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필육상묘도(鄭敾筆毓祥廟圖)
보물 제873호
명칭 정선필육상묘도(鄭敾筆毓祥廟圖)
분류 유물 / 일반회화/ 산수화/ 산수화
수량/면적 1축
지정일 1986.10.15
소재지 서울 강남구
시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중기의 위대한 산수화가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은 그 자신이 탁월한 창조적 상상력을 갖춘 예술가였을 뿐만 아니라, 문예부흥의 새 물결이 새로운 각성을 가져온 시대의 산물이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후 2세기만에 찾아온 문예부흥의 활기찬 새 물결은 창조성이 풍부한 화가 겸재로 하여금 한국회회사에서 새로운 지평을 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무렵 조선왕조의 지식인·예술가들은 철학, 역사학, 지리학, 의학, 농학, 언어학, 회화 등 각 분야에서 눈부신 업적을 쌓았다. 화가들은 정치와 사회의 안정, 경제의 번영, 한글문학의 발달, 서민들의 자각 등으로부터 영향을 크게 받고 서서히 조국의 산하와 서민들의 일상생활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애정의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들은 중국의 산하가 아닌 한국의 아름다운 강산을 실경산수화로 그리는 한편, 사회에서 일어나는 시정사(市井事), 서민들의 여러가지 잡사(雜事), 양반들의 한가한 놀이, 베짜는 여인의 모습, 여색(女色)이 풍기는 춘의도(春意圖)까지 과감하게 그렸다. 겸재 정선은 여러 방면의 인사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직업화가로 충실했다. 겸재와 가까이 지낸 인사에는 김창집(金昌集), 조영석(趙榮석), 이병연(李秉淵) 등이 있었다.
83년간 살면서 수많은 그림을 그린 겸재의 유작으로 현재 남아있는 것은 5백 점에 가까운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금강산그림, 인왕산그림, 서울근교그림, 소나무그림, 고사(故事)그림, 잡화(雜畵),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 관념산수화(觀念山水畵), 지도(地圖) 등 정부의 기록화. 정선의 육상묘도(毓祥廟圖)란 서울근교 도성 안팎의 명소 그림으로, 이런 그림들은 단순히 산수화가 아니라 기록화 같은 성격도 띠고 있어 역사적으로나 학술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고 있다. 이런 그림에는 경복궁도(景福宮圖), 세검정도(洗劒亭圖), 동소문도(東小門圖), 동문조도도(東門祖道圖), 서교전의도(西郊餞儀圖), 부자묘노송도(夫子廟老松圖), 육상묘도(毓祥廟圖), 목멱산도(木覓山圖), 북단송음도(北壇松陰圖), 압구정도(狎鷗亭圖), 장안연우도 (長安烟雨圖) 등 80여 폭이 있다. 육상묘와 그 뒷산인 백악산(白岳山) 등을 그린 육상묘도는 겸재 정선이 63세 때인 1739년(기미(己未))에 그린 그림이다. 그림은 견본수묵담채화(絹本水墨淡彩畵)로서 큰 편인데 세로 94㎝, 가로 63㎝이다. 상단(上段)의 좌목(座目)까지 계산한 전체크기는 세로 146.5㎝, 가로 63㎝이다.
그림의 상단에는 육상묘의 영건(營建)에 참가했던 관리들(18명)의 명단인 부묘도감좌목(부廟都監座目)이 쓰여 있고, 하단(下段)에는 겸재화법으로 그린 그림이 있다. 육상묘는 초가(草家)이며, 그림의 왼쪽 위에는 기미중춘(己未中春) 겸재사(謙齋寫)라고 쓰여 있다. 육상묘는 숙종(肅宗)의 후궁(後宮)이며 영조(英祖)의 사친(私親)인 숙빈(淑嬪) 최씨의 신주(神主)를 모시기 위하여 영조원년(英祖元年)(1725)에 북악산하(北岳山下)에 세운 사당이다. 처음에는 숙빈묘(淑嬪廟)라 하였으나 1744년에 육상묘라 하였고, 다시 1753년에는 육상궁(毓祥宮)이라 하였다. 요즘은 그 근처의 다른 묘(廟)들과 함께 7궁(宮)이라 부르는 것은 다 아는 바이다.
이 육상묘도는 현재의 소유자 이재곤(李在坤)씨의 9대조(代祖)인 이광의(李廣義)(당시 제용감판관(濟用監判官))도 좌목(座目)에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광의가 겸재 정선에게 의뢰하여 그리게 한 것으로 생각되며, 그 후 가전(家傳)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지금으로부터 250여년 전 그림이나 상태는 비교적 좋은 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