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

[스크랩] 화양서원과 만동묘

회기로 2009. 7. 19. 18:45

        화양서원과 만동묘

 

서예세상에서 2009년 정기답사를 갈 화양동계곡은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 속리산 북쪽의 도명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이 지역은 트레킹에도 적당하고 물놀이에도 적당해 사철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으로 1975년 속리산 국립공원에 포함되었다. 조선 중기 우암 송시열이 이곳에 은거하면서 중국 송대의 주자가 복건성의 아름다운 무이계곡을 보고 무이구곡가를 지은것을 본받아 화양동에 9곡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전한다. 이후 402년 전 이 땅에 태어났던 송시열을 빼놓고는 이야기하기가 어려울 만큼 화양동에는 그와 관련된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는데 특히 화양서원과 만동묘에는 송시열의 여러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우리는 본격적인 답사를 위해서 먼저 우암 송시열에 대해서 알아보고, 이어서 화양서원과 만동묘에 대해서도 살펴보고자 한다.

 

 

  우암 송시열의 삶

 

 

    국보239호 송시열 초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선조 40)~1689(숙종 15)은 인조 때 27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면서 학문적 명성을 떨쳤다. 2년 뒤인 1635년에 봉림대군(뒷날 효종)의 사부로 임명된 이래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 이상 이름이 거론되었고, 죽은 후에는 전국 40여 개 서원에 배향될 정도로 걸출한 정치인이고 유학자이면서 경세가였다.

송시열은 존주대의(尊周大義 ; 춘추대의에 의거하여 중화(中華)를 명나라로, 이적(夷賊)을 청나라로 구별하여 밝힘)와 복수설치(復讐雪恥 ; 청나라에 당한 수치를 복수하고 설욕함)를 골자로 하는 정치적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효종의 북벌의지와 맞아 떨어져 임금의 절대적 신임 속에 북벌계획의 핵심 인물로 활약하기도 하였으나 효종이 급서한 이후 거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668(현종9) 우의정에, 1673년 좌의정에 임명되었을 때 잠시 조정에 나아갔을 뿐, 시종 재야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재야에 은거하는 동안에도 선왕의 후광과 사림에서 차지하는 위상 때문에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사림의 여론이 그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은 물론이고, 조정의 대신들조차 매사를 그에게 물어서 결정할 정도였다.

 

송시열은 서인 중에도 노론의 영수였고, 미수 허목은 남인 중에도 과격한 청남의 영수였다. 노론과 남인은 치열한 권력 투쟁 중에 있었다. 그들은 예송논쟁의 주역이자 역사속의 라이벌이었다. 송시열이 화양동에 은거할 때, 우의정을 지낸 정승 허목이 화양동에 왔다가 송시열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다. 허목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 진출한 산림(조선 중기 민간에서의 학문적 권위와 세력을 바탕으로 정치에 참여한 인물들) 중에서 정승까지 승진한 흔치 않은 인물이다. 허목이 돌아가면서 “걸어서 화양동을 왔다가 우암을 못 보고 간다”는 욕설(한자로 읽으면)을 남기고 갔는데, 전하기로는 두 사람이 다정한 벗이어서 장난으로 그리했다고 한다. 또한 송시열이 병이 들어 허목이 부자를 넣은 처방을 해서 고쳐주었다는 말이 전하지만 둘 사이는 정치적으로는 늘 적의 입장이었다.

 

송시열과 허목의 예송논쟁은 실제는 정치적 정적으로서의 싸움이었지만 겉으로는 복상을 두고 벌어진 논쟁이었다. 예송(禮訟)은 예절에 관한 논란으로, 조선 후기에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의 정통성과 관련하여 1659년 효종 승하 시와 1674년 효종비(妃) 인선왕후의 승하 시에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이때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의 복제가 쟁점이 되었기 때문에 복상문제(服喪問題)라고도 부른다. 사실 예송논쟁이란 요즘 입장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당시 국가 최고권력의 상징인 왕실에서 복상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전체 국가 운영의 문제와 직결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자신의 학문적 근거와 원칙에 맞게 예를 행하려고 했던 송시열과 허목은 복상문제를 둘러싸고 정치적 생명을 내걸고 싸웠던 것이다.

 

예컨대, 첫 라운드는 현종이 부친(효종)상을 당했을 때 할아버지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의 복상 기간을 송시열이 주도하여 1년으로 한 것은 잘못이므로 3년으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허목이 주장하였는데 이 논쟁에서 진 허목은 삼척부사로 축출되었다. 심판격인 임금이 어떤 주장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탄핵을 받아 외직으로 좌천되거나 귀양을 갈수도 있고 아주 잘못 되면 죽을 수도 있는 것이 당시 붕당정치의 대립상황이었다. 이어서 두 번째 라운드는 1689년(숙종 15년) 송시열이 숙의 장씨가 낳은 아들(뒷날 경종) 균의 원자 책봉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 화근이 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는데, 왕통을 문란하게 했으니 송시열의 죄를 엄하게 다스릴 것을 주장한 청남을 이끈 사람은 허목이었다. 결국 송시열은 그 해 6월 추가로 국문을 받기 위해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송시열에 대한 평가

 

한국 유학사에서 송시열처럼 당대는 물론 후대에까지 양면의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도 드물다. 일각에서는 '사문(斯文)의 종사(宗師)’, '정계의 대로(大老)', '아동(我東)의 주자(朱子)', '태산교악(泰山喬嶽)'으로 추앙하는 반면, 한편에서는 '당쟁의 화신', '골수적인 사대주의 신봉자', '극단적인 권력 추구자' 등으로 비난받고 있다. 추앙하는 측은 '송자(宋子)'라고 부르고, 비난하는 쪽은 '송자(宋者)'라 부른다. 전자는 공자.맹자.순자 등에 붙이는 선생님 이라는 최상급의 경칭이고, 후자는 욕할 때 쓰이는 놈자라는 최하급의 비칭이다. 송시열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악재로 작용하는 대표적인 것이 화양서원과 만동묘이다.

 

 

 화양서원과 만동묘

 

 

  화양서원

 

조선시대 서원은 유생의 사학기관으로서 명현을 제사하고 청소년을 모아 유학을 장려함을 목적으로 세워졌으나, 조선 중기 이후 유생들이 곳곳에 서원을 짓고 이를 근거로 정쟁을 일삼으며 백성을 못살게 괴롭히는 폐단이 크게 나타났다. 화양서원은 특히 말썽이 많아 조선시대의 수많은 서원 중에서 대표격이라 할만하다.

 

화양서원(華陽書院)은 송시열이 죽은 후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노론의 영수였던 송시열의 신원을 회복하고 제향하기 위해 1696년(숙종 22) 그의 문인 권상하 · 정호 등 노론계 관료와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화양동에 건립했던 서원이다. 창건되던 해에 현판을 하사받아 숙종 42년(1716) 어필로 현판을 달았다. 화양동은 송시열이 병자호란 이후 이곳에 은거하면서 학문을 연마하고 후진을 양성하였던 곳이다. 특히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의종(숭정)의 '비례부동(非禮不動)' 넉자의 필적을 구하여 화양계곡의 암벽에 새겨놓고 그 옆에 친히 '대명천지(大明天地) 숭정일월(崇禎日月)'이란 글씨를 새겨서 존명대의의 장소로 삼았던 곳이다. '대명천지'란 말은 사전적인 의미로는 '밝고 환한 세상'을 뜻한다. 하지만 본래의 의미는 '큰 명나라의 세상' 즉, '명나라가 중심이 된 세상'이라는 뜻이다. 당시의 사대부들이 그토록 꿈꾸던 중화 명나라의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숭정일월'도 비슷한 뜻으로 해석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의 연호가 '숭정'이다. 그러니 결국은 두 말이 모두 같은 뜻이다. 대명 황제가 다스리는 밝고 환한 세상을 꿈꾸며 쓴 말인 것이다. 이쯤 되면 그들의 사대주의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소론과의 당쟁에서 송시열이 노론측 정치 명분의 상징으로 추앙됨에 따라 이 서원은 노론 사림의 본거지가 되었고, 영조 때에 이르러 노론의 일당 전제가 이루어지고 또 송시열이 문묘에 배향되자 이 서원의 위세는 날로 더하여 국가에서 물질적 지원은 물론, 노론 관료나 유생들의 기증으로 서원 소속 토지가 크게 늘어나 강원도와 삼남 일대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이 때부터 이 서원은 점차 민폐의 온상으로 변해갔다. 특히 제수전 징수를 빙자하여 각 고을에 보내는 고지서인 이른바 '화양묵패(華陽墨牌)'의 폐해는 극심하여 때로 관령을 능가했다. 한번 묵패가 발행되면 지방의 수령이라도 거역하지 못했다. 이를 거부하는 수령에 대해서는 통문을 돌려 쫓아내려고 하는 등의 행패를 자행하였다. 묵패란, “서원에 제수전(祭需錢)이 필요하니 아무 날 아무 시간까지 얼마를 봉납(奉納)하라.”는 식의 고지서(告知書)에 묵인(墨印)을 찍어 군(郡) ·현(縣)으로 발송하는 것이지만, 이 묵패를 받은 자는 관(官) ·민(民)을 가리지 않고 전답이라도 팔아서 바쳐야 했다. 만일 불응하면 서원으로 잡혀가서 공갈 · 협박을 받고, 사형(私刑)을 당하였다. 이 불법 행위가 문제되어 흥선대원군 이전에도 이 서원 및 일반 서원도 여러 번 단속하였다. 화양묵패는 약탈을 전제로 한 협박장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규모로 보아 화양서원은 도산서원 등과 더불어 4대 서원으로 유명하였으나, 이러한 횡포가 거듭되자 1858년(철종 9) 영의정 김좌근(金左根)의 주청으로 복주촌을 없애고, 재화 징수도 금지시켰다. 전국의 사액서원 중에서도 가장 이름있고 위세가 당당한 서원이었으나, 그릇된 세금징수로 심한 민폐를 끼쳐 철종 9년(1858)에 폐쇄되고, 논란 속에 고종 7년(1870) 건물이 헐리었다.

 

      만동묘(萬東廟)

 

 

 만동묘

 

만동묘(萬東廟)는 명나라 황제인 신종(神宗)과 임진왜란 때 군대를 보내 도와준 의종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1704년(숙종 30) 청천면(靑川面) 화양동(華陽洞)에 지은 사당인데, 송시열이 사약을 받으며 남긴 유언에 따라 그의 제자들이 지었다. 대부분의 집이나 사찰.사당.서당을 햇볕이 잘 드는 동향이나 남향 또는 동남향으로 짓는 것에 비해 화양서원과 만동묘 사당은 굳이 북향하여 지었다. 명나라를 향한 사대의식의 발로였는데, 단순히 국가 존망의 위기에 도움을 준 명나라에 대한 은혜를 잊지 못한다는 의미로 북쪽을 향해 지었다고 전한다.

만동이란 이름은 권상하가 선조의 어필인 '만절필동'(萬折必東 ; 중국의 황하는 만 번을 굽어서 흘러도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 간다는 뜻)으로 곡절이 있으나 필경은 본뜻대로 나간다는 의미이다.

 

만동묘의 위치는 동천구곡(洞天九曲) 중 제3곡인 읍궁암(泣弓巖) 위쪽에 낙양산(洛陽山)을 배후로 북향하고 있다. 조정에서는 명에 대한 보은의 의리와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자 만동묘를 보호해주었다. 즉 묘우(廟宇)의 수호와 제향(祭享)에 관심을 표명했고, 수직사(守直使)를 임명하거나 전결(田結)을 급여해주기도 했다. 봄과 가을의 제향에는 큰 성황을 이루어 유생을 비롯한 촌민·수령 등 각계 각층이 참여했다. 그러나 반면에 만동묘의 위세가 날로 증대해 그 폐해가 막심했다. 제사 지낼 때 자성지폐(盛之弊)는 물론이고 면세전이 확대되어 국가의 경제적 손실이 컸고, 면역이 인정되는 수직사를 자원하는 자가 늘어 군역의 기피현상이 나타났다. 이후 대원군 집정기에 철폐되었으나 얼마 후에 다시 복귀되었다가 일제시대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하지만 근래 만동묘의 묘정비가 출토되어 옛 자리에 다시 세우고 묘역을 정비했으며 충청북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조정에서는 이 묘에 딸린 전토(田土)와 노비를 주었고, 영조 때에는 묘를 중수하였으며 면세전(免稅田) 20결(結)을 주었다. 1809년(순조 9)에는 묘우를 개축하고 1844년(헌종 10)에는 정식으로 봄과 가을에 한 번씩 관찰사가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이 묘는 노론(老論)의 소굴이 되어 상소와 비판을 일삼았고, 비용을 염출하기 위해 양민을 토색하는 등 민폐가 심하여,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헐어버리고 신주와 편액(扁額) 등은 서울 대보단(大報壇)의 경봉각(敬奉閣)으로 옮겼다. 대원군이 실각한 후 1874년(고종 11) 다시 세웠으나 일제강점기에도 유생들이 모여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므로 총독부가 강제로 철거하였다. 근자에 괴산군에서 건물을 수리하고 보수하였다.

 

노론선비들의 집합소이자 송시열이 은거하였던 화양서원과 만동묘가 있는 화양구곡을 들어서는 화양동 입구 하마소(下馬所)부터는 누구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야 했다. 위세 등등한 그곳을 사람들이 지나갈 때에는 허리를 굽히고 양손을 공손히 모아 사타구니에 대고 걸어가야 했는데, 그 모양이 마치 남자가 생식기를 쥐고 걸어가는 것처럼 보여 속된말로 'O잡고 화양동 간다'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이곳의 기세가 얼마나 등등했던지 흥선대원군이 초야에서 몸을 낮추고 지내던 시절 이곳에 들렀다가 말에서 내리지 않는다 하여 문지기한테 봉변을 당했을 정도였다. 1864년 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서원 철폐가 시작되었는데, 가장 먼저 화양서원과 만동묘가 철퇴를 맞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출처 : 수일재
글쓴이 : 수일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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