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과거시험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조선시대의 과거제는 문·무 양과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특히 문과를 중시하였는데 문과에는 생원·진사과 및 잡과로서 역과, 의과, 음양과, 율과 등이 있었습니다. 생원·진사과는 소과라 하여 15세 이상인 자가 응시할 수 있었고 소과에 합격하면 성균과 입학자격을 주고 하급관리로 채용할 수 있었습니다. 고급 관리가 되려면 대과에 응시해야 했는데 대과에는 성균관 출신과 소과 합격생이 응시할 수 있었습니다.
정약용은 정조 7년 의빈성씨가 낳은 문효세자의 세자책봉을 기념하는 과거시험에서 소과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이 됩니다. (하지만 [이산]에서는 정약용이 대과에 합격하였는데 의빈성씨는 회임조차 하지 않네요.) 정약용은 성균관에서 실시하는 과제에서는 매번 장원 또는 그에 버금가는 성적을 올리는데요. [이산]에서 정조가 무기명의 답안지를 보고 놀라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중용 70조에 관한 정약용의 답안입니다. 중용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쓴 유교경전으로 정조는 인간의 본성, 선악, 군자의 의미를 물었는데 정약용의 답이 정조가 평소에 품은 그것이었습니다. 쉽게 얘기해서 코드가 맞은 거죠.
이렇듯 뛰어난 학문적 역량을 가진 정약용이 네 번씩이나 대과에서 떨어진 이유가 뭘까요? [이산]에서처럼 그의 답안이 워낙 파격적인 것도 이유 중에 하나였지만 정약용의 가문이 남인이었던 것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영,정조시대 남인의 최고 지도자인 채제공(蔡濟恭)은 정실부인에게서 아들이 없어서 양자로 채홍원(蔡弘遠)을 두었는데 서자로는 채홍근(蔡弘謹)이 있었습니다. 채홍근은 정약용의 아버지인 정재원(丁載遠)의 서녀와 결혼을 했으니 정약용의 집안과 체재공은 사돈지간이 되는것이죠. 따라서 정약용과 같은 출중한 인재가 대과에 네 번씩이나 낙방한 데에는 당시 정조의 견제세력이었던 노론과 소론의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했었던 걸로 보입니다.
이점은 정조 12년 채제공이 우의정의 오른 뒤에야 비로소 정약용이 대과에 합격한 걸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이산]에서 처럼 정약용이 장원을 하지는 않고요. 갑과 2등으로 합격을 하는데 그가 대과에 급제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던 정조는 그가 출사하자 바로 규장각의 초계문신으로 발탁합니다. 이후 정약용은 규장각 사검서들과 함께 정조의 브레인으로 불리며 한 시대를 풍미하게 됩니다. <어떤오후>
출처 : 영롱(玲瓏)한 보석(寶石)
글쓴이 : 매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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