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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서예가 열전 (16) 조선 후기 - 옥동 이서

회기로 2009. 7. 16. 18:07

 

[서예가 열전](16) 조선 후기 - 옥동 이서
굳이 강남 8학군을 거론하지 않아도 요즘 공부는 돈이 한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한다. 오죽하면 서울대에서 입학정원 일정 부분을 농어촌이나 극빈 자녀에게 할당하고자 하겠는가.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사정이 좀 다르다. 물론 과거 응시 자체부터 권력과 신분에 따라 제한된 사회였지만 그 안에서 공부라는 것은 돈만으로는 되지 않았다. 요컨대 조선의 공부는 기본적으로 가학(家學)이다. ‘왕 대 밭에 왕 대 난다’고도 했지만 문화로 지칭될 만큼 집안의 대물림 정도가 뚜렷하다. 이에 대해 임창순 선생도 생전에 우리나라 서예가들은 세습적인 가문의 전통 위에 대성한 작가들이 많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거론한 바 있다. 그는 “문필도 대를 이어 전승되는 것은 또한 조선시대 특유한 예술의 ‘대물림 문화’로 내세울 만하다”고 하면서 대표적 가문을 꼽았다.

먼저 조선 초 성석린에서 시작하여 성달생 성삼문 성임 성수침 성혼 등 200여년 간 명필의 가문이라는 명예를 지속해온 창녕 성씨가 있다. 그리고 전주 이씨 정종(定宗)의 왕자 덕천군의 후손으로 이경직 이경석 이정영 이광사의 집안이나 이지정 이하진 이서 등으로 이어지는 여주 이씨 집안, 조문수 조명교 조윤형 등 창녕 조씨 집안이 그것이다.
이익(1681~1763)의 ‘무이구곡도발(武夷九曲圖跋)’, 27.8×16.8cm, 개인 소장. 이익은 옥동 이서의 이복동생이다.

# 조선시대 서예이론 저작의 선구, 옥동 ‘필결(筆訣)’

이중 여주 이씨 가문의 옥동(玉洞) 이서(1662~1723)를 보자. 기호남인인 옥동 일가는 선조 23년(1590년)부터 광해군 3년(1611년)까지 20여년 동안 문과 진사 생원 무과 등 도합 33명의 과거급제자를 낼 만큼 가세가 극성했지만 이후 서인의 득세로 몰락했다.

특히 유배지에서 작고한 부친을 장사 지낸 후 관계 진출을 단념하고 초야에 묻혀 글과 글씨공부에 일생을 걸었다. 옥동은 우선 글씨도 글씨이지만 우리 서예사에서 ‘필결(筆訣)’이라는 서예 이론과 비평서를 남긴 선구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사실 우리 서예사에서 역대로 글씨로 일가를 이룬 작가는 무수하고, 이중에는 중국과 비견될 작가도 많다. 그러나 이런 작품의 이론적 토대나 품평을 우리 시각에서 밝힌 본격적인 저작은 옥동 이전에는 사실상 보기 어렵다. 있다 하더라도 편지나 시문에 단편적으로 보일 뿐이다. 이런 환경에서 저작된 옥동의 ‘필결’은 ‘완물상지(玩物喪志)’라 해서 서화를 말기(末技)로 간주한 당시 도학자들의 시각에서 볼 때 매우 혁신적인 일이다.

물론 이것은 임진, 병자 양란을 거친 이후 관념에서 현실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당시 사회현실을 반영한 것이지만 ‘필결’ 저작을 통해 서예를 역리(易理)와 등치시킴으로써 서예를 도학과 같은 반열에 올려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 왕희지를 골수 정통으로 삼은 ‘옥동체(玉洞體)’

글씨에 대한 옥동의 이러한 입장이나 태도는 그의 글씨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허전이 쓴 ‘옥동 이선생 홍도공(弘道公) 행장’에서 “대자와 해서는 물론 행·초서 모두 참으로 정체(正體)인데, 자획(字劃)과 체상(體像)이 크고 기세가 웅장(雄壯)하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조카인 이용휴는 “대자(大字)는 신라와 고려시대 이래 한 사람뿐”이라 치켜세웠고, 이규상은 ‘서가록’에서 “글씨가 큼지막하고 기력이 뛰어나다”고 했다. 또한 이광사는 “의론(議論)으로 감히 도달할 수 없는 경지다”라고 할 정도로 대자와 이론에 특장을 보였다.

이런 글씨를 세간에서는 ‘옥동체(玉洞體)’(그림1)라 불렀다. 옥동은 “글씨는 심법을 궁구해야지 자획(字劃)을 모방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글씨의 외양만 본뜨려는 태도를 경계하며 심획(心劃)을 강조했다. 이는 그가 ‘필결’에서 외형적인 균제미에만 치중하는 조맹부의 송설체와 관청의 서사정식(書寫程式)으로 흐른 석봉체를 극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데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옥동의 글씨관은 이복동생이자 실학의 대종(大宗)으로서 경세치용학파의 최대 인맥을 형성한 이익이 사실주의 문학론을 주장하여 근기남인 문학의 지향을 제시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즉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시문이나 회화에서 형체를 온전히 묘사해야만 정신을 표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옥동이나 이익이 말한 ‘심획’이나 ‘사실성’은 결코 외형의 혹사(酷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감추어진 정신세계를 사실적으로 표현해낸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왕대밭에 왕대 난다. 조선예술의 대물림 문화

그러면 이러한 정통을 자처하는 ‘옥동체’나 ‘필결’이라는 혁신적 서예이론은 어떻게 배태되었을까. 사실 여주 이씨 가문의 필명은 옥동의 부친 이하진을 거슬러 올라가 이지정에서부터 세간에 칭송이 자자했다. 이지정(그림2)은 중국의 회소와 장욱 장필은 물론 조선중기 황기로로 이어지는 광초(狂草)의 정맥을 이은 이로 이것이 이하진을 통해 가법으로 전수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옥동은 ‘필결’에서 선대로부터 이어져 온 서풍은 물론 옥동체의 근간이 된 서가들에 대해서 혹독한 비판을 하고 있다. 회소와 장욱은 물론 장필 황기로 이지정으로 이어지는 가법의 원류마저도 이단으로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역시 ‘필결’에서 ‘초서는 장지에서 시작하여 왕희지에 이르러 대성하였고, 그 뒤로는 극도로 쇠퇴했다’는 관점에서 확인된다. 즉 왕희지의 전형을 뺀 광초계열의 글씨는 모두 정법이 아니라는 것이 옥동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특히 황기로에 대해서는 ‘획의 운용이 활달하고 글자 구성이 공교롭지만 습속에 빠져 용렬함이 매우 심하다’고 할 정도였다.

옥동의 이러한 왕희지에 대한 경도는 구체적으로 부친인 이하진이 연경에서 고가로 사온 왕희지의 ‘낙의론(樂毅論)’에서 필력을 얻으면서부터이다. 즉 이하진은 1678년(숙종4년) 3월, 진향정사(進香正使)로 연경을 다녀왔다. 귀국하는 길에 황제로부터 받은 하사품을 통틀어 수천 권의 서적과 왕희지 필첩의 선본(善本)을 많이 구입해 왔는데, 당시 최고의 필명을 날렸던 윤순이 매양 기보(奇寶)라 일컬을 때는 반드시 이씨 집안 소장(李家藏)이라고 할 정도였다.

이하진은 연행에서 서적 구입을 통해 이서와 이익의 형제에게 서예 이론과 실기의 바탕을 제공해주는 한편 서첩 ‘천금물전(千金勿傳:천금을 주어도 그 사람이 아니면 전하지 말라)’을 선대로부터 가법으로 이어온 서풍을 전수했다. 이러한 이하진의 서풍은 아들 옥동과 성호에게 계승됐고, 소위 동국진체의 발원지로 옥동의 글씨는 당시 같이 교유한 윤두서와 윤덕희 부자 등 근기남인들을 통해 맥이 이어졌다. 그런데 옥동의 여주 이씨 가문은 비단 글씨뿐만 아니라 학문에 있어서도 대를 이어 혁혁한 업적을 남겼는데 경제학의 이만휴, 천문학과 문학의 이용휴, 경학과 사학의 이가환, 지리학의 이중환 등 조선후기 걸출한 인물들이 그 주인공이었다.

 

 

주역으로 탄생한 ‘필결(筆訣)’

 

필결’은 총 24장으로 옥동의 유고집인 ‘홍도선생유고’ 제12권에 수록되어 있다. ‘필결’의 구성은 대체적으로 총론과 각론 그리고 결론으로 되어 있다. 총론은 글씨가 주역의 음양(陰陽) 삼정(三停) 사정(四正) 사우(四隅) 등에 근본을 두고 있음을 그 기본이 되는 점획과 영자팔법(永字八法)으로 밝힌 ‘여인규구(與人規矩)’이다. 각론 역시 주역원리로 붓을 잡거나 움직이는 법, 먹을 가는 법은 물론 점획을 긋고 변화시키는 법, 글자의 짜임과 배치를 논한 작자법(作字法)과 행법(行法), 글씨의 정도와 변통의 중용을 경권(經權)으로 논하는데 할애하고 있다.

그리고 ‘변정법여이단(辨正法與異端)’에서는 서가정통(書家正統)이라는 표제 아래 왕희지를 정통의 기준으로 설정하고 정자(正字)와 행초 필법의 성쇠와 함께 이단의 근원과 해당 작가를 기술하고 있다. ‘범론서법(汎論書法)’에서는 지필묵 등 서예 도구재료의 중요성, 서예가의 자세 등을 논하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대목은 이 다음에 오는 ‘평론서가(評論書家)’와 ‘논고서(論古書)’이다. 여기서는 김생 탄연 안평대군 성수침 황기로 양사언 한호 등 우리나라 서가를 단독으로 논함은 물론 이들을 종요 왕희지 우세남 안진경 회소 장욱 조맹부 등의 중국작가와 동일한 반열에 두고 각체를 품평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 명·청 교체 이후 조선사회 전반에 충만해진 자존의식의 발로에 다름 아닌 것이다. 끝으로 ‘필결’은 ‘필결논요(筆訣論要)’ ‘잡론(雜論)’ ‘총단(總斷)’ ‘요지(要旨)’로 결론을 내고 있다.

요컨대 ‘필결’은 도학자로서 옥동의 역학(易學)이 서예가이자 비평가였던 그의 이론·역사·실기에 동시에 혼융되어 나온 저작이다. 특히 옥동은 만물의 형성과 변화 원리, 즉 천도(天道)를 글씨의 점획 결구 장법 등의 원리와 동일시하여 주역의 음양배합과 유전(流轉)원리로 해명하여 독자적인 서론을 전개했던 것이다.

이러한 ‘필결’은 신채(神彩)보다 외형 모방에만 급급해온 17세기 당시 조선 서예의 말폐적 현상을 극복하기 위하여 서예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촉구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예컨대 옥동은 ‘논고서’에서 조맹부와 한호를 극렬하게 비판하고 있는데, 그가 볼 때 조선에 전래된 이래 근 200년이 지난 송설체는 균정미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유약함과 몰개성으로 흘렀고, 석봉체는 판박이 사자관체로 전락했던 것이다. 특히 ‘필결’은 글씨를 천도에 귀속시켜 독자적 이론으로 해명하여 당시까지 글씨를 문예의 말단으로 간주해 온 사대부들의 인식을 뒤집고 있다는 점에서 혁명적이기까지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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