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상>은 임용련(1901-?)이 1929년에 그린 작품이다. 그러나 임용련은 미술에 관심이 많지 않은 사람은 거의 모르는 화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림 실력이 상당하고 기록으로 남아있는 경력도 화려하지만, 그는 ‘화가 임용련’보다 ‘이중섭의 스승 임용련’으로 더 알려지고 있는 ‘불운한 화가’다.
임용련은 위의 그림을 완성한 1929년에 미국 예일대학교 미술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고, 국내에 돌아와 <부부전>을 비롯해 여러 전시회에 좋은 작품을 출품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전해지는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에르블레 풍경>과 개인소장의 <금강산> 그리고 위의 <십자가의 상>등 세점 밖에 되지 않는다. 8.15 해방 후 살고 있던 평북 정주에서 급작스레 서울로 내려오느라 작품을 한 점도 갖고 오지 못했고, 6.25 전쟁 직후 북한군에게 중부 경찰서(일설에는 종로 경찰서)로 끌려간 후 생사가 확인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가족들도 갖고 있던 작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근대미술사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유보되고 있다.
이 작품에 대해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장을 지낸 이원복 현 전주국립박물관장은 “현존하는 양화로서는 가장 오래된 ‘예수상’이고, 알려져있는 두점의 임용련 작품보다 앞선 작품이일뿐 아니라 작품성도 좋다"라고 그 가치를 평가했다.
이구열 한국근대미술연구소장은 "당시 일본에 유학하던 화가들의 실력으로는 그릴 수 없던 수준의 그림이다. 리얼리즘풍의 표현방법과 기법이 매우 뛰어난, 우리나라 근대미술사에서 가치가 매우 큰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그는 임용련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하면서 <에르블레 풍경>을 발굴하는데 중요한 역활을 했고, 1930년 신문에 실렸던 <십자가의 상> 흑백도판 사진을 1982년 <계간미술> 여름호에 소개해 이 작품이 발굴되는데 결정적 단서를 제공했다.
임용련은 귀국 후인 1930년 11월 5일부터 9일까지 동아일보사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부부전>을 열어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당시 <부부전>에는 드로잉 20점을 포함하여 모두 82점의 작품이 출품되었고, 위의 <십자가의 상>이 바로 이 <부부전>에 출품되었던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어떻게하여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는지는 현 소장자가 밝히지를 못했다. 작품 발견 당시 현 소장자는 너무 흥분하여, 어떻게하든 작품을 손에 넣을 생각만 하였고, 작품발굴의 경험이 없어 소장경위나 이동경위의 중요성을 몰라 구입 후에라도 알아볼 생각을 못하였다니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임용련은 서울에서의 전시회를 끝낸 후 1931년부터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에서 미술, 영어교사로 재직하며 이중섭,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발굴회고전을 가진 승동표, 그리고 우리 근대미술사와 북한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문학수등을 제자로 배출하면서, 간간히 서울에서의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였다. 그러나 그는 일본인이 주최하는 조선미술전람회에는 단 한번도 출품하지 않은 투철한 민족정신을 갖고 있었다. 오산학교 재직 당시 그는 이중섭을 비롯한 제자들에 밑그림(드로잉)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이중섭에게 수없이 강조했다는 "밑그림을 바닷가의 모래알보다 더 많이 하여라. 그런 다음에 네 예술이 있다."는 말이 이중섭 전기에 등장하고, 이중섭은 일본 유학 중에도 드로잉 작업을 매우 열심히 했다고 한다. 따라서 이중섭의 드로잉이 습작이라기 보다 완성된 작품형태가 많은 이유는 스승인 임용련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십자가의 상>은 전통적인 성화 형식에 충실한 그림으로 모두 여덟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첫번째 인물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을 맞은 예수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는 예수가 십자가가 아니라 나무에 매달려 있는 부분이 특이하며, 예수 근육을 표현하는 솜씨가 대단히 원숙함을 보여준다. 근육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능력은 중세 이후 많은 화가들의 화두라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어려운 부분이기 때문에, 화가의 실력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성화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이탈리아에서 미술사학을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받은 고종희 한양여대 교수에 의하면, <십자가의 상>의 내용은 '십자가에 못 밖힌 예수와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전통적으로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보면 예수 혼자 그린 경우가 있고(십자고상), 이 그림에서처럼 예수와 가까웠던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장면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있다. 전통적으로 애도하는 이들은 성모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사도 요한이 등장하고 있으며 슬퍼하는 여인들(Pie donna)도 자주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머리 위에 후광이 있으니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다. 미켈란젤로가 축 늘어진 예수의 시신을 안고 슬퍼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조각으로 만든 이후 많은 화가들이 즐겨 그리는 소재가 된 '피에타(경건한 애도)'인데, 이를 그린 우리나라 화가는 그리 많지 않고, 근대미술에는 이 그림외에는 없다. 그런 '피에타'를 임용련은 원숙한 필치로 엄숙하고도 애통하게 그렸고, 옷의 선과 주름을 한치의 어색함도 없이 섬세하게 표현하여 그림이 경직되지 않고 부드럽게 보이게 했다.
옷을 벗은 남자는 <십자가의 상>에서 가장 독특한 부분이다. 옷을 벗은채 팔을 길게 뻗은 이 남자는 사도 요한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서양의 어느 <십자가의 상>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매우 창조적이고 실험적인 표현이다. 이 남자에 대해 고종희 교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 슬픔을 절규하고 있다. 보통 사도 요한은 붉은 색 옷을 입은 모습으로 표현하는데 이렇게 벌거벗은 채 그림에 등장한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화가 자신인가? 아니면 이 그림을 그릴 당시에 관여했던 그 누구인가? 아니면 작가와 개인적 관계가 있는 그 누구인가? 머리가 짧으니 현대인인데, 그것은 작가의 어록이나 설명 없이 추측하기 힘든 부분이라 생각된다.
옷을 벗은 남자는 고종희 교수의 추측대로 화가의 자화상일 수도 있다. 일본경찰을 피해 만주로 도망간 후 상해에 도착해, 한국인 임용련이 아니라 중국인 임파로 여권을 만들어 건너갔던 미국땅에서, 온갖 어려움을 딛고 5년 동안의 공부를 마치는 자신의 심정을 표현한건지도 모른다. 그런 심정때문이었는지 그는 이 그림의 액자 뒤에 영문으로 임파, 학교에서 사용하던 길버트 임, 한국에서 온 화가 등 다양한 형태의 서명을 하였으니, 졸업작품의 밑그림에다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자신의 심정을 감정이입 시킨 것일 수도 있다.
예수의 다리를 붙잡고 애통해하는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로 추정할 수 있다. 성경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를 닦은 여인이고, 예수가 죽은 뒤 무덤에 맨 처음 찾아간 여인이기 때문에 성화에 자주 등장한다. 유럽의 <십자가의 상>에 나타는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 고종희 교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일반적으로 늘 등장하는 막달라 마리아는 보통은 열렬하게 예수의 죽음을 슬퍼하는 여인으로 묘사되어 있고, 옷도 다른 여인들보다 화려하게 입고 있다. 여기서는 흑백의 스케치 사진이기 때문에 잘 알 수 없으나 예수의 몸을 끓어 안고 슬퍼하는 여인을 막달라 마리아로 그렸다고 일단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주검을 끌어당기며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은 예전에 본 적이 없는 적극적인 방식이다.
임용련. 그는 이렇게 탁월한 미술적 재능을 갖고 있었지만, 전쟁과 이데올로기의 격랑 속에서 평생의 작품과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그가 추구했던 미술정신은 이중섭, 문학수 같은 제자들에게 계승되었고, 그들은 남북미술사에 커다란 자취를 남겼다. 앞으로 더 많은 임용련의 작품이 발굴되어 그의 작품세계가 온전히 평가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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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cafe.daum.net/hknetizenbonb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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