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산한 세상 향해 터뜨린 꿈의 꽃망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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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람 전기가 그린 ‘매화초옥도’ 그의 그림은 마음이 본 꿈의 풍경이다.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서양의 원근법이라면 우리 그림은 반대되는 개념으로 눈앞의 정경보다 뒷산이 훨씬 우뚝하고 크다. 이런 ‘역원근법’은 그리움의 거리를 말한다. 그림 출처:〈우리가 꼭 알아야할 우리 그림 100가지〉(현암사) 교과서 미술 기행 /
고람 전기의 ‘매화초옥도’ ‘계산포무도’
전기의 그림은 내게 벼락처럼 왔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처럼 오랫동안 열망하던 내밀한 꿈들이 갑자기 쏟아져 들어와 숨도 쉬지 못할 만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오래 전 박물관을 어슬렁거리다가 맞닥뜨린 그의 그림은 순식간에 나를 사로잡았다. 하도 황홀하고 따뜻해서 손을 뻗어 만져보고 싶던 <매화초옥도>(중학교 3학년 <미술>, 교학사 펴냄). 나는 이 그림을 그린 화가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정신없이 빠져들고 말았다. 한없이 깨끗해서 슬프기까지 한 매화가 눈송이처럼 산뜻하게 피어난 풍경. 이 묘한 설렘은 오늘처럼 따뜻한 것이 그리운 날이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돼버렸다.
고람 전기(1825∼54)는 19세기 중엽의 우리 화가다. 중인 출신으로 약방에서 약을 지으며 살다가 서른 살에 요절했다. 그래서였을까? 그의 그림은 담백하고 화사하지만 비극의 기운이 어른거린다.
그가 스물다섯에 그린 <계산포무도>는 꿈꾸는 자의 단호한 자기 선언이다. 이 스산하고 바람찬 세상에서 끝없이 흔들리다가 사라질지라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 이 그림 앞에 서면 옷자락에서 차가운 바람 냄새가 난다.
그는 이 그림을 그리며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을지 모른다. 곧 바람 속으로 훌훌 떠나게 되리라는 것을. 이 그림은 무섭도록 쓸쓸하다. 그림의 전경에 홀로 서 있는 그의 외로움은 세월을 뛰어넘어 곧장 가슴을 뒤흔든다. <계산포무도>를 볼 때마다 자꾸 백석의 시가 겹쳐서 떠오른다.
“하늘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서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흰 바람벽이 있어> 중에서) 그가 꿈의 자리로 걸음을 옮길수록 현실은 그를 꺾고 모욕하려 기승을 부린다. 그러나 그는 안다. 자신을 억압하고 상처 입히는 이 상황들을 온몸으로 뚫고 나가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한 개인이 세상에 피워 올리고 싶었던 꿈은 오롯이 순수한 자기 열정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처한 세상은 딱딱한 외피 속에 웅크린 거대한 신분질서였고 외면하려 들어도 밑바닥부터 그의 꿈을 침잠시키려 한다. 더욱이 개인의 가능성을 열어줄 듯 보이는 소리없는 붕괴의 조짐, 그것이 전기를 더 힘들게 만들지 않았을까. 자기처럼 꿈에 기대 사는 사람 하나 만나지 못하는 현실. 그래서 그는 홀로 눈꽃 같은 매화를 하나씩 세상을 향해 던진다. 분명한 것은 세상의 변화 조짐은 아주 더디게, 그러나 구체적으로 인간을 향해 열린다. 그래서 꿈꾸는 자는 혼자서도 외롭지 않다.
<매화초옥도>와 <계산포무도>는 다른 느낌의 그림이지만 가만히 들여다 볼수록 닮아 있다. 이 조용한 사유는 전기의 표현대로 “가슴 속에서 곧바로 튀어나온” 목소리이기에 아름답고 진실하다. 척박한 현실에서 피어나는 꿈이라서 그 꿈은 더욱 향기롭다. 자신의 앓는 소리에 건넌방의 어머니가 걱정하실까봐 입술 깨물며 소리 죽이던 섬세한 사람. 그 착한 영혼이 그려낸 맑은 그림들이 지친 우리를 위로한다.
소중한 벗이 찾아온다는 소식에 마음이 활짝 열려 눈이 펑펑 내리는 산 어귀까지 추운 줄도 모르고 꽃불을 켜들고 기다리던 한 사람. 미나리꽝처럼 싱그런 초록빛 담채와 산뜻한 호분으로 그려낸 매화 향기 가득한 꿈길을 걷고 싶다. 너울너울 눈 속에 피어난 매화가 친구의 피리 소리를 따라 수줍게 웃고 다리를 건너는 내 가슴에도 꽃물결이 일렁여 온몸이 붉어진다. 어깨에 거문고를 메고 너를 만나러 가는 발걸음은 언제나 마음보다 더디다. 내 기쁨과 슬픔을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사람. 내 꿈을 자신의 꿈처럼 귀하게 여겨주는, 함께 꿈꾸는 사람. 그런 네가 있어서 내 안의 매화들도 폭죽처럼 일제히 너를 향해 터져버린다.
전기의 그림은 마음이 본 꿈의 풍경이다.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서양의 원근법이라면 우리 그림은 반대되는 개념으로 눈앞의 정경보다 뒷산이 훨씬 우뚝하고 크다. 이런 ‘역원근법’은 그리움의 거리를 말한다. 멀리 있어 커 보이고 사무치는 그리움의 깊이와 공간이 역원근법이다.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볼 때 눈물나지 않는 사람을 나는 믿지 않는다. 이 아득하고 높고 큰 그리움으로 우리는 불안한 일상들을 애써 작은 일처럼 여기며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역원근법’은 이상주의자가 내다본 꿈의 풍경인 것이다.
눈앞의 것들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포식자처럼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상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유배시킨 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삶이 끝이 갈라진 독필로 우리를 휘몰아쳐 그린다고 해도 우리는 꿋꿋하게 이 자리에 서있을 것이다.
비바람에 생가지 찢겨나갈지라도 극한에 닿은 외로움을 견뎌낸 나무만이 악기가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전기를 아꼈던 선배 화가 조희룡은 “그의 그림 속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했다.
사위가 어둑해지고 바람찬 날, 짧고 명징한 서정시 같은 전기의 그림 속에서 그리운 너를 만나고 싶다. 정지원/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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