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자료실

[스크랩] 문무왕릉비 사실상 다 찾은 셈

회기로 2009. 9. 23. 19:01

문무왕릉비 사실상 다 찾은 셈 [경향신문] 2009.09.03

상단부 발견... 신라 김씨 조상 등 연구 전기

 

 

"문무왕릉비의 실물을 '사실상' 다 찾았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오영찬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관)

"신라 김씨의 실체 연구에 전기를 마련했습니다. 실물을 다 찾은 셈이므로 이제는 비문을 선입견 없이 연구해야 할 때입니다."(김병모 한양대 명예교수)

가정집 수돗가에서 신라 제30대 문무왕(재위 661∼681년)의 무덤 비석 상단부 조각이 발견된 것은 그동안 비석 아랫부분과 비문 탁본만이 남아있던 왕릉비의 실물을 '사실상' 다 찾았다는 데 의미가 있다.

'사실상'이라고 하는 것은 1796년에도 상단부 왼쪽이 멸실된 채 발견됐기 때문이다. 상단부 왼쪽 부분은 18세기 당시에도 확인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번에 1796년 당시의 문무왕릉비가 현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문무왕릉비는 비 자체에 파실된 부분이 많아 파악하기 어렵다. 대체로 앞면에는 신라에 대한 찬미, 신라 김씨의 내력, 태종무열왕의 사적, 그리고 백제 평정사실 등이 적혀있다. 뒷면에는 문무왕의 유언과 장례 사실, 그리고 비명(碑銘)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한당류(漢唐流)의 명문장을 모방했고, 중국의 경전과 고사성어에서 따온 미사려구로 가득차 있다. 서체는 구양순체의 해서(楷書)이며, 문장은 사륙변려체(4자와 6자를 기본으로 한 대구로 이루어져 수사적 미감을 주는 문체)다.

특히 비문에는 문무왕의 조상, 즉 신라 김씨의 가계와 관련해서 수수께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즉, 신라 김씨의 조상을 흉노족으로 보았거나, 적어도 그 뿌리를 흉노에서 찾고자 했다는 암시가 등장한다.

예컨대 이번에 확인된 비문의 상단부에는 문무왕의 15대조를 '성한왕(星漢王)'이라고 밝히고 "투후(禾宅侯)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 …했다(傳七葉)"는 구절이 있다. '투후 제천지윤'이란 < 한서(漢書)·열전 > 에 나오는 김일제(金日石單)라는 인물을 뜻한다.

김일제(BC 134~86년)는 흉노 휴도왕의 태자. 한나라 장수 곽거병의 흉노 토벌 때 포로가 되었다.

그런데 비문 내용 가운데, "하늘에 제사 지내는 사람의 후손(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했다(전칠엽·傳七葉)"라는 구절은 무엇인가. 이는 본래 휴도왕이 금인(金人)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祭天)했으며, 한 무제로부터 김(金)씨 성을 받았다는 사서( < 한서·열전·김일제전 > )에 나오는 대목이다. 여기서 '제천지윤 전칠엽'은 신라 문무왕 선대의 7대 전승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비문 자체가 깨지고 멸실된 부분이 워낙 많아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기 힘든 측면도 있다.

이와 관련, 김병모 교수는 "당대의 시대 상황, 즉 당나라와 건곤일척의 싸움을 끝낸 문무왕 입장에서 신라의 조상이 중국, 즉 당나라가 아님을 널리 알린 것일 수 있다"고 본다. 김 교수는 "어쨌든 이번 비석의 실물 발견을 계기로 기존의 탁본에 의지하지 말고 지명이나 이름, 내용을 선입견 없이 비석 명문 그대로 해석하고 연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신라 문무왕릉비 조각 200년 만에 재발견 [연합뉴스] 2009.09.02

 

 

조선시대에 발견됐다가 다시 실종됐던 신라 문무왕릉비의 조각이 200여년만에 다시 발견됐다.

국립경주박물관(관장 이영훈)은 지난 2일 경주시 동부동의 한 주택에서 신라 문무왕릉비의 상단부분을 확인했다고 3일 밝혔다.

조선시대 경주부윤을 지낸 홍양호(1724-1802)의 '이계집(耳溪集)'은 682년 경주 사천왕사에 세워졌던 문무왕릉비의 조각들을 정조 20년인 1796년에 발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조각들의 탁본은 청나라 금석학자 유희해(劉喜海.1793~1853)에게 전해져 그가 쓴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내용이 실렸다.

이 조각들은 그 이후 있는 곳이 다시 묘연했으나 1961년 비석의 하단 부분이 경주시 동부동에서 발견돼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돼 있으며 이번에 상단 부분이 발견됐다.

상단 부분은 주택의 수돗가에 박혀 있었으며 표면이 훼손되고 가장자리 등 일부는 심하게 마모됐지만 비문의 전체 내용을 읽는데는 큰 어려움이 없다고 박물관 측은 설명했다.

진정환 학예연구사는 "'해동금석원'에서 제대로 밝히지 못한 일부 글자도 실제 조각과 비교하면 추가로 판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면서 "조각을 안전하게 박물관으로 옮겨 보존처리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출처 : mooncourt
글쓴이 : mooncourt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