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자료

[스크랩] 정조를 위한 변명 - 1

회기로 2010. 1. 19. 23:14
어제(2월 9일), 정조의 비밀 편지 299통이 공개되었다. 1796년 8월20일부터 1800년 6월15일까지, 예조판서와 우의정 등을 역임한 노론 벽파(僻派)의 거두 심환지(沈煥之.1730-1802)에게 보낸 비밀 편지다.

이 편지들 중에는, 정조가 심환지에게 자신의 건강에 심대한 이상이 있음을 여러 차례 알렸다는 내용이 있어, '심환지의 정조 독살 의혹'은 종지부를 찍어야 할 형편이 되었다. 추측과 심증에 의한 역사해석이 얼마나 위험한지가 증명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여러 언론에서는...

편지 내용 중, 최측근인 노론계 서영보(1757~1824)를 “호로자식(胡種子)”, 촉망받던 젊은 학자 김매순은 “젖비린내 나고 미처 사람 꼴을 갖추지 못한 놈”, 학문적 정적을 비방하는 일부 유생들을 겨냥해 “오장에 숨이 반도 차지 않았고” “도처에 동전 구린내를 풍겨 사람들이 모두 코를 막는다”는 등의 비속적 표현을 썼으니...

정조는, ‘학자 군주’라기보다 능수능란 ‘고단수 정객’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어느 일간지 기자는 "200여 년 전에 부친 왕의 편지. 이를 통해 우리가 익히 알던 18세기 ‘성인 군주’를 잃어야 할지는 모르지만..."이라고 썼다....

 

 

왼쪽에서 다섯번째 줄 아래에 '뒤죽박죽'이라는 한글이 보인다.

어제 언론의 평가에 따르면, 정조는 '욕쟁이 정치꾼'이라는 소린데... 그건 아니다....  얼마전, 우리나라에 최초로 전해진 세계지도인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를 소개하면서 숙종과 그 시대는 다시 평가되어야 한다고 했듯이, 조선시대의 왕들은 하나의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동시대에 세상에 존재하던 왕들 중에서 공부를 가장 많이 한 '학자'들이었고, 어려서부터 '제왕학'을 공부한 '전문 정치인'이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학자와 정치인의 두가지 모습이 있다... 

따라서 성리학이라는 학문에 기반을 두었던 조선시대의 왕과 그들의 통치형태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학자와 전문 정치인 양면을 보고 평가해야지, 어느 한쪽만 보면 정당한 평가를 할 수 없다....  정조도 마찬가지다.... 

 

 

영조의 <연강시> (간송미술관 소장)

 

 

간송미술관 최완수 연구실장 번역

위의 자료에서 볼 수 있듯이 정조는 설날에도 83세의 할아버지 영조 아래서 공부를 했다....  영조는 세손 정조에게 그렇게 '제왕의 길'을 가르쳤다....  그리고 이런 '제왕 훈련'은 어렸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상풍에 긔후 평안하오신 문안 아옵고져 바라오며 뵈완디 오래오니 섭~ 그립사와 하옵다니 어제 봉셔 보압고 든~ 반갑사와 하오며 한아바님 겨오셔도 평안하오시다 하온니 깃브와 하압나이다. 元孫"
(가을바람에 기후 평안하신지 문안을 알기를 바라오며 뵌 지 오래되어 섭섭하고도 그리워하였사온데 어제 봉한 편지를 보고 든든하고 반가워하였사오며 할아버님께서도 평안하시다 하시오니 기쁘옵나이다. 원손)

이 한글 편지는, 정조가 8살 원손 시절 외숙모에게 보낸 문안편지이다...  어려서 부터 한문뿐 아니라 한글 공부도 했고, 친인척에 대한 예의범절을 배웠다... 학문과 제왕학뿐 아니라 인성교육도 함께 받은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심성은 훗날 왕이 되어서도 이어진다....


 

 

정조 어찰(왕의 편지)  출처 : <묵적> (명문당 발행)


 

 



이 편지는 위의 한글 문안 편지를 쓴 종이처럼 꽃 무늬가 찍힌 시전지에 쓴 걸로 봐서, 신하가 아니라 왕실 친인척 누군가에게 보낸 새해 선물 편지로 보인다....  정조는 신하에게 편지를 보낼 때는 도장을 찍었기 때문에 친익척에게 보낸 편지라고 추정할 수 있다.


 

 

정조 <김참판에게 보내는 선물 편지> 출처 : <묵적>


 

 

               큰 곶감이 아니라 곶감이라는 부분이 눈에 띈다.


조선 시대의 왕들은 시서화에 능했다. 시는 공부를 했으니 당연히 잘 짓고, 글씨 역시 연습을 많이했으니 명필이 많다. 그림은 글씨를 쓰면서 붓과 먹에 익숙해있고 세자시절 그림의 기본을 배워 웬만한 문인화가 못지 않은 솜씨를 가진 임금이 많다. 예를 들어 영조는 세자 시절 겸재 정선에게 그림을 배웠다.


 

 

정조 <정혜공 연시 잔치의 시> (간송미술관 소장)


 

 

간송미술관 최완수 연구실장 번역


 

 

 

 

정조 <임지로 떠나는 철옹부사에게> 201.8 x 73.3cm 1799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미술사학자 고 오주석 선생의 글에 의하면, "정조는 글씨 쓰기를 좋아하여 두 살 때 글자 모양을 만들었고, 서너 살 때는 필획을 이루어 날마다 그것으로 장남을 삼았다고 한다. 심지어 여섯 살 때 쓴 글씨로 병풍을 만들었다 전하는 사람도 있다."라면서 정조의 글씨는 바르고 단정하다고 평가했다.

시(詩)와 서(書)를 봤으니 이제 화(畵), 그림을 볼 차례다.


 

 

정조 <들국화> 종이에 수묵 84.6 x 51.5cm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  보물 제743호

이 작품은 고 혜곡 최순우 선생을 비롯해 많은 미술사학자들이 매우 잘그렸다고 평가한 작품이다. 일본에 살던 왕손의 소장품이었는데, 어느 재일동포가 구입해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해 고국에 돌아오게 되었다.

정조의 내면적 모습이 느껴지는 듯한 작품이다. 왕 혹은 왕세손이기에 가질 수 밖에 없는 쓸쓸함을 그림 속에 표현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국화꽃 위에 메뚜기 한마리를 그려 넣었는지도....


 

 

정조 <파초> 종이에 수묵 84.6 x 51.5cm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  보물 제743호

왕은 외롭고 고독하지만, 꿋꿋함과 고고함을 잃으면 안된다... 정조는 그렇게 외로운 삶을 살았고, 자신의 능력을 믿었기에, 편지에다 자신의 속마음을 나타냈고 마음에 차지 않는 신하들을 우습게 알면서 욕을 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번에 발굴된 편지들은, 왕이기에 갖고 있는 내면의 한 모습일뿐, 정조의 전체를 평가하는 잣대로 삼을 수는 없다....


 

 

정조 <묵매도> 종이에 수묵 123.5 x 62.5cm 1777년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이 작품은 정조가 28세 께, 작은 외숙에게 그려준 작품이다. 직업 화가의 그림이 아닌 문인화로서 이정도면 상당한 수준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 정조는 이렇게 시서화에 능하고 공부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백성들을 생각하는 정치를 하려고 한 성군이었다.

따라서 이번에 발굴된 편지들은,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왕이, 자신들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신하들에 대한 불신과 경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편지들 속에서 비속어가 보이고, 정치술이 보인다고 하여  정조가 성군이 아니었다고 단정하려는 듯한 기사는 매우 위험하다...  그 편지들은 정조의 통치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백성들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아니, 그는 백성들을 어떻게 생각하며 나라를 다스린 임금이었을까?  정말로 성군이라고 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줬을까? 그 답 또한 몇 점의 그림을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 계속
출처 : 이보세상
글쓴이 : 이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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