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사

[스크랩] 춘추(이종욱)

회기로 2009. 7. 16. 21:14

김춘추, 민족의 영웅인가 매국노인가
교과서의 부정적 평가 뒤엎는 '도발적 문제 제기' [북데일리/이동환] 파이미디어 | 2009.07.13


"춘추를 바로 보기 위해서는 우선 그를 둘러싼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재구성해내는 일이 필요하다. 춘추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13쪽)
신라의 태종무열왕, 우리는 그를 김춘추라고도 부른다. 나당연합군을 결성해서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의 왕이고, 나아가 삼국통일(삼한통일)의 초석을 이룬 사람이다. 그렇다면 분명 그는 승자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거늘 그는 승자이면서도 현재 한국에서 영웅이 아닌 매국노로서 푸대접을 받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신간 < 춘추 : 신라의 피, 한국·한국인을 만들다 > (효형출판.2009년)는 태종무열왕 김춘추를 역사적 사실 그대로 평가해보고자 하는 의미에서 출간된 책이다.
현행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신라의 삼국 통일이 "외세를 이용했다는 점과 대동강에서 원산만까지 경계로 한 이남의 땅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는 점에서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고 되어 있다. 이 표현을 보면 글 쓴이(손진태)가 삼국통일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저자인 이종욱 교수는 그 이유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손진태는 해방 전 일제와 해방 후 남북한에 진주한 미국과 소련의 군대를 보며 외세를 몰아내고 남북통일을 이루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춘추를 외세를 끌어들인 반민족적 행위자의 표상으로 만들어냈다. 반면 광개토왕 등은 외세를 물리친 위인의 표상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현재 한국인은 신라를 부끄럽게 여기는 반면 고구려를 자랑스럽게 여기게 되었다."(416쪽)
즉 김춘추에 대한 손진태의 평가는 민족이라는 이데올로기가 깊이 박혀있는 만들어진 역사라는 말이다. 이종욱은 이러한 평가를 '모델 2'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모델 1'은 무얼까?
'모델 1'은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고려와 조선 사람들의 평가다. 삼국사기의 내용을 토대로 한 것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당나라 군대의 위엄을 빌려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그 땅을 얻어 군현을 삼았으니, 융성한 시대라 이를 만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김부식은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한 승자이고, 또 통일 이후를 '융성한 시대'라고 말함으로써 신라의 우월함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평가는 조선시대에 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그러나 해방이후에는 춘추에 대한 평가는 '모델 2'처럼 부정적으로 변해버렸다. 즉 춘추는 매국노가 되어버렸다.
저자는 이러한 '모델 2'의 평가가 잘못되었다고 본다. 자신의 연구결과를 통해 저자는 춘추를 새롭게 평가하고 있고, 이에 '모델 3'라는 명칭을 붙였다. '모델 3'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먼저 저자는 '모델 3'에 대해 이렇게 운을 띄운다. "모델 3은 신라인도 모르는 이야기다. 신라인은 춘추가 기획한 삼한통합이 고려 조선은 물론이고 현재 한국, 한국인, 한국 사회, 한국 문화의 기원을 신라에 두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417쪽)
즉 현대 우리나라 사람이 사용하는 성 중 인구가 가장 많은 성의 본관을 보면 거의 모두 신라의 지명에서 나왔다. 신라는 고려와 조선을 거쳐 오늘날 대한민국으로 그대로 전통이 이어져 내려왔음을 의미한다. 피정복 국가였던 백제나 고구려 사람들은 신라의 하층계급으로 전락했고, 점차 도태되었기에 지금 한국에서 백제나 신라인을 시조로 하는 성씨는 남아있지 않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그렇기에 춘추는 반민족 행위자가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한국인을 만들어준 장본인라고 저자는 말한다.
또한 '모델 2'의 평가에서 보면 춘추가 외세를 빌려 동족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는 부정적 평가가 있다. 이 평가에서 중요한 점은 바로 '동족', 즉 민족이라는 개념이다. 서로 정복하느냐 정복당하느냐라는 절체절명의 운명을 안고 피 튀기게 싸운 삼한의 각 나라는, 동족의식이라는 것은 알지도 못한 채 자국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투쟁했다. 그 결과 신라는 삼한통합을 이루었다. 고려, 조선을 지나 현재에 이르는 한국사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결국 신라의 혈맥과 역사적 유산만이 계승되고, 백제와 고구려의 존재는 역사의 저편 어딘가에 조용히 안장된 것이다. 저자는 춘추를 욕하는 행위는 "조상에게 침을 뱉는 행위"라고까지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는 이렇게 외친다. "춘추에게 민족을 강요하지 말라"고 말이다.
저자의 춘추에 대한 평가의 근본에는 < 화랑세기 > 가 자리하고 있다. 위작 논란에 빠져있어, 주류 사학계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책이지만, 이 책에는 신라에 대한 아주 자세한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다. 소수의 학자들만이 < 화랑세기 > 필사본을 진짜로 보고 있는데, 이 책의 저자인 이종욱 교수는 그 소수를 이끌고 있는 대표적인 학자다.
< 화랑세기 > 는 신라인 김대문이 쓴 책으로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 32명의 전기를 정리한 책이다. 저자 이종욱 교수는 이 책의 필사본을 연구하기 시작해 새로운 신라사를 쓰고 있다. 이 책 < 춘추 > 는 이종욱 교수의 지난 30여 년에 걸친 신라사 연구의 핵심을 모아 구축한, 새롭고 정확한 신라사 및 김춘추 연구서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에 기반을 둔 춘추의 평가는 독자들에게는 아주 새롭다.
저자는 책을 끝내며 이렇게 말한다. "한국사 최고의 위인을 뽑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춘추를 꼽을 것이다."(427쪽) 그렇다, 김춘추는 오늘날 우리가 이 땅에서 한국인으로 살며, 한국어를 사용하게 하는 등 오늘날 한국인을 만든 장본인인 것이다.

 

 

 

 

 

[박종현 기자의 대중과 소통하는 학자들] <28>역사학자 이종욱 서강대 총장“우리 뿌리는 신라”… 관학파에 맞선 사학계의 비주류[세계일보] 2009.06.29


세계일보사가 1억원 고료를 내걸었던 세계문학상은 2005년 그 첫 수상작으로 김별아의 ‘미실’을 선정했다. 신라의 미실궁주(美室宮主)는 이 소설의 제목과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녀는 3명의 풍월주와 사랑을 나누고, 진흥왕을 비롯해 3대에 걸쳐 후궁 노릇을 했다. 여러 남성에게 일부종사(一婦從事)를 시키고 정사(政事)에 적극 참여하며 운명을 개척한 여걸이었다. 성녀(聖女)와 창녀의 속성을 모두 보여주고자 했던 작가의 ‘내공’ 덕택이었는지, 책은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랫동안 이름을 올렸다.

소설 출간을 계기로 ‘신라 여성 미실’에 대한 관심은 크게 늘게 된다. 요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는 MBC 드라마 ‘선덕여왕’의 성공적 안착에도 도움을 줬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인의 시각으로 미실의 행각은 고약하기 그지없다. 동방예의지국에서, 그것도 왕궁에서 벌인 행태라니. 그녀의 일생은 21세기 한국인의 사고로는 용납하기 힘들다. 그래서인지 미실의 역사적 존재를 인정하는 이들마저 그녀를 ‘소설적 상상력이 극대화된 인물’로 여기기도 한다.

미실의 이야기가 사학자 등 학계에서 언급된 것은 20년밖에 안 된다. 1989년 2월 부산에서 발견된 ‘화랑세기(花郞世紀)’ 필사본에서 미실에 관한 내용이 담긴 게 확인되면서부터다. 그후 6년 뒤에 162쪽 분량의 또 다른 필사본이 발견된다. 화랑들의 전기를 담은 화랑세기는 신라 문필가 김대문의 작품으로 그때까지 이름만 전해져 왔다. 필사본의 등장으로 신라의 비밀을 풀어줄 ‘열쇠 말’을 찾을 것이라는 기대도 나왔다.

하지만 학계의 흥분도 잠시였다. 학자들은 필사본이 가짜라고 생각했다. 필사본을 남긴 사람이 일본 왕실도서관 사무촉탁이었던 박창화(1889∼1962)였다는 점에다가 내용이 작위적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견해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도 있다. 대학원 시절 이후 40년 동안 신라사에 천착해온 이종욱 서강대 총장이 대표적이다. 그는 한 세대 넘게 사학과 교수로 봉직하다가 29일부터 총장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임기 시작 며칠을 앞두고 그를 연구실에서 만났다. 총장실에서 업무를 보더라도 그는 간혹 연구실에서 신라사를 연구할 것이다. 땀을 흘리며 찾아간 연구실 문에 ‘이종욱’이라는 문패가 기자를 반긴다. 그의 연구실 문의 명패는 특징이 있다. 1개가 아닌 2개의 명패가 있다. 문 바깥쪽에는 찾아온 이를 위해 자신의 이름을, 안쪽에는 스승의 이름을 달았다. ‘신라국가형성사 연구’로 학위를 받을 때, 제자의 학문적 열정을 평가했던 당시 스승에 대한 도리에서다.

학문은 학계의 이기심으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 이는 스승과 제자였던 그가 공유했던 생각이었다. 다수 사학자가 외면하고 있지만 ‘화랑세기 필사본’만 해도 진본이라고 여긴다. 여러 자료와 증거를 살펴볼 때 결코 가짜가 아니라는 것이다.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해서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가령 필사본에서 경주 월성 동쪽에 ‘하수구의 연못’인 ‘구지(溝池)’를 언급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 유적은 필사자 박창화가 숨지고 한참 뒤에 발굴된다.

학문에 대한 치열함 덕택에 그간의 저술량도 만만찮다. 단행본만 20권에 이른다. 1998년 이후 10년 동안에는 ‘화랑’ ‘색공지신 미실’ 등 17권을 저술할 정도로 연구에 매진했다. 이달 중순 내놓은 최신작은 ‘신라의 피, 한국·한국인을 만들다’는 부제를 단 ‘춘추’(효형출판). 이 총장은 “김춘추는 한국·한국인을 존재케 한 가장 위대한 인물이며, 삼국통일이라는 위업을 달성하며 우리 역사상 최대의 M&A를 성사시킨 군주”라며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신라를 높게 평가한다.

이번 저술을 위해 그는 2007년 9월부터 안식년 1년을 죄다 경주에서 보냈다. 1년 동안 전문가를 상대로 각기 12번에 걸친 강연과 답사를 제외하고는 기록을 통해 역사적 사실 찾기에 열정을 쏟았다. 일례로 사적 제245호인 경주 나정(蘿井)을 여러 차례 찾았다. 박혁거세는 우물 옆에서 태어났다고 탄생 설화에 언급되는데, 이곳에서 설화와 밀접한 배경을 지닌 우물의 흔적이 발굴된다. 이 사례를 들며 “역사와 기록, 혹은 전승되는 말은 일치할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한다.

보통의 경우 총장에게는 결코 ‘소수자의 이미지’가 겹쳐지지 않는다. 그런데 그는 학문적 시각에서 소수자의 길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신라의 중요성’을 유독 역설하는 것도 보편적인 우리의 정서와는 다르다. 무슨 이유에서일까.

“‘우리가 누구냐’는 근본적인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해요. 우리의 뿌리는 고구려나 백제가 아닌 신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문화, 사회적인 유산은 대부분 신라에서 이어진 것이지요. 우리 역사에서 신라를 변방으로 몰아내서는 안 돼요. 신라는 사실 오늘날 우리와 한국의 근원입니다.”

그의 최근 저서를 읽었지만, 이내 수긍하기는 곤란하다. 마치 재야 사학자의 주장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한번 찔러보기로 했다. “신라는 ‘당나라’를 끌어들여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을 불러온 나라가 아닙니까”라고 반문하니 금세 반응이 나온다. “사실입니다. 하지만 당시에 민족 개념이 있었을까요. 신라는 물론 고구려와 백제에서도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라는 개념이 결코 없었어요.”

이때다 싶었는지, 학자라면 학문적 객관성을 확보해야 한다며 설명을 이어간다.

“우리에게 ‘민족’은 관학파 주도의 현대사학이 주입한 해방 이후의 개념입니다. 당시에 민족은 없었어요. 신라가 통일하면서 9서당에 고구려, 백제, 말갈 사람의 군단을 편성한 것을 민족융합책의 근거로 드는데, 그것도 웃겨요. 병사들을 9서당에 편성했을 뿐이지, 지휘관은 죄다 신라인이었어요. 피정복자였던 고구려와 백제인들은 역사적인 흐름에서 점차 사라졌지요.”

해방 직후 손진태와 이병도 등 학문 권력을 장악한 이들이 ‘관 주도의 국사’를 만들면서 오류가 생겼다고 설명한다. 국가를 등에 업고 민족·민족사를 국민의 역사관으로 만들어내며 지나치게 ‘민족’을 강조하며 신라가 도태됐다는 것이다. 만주를 당나라에 내준 신라가 대한민국 건국 초기 사학자들에게는 결코 자랑스럽지 않는 나라였을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이 있어요. 2000년 인구센서스 조사 결과 한국인의 286개 성씨 중 대성(大姓)은 거의 신라인을 시조 혹은 중시조로 하고 있어요. 김, 이, 박, 정, 최, 손씨 등이 다 신라인을 시조로 하고 있잖아요.”

이 총장의 말대로 현대사회에서 단군왕검이나 고주몽을 시조로 두고 있는 성씨는 없다. 통일신라 이후에는 더 심했을 것이다. 피정복자 처지에서는 자신을 숨겨야 하니까. 불교와 토착신앙의 결합은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한반도에서는 고구려나 백제보다는 산신각 등에서 보듯 신라의 민속신앙과 더 잘 조화를 이뤘다는 설명도 이어진다. 오늘날 군과 면을 포함한 지방행정조직의 명칭도 그 뿌리는 신라에 두고 있는 게 사실이다.

“아버지(조선)와 할아버지(고려)를 있게 한 직계 증조부(신라)는 창피하게 여기고, 증조부의 형제들(고구려와 백제)에 대해서만 안타까워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요.”

이 총장은 당분간 전공 분야 연구보다는 학교 행정에 더 관심을 둬야 한다. 대학은 대학다워야 하고, 학자는 학자다워야 한다는 철학 덕택에 그는 서강대 최초의 본교 출신 총장이 됐다. 학문에서처럼, 그는 행정에서도 원칙을 지키며 소수 의견도 받아들일 생각이다. 대학 안팎에서는 총장 선거에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낸 그에 대한 기대가 남다르다. 총장 출마에서 임명까지 그가 지출한 선거비용은 복사비 9만원이었다고 한다.

“임기 내에 무엇인가 확실한 성과를 내겠다는 생각보다는 적어도 25년 후를 생각하면서 일을 하고 싶습니다. 제가 있는 동안 조그만 돌 하나 올려놓으면 시간이 지난 뒤에는 역사로 남겠지요. 이런 차원에서 교수의 새로운 연구는 대폭 지원하고, 학생에게는 최고의 교육 기회를 제공해야지요. 특히 학생들의 인문학적 소양과 전인교육을 위해서 힘을 보태겠습니다.”

 

 

춘추 - 신라의 피 한국 한국인을 만들다 / 저자 이종욱 | 출판사 효형출판


진짜 신라, 진짜 김춘추의 이야기가 궁금하다고?

요사이 한국 대중문화는 전에 없이 신라에 대한 이야기로 들끓고 있다. 몇 해 전, 정사에는 존재하지 않는 미실의 이야기가 소설화되어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고, 최근에는 선덕여왕과 미실, 그 주변 인물의 이야기를 다룬 TV 드라마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이처럼 신라 시대를 배경으로 한 대중문화 콘텐츠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화랑세기』덕분이다. 익히 알려진 대로, 『화랑세기』는 신라인 김대문이 그의 조상을 기리며 풍월주(화랑의 우두머리) 32명의 전기를 정리한 책이다.
저자 이종욱 교수가 주축이 되어 이 책의 필사본을 발굴해 1999년 번역·출간되기에 이르렀다. 근래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신라에 대한 이야기들 대부분이 『화랑세기』의 기록에 의지하고 있음을 볼 때, 오늘날 신라 담론의 상당 부분이 그의 연구에서 비롯되었음은 자명하다.
『춘추 : 신라의 피, 한국·한국인을 만들다』는 이종욱 교수의 지난 30여 년에 걸친 신라사 연구의 핵심을 모아 구축한, 새롭고 정확한 신라사 및 김춘추 연구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물론, 『화랑세기』에 기반을 두고, 신라 중흥의 군주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그가 기획한 신라의 삼한통합에 대한 진짜 이야기를 알고자 하는 독자에게 최상의 지식을 선사한다. 가히 현대 신라사의 정전이라 부를 만하다.

신라, 김춘추, 이 몹쓸 것들!

사서를 펼쳐보라. 한국사를 선사시대부터 읽어내려 가다가 고대사회 부분을 지나면서, 이런 대목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춘추. 무열왕. 나당연합. 신라의 삼한통합(삼국통일)…….”
이 인물과 사건들에서, 우리는 어떤 기분을 느끼는가? 열에 예닐곱은 왠지 모를 거부감을 느낄 것이다. 이건 일차적인 반응에 불과하다.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끌끌 차는 사람은 물론, “신라, 이 몹쓸 것들!” 하며 비분강개하는 이도 있다.
그렇다. 지금까지 신라 그리고 김춘추는, 이른바 ‘민족 형성사’로서의 고대사에서 ‘과거사 청산’ 대상 1호였다. 김춘추의 신라, 신라의 김춘추는 삼한통합의 원대한 꿈을 이루어 오늘날 한국인을 있게 한 장본인이다. 그런데도 거대한 외세 당나라에 사대해 동족 백제와 고구려의 자랑찬 역사와 문화를 짓밟은 파렴치하고 패륜적인 세력 정도로 치부되고 있다. 연구자들 중에서도 많은 수는 신라가 수행한 삼한통합(이른바 삼국통일)의 의의는 인정하지만, 그것을 실현하는 데 동원된 방법에는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하는 게 현실이다.
심하게 말해 ‘공공의 적’으로까지 평가절하 된 춘추와 대신라(통일신라). 이런 평가가 나오기까지, 한국 사학계와 교육 현장에서는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관학파의 민족사학, ‘죽은 권력’ 김춘추와 신라에 테러를 가하다

1945년 이후 해방 공간의 사학계에서, 김춘추와 그가 건설한 대신라는 ‘한민족의 웅혼한 기상을 앙양’하기 위한 프로젝트인 ‘민족사’ 구축의 첫 번째 희생 번제가 되었다. 왜 하필 그들이었을까?
저자는 이른바 ‘민족사’라는 한국사학의 계파에 주목한다. ‘관학파’는 ‘민족’이라는 개념을 한국고대사에 도입·적용해, 논의의 핵심을 ‘민족’의 문제로 치환했다. “국민은 민족”이고 “한국사는 민족사”라고 명토 박아, 한국 역사 속의 모든 나라와 그 안에 살았던 모든 사람을 단군의 자손인 한민족이라 규정했다.
학문 권력을 장악한 이들의 표적이 된 게 바로 김춘추와 신라였다. 당나라라는 거대한 외세와 결탁해 ‘동족’ 백제를 치고, 나아가 ‘만주벌판을 말달리던’ 고구려의 ‘웅혼한 민족 기상’까지 거꾸러뜨려 놓고선, 그것을 통일 대업의 완성으로 포장했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1974년 이래 국가가 주도해 만든 국정교과서 고등학교 『국사』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신라의 삼한통합은 이른바 ‘불완전한 통일’로 규정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후 김춘추는 을사오적에 준하는 반민족 행위자의 표상이 되었다.
저자는 이 점을 분명히 밝히는 데서 시작하고, 또한 끝맺는다. ‘민족’ 개념이 일제 강점 이후 이 땅에 유입되고 사용되기 시작했음을 도외시한 채 관학파는 십수 세기 전의 역사에까지 ‘민족’을 소급 적용해 고대사를 연구하는 촌극을 벌여왔다. ‘단군의 순수 혈통을 물려받은 단일민족’의 이념을 발명해 국민에게 강요한 이들의 역사하기는, 결국 오늘날 한국인의 왜곡된 역사의식에 단초를 제공했다. 김춘추와 대신라, 바로 그 시대의 역사를 올바로 재구성하는 데서, 저자는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를 시작한다.

춘추, 그는 누구인가?

진골로서 최초로 왕위에 등극한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은 진지왕의 직계 손자, 진평왕의 외손자, 선덕여왕의 조카, 용수갈문왕과 천명공주의 아들이다. 본디 춘추는 성골로 태어나 당연히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조건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할아버지 진지왕의 폐위로 인해 일족이 진골로 강등되면서, 자력으로 거대한 운명을 개척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어린 시절 10년간 왕궁에서 성골 왕족과 함께 생활하며 왕자로서의 기본 자질을 형성했다. 진평왕의 사위로서 왕위를 계승할 지위를 갖고 있다가 선덕공주에게 그 자리를 내주며 출궁하게 된 아버지 용수갈문왕을 따라 출궁하며 새로운 운명을 맞는다.
평생 한 몸과 같이 지낸 김유신의 권유로 화랑도에 들어가 풍월주 활동을 하며 칠성우라는 평생 추종 세력을 거느리고 당대의 국제 정세를 파악함으로써 삼한통합을 개인적·국가적 목표로 세운다. 선덕여왕의 지근거리에서 주요 직위를 맡아 활동하던 그는 유신, 칠성우 세력과 함께 왕위 찬탈을 노린 반란을 진압하며 진덕여왕을 즉위시킴으로써 왕이 되기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친다. 그리고 660년, 드디어 신라 제29대 왕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한다. 당나라와의 군사 연합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그는, 삼한통합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눈앞에 둔 채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친다.

신라인 김춘추의 피톨, 한국인의 유전자에 아로새겨지다

저자는 ‘한국·한국인의 근원(origin)’이라는 말로 그의 업적에 대한 위와 같은 구구한 설명을 압축한다. 김춘추, 그리고 신라(혹은 대신라)를 한국·한국인의 기원으로 보는 데에는 분명한 역사적 근거가 있다. 한국인의 대다수가 신라인을 시조 또는 중시조로 하는 김, 이, 박, 정, 최, 손 등을 성으로 하는 씨족에 속해있다는 간단하고도 명쾌한 현실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는 자명하다.
한마디로, 춘추-태종무열왕의 존재가 이를 대변한다. 그는 삼한통합이라는 대역사를 기획해 추진했고, 생전에 직접 백제를 평정함으로써 그 길의 과반에 도달했다. 그의 아들 문무왕은 선왕의 유지를 이어받아 고구려를 평정하는 데 성공했고, 통합된 삼한을 병탄하려는 야욕을 드러낸 과거의 우방 당나라를 격퇴함으로써 삼한통합의 대업을 완성했다. 그 후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옛 영토와 백성을 한데 모아 대신라(통일신라)를 운영했다. 그 과정에서 백제와 고구려의 혈통은 도태되어갔고, 문화 등 사회 제분야 역시 신라의 사회 체제에 흡수되었다.
서로 정복하느냐 정복당하느냐라는 절체절명의 운명을 안고 피 튀기게 싸운 삼한의 각 나라는, 동족의식이라는 것은 알지도 못한 채 자국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투쟁했다. 그 결과는 바로 신라의 삼한통합으로 귀착되었다. 고려, 조선을 지나 현재에 이르는 한국사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결국 신라의 혈맥과 역사적 유산만이 계승되고, 백제와 고구려의 존재는 역사의 저편 어딘가에 조용히 안장된 것이다. 이 모든 역사의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수원에 춘추가 당당히 앉아있다.
저자는 이러한 춘추의 일대기와 그의 활동으로 성사된 삼한통합의 과정을, 다양하게 수집한 역사 자료의 교집합을 통해 생생하게 재구성해냈다. 신라사의 진면목을 알고자 하는 독자에게는 가뭄 중 단비와 같은 자료가 될 것이다.

경주에서 보낸 1년 춘추를 다시 만나다

저자는 20세기 한국 사학계를 주도해온 관학파의 민족주의적 연구 관행을 넘어선 올바른 고대사 연구 풍토의 정착을 위해 매진해왔다. 2007년 안식년을 맞아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에 내려가, 자신이 연구해온 신라의 역사에 대해 한 해 동안 되짚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 속에서 김춘추의 진면에 새롭게 주목하고, 그것을 정리해보겠다고 결심했다. 먼지 쌓인 기록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이 책으로 재구성했다.
저자는 말한다. “평가절하도, 신화화도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신라를 직시하자”고. 그리고 덧붙인다. “그럴싸한 이야기에 역사라는 거죽만 씌운 채 오늘 우리에게 제공되고 있는 역사 관련 콘텐츠를 경계하자”고. 민족사학의 역사 왜곡이 자아낸 한국(고대)사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아울러 새롭고 정확하고 재미있는 역사 관련 문화 콘텐츠의 보급·양산을 위해, 여기 ‘춘추, 그리고 그가 추진한 신라의 삼한통합 이야기’를 펼쳐냈다.

 

 


한국과 한국인을 만든 김춘추 [연합뉴스 | 2009.06.16]


고구려ㆍ백제ㆍ신라의 통합을 기획하고 백제를 평정해 통합의 기틀을 잡은 태종무열왕 김춘추.

우리는 김춘추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신라가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의 나라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기에 현재 한국의 영토가 쪼그라들었다는 역사인식이 널리 퍼져 있으며 김춘추를 매국노와 같은 인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

20세기 한국 사학계의 민족주의 경향과 대척점에서 한국고대사 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형성하려 해온 이종욱 서강대 사학과 교수는 최근 출간한 '춘추'(효형출판,448쪽. 2만2천원)에서 이 같은 논리를 반박하며 김춘추와 신라에 씌워진 '오명'을 벗긴다.

"죽은 춘추에 대한 일방적인 폭력을 멈춰야한다. 나를 있게 한 아버지(조선), 할아버지(고려), 증조할아버지(신라) 가운데 증조할아버지를 심판하는 일을 멈춰야 한다는 것이다"(421쪽)

책의 부제인 '신라의 피, 한국ㆍ한국인을 만들다'에서 보듯 현재의 한국과 한국인을 만든 사람은 삼한(고구려ㆍ백제ㆍ신라)통합의 기틀을 닦은 김춘추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통합 후 고구려인과 백제인은 하층 신분으로 편제돼 점차 도태됐기 때문에 한국인 중 다수가 김(金), 박(朴), 이(李), 정(鄭), 최(崔) 등 신라인을 시조로 하는 성과 본관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1945년 이후 민족사를 탄생시킨 손진태 등 주류 사학계를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현재 국사 교과서 등에 나타난 역사가 잘못됐다고 말한다.

"손진태는 해방 전의 일제와 해방 후 남북한에 진주한 미국과 소련 군대를 보면서 외세를 몰아내고 남북통일을 이뤄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춘추를 외세를 끌어들인 반민족적 행위자의 표상으로 만들었다. 반면 광개토왕 등은 외세를 물리친 위인의 표상으로 만들었다"(415-416쪽)

또 '단군의 자손 한민족'이라는 개념은 현대 한국사학이 발명해낸 이야기로 고구려ㆍ백제ㆍ신라는 다른 사회체제와 역사를 가진 왕국일 뿐이며 따라서 신라가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의 나라를 멸망시켰다고 비판해온 민족사는 왜곡된 역사라고 덧붙인다.

김춘추가 당나라의 연호를 사용하고 세 아들을 당나라에 보냈으며 중국식 옷을 도입한 것에 대해서도 사대주의가 아니라 당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당나라 군대의 힘을 활용하기 위해서였다며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하기 위한 것"이라고 옹호한다.

세종대왕, 이순신, 광개토대왕 등 역사 인물을 소재로 한 드라마의 홍수 속에서 한 번도 본격적으로 다뤄지지 않을 정도로 우리의 관심 밖인 김춘추. 저자는 김춘추를 제대로 평가해야 한국사를 바로 볼 수 있다고 강조한다.

"한국사의 구석에 유폐된 춘추에 대한 역사만이라도 제대로 재구성된다면 적어도 민족사의 역사왜곡이 자아낸 한국사의 위기만큼은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411쪽)

 

 

 

“삼국통일 이룬 김춘추 외세의존 잣대로 과소평가는 부당” [동아일보]2009-06-17


연구서 펴낸 이종욱 교수 “당시엔 단일민족 개념 없어”

최근 인기몰이 중인 MBC 드라마 ‘선덕여왕’ 중 미실이 이야기는 1989년 공개된 ‘화랑세기’ 필사본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신라의 문장가 김대문이 7세기 말 여러 화랑의 생애를 쓴 ‘화랑세기’의 원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다 1989년과 1995년 한학자 박창화(1889∼1962)가 쓴 필사본이 공개됐다. 학계에선 진위 논란이 일었고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서강대 13대 총장으로 선임돼 27일부터 4년 임기를 시작하는 이종욱 교수(사학과·사진)는 이 필사본을 진짜라고 보는 학자다. 이 교수가 ‘화랑세기’를 중심으로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기록을 곁들여 신라 29대 무열왕(김춘추)의 생애와 업적을 정리한 책 ‘춘추(春秋)-신라의 피, 한국·한국인을 만들다’(효형출판)를 펴냈다.

이 교수는 우선 춘추가 왕위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상세히 소개했다. 그는 “신라 때는 성(姓)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다”면서 인물들의 이름만 썼다. 이 교수의 말에 따르면 춘추는 성골에서 진골로 신분이 떨어진 뒤 진골 출신으로는 최초로 왕이 된 인물이다. 할아버지인 25대 진지왕이 즉위 3년 만에 폐위되자 아버지 용수와 더불어 진골로 격하됐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미실이라는 여인이 이 과정에 깊숙이 개입했다”고 설명했다. 24대 진흥왕이 사망하자 왕비인 사도는 진지왕을 새 왕으로 옹립한 뒤 조카 미실을 왕비로 맞을 것을 강요했다. 진지왕이 반대하자 사도와 미실이 진지왕을 내쫓고 진평왕을 새 왕으로 추대했다는 얘기다. 진골로 강등된 춘추는 이후 화랑도에 깊숙이 관여하면서 김유신과 교분을 나눴고, 이모인 선덕이 왕위에 오른 뒤 왕의 주변에서 큰 역할을 했다고 이 교수는 설명했다.

이 교수는 춘추에 대한 역사학계의 평가에 대해 불만을 나타냈다. 그는 “춘추에 대한 역사학계의 평가는 대부분 ‘외세를 빌려 동족 국가를 망하게 함으로써 민족의 무대를 축소했다’는 식이었다”면서 “이는 광복 이후 소위 민족사를 표방해온 한국사학이 그렇게 가르쳐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민족’ 개념에 대해 발상전환이 필요하다면서 “춘추에게 민족을 강요하지 말라”고 주문했다. 당시 신라, 백제, 고구려인은 같은 민족이라는 생각을 가진 적이 없었고 그들을 단일 민족으로 ‘발명’해낸 것은 민족사를 내세운 역사가들이라는 것이다.

이 교수는 또 “국제적 감각을 가졌던 춘추는 당나라의 제국적 위상을 인정했고, 강력한 상대를 만나 덮어놓고 덤비는 무모한 정치 지배자가 아니었다”면서 춘추가 당나라의 힘을 적절히 사용했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춘추는 한국 역사를 하나로 묶어 대신라(통일신라), 고려, 조선을 거쳐 오늘의 우리에게 전해준 영걸한 군주인데도 TV 드라마에선 춘추를 영웅으로 다룬 적이 없다”고 지적했다

 

 

 

 

김춘추가 부끄럽다고? 그는 한국역사틀 잡은 영웅이었다 [한국경제] 2009-06-18
춘추(春秋)-신라의 피,한국·한국인을 만들다 / 이종욱 지음 | 효형출판 | 448쪽 | 2만2000원


오는 29일 서강대총장 취임을 앞둔 이종욱 교수(사학과)는 통일신라기 김대문이 쓴 <화랑세기>를 발굴해 세상에 알리고 연구해온 고대사 전공학자다. 그가 이번에는 신라 29대 무열왕 김춘추의 역사적 복권을 주장하는 책 《춘추(春秋)-신라의 피,한국 · 한국인을 만들다》를 내놨다.

이 책은 두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다. 한 부분은 진흥왕에서부터 무열왕 즉위에 이르는 신라궁정의 사정을 읽을 수 있다. 요즘 인기를 모으며 방영 중인 신라 TV역사극과 궤를 같이하는 내용으로 정사의 기록이 소홀한 부분을 <화랑세기>의 내용으로 보충했다.

두 번째는 '삼한통합(삼국통일)'이라는 위업에도 불구하고 '역사상 부끄러운 인물 19위'에 랭크된 김춘추에 대한 재평가 문제다.

김춘추에 쏟아지는 비난은 외세를 끌어들여 삼국을 통일하고 민족의 활동무대를 축소했다는 것인데,이것은 해방직후 '관학파 사학자들'의 역사조작 때문이라고 논란이 예상되는 주장을 내놨다.

저자는 단군을 시조로 하는 민족이나 민족사는 애당초 그들이 만들어낸 개념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외세를 끌어들인 통일을 민족의 시각으로 과소평가할 것이 아니라 개별 독립왕국 간의 정치행위로 봐야 하며,통일 이후 신라는 백제 · 고구려 사람들에 대한 철저한 도태정책으로 신라인 중심의 한국사회와 역사의 틀을 잡았다는 것이다. 즉 김춘추야말로 오늘날 한국의 기원을 만든 영웅으로 복권돼야 하며,따라서 '김춘추 폄하는 곧 조상을 욕보이는 행위'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춘추-신라의 피, 한국·한국인을 만들다/효형출판·2만2000원〉[한겨레] 2009.06.19


삼국통일을 기획하고 실행에 옮긴 신라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일대기. < 화랑세기 > 연구 등으로 유명한 이종욱 서강대 교수(현 총장)가 35년간의 신라사 연구를 토대로 쓴 신라시대 바로보기라고도 할 수 있다. 민족 개념이 없던 그 시대의 춘추에게 민족이나 민주, 평등 따위의 근현대 개념을 들이대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현재 한국인은 신라의 ‘직계’후손이다 / 삼국을 통일한 김춘추의 지략과 국가 운영방식 재구성 [경향신문 | 2009.06.19]
춘추-신라의 피, 한국·한국인을 만들다…이종욱 | 효형출판


654년 왕위에 오른 김춘추는 660년 당나라 군대와의 협공으로 백제를 정복했다.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문무왕은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킴으로써 삼한통합(삼국통일)을 완성시켰다.

한국 고대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사료가 그리 풍부하지 않다. 신라인들에 의해 태종무열왕이라고 추앙받았던 김춘추 역시 마찬가지다. 오는 29일 서강대 총장에 취임하는 이종욱 교수는 안식년을 맞아 경주에 머물면서 쓴 이 책에 대해 "신라인 (김)춘추에 대해 다룰 수 있는 모든 것"을 집대성했다고 자부했다. 부제가 말해주듯 현재의 한국과 한국인은 신라의 '직계' 후손이며, 그 중심에는 천재적인 외교력과 불굴의 의지로 통일신라(대신라)의 계기를 마련한 김춘추가 있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책은 김춘추의 생애를 진지왕의 손자로 왕궁에서 태어나서 생활하다 부모와 함께 출궁하기까지의 기간(출생~10세), 평생 동지인 김유신과 만나고 화랑도에 투신한 기간(10~30세), 선덕여왕의 측근 신하로서 왕의 꿈에 접근하던 기간(30~45세), 진덕여왕의 신하로 국정을 장악하고 몸소 당나라에 가서 파병을 약속받았던 기간(45~52세), 왕위에 올라 백제를 정복하고 이듬해 사망하기까지의 기간(52~59세)으로 구분했다.

당나라와 연합해 백제를 정벌함으로써 삼국통일의 길을 연 김춘추(태종무열왕). 경북 경주 통일전에 걸려 있는 김춘추의 초상화는 후대에 그린 상상도이다. < 삼국사기 > 는 김춘추의 아버지가 '용춘' 또는 '용수'라고 기술했다. < 삼국유사 > 는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고 적었다. 역사학계도 그렇게 봤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발견된 < 화랑세기 > 필사본에는 용춘과 용수는 형제이며, 김춘추의 아버지인 용춘은 죽으면서 부인과 아들을 동생인 용수에게 맡겼다고 나와있다.

김춘추는 진골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그가 처음부터 진골이었던 것은 아니다. 성골로 태어나 진골로 강등됐다. 이 교수는 이 과정에서 < 화랑세기 > 필사본이 탄생시킨 최대의 스타 '미실'이 크게 개입했다고 분석한다. 진흥왕이 죽자 왕비 '사도'는 김춘추의 할아버지를 진지왕으로 세워 자신의 조카이자 진흥왕의 후궁이었던 미실을 왕비로 만들고자 했다. 왕위에 오른 진지왕이 이를 거부하자 사도와 미실은 그를 3년 만에 내쫓고 진평왕을 세웠다. 이 때문에 김춘추 일가는 진골로 내려왔다. 진평왕을 끝으로 성골 남성의 대가 끊겨 여성인 '선덕'과 '진덕'이 왕위에 올랐고, 성골여성마저도 끊기면서 김춘추가 즉위할 수 있었다.

김춘추는 왜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하려 했던 걸까. 이 교수의 답은 간단하다. 끊임없이 신라를 공격하며 존재를 위태롭게 했던 '적국'이었기 때문이다. 딸인 고타소가 백제에 의해 죽으면서 개인적 원한까지 겹쳤다. 고타소가 죽자 김춘추는 적국인 고구려에 가서 힘을 합쳐 백제를 치자고 했으나 거절당하고 죽을 고비를 넘겼다. 김춘추가 택한 길은 호시탐탐 고구려를 노리던 당나라의 힘을 빌리는 것이었다. 그는 당 태종을 직접 만나 파병을 약속받았다.

이를 두고 신라가 다른 민족의 힘을 빌려 동족의 국가를 멸망시켰기 때문에 반민족적 죄악을 저질렀고(손진태), 삼국통일의 결과 만주지역이 민족사의 활동무대에서 제외됐기 때문에 불완전한 것(이기백)이었다는 비판이 제기돼 왔다. 이런 평가는 현재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도 일부 반영돼 있다. 이 교수는 이들이 당시엔 있지도 않았던 단일민족이라는 개념으로 민족사를 재단하고 현재 한국인의 조상을 욕보였다고 비판한다. 오히려 뛰어난 지략으로 생존을 도모하고 적극적으로 국가의 운명을 도모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논리다.

경북 경주 서악동의 무열왕릉 앞에 있는 태종무열왕릉비. 국보 25호로 지정된 이 비는 일부만 남아있으며 이수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 새겨져 있다.이 책은 7세기에 김대문이 썼다는 < 화랑세기 > 의 필사본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한학자 박창화(1889~1962)가 일본 천황가의 보물창고인 정창원에서 필사했다고 주장되는 이 책은 그간 유추됐던 신라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파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어 위작 논란이 일었다. 김 교수는 < 화랑세기 > 필사본이 진본에 근거했다고 보는 대표적인 학자다.

요즘 신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현재 방영 중인 드라마 '선덕여왕'의 영향이 크다. 흥미 위주일 수밖에 없는 드라마와 달리 이 책은 김춘추를 중심으로 신라라는 국가의 운영방식, 신라가 처한 상황 등을 진지하게 재구성했다. 그러나 이 교수가 크게 기대고 있는 < 화랑세기 > 필사본의 진위여부가 아직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는 점은 염두에 두어야 한다. 2만2000원

 

 


외세 끌어들여 동족 패망시켰다고? … ‘춘추―신라의 피,한국·한국인을 만들다’ [국민일보] 2009-06-19


춘추-신라의 피, 한국·한국인을 만들다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신라가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바람에 한국의 영토가 쪼그라들었다는 역사의식이 꽤 널리 퍼져 있다. 이종욱 서강대 사학과 교수는 이 같은 관점에 단호히 반대한다. 그는 무엇보다 현대 한국사학이 만들어낸 민족사관의 틀을 벗어던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1945년 광복 후 제대로 된 한국사 개설서 한 권 없던 상황에서 당시 손진태 서울대 교수가 고구려 백제 신라를 동족의 나라로 묶어 한민족이라고 규정하며 춘추를 반민족적 행위자의 표상으로 왜곡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삼국은 건국 이후 한 번도 동족이었던 적이 없는, 서로 끊임없이 전쟁을 벌인 독립된 왕국이었을 뿐이라는 게 저자의 시각이다. 그는 1989년 발견된, 아직 진위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 필사본을 근간으로 삼한통합을 이룩한 김춘추와 신라의 진면목을 제시하고자 한다. 저자는 27일 서강대 총장에 취임할 예정이다(효형출판·2만2000원).

 

 


먹느냐 먹히느냐 절체절명 삼국시대 [대전일보] 2009.06.19
춘추 / 이종욱 지음 / 효형출판. 2만2000원.


7세기 김춘추(신라 무열왕)·김유신 장군에 의한 삼국통일을 우리는 어떤 시각으로 보고 있을까. 고구려가 지배했던 면적을 감안한 ‘절반의 통일’, ‘외세(당나라)를 끌어들여 더 강성했던 고구려·백제를 멸망케 한 쪼그라든 통일’이라는 비판적 시각이 엄존하는 게 사실이다. 두 가지 주장 모두 그 배후에는 민족주의적 시각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민족주의적 각성은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는 20세기에 들어와서야 형성됐다.

이종욱 서강대 교수가 쓴 책 ‘춘추’는 이런 시각을 걷어내고 있는 그대로의 태종 무열왕과 신라를 보자고 강조하면서 시작된다. 삼국시대는 민족 개념 없이 먹느냐, 먹히느냐는 절체절명의 시대 분위기가 지배했던 때였기 때문. 그리고 저자는 우리나라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김(金) 이(李) 박(朴) 정(鄭) 최(崔) 손(孫) 등의 성씨는 신라의 씨족이었다면서 삼국통일 후 어쩔 수 없이 고구려와 백제의 혈통은 도태되거나 신라 사회에 흡수되었음을 든다. 수많은 사료를 종합해 있는 그대로의 신라를 비교적 충실하게 보여준다.

 

 


춘추/이종욱 지음, 효형출판 펴냄 [서울경제] 2009.06.19


평가절하된 김춘추의 업적 재조명

드라마 선덕여왕의 인기에 힘입어 신라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알에서 태어났다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성적 묘사가 자유분방한 토기 등 신라는 일반인들에게 설화나 신화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또 역사학계에서 신라는 그리 탐탁한 국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외세를 끌어들여 민족의 정신적ㆍ국가적 영역을 한반도라는 울타리에 가뒀다는 평가 때문이다. 특히 김춘추를 대한제국을 일제에 넘긴 을사오적과 같은 반민족적 행위자의 표상으로 지목하기도 한다.

한국 고대사 전문가로 29일 취임하는 이종욱 서강대 총장이 그 동안 평가절하되고 왜곡된 신라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기위해 김춘추의 일대기를 재조명했다. 저자는 진골 신분으로는 처음 왕위에 등극한 신라 제 29대 태종무열왕인 김춘추의 삶과 당시의 시대상을 재구성했다.

이 총장은 김춘추를 올바로 이해하기해서는 기존의 고정관념을 벗고 새로운 시각으로 봐야 한다며 이에 필요한 전제조건을 제시한다. ▦민족ㆍ민족사ㆍ민족주의사학의 틀을 벗어던져라 ▦민족사가 만든 헛된 주장을 버려라 ▦자료가 부족한 신라, 외국처럼 이해하라 등이다.

책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를 비롯해 20여년전 모습을 드러낸 '화랑세기'의 기록을 통해 김춘추의 출생에서부터 신라 중흥을 완성한 업적 등을 소개한다. 저자는 민족주의적 연구로 한국사학계를 주도해 온 관학파의 시선과는 다소 거리를 두고 김춘추를 통해 신라를 재평가한다.

"평가절하도 신화화도 하지말고 있는 그대로의 신라를 직시하자. 그럴싸한 이야기에 역사라는 거죽만 씌운 채 오늘의 한국인에게 제공되는 이른바 역사관련 소설ㆍ영화ㆍTV드라마와는 근본이 다르다. AT(Art Technology)분야의 새로운 스토리텔링의 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

 

 

 

역사적 비호감 김춘추 영웅으로 되살려내다 [서울신문] 2009-06-20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 김춘추. 진지왕의 친손자이자 진평왕의 외손자, 선덕여왕의 조카로 고구려, 백제, 신라 삼한통합의 기반을 마련한 춘추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그리 후하지 않은 편이다. 현행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신라의 삼국 통일은 외세를 이용했다는 점과 대동강에서 원산만까지를 경계로 한 이남의 땅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는 점에서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고대사학자인 이종욱 서강대 교수는 이러한 역사인식이 광복 이후 한국 사학계의 주류로 자리잡은 관학파의 민족사학에 의해 왜곡된 시각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오히려 춘추가 기틀을 닦은 통일신라야말로 진짜 한국과 한국인의 기원이라고 강조한다.

오는 29일 서강대 총장 취임을 앞두고 최근 출간한 ‘춘추-신라의 피, 한국·한국인을 만들다’(효형출판 펴냄)는 춘추의 일대기와 삼한통합의 과정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춘추를 영웅으로 되살려낸다. 30년 넘게 신라사 연구에 매달려온 저자의 시각이 명료하게 압축돼 있다.

저자는 ‘삼국사기’, ‘삼국유사’와 더불어 ‘화랑세기’ 필사본을 주요 사료로 삼고 있다. 신라인 김대문이 지은 ‘화랑세기’는 1989년 필사본이 발견된 뒤 저자가 주도적으로 번역·출간을 통해 기존에 알려지지 않은 신라와 신라인에 관한 이야기들이 소개됐지만 진위여부를 둘러싼 학계의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현재 인기리에 방영 중인 MBC 드라마 ‘선덕여왕’은 이 ‘화랑세기’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저자는 ‘단군을 시조로 하는 한민족’이란 개념은 애초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현대 사학이 외세를 물리쳐야 하는 현실적 필요성에 따라 창안해낸 것이었다고 비판한다.

즉 삼한통합 당시 세 나라는 서로 다른 국가였다는 주장이다. 한국인 상당수가 김, 박, 이, 정, 최 등 신라인을 시조로 하는 성과 본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근거로 들고 있다.

안식년이었던 2007년 한해 경주에서 머물며 춘추에 주목하게 됐다는 저자는 “춘추는 민족사의 평가처럼 비난을 받아야 할 인물이 아니며, 한국·한국인이 오늘과 같은 모습을 갖게 한 정치 천재이자 위대한 군주”라고 강조한다. 2만 2000원.

 

 


김춘추, 부정적 이미지 벗기다 [한국일보] 2009.06.20
춘추 / 이종욱 지음 / 효형출판ㆍ448쪽ㆍ2만2,000원


‘외세를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매국노’로까지 평가절하되는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 태종무열왕 김춘추. 이 책은 김춘추에 씌워진 부정적 이미지를 걷어내고, 한국과 한국인의 원형을 만든 인물로 재조명한다. 저자는 지난 30여년의 한국 고대사 연구를 ‘관학파 민족사학에 의한 김춘추에 대한 테러’로 규정하며 복권을 시도한다.

 

 


김춘추가 배반자? 그는 '삼국 M&A' 리더 [조선일보] 2009-06-20
춘추-신라의 피, 한국·한국인을 만들다 / 이종욱 지음|효형출판|448쪽|2만2000원


책 제목 '춘추(春秋)'는 동양고전 〈춘추〉가 아니라 신라 29대 임금 태종무열왕 김춘추를 말한다. 굳이 성(姓)을 떼낸 이유는 신라 당시에는 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랑세기》에는 '춘추'라고 되어 있다.

춘추는 할아버지인 25대 임금 진지왕이 폐위되면서 성골에서 진골로 떨어졌지만 왕권과 늘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그의 아버지 용수는 26대 임금 진평왕의 사위로서 한때 왕위 계승자였고, 27대 임금 선덕여왕은 그의 이모였다. 28대 임금 진덕여왕 때 춘추는 이미 왕정을 장악했다. 저자는 춘추가 소외된 귀족이었다는 기존 인식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김춘추는 외세를 끌어들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민족의 배반자'라는 부정적 인식도 일제 강점기 '민족'을 강조한 역사학이 만들어낸 허구라고 주장한다. 당시 고구려·백제·신라 삼국(三國)은 같은 민족이라는 인식이 없었다. 춘추는 지성과 배포, 리더십과 판단력, 세계화(중국화) 실현 능력을 통해 한국 역사상 가장 어려웠던 인수·합병을 성공시켰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대신라(통일신라)는 오늘날의 한국과 한국인을 만들었다. 현재 한국인 중에는 단군이나 주몽을 시조로 하는 성을 가진 씨족이 없는 반면, 많은 사람들이 신라인을 시조 또는 중시조로 하는 김(金)·박(朴)·이(李)·정(鄭)·최(崔)·손(孫) 등을 성으로 사용하고 있다. 저자는 "단군의 자손 한민족이라는 개념은 현대 한국사학이 발명해낸 이야기"라며 "나를 있게 한 아버지(조선), 할아버지(고려), 증조할아버지(신라) 중 증조할아버지를 심판하는 일을 멈추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출생부터 백제 정복에 이르는 쉰아홉 살 춘추의 삶을 박진감 넘치게 재구성한다. 주요 전거로 삼고 있는 문헌은 20년 전 필사본 형태로 발견된 《화랑세기》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TV 드라마〈선덕여왕〉이나 소설 《미실》도 이 문헌에 근거해 있다. 그러나 역사학계 다수 학자들은 《화랑세기》를 위작으로 보고 있다.

 

 


김춘추, 한국 역사 최고의 M&A 해결사 [중앙일보] 2009-06-20
춘추-신라의 피, 한국·한국인을 만들다 / 이종욱 지음, 효형출판, 446쪽, 2만2000원


“오늘날 한국·한국인의 뿌리는 신라”라고 줄기차게 외쳐 온 이종욱 서강대 교수가 태종무열왕(김춘추)의 일생과 업적을 새롭게 조명했다. 한국고대사를 전공한 이 교수는 『화랑세기』 필사본을 진본이라고 주장해 학계에 논쟁을 부른 학자로도 유명하다. 모교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서강대 총장에 선임돼 오는 29일 취임식을 갖는다.

이 책에서 저자는 작심하고 김춘추를 '띄워' 놓았다. 654년 왕위에 오를 때까지 김춘추가 보여준 자질을 저자는 무려 17가지로 정리한다. 용모, 지성, 설득력, 복수심, 인내심, 배짱, 자긍심, 자신감, 냉정함과 판단력, 수단과 방법 강구 능력, 인맥 관리능력, 중국화(세계화) 의지, 국가 경영 능력, 국가의 목표 설정, 영웅적인 자질, 역사의 방향을 이끄는 능력, 그리고 신라왕국의 앞날을 준비한 능력.

저자는 김춘추에 대한 '편애(偏愛)'를 굳이 감추려 하지 않는다. “한국사 최고의 위인을 뽑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춘추를 꼽을 것이다”라고 단언한다. 책은 김춘추의 가문, 출생 후 궁에서 나와 화랑도로 활약하는 시절, 든든한 후원세력(칠성우)을 얻고 '전쟁 엘리트'로 인정받는 젊은 시절, 고구려·당을 오가며 외교적인 노력을 펼치고 마침내 신라의 왕이 되어 삼한 통일에 나서기까지 평생을 충실하게 재현했다. 『삼국사기』『삼국유사』는 물론 저자가 진본임을 믿어의심치 않는 『화랑세기』필사본도 두루 인용했다.

저자는 김춘추에 대한 시각을 3가지로 나누고 이를 다각도로 비교해보인다. 첫번째 '모델1' 시각은 김춘추를 비교적 긍정적으로 본 고려·조선시대 사람들의 평가다. 두번째 '모델2'는 해방 이후 국내 사학계를 주름잡는 '관학파' 학자들의 관점이다. “(김춘추가) 신라로 하여금 외민족의 병력을 빌어서 동족의 국가를 망하게 한 반족적(反族的) 행위를 하게 한 것은 귀족국가가 가진 본질적 죄악이요, 그로 말미암아 민족의 무대는 쪼부라 들었다”는 손진태 전 서울대 교수의 주장이 대표적이다. 이런 '잘못된' 시각이 국사 교과서에도 그대로 반영돼 있다고 저자는 한탄한다.

저자는 “현대 한국사학이 만들어 낸 민족·민족사·민족주의사학의 틀을 벗어던져야 김춘추를 바로 볼 수 있다”고 역설한다. 민족사는 고구려·백제·신라를 동족의 나라로 보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삼국은 동족이었던 적이 없는 서로 다른 왕국으로, 서로 정복하느냐 정복당하느냐의 전쟁을 벌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세번째 '모델3'은 저자 이종욱 교수의 시각이다. 김춘추는 “한국·한국인을 존재케 한 가장 위대한 인물”이며, “한국 역사상 최대의 M&A를 성사시킨 군주”라는 관점이다. 이런 시각에서 저자는 주류 사학계의 '편견과 무지'를 책 곳곳에서 꼬집는다. “한국 사학계는 삼한통합을 이룬 태종대왕과 문무대왕의 역사적 의의를 옳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하튼 김춘추는 이 책 덕분에 크게 '떴다'.

 

 


춘추-신라의 피, 한국·한국인을 만들다(이종욱) [부산일보] 2009.06.20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화랑세기 등의 자료에 기반을 두고 신라 중흥의 군주 김춘추를 집중 분석한 연구서. 효형출판/2만2천원.

 

 


김춘추는 난세 위대한 군주 '매국노' 평가 바로잡아야 [영남일보] 2009.06.20
● 춘추-신라의 피, 한국·한국인을 만들다 / 이종욱 지음/효형출판/448쪽/2만2천원


'한민족' 개념은 광복이후 형성 / 왕실모습 등 신라史 세밀한 묘사, 일부 왜곡된 역사해석에 일침

美實 "모든 것을 다 가졌는데도 황후가 아닌 것이 싫습니다. 이제 저는 황후가 될 것입니다." '미실'의 등장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TV 드라마'선덕여왕'한 장면. 2005년 '색공지신 미실'이라는 책을 통해 신라시대의 '색공'제도와 미실의 존재를 대중적으로 각인시킨 이종욱 서강대 총장이 이번에는 '춘추- 신라의 피, 한국·한국인을 만들다'라는 책을 출간했다.

최근 역사드라마 '선덕여왕'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화제의 중심에는 고현정이 연기하는 '미실'이 있다. 서기 600년을 전후해 신라를 주무른 여인 미실. 드라마에서는 타고난 미모와 끝없는 야망으로 남자들을 이용해 권력을 잡는 철의 여인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거기에는 오늘날 윤리관으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신라시대의 묘한 '관습'이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난교'라고 할 수 있는 진골과 성골 왕족사이에 관례화된 '색공'이다. 미실은 색공지신(色供之臣: 왕이나 태자에게 색을 바치는 신하) 가문의 여인으로 왕을 모시는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세종(남편), 사다함, 설원랑, 동륜태자,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등과 육체적 관계를 가졌다. 드라마는 오늘날의 윤리 잣대로 이런 관계를 도발적인 호기심으로 연결하고 있지만 그 시대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정치적 힘은 권력 핵심과의 거리가 결정하는 법. 미실은 색공 제도를 잘 활용해 자신을 중심으로 정치권력을 재편해 나갔다. 이러한 사실은 역사학계에 널리 알려져 있었으나, 이를 대중적으로 널리 알린 사람은 역사학자이자 현재 서강대 총장인 이종욱 박사이다. 그는 2005년 '색공지신 미실'이라는 책을 통해 신라시대의 '색공'제도와 미실의 존재를 대중적으로 각인시켰다.

이 총장이 이번에는 신라시대의 태종무열왕 김춘추를 파헤쳤다. '춘추- 신라의 피, 한국·한국인을 만들다'는 김춘추라는 인물을 통해 한국인과 한국문화의 원형을 파헤친 역사학자의 대중 교양서이다. 잘 알다시피 그는 진골 출신으로 왕이되어 삼한통합을 기획했고, 백제를 평정해 신라중심의 한반도 통합의 기틀을 다진 군주였다. 저자는 김춘추가 한국, 한국인, 한국 사회, 한국 문화의 '기원(origin)'을 신라에 두도록 해 한민족의 현재의 모습을 만들었다며 그에 대한 관심과 집필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김춘추의 일생이 역사적 인물 어느 누구보다 드라마틱한 것은 그가 활동하던 시기의 신라는 존망의 기로에

서 있었고, '미실'의 사례에서 보듯 왕실 역시 격변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학자의 설명형식으로 쓰여진 이 책은 어느 소설보다 흥미진진하고 박진감이 넘친다. 그리고 우리가 잘 몰랐던 박제화되었던 신라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김춘추는 그 속에서 지성, 배포, 위엄, 자부심, 리더십, 판단력, 인내력, 설득력, 현실 인식능력, 방법강구 능력, 세계화(중국화) 실현 능력 등 세기를 아우르는 뛰어난 영웅의 모습을 보여준다.

저자는 1400년 전 신라는 우리에게 외국이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한다. 신라인들은 우리와 전혀 다른 사회에서,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김춘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신라를 잘 이해해야 한다고 전제한다. 그래서 이 책의 많은 부분은 당시 신라시대의 정치, 문화, 외교에 할애되어 있다. 특히 '미실'의 경우에서 보듯 신라 왕실의 모습과 역사들을 매우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그 흐름 속에서 김춘추가 왕이 될 수 있었던 사건들도 풍부한 맥락을 가지고 해석해 낸다.

저자가 김춘추의 생을 통해 현재의 한국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한민족'에 대한 정확한 이해이다.

그에 따르면 조선시대까지 이 땅에는 민족의 개념이 없었다고 한다. 광복 이후 주류를 형성하게된 정부측 역사학자들이 국사교육을 장악하면서 한민족의 개념을 형성했다고 한다. 그래서 원류를 단군에서 찾고, 고구려, 백제, 신라를 동족의 나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 번도 동족이었던 적도 없고, 매우 상이한 나라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김춘추에 대한 역사적 평가도 정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그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동족을 멸망시켰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일제 강점기와 이후 신탁통치를 거치면서 관학파가 외세를 몰아내는 당위성을 주장하기 위한 역사적 해석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김춘추를 그저 난세에서 세상을 잘 다스린 영걸한 군주로 보자고 주장한다.

출처 : mooncourt
글쓴이 : mooncourt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