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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동 이서에서 시작된 동국진체는 백하 윤순을 거쳐 원교 이광사에 이르러 꽃을 피운다. 가장 ‘조선적인 글씨’로 꼽히는 윤순(1680~1741)의 ‘흥진첩’(興盡帖·부분·경남대박물관 소장). | 우리 예술을 논할 때 시대와 사람을 불문하고 늘 화두가 되는 것이 있다. ‘정체성 문제’가 그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알고 보면 시대에 따라 논의의 경중이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정체성이 없는 것으로 우리 예술이 채워지거나 공격받는 것에 대한 반작용 정도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일제세대가 민족문화의 말살위기 앞에서 우리문화의 정체성 문제가 가장 심각하게 제기되었다면, 그때가 정체성을 찾아내기가 가장 모호한 때 중의 하나인 듯싶다.
그러면 우리 글씨에서 일종의 정체성을 문제 삼는 ‘조선색’이란 어떤 것인가. 예컨대 초기 이용, 중기 한호, 후기 윤순, 말기 김정희 모두 조선의 걸출한 서가임이 분명하다. 이중에서 귀족미의 안평체, 전형미의 석봉체, 고졸미의 추사체 모두 시기는 다르지만 모두 일가를 이루면서 자기 색깔을 확보하고 있음은 물론이고 시대서풍을 뚜렷이 선도하여 왔다. 더 나아가 이들의 성취는 또한 당시부터 중국과 비견되거나 그들을 능가하는 것으로 평가되어 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글씨의 최고 아름다움에 대해 당시나 지금 ‘조선적이다’라는 평가가 우선되지는 않는다. 긍정적인 의미에서 이들 시대는 상대적으로 ‘조선적이다’라는 인식이 굳이 필요치 않았던 때인지도 모른다.
# 진정한 조선 글씨, ‘동국진체’의 다양함
이에 비한다면 백하 윤순(1680~1741)이 생존한 전후시대는 여타 시대와는 분명 다르다. 즉 시대상황은 임진·병자 양란과 대륙의 질서가 재편되는 명·청 교체기 이후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한 조선의 팽배한 자존의식으로 북벌(北伐) 도모를 계획한 때이다. 사상 또한 관념에서 현실을 문제 삼는 실학으로 바뀔 때고, 문예사조는 사실을 지향하면서도 그 속에서 참됨(眞)을 찾아낼 때이다. 요컨대 모든 방면에서 조선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가장 절실하게 묻지 않으면 안 될 때라고 할 수 있겠다.
글씨만 봐도 진정한 우리 것이 무엇인지를 규정하고 있는 ‘동국진체(東國眞體)’의 개념이 등장한 것이 그 단적인 예다. 허전은 “동국진체는 이서로부터 시작되어 그 후의 윤두서 윤순 이광사 등은 모두 그 실마리를 이은 자들이다”라고 할 정도다. 당시 조귀명 또한 “우리나라의 서법은 대략 세 번 변하였다. 국초에 촉체(蜀體:송설체)를 배웠고, 선조 인조 이후로는 석봉체를 배웠으며, 근래에는 진체(晉體:왕희지체)를 배우고 있다”고 한 바 있는데, 이용 한호 윤순이 그 해당인물이 된다. 요컨대 백하는 송설체가 퇴조하고, 석봉체가 관각체(館閣體)로 떨어진 조선후기 새로운 시대서풍을 꽃피운 인물로 자리매김된다. 즉 왕법을 토대로 당 송 명의 여러 명서가, 특히 미불과 동기창을 소화해냄으로서 백하 이후 후기서단을 주도한 이광사 조윤형 강세황 등의 서풍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옥동 이서와 백하 윤순은 글씨에서 왕희지를 토대로 하고 있지만 백하는 한걸음 더 나아가 미불과 동기창을 수용하여 옥동과는 서풍이 현격하게 차이가 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백하와 사제관계인 이광사 또한 왕희지법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글씨의 이념형은 같지만 해서와 행·초서는 물론 그 이전의 전서와 예서 등 오체겸수를 실천했다는 점에서 현격하게 차이가 난다. 요컨대 ‘동국진체’ 시기 서예는 같은 이념형을 가지고 있지만 실천에 있어 개별성이 두드러지는 흐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백하는 조선글씨의 정체성을 가장 문제 삼는 시기에 중핵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라 하겠다.
# 굳세되 비속(卑俗)해지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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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1662~1723)의 ‘위자원휴서’(爲子元休書·개인소장) | 그렇다면 이러한 백하는 글씨에 대한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가. 백하는 자신의 서첩을 평한 글에서 “비록 획의 뜻은 얻었으나 그 뜻이 먼저 속된 눈에 들고자하는 데 있다면 그 짜임새는 비속하게 된다. 그러므로 뜻이 항상 굳세고 속되지 않은(창경발속·蒼勁拔俗) 곳에 있은 뒤에야 그 성취가 필경 크게 나아갈 수 있다”고 하였다. 백하는 글씨의 정도(正道)를 그 짜임새나 획이 아니라 ‘굳세고 비속(卑俗)하지 않은’ 뜻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백하는 이러한 태도로 18세 봄부터 글씨공부를 시작하여 37세 겨울까지 족히 20년을 공부하고 나서야 비로소 글씨에 대한 고질(痼疾)과 독실한 공부가 스스로도 옛날 사람보다 못하지 않다고 말 할 수 있게 됨을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백하의 글씨철학은 또 그의 생활 속에서도 그대로 실천되었다. 즉 극심한 당쟁 속에서 직심(直心)과 절의(節義)의 조선의 선비정신 그대로 산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고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백하는 1716년 홍문관 부수찬 재직 시 숙종임금이 약원(藥院)을 나무라며 조정신하를 진퇴시킨 데 대하여 “전하께서 조정을 바꿔 조치하시는 것이 본래 바둑알 뒤집듯이 하셨지만 그 갑작스럽고 황급한 것이 또한 오늘의 조치와 같은 적이 없습니다”라고 직간(直諫)을 할 정도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백하는 숙종 경종 영조 3대에 걸쳐 30여년 동안 당쟁에 휘말리지 않고 80여 차례나 관직에 제수되었는데, 청렴하기는 영조가 ‘백하의 깨끗함(淸)이 너무 지나칠 정도다’라고 할 정도이다. 오죽했으면 평생 집 한 채를 가지지 못해 형인 윤유가 장만해 주었을까.
#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따라올 자 없는 백하체
그러면 이러한 백하의 예술정신이나 생활철학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백하의 가문은 동서분당 이후 서인(西人)이었고, 노소분당 이후 소론(小論)으로 김장생 송시열 등의 노론학맥에 반해 윤증 박세당 등의 학맥을 이었다. 그러나 백하의 생각과 행동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가학(家學)으로 내려온 양명학(陽明學)이다.
이것은 백하가 40여년을 스승으로 모셔온 정제두의 ‘제문(祭文)’에서 치양지(致良知:양지에 이르게 함)의 심학(心學)이 바로 스승의 삶이었음을 증언하는 대목에서 짐작이 간다. 즉 “이 마음을 간직하여 온갖 이치를 정하게 하고(存此心而精萬理), 이 마음을 실하게 하여 온갖 일에 응했다(實此心而應萬事)”는 것이 바로 양명학의 화두인 심즉리(心卽理)를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본연의 천을 즐겼다(樂其本然之天)”는 것은 본래 타고난 양지(良知)를 즐겼다는 말이다.
이러한 학문과 실천 속에서 배태된 굳세고 비속함이 없는 백하 글씨에 대해 “오직 백하 윤공이 천년 뒤에 태어나 뛰어남과 빼어남으로 조선의 고루함을 단번에 씻어냈다. 김생 이하 여러 서가를 다 취하여 그 빛나는 것을 가려냈으며 당·송·원·명을 깊이 터득하여 이를 왕희지에 절충하였다”고 홍양호가 평하고 있다. 하지만 백하 당대 사람들은 이미 “이전에도 없었고(前無古人) 이후에도 따라 올 사람이 없었다(後無來者)”고 할 정도로 상찬이 자자하였다.
조선후기 시대 서풍 동국眞體는 분명 있다 |
앞서 본 대로 ‘동국진체’는 허전이 옥동 이서의 ‘행장’에서 “동국진체는 이서로부터 시작되어 그 후의 윤두서 윤순 이광사 등은 모두 그 실마리를 이은 자들이다”라고 한 데에서 유래된다. 그러나 이것이 공식화된 것은 이를 근거로 간송미술관 최완수 실장이 ‘한국서예사강’ 논문에서 ‘동국진체의 맥락’을 사용하고부터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고 임창순 선생은 진체(眞體)라는 서체가 없어 이것은 서예용어상 부적절하고, 옥동과 백하가 사승관계가 아님을 들어 ‘동국진체’를 맥락으로 연결하는 것이 말이 될 수 없음을 지적하였다. 실제 기호남인으로 퇴계 학통을 골수로 이은 옥동과 성혼과 율곡학통 계열을 이은 소론의 백하가 사승관계가 될 수 없다는 점에서 임선생의 지적은 옳다.
그러나 최실장의 ‘동국진체’ 설정 또한 해서·초서 등 특정서체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조선 중화를 자처하며 자의식이 팽배한 조선 후기의 일련의 시대서풍의 특질로 사용한 것이라는 점에서 보면 이 또한 설득력이 확보된다.
더군다나 “우리나라 서법은 국초에 촉체 중기에 석봉체 후기에 진체로 바뀌었다”는 당시 조귀명의 말마따나 옥동 백하 원교 모두가 왕희지 서법으로의 직접적인 복귀를 공통점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더 그렇다. 물론 이점에서 작품에서 다르게 대비되는 작가마다의 개성은 별도로 치더라도 ‘동국진체맥락’은 이서나 윤순, 이광사를 통해 당시 서풍이 주도되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글씨에서 ‘동국진체’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최완수 실장 중심의 간송학파는 겸재 정선 그림을 ‘진경산수’로 명명하고, 동시대를 ‘진경시대’로 확장하면서 학계에서는 제3의 논박이 계속되고 있다.
올 7월 성균관대에서 열린 한국사상사학회의 학술대회가 대표적인 예인데, 반대하는 쪽에서는 ‘사상과 예술실천의 도식화를 경계하면서 겸재그림을 낙론계(洛論系) 성리학 사상과 연결시킬 수 없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반면 긍정하는 쪽에서는 ‘김창흡의 백악사단과 겸재의 논쟁 자체가 낙론계 천기론적(天機論的) 사고를 겸재가 공명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라고 재차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또 ‘18세기는 매우 개별적이고 다양한데 진경시대 하나로 당시를 규명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해 ‘그렇기 때문에 그 가중치에 해당하는 하나의 개념으로 시대를 보는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응수하고 있다.
요컨대 ‘진경’이다 ‘진체’다 라고 할 때 ‘진(眞)’이라는 것이 내면의 참됨은 물론 형상까지 사실과 부합되어야 하고, 관념은 물론 현실까지 참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시대 글씨나 그림의 이념형이나 실천 또한 진(眞)임을 동의한다면 당시 예술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자명해질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