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한반도에 가둔 선덕여왕과 박노자
- 대륙의 역사와 민족주의는 정치적 현실이다 / 김헌식 문화평론가 [데일리안] 2009.08.18
드라마 ´선덕여왕´이 큰 인기를 끌면서 신라를 다시 인식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70-80년대 신라의 통일이 크게 가치 평가되는 평가들이 대중적으로 유행하기도 했다. 드라마 ´선덕여왕´은 통일의 기틀을 다진 선덕여왕을 주목하면서 신라의 통일에 다시금 의미부여를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고 있기도 하다. 특히 가장 늦게 출발한 작은 나라가 어떻게 통일을 이루었을 것인가에 관련되어서 말이다. 이러한 점은 ´선덕여왕´의 제작진의 발언에서도 드러난다.
MBC 월화드라마 ´선덕여왕´ 홈페이지에는 “삼국 중 가장 약소국이었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도록 했던 그 지도자의 힘! 그 힘을 보여주려 한다.”라고 기재 되어 있다. 제작발표회에서 박홍균 PD는 “약소국이었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게 되는 힘을 기르는지 그리고 싶다."고 밝혔다. <무비위크> 3월 인터뷰에서 박상연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생존의 문제’로 풀려고 한다. 원래 신라는 삼국 중에서 최약소국이었다.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던 고구려, 백제와 달리, 신흥세력인 신라는 변화를 화두로 삼고 통일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약소국 신라가 삼국통일을 단행한 것에 대해서 긍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 역사적 의미는 거세시켰으므로 신라의 외교와 통일 전쟁 상의 외세 개입이 가지는 오류를 합리화하는 것과 같다. 이는 반도사관에 머물게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에 대해서는 아직 논쟁이 다양하게 분분하기 때문에 그것을 세세하게 다룰 수는 없을 것이다. 최근 활발하게 신라를 다루고 있는 논객의 글을 보면서 몇 가지 말을 덧붙여보려 한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8월호에 박노자 교수의 인터뷰가 실렸다. 그 인터뷰 내용 중에는 신라에 관한 시각과 입장도 들어 있었는데, 개인적으로는 놀랄만한 발언이었다.
Q: 고구려 중심의 역사관을 비판하면서 (당신은) 신라의 불완전한 삼국통일에 대해선 관대하다.
A: 당시 신라의 선택은 당나라 이외엔 있을 수가 없었다. 약자로서 어디에 붙느냐의 계산이 남았을 뿐인데 당나라가 중국을 평정하는 걸 보고 고구려의 멸망을 점쳤을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는 고구려를 없앨 수 없으니 김춘추가 당 태종에게 대동강 이남은 우리 땅으로 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결국 자기에게 가장 유리한 강자와의 연합을 택한 것인데,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정치인이라면 당연한 선택이 아니었을까? 외세를 끌어들였다는 비판도 있지만 신라엔 고구려도 외세였다. 언어와 문화가 달랐는데 후대적인 민족 개념을 들이대는 건 난센스다. 당시엔 동족 인식이 거의 없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8월호 인터뷰에서
대개 고구려 중심의 역사관을 비판하는 것은 고구려를 매개로 한국인들이 배타적 민족주의로 공격적 이데올로기를 무감각하게 받아들일 것을 우려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신라를 관대하게 대하며 정작 그들의 외교, 통일 방식 모순을 가려주는 언로를 합리화 하게 된다. 박노자도 마찬가지 맥락 안에 있다.
박노자는 왜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되었을까. 그것은 박노자가 민족주의를 깨부수려는데 올인했기 때문이다. 무슨 이야기인가. 박노자는 줄기차게 고대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에 같은 동족의식이 없다고 주장해왔다. 따라서 신라의 시각에서 고구려는 외세였을뿐 이라는 것이며, 따라서 당나라를 연합해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문제가 없다고 본다. 결국 신라라는 작은 나라가 당나라와 연합해 많은 땅을 차지한 것은 당연하고도 옳은 일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인식에는 여러가지 오류와 모순이 혼연해 있다.
민족주의를 부수려는 것은 그 부정적인 결과들 때문인데, 일단 민족주의는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라고 전제해야 그것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전제에 따라 민족주의는 이성적 합리적 판단을 그르치며 민족이라는 의식은 계층과 계급의식을 불식시켜서 내부 모순을 봉합한다고 본다. 외부적으로는 배타적인 태도로 다른 타민족이라고 규정된 이들을 공격하거나 침략한다고 본다. 나치즘의 출현은 민족주의와 국가권력의 결합으로 본다. 고구려 중심의 역사관을 비판하는 이들은 흔히 나치즘을 견준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민족 의식은 없앤다고 해서 없앨 수 있는 사물이 아니다. 우리만의 문제도 아니며 다른 이들이 모두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을때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대안은 없다.
두번째는 동족의식이 없다는 전제를 무분별하게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두 가지 키워드를 뽑아낼 수 있다. 하나는 공간의 개념과 유대의 정도라는 것이다. 중원이라는 땅은 한반도에서 매우 멀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공간적으로 이격된다. 또한 일본 열도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공간의 지배를 받는다. 공간의 지배는 인식적으로 멀고 가까움을 드러낸다.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가까운 관계로 인정하지 않는다 해도 고구려와 백제는 한 뿌리에서 나왔다. 박노자의 견해는 결국 신라 중심의 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고려라는 나라는 신라를 뒤엎었고, 조선은 더욱 더 고대로 올라가서 하나의 뿌리임을 강조하고 있다. 부족연맹체를 맺었던 것이 가능한 것은 공간학적인 동질성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족으로 인식하고 있는가 있지 않은가는 너무나 현대적인 개념이다. 민족이라는 개념은 없지만 유대의 개념은 있다.
예컨대 몽골족들은 한국 사람들을 형제의 나라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것은 현대의 민족이라는 개념으로 묶을 수는 없지만 분명 한족과는 다른 종류의 의식인 것이다. 이는 한족과 흉노족과의 관계와 비교해 볼 수 있다. 신라계가 흉노족이라고 할 때 분명 한족과는 구별되는 점들이 존재한다. 흉노족은 결국 동이족이라는 같은 계열로 묶을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동족의식이 아니라 포괄의 영역에 있는 종족인가 아닌가가 중요한 것이 고대동아시아의 문제다.
따라서 외세일 뿐이라고 규정하면서 한족이나 다를 게 없다는 것은 모순을 내포하게 된다. 요컨대, 당나라, 고구려, 왜, 신라, 백제가 다같은 등 위에 있을 수는 없다. 더구나 왜가 백제를 지원한 것은 많은 백제의 혈족들이 일본에 진출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당나라의 침입을 방지 하기 위해 백제를 지원했으리라 볼 수는 없다. 가까운 지정학적 공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뒤섞이게 마련이다. 고구려와 신라, 백제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지배층 일부는 다를 지 몰라도 비슷한 공간상에 있는 이들은 문화적 공동체를 이루게 마련이다. 따라서 이러한 점은 주로 왕족의 유물이나 흔적을 중심으로 민족이나 동족의식을 연구하는 것이 얼마나 한계에 있는지 알게 한다.
중요한 것은 문화적 공동체를 하부에서부터 이루고 있느냐이다. 그렇기 때문에 외세로만 인정했다는 것은 받아들여질 수 없다. 지배층은 별도로 하더라도 그 당시 기층 민중들은 유사한 문화적인 공유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노자가 말하는 언어와 문화가 달랐다는 주장은 일부 문헌을 인용한 것이며 그것은 지배층의 일부 모습일 뿐이다. 언어계열을 볼때 한족과 동이족은 분명하게 다르며 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족과 어군이 분명 다르다.
중국 본토는 지나(支那)다. 지나에서도 언어와 문화가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그들은 적어도 고대부터 동류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지나에 있는 사람들을 대하는 것과 신라가 백제 고구려 사람들의 동질적 수준이 같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지나 사람들을 대하듯이 한반도 사람들을 대했을까. 시간이 많이 흐르기는 했지만, 고대나 현대나 사람살이는 비슷하다.
박노자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끌어들여 삼국통일을 이룬 것이 당연하다고 보는데 그 이유는 어차피 백제나 고구려는 외세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나이브한 원칙론이 냉혹한 국제정치질서에서 역이용당할 수 있음을 간과한다. 민족주의라는 개념은 정치적으로 재구성되는 것이다. 원래의 출발은 문화적 유대와 공동체감이다. 그것을 방기하고, 민족주의만 없애면 결국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대동아공영권론에 지배당하기 쉽다. 더구나 민족주의는 안티테제 혹은 저항적 혹은 방어적 기능도 있다. 한국에서 민족주의란 이러한 개념으로 기울어왔다.
무엇보다 민족주의는 없어질 수 없으며, 그것을 인정하고 공존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신라와 백제, 고구려가 동족의식이 없다는 나이브한 접근은 지배층의 역사를 공고하게 하는 편견을 강화한다. 당연히 자신의 패권을 추구할 때는 상대를 동족이나 유대적 관계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정치다. 현재의 남과 북을 보라. 둘은 서로를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적 차원에서만 그렇다. 문화적으로 볼 때 남과 북은 너무나 같다. 남한에서는 영어를 많이 쓰는데 그렇다고 북한과 같은 민족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신라도 흉노족 계열이 정권을 장학했다고 해서 말의 쓰임이 다를 수는 있지만, 공간학적인 문화 유사성은 변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말해 신라가 외세를 끌어들여 대동감 이남의 불완전한 통일을 한것을 무조건 옹호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를 끌어들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다. 자칫 당나라가 한반도 전역까지 모두 집어삼킬 뻔했다. 그것을 신라가 물리쳤다고 주장하면서 역시 신라의 외세 끌어들이기는 합리화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도 문제다. 한반도에서 외세를 물리친 것은 신라 단독의 힘이 아니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사람들이 모두 힘을 합쳤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왜 힘을 합쳤을까? 서로를 동족으로 아니 서로 외세로 규정한 사람들이 왜 당나라에 붙지 않고 당세력을 몰아냈는가. 이러한 점에서 역시 박노자의 견해가 갖는 흠결을 발견할 수 있다. 당나라와는 다른 공간학적 문화적 동질성이 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무엇보다 적어도 한반도에서는 외세를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단결과 연합만이 살아남은 길임을 알 수 있다.
대륙의 역사를 생각할 때 고구려는 여전히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구려 정신은 나치즘과 같은 제국주의적인 침략이 기본이 아니다. 고구려가 자신만의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나라 동력의 핵심은 각 민족의 포괄에 있다. 이민족이 세운 당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삼국시대는 5호 16국의 시대였지만, 이때만큼 동아시아가 역동적이고 다양성이 보장된 때도 없었다. 신라가 과연 고구려와 같이 수많은 이민족을 포괄하는 정치를 보여주었는지, 그것이 디아스포라와 다문화 사회에서 신라가 국가적 모델로 적합한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신라는 강고한 민족주의에 치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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