퇴계가 70세를 일기로 작고하던 해인 1570년 12월4일, 조카 영에게 받아쓰게 한 유언장은 국장(國葬)을 치르지도 말고, 값비싼 유밀과(油蜜果)는 물론 비석도 쓰지 말고, 작은 돌에다 앞면에는 단지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퇴도 만은 진성이공지묘·사진)라 쓰게 할 정도로 극도로 간소하다. 같은 날 제자들에게 ‘평소 그릇된 견해를 가지고 종일토록 강론한 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었다’고 술회하고, 7일, 제자 이덕홍에게 서적을 맡게 하였다. 그리고 8일 아침에 ‘매화 화분에 물을 주라’고 명하고는 유시(酉時, 오후 5~7시)초에 누운 자리를 정돈하게 하고는 부축받고 일어나 앉아서 편안하게 서거하였다. |
출처 : 해외유학,교환교수,출장자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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