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도 풍속화의 대가였다 [한겨레] 2009.09.01
노론 원로 경로잔치 정경…친필 서명·지인들 기념시 등 붙여
세밀한 일상 묘사 눈길…회화·정치·사회사 중요 자료 될 듯
겸재 풍속 기록화 '북원수회도첩' 발견
조선 후기의 문화 르네상스를 수놓은 선비 화가 겸재 정선(1676~1759). 후대인들은 그를 18세기 이땅의 산하와 자연을 조선의 주체적 관점으로 묘사한 < 금강전도 > < 인왕제색도 > 등의 진경산수화를 그린 거장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이제 이런 상식도 바뀌어야 할 시점이 됐다. 겸재가 당시 상류층 양반 노인들의 경로 잔치 풍경을 생생하게 그린 풍속 기록화가 최근 발견됐기 때문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1716년 서울 북악산 기슭 장의동(오늘날의 청운동, 궁정동 일대)에서 벌어진 노론 원로 양반들의 경로 잔치 정경을 그린 겸재 정선의 그림에 그의 지인들과 선배들이 발문과 축시 등을 붙인 서화첩 < 북원수회도첩(北園壽會圖帖) > 을 작품 조사 중 발견해 분석중이라고 밝혔다. 이 그림첩은 추사 김정희의 < 세한도 > 를 소장해온 수집가 손창근씨의 컬렉션 중 일부로 박물관의 전시 준비 과정에서 확인됐다.
'서울 북쪽 동네에서 펼쳐진 연로한 노인들의 모임'이라는 뜻의 < 북원수회도첩 > 은 숙종 재위 42년 때인 병신년(1716년) 10월22일 낮 현재 청와대 부근에 있던 당시 노론의 원로 정객 은암 이광적(1628~1717)의 집에서 펼쳐진 70살 이상 노인들의 잔치인 '기로회' 풍경을 생생하게 담은 것이다.
이 그림첩은 맨 앞장인 겸재의 풍속 기록화를 필두로 잔치에 참석한 이광적(당시 88세), 김창국, 이속, 최방언 등 노론계 가문의 원로 인사 13명과 그 후손들 명단을 적은 '좌목', 참석자들이 붙인 기념시 모음, 잔치를 주선했으나 병이 나 불참한 겸재의 외삼촌 박견성의 아들 박창언이 쓴 발문 등이 이어진다. 우선 그림을 보면, 정선 말기의 호방한 화풍과도 다른, 꼼꼼하고 사실적인 필력이 돋보인다. 이광적의 사랑채 안에서 펼쳐진 흥겨운 잔치 풍경과 방안에 둘러 앉은 노인들과 그 후손들, 그리고 시중을 들던 여자 시종과 바깥에 대기하던 말몰이꾼 등의 움직임, 당시 양반 가옥의 얼개 등을 마치 사진을 찍은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또 아울러 한옥 담과 주변을 감싸고 있는 각종 꽃나무와 소나무의 싱그러운 모습도 실경에 가깝게 그렸다. 내용상 선비들의 모임 등을 그린 전통 계회도에 가깝지만, 그 도식적 구도를 벗어나 당시 일상의 풍경과 풍속을 놀라울 정도로 충실히 옮겨 놓았다. 그림 오른쪽 아래에는 낙관과 함께 장동(장의동) 북쪽에 사는 겸재가 정성껏 썼다는 뜻의 친필 글귀와 서명이 쓰여져 눈길을 끈다.
이 서화첩은 앞서 1711년 30대 시절의 겸재가 처음 그린 금강산 그림 모음인 < 신묘년 풍악도첩 > 과 더불어 초창기 작품에 해당한다. 40대에 막 접어들어 화가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게된 겸재가 잔치에 참석한 뒤 화첩을 그려 달라는 외가 쪽 어른들과 외사촌형 박창언의 부탁을 받고 그린 것으로 보인다. 그림을 그린 1716년은 노론계열의 문인이었던 겸재가 숙종의 배려로 관상감 천문학겸교수(종 6품)로 특채되면서 벼슬길을 시작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막 관직에 나선 겸재로서는 자신을 후원해준 노론 가문의 뜻깊은 경로 잔치를 그림으로 남기는 데 성의를 다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박물관쪽 관계자는 "잔치를 주최한 쪽인 박견성이 행사에 불참한 것을 아쉬워해 훗날 아들과 외조카인 겸재로 하여금 당시 행사를 재현한 화첩을 만들게 한 것으로 추정된다"며 "겸재가 잔치를 주의 깊게 관찰한 느낌이 역력히 드러나는 조선 풍속 기록화의 걸작"이라고 밝혔다.
< 북원수회도첩 > 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던 풍속화가 겸재의 면모를 조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진경산수의 대가로만 여겨졌던 그가 일상의 모습을 담은 풍속 기록화에서도 조선 특유의 화법을 구사했던 17세기 진경 산수화풍의 관점과 분위기를 살려 또다른 일가를 이뤘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그림에 묘사된 18세기 양반집의 창문과 담벽, 말을 타고 내리는데 발판으로 썼던 받침대 등이 설치된 중문 앞 마당 등의 건축 얼개에 대한 묘사는 찬탄을 자아낸다, 개다리 소반 등이 차려진 잔치판, 가마꾼과 음식을 나르는 여종 등이 오가는 마당 등의 풍경은 18세기초 조선 사대부들의 일상 풍경을 온전하게 복원할 수 있는 희귀한 시각적 자료로서도 가치를 지닌다.
뒷 부분 글씨첩에서는 겸재의 외사촌형 박창언이 잔치와 그림을 그린 경위를 적은 발문이 주목된다. 겸재의 세밀한 일상 풍경 묘사를 뒷받침하듯, 당시 잔치판의 분위기는 물론, 주요 참석인사의 거동, 심지어 여자 시종, 심부름꾼들 하나하나의 주요한 배치 상황과 움직임, 동선 등을 세세히 기록해 놓았다. 당시부터 실제 일상과 풍속에 대한 문화적 관심이 지식인들 사이에 유행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조선 풍속화의 선구자로 흔히 자화상을 그린 공재 윤두서(1668~1715)와 관아재 조영석(1686~1761)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겸재가 이 분야의 실력자였음을 그림첩은 은연중 일러주는 셈이다. 이밖에 잔치에 불참했던 노론의 핵심 정객 김창업 등이 훗날 쓴 축시 등도 들어있어 이 화첩은 당시 노론 지배층 세력의 인맥 관계도 엿보게 한다.
겸재의 풍속기록화는 10여년전 미술사학자인 유홍준 명지대 교수가 이광적의 과거 급제 60돌 기념잔치를 담은 비슷한 구도의 < 회방연도 > (개인소장)를 발굴·소개한 전례가 있다. 하지만, 이 그림은 별지로 붙은 박창언의 축하시 외에는 상세한 제작 경위가 밝혀지지 않아, 연구에 결정적인 단서를 주지는 못했다.
겸재 그림 연구의 권위자인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은 "기존 통설과 달리 겸재가 김홍도와 신윤복 등으로 대표되는 조선 후기 풍속화의 실질적인 시조였다는 사실을 확실히 입증하는 놀라운 근거 자료가 나왔다"며 "선비화가로서 그의 폭넓은 역량을 살펴볼 수 있다"고 평했다. 한편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02-2077-9485)는 오는 8일 시작하는 겸재 테마 특별전(11월22일까지)에서 이 작품과 함께 독일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최근 국내에 기증한 화첩 등 비장의 겸재 명품들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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