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의 3 성씨 안동권, 안동김, 안동장 태사묘
태 사 묘
태사묘는 후산국 쟁패기에 왕건을 도와 고려의 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삼태사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안동이 역사상 크게 두각을 나타낸 데에는 태사묘에 배향된 태사들의 공헌이 적지 않다.
태사묘는 고대에서 최근세까지의 안동과 경북의 지역사에서 주요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안동지역과 그 지역 사람들의 역사를 대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후삼국의 쟁패기에 고창군(안동)은 후백제와 고려가 각축을 벌이던 곳이었고,
이 지역의 호족들이 정하는 향배(向背)에 따라 양국 사이에 세력의 판도가 달라지는 때였다.
처음에는 후백제의 세력이 강하였으나 930년 고창군 전투에서 고려가 승리함으로써
고려는 인근 지역까지 세력권을 장악하게 되어 삼국 통일의 중요한 기회를 얻었다.
태조가 고창 성주였던 김선평(金宣平) 등의 도움으로 병산전투에서 승리하면서
김선평을 대광(大匡)으로 삼고,
권행(權幸)과 장길(張吉,선평)을 대상(大相)으로 삼았다.
이후에 태사들은 각각 안동 권․김․장이라는 세 성씨의 토성을 이루는 시조가 되었다.
삼태사의 공로 이후, 안동이 다시 역사상에서 크게 부각된 것은 공민왕이 안동에 몽진해 오면서이다.
고려 후기에 이르러 중국 한족의 반란군이었던 홍건적이
고려에 자주 침입을 해 국가가 황폐해져 가고 있었다.
공민왕이 즉위한 지 10(1361)년이 되던 해에 홍건적의 침입으로 공민왕이 안동까지 몽진을 오게 되었고
왕은 지리적, 물적, 인적 기반을 토대로 몽진의 대상지로 찾았는데 이러한 조건에 맞는 곳이 안동이었다고 한다.
바로 안정성 있고 주민들을 믿을 수 있는 곳을 찾았는데
그 곳이 고려 개국을 도왔던 삼태사가 있었던 안동이었던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안동도호부에 대해 ‘
충성과 의리가 남쪽 지방에서는 가장 뛰어난 곳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도 삼태사의 공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몽진 후 역시 안동 부민은 공민왕을 적극적으로 원조하였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안동은 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이렇듯 안동이 역사 속에서 부각되게 된 것은 결국 안동에
삼태사가 있었기에 여러 가지가 가능한 것이었다고 할 것이다.
2
태사묘는 안동시 북문동 24-1번지에 소재하며 태사묘우, 숭보당, 경모루, 동재 서재,
주사, 전사청, 안묘당, 보물각,차전각 등 기념물 15호와 고려 시대의 유물이라는 보물 451호 등이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태사묘는 고려 성종 2년(983)년에 처음으로 부사(府司) 내에 공신묘(功臣廟)가 창건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고려 초기의 부민들은 자발적으로 정성을 모아, 고을 백성들을 존중하여 분란없이 대세로 이끈
삼공신의 공덕을 추모하였다.
당시의 부사 안 묘우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안동이 도호부로 유지되어 오면서
묘우를 소홀히 다루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공민왕이 안동에 파천했을 때 고을 사람들이 정성을 다하자
수도로 환도한 이후 다시 안동대도호부로 승격시켰다.
더욱이 공민왕이 하사한 유물은 부민들의 사기를 돋우고 삼태사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게 하였을 것이다.
태사묘의 위상을 안동부민들이 더욱 확실히 인식하게 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이다.
이는 후손들의 번성과 가문을 중시하는 유교적 기반의 성숙에 의해 가능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종 37(1542)년 강릉인 김광철(金廣轍) 부사가 안동에 부임하면서
태사 묘우가 현재의 위치에 세워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때 감사로 있던 권공(휘 轍)이 제사를 지낼 토지를 마련하고 전복(典僕)을 지급하였다.
그리고 조상들의 중요성을 인식을 하게 된 후손들은 태사묘를 체계적으로 정비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명종 11년(1556)에 분묘와 묘우를 수축(修築)하고 동왕 18년(1563), 안동부사 권응정(權應挺)에 이르러
태사묘가 자리잡게 된다. 그 후 태사들의 묘정비(廟庭碑)를 세우고 제전과 노복을 지급하였다.
또 묘우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하여 안동부에서 임명한 권씨 1인과 호장이 관리하도록 하였으며
명절에는 헌관과 집사가 향화를 올리며, 매년 한식에 묘소에서 제향을 올리도록 하였다.
조선 전기에 태사묘의 제향 방식은 자연히 유교적 의례로 체계를 잡아가게 되었을 것이다.
처음에 태사들의 제사는 부사에서 부민들이 지냈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권․김․장씨의 자손들이 주도적으로 관계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1585년부터 춘추로 향사를 지내도록 결정하였으며 이러한 제향 방식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임란 이후 장태사의 후손인 장경당(敬堂, 휘 興孝, 1564-1633)은 당시
김태사공과 권태사공의 후손과 함께 신위를 새로 봉안하였다.
이제까지 모셔온 위판을 1608년 11월에 태사들 후손의 대표 3인이 새로 제주(題主)하였다고 한다.
현재 태사묘의 위판은 모두 성씨만 다르고 동일한 문구로 되어 있다.
곧 태사묘의 향례는 유학이 성행하던 시대에 그 시대의 풍속을 따라 정립되었다.
특히 이 때는 안동 권씨와 김씨 및 장씨들이 중앙과 지방에서 여러 관료와 유현을 배출하여
안동에서 토착세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던 시기이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묘우에 대한 정비는 물론이거니와 향사는 유생들이 행하는
사림 단위의 행사로 바뀌고 후손들은 각기 씨족의 선조가 안동 부민의
구심력있는 인물에 이른 것을 긍지로 삼고 있었을 것이다.
1613년 7월에 경상감사 권공(휘 盼)과 경주부윤 권공(휘 泰一)이 종래의 묘우를 증축했다.
그리고 삼공신의 후손들과 안동 향당의 덕망있는 노성들과 공론하여 묘우를 신축하였다.
이때 오늘날의태사묘’라는 묘우의 명칭을 얻는다. 태사묘는 착공 1년만에 완공되었다.
그러나 1721년에 서문에서 일어난 대화재로 묘우만 보전되고 부사도 타 버렸다고 한다.
영조 43년(1767) 실록 자료에 의하면 여전히 안동부에서 묘식(廟食)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영조대와 정조대(1791년)는
안동 김씨와 안동 권씨 문중 사이에 태사묘에 배향되어 있던 선조들과
관련된 문제로 논쟁이 심각했던 시기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결국 삼태사 배향이 이루어졌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이르러 태사 묘우가 창건되어 현 태사묘의 모태가 되었다.
조상의 공을 내세우고 가문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마음이
지나침에 따른 폐단이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러한 기대와 관심들 때문에
태사묘의 체계적인 관리가 가능했으며 태사를 모시기 위한 배향 방식도 유교적 방식으로 정착되여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이다.
아울러 조상과 가문에 대한 애착 덕분에 선조들의 귀한 유물이 지금까지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하겠다.
태사묘의 역사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현재까지의 오랜 기간 동안 많은 우여곡절을 거친 후
현재에 이르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임진왜란이나 6.25 한국전쟁과 같은 사건들이 간간이 태사묘를 위태롭게 하였으며
그런 와중에서도 태사묘의 유물들은 굳건하게 보존되어 왔다.
앞으로도 영원히 후손들에게 전해져야 할 귀중한 보물들이다.
3.
현재 태사묘의 보물각에 소장되어 있는 유물은 모두 12종의 22점이다.
주칠탁잔(朱漆托盞) 1개와 고견포(古絹布) 7점, 관(冠) 1개, 이(履) 1족, 포선(布扇) 1개, 동인(銅印) 2개,
은구유개합(銀釦鍮盖盒) 1개, 옥관자(玉貫子) 2개, 혁과대(革銙帶) 4벌, 교지 1매, 은시저(銀匙箸) 1벌 등 있다.
그러나 영가지에는 이보다 많은 유물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공민왕이 하사한 것과 태사의 것을 구분하여 제시하고 있으므로
우선 이 자료에 의한 유물들의 유무와 상태 등을 <표 Ⅱ-1>로 정리하고
소실된 것들과 복식유물에 해당되지 않는 것들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永嘉誌 기록의 태사묘 관련 유물(보물 제451호)
출 처 |
번호 |
유물 명칭 |
현존 여부 |
비 고 |
太師 유물 |
1 |
玉笛 1 |
× |
|
2 |
荔枝金帶 1 |
△ |
장식판으로 현존 | |
3 |
朱紅木杯 1 |
○ |
잔 & 받침 현존 | |
공민왕이 本府에 머물렀을 때 내려준 물건 |
1 |
白玉帶 1 |
△ |
홍정 일부와 옥판 일부 남음 |
2 |
玉貫子 1쌍 |
○ |
1쌍 중 한 개 반파 | |
3 |
銀食器 1 |
○ |
‘은구유개합’ | |
4 |
銀匙箸 1 |
○ |
젓가락 한 짝 반파 | |
5 |
破色花白段 4 |
△ |
1점 현존하나 섬유 손상되고 황변 | |
6 |
破色紅段 4 |
△ |
1점 현존하나 섬유 손상되고 퇴색 | |
7 |
破色藍段 2 |
△ |
1점 현존하나 섬유 손상되고 퇴색 | |
8 |
破色草綠段 2 |
○ |
3점 현존하나 섬유 손상되고 퇴색 | |
9 |
金線段 3 |
× |
| |
10 |
丹紅金線段 1 |
× |
| |
11 |
倭色花文段 1 |
× |
| |
12 |
香囊 7 |
× |
| |
13 |
紅色紬 1 |
× |
| |
14 |
靑黃赤白色花紋段 1 |
× |
| |
15 |
銅鐵荔枝金帶 1 |
○ |
복잡한 구조, 네 조각으로 남음 | |
16 |
牧丹金帶 1 |
○ |
비교적 상태 좋은 편 | |
17 |
烏犀帶 1 |
△ |
서각 잔편만 남음 | |
18 |
象笏 1 |
× |
| |
19 |
鍮盞俱臺 14 |
× |
역리(驛吏)에게 하사한 물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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