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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화궁(順和宮) 경빈 김씨는 헌종의 후궁으로 주부 김재청의 딸로 때어났다. 헌종의 계비 남양 홍씨(명헌앙후)가 혼인한 지 2년이 넘도록 태기가 없자 대비 순원왕후 김씨는 자신의 친정 안동김씨 일문에서 후궁을 들여 후사를 보게 하였다. 이때 김씨는 후궁으로 간택되어 경빈에 봉해졌다. 그런데 순화궁 김씨의 친정은 벼슬은 높지 않았으나 친정이 광산 김씨 일족으로서 애초에 왕비간택 때 3간에서 낙선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경빈 김씨에게도 소생은 없었다. 헌종 13년 (1847) 10월에 입궁하여 2년 후 헌종15년(1849) 6월 헌종이 승하할 때까지 짧은 기간이었지만 김씨는 헌종의 지극한 사랑을 받아 헌종은 김씨를 위하여 창덕궁에 500간이 넘는 낙선재(樂善齋)를 지어주었다. 낙선재는 후궁의 집이라서 단청을 칠하지 않은 소목을 써서 지었으며,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에는 그 후원에 각각 정자가 있고, 계단식 정원의 아름다움은 한국궁원의 전통적 정원양식이라고 일컬어진다. 헌종은 대조전에는 들지 않고 아예 낙선재에서만 살다가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또 순화궁이 지녔던 〈순화궁접초〉는 조선시대 비빈들의 복식규정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인데 그 내용을 보아도 순화궁은 사실상 비빈과 차등이 없는 호화롭고 고귀한 옷차림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헌종이 승하하자 김씨는 궁에서 나와 현재의 안국동 근처에서 살다가 광무11년 (1907) 6월에 80세의 생을 마쳤다. 고종은 김씨가 서거하자 헌종의 순화궁에 대한 총애를 생각하여 순화궁의 장례에 극진한 예우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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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낙선재(樂善齋), 헌종의 예술과 사랑
매화꽃은 지고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4월도 반이 지났으니 어디, 철모르고 핀 매화가 있으면 몰라도 매화꽃이 남아있을리 없다. 대신 낙선재(樂善齋) 가는 좌측 돌담 위에는 능수벚나무 꽃이 한창이다. 하늘에서 꽃비가 내린다.
공중을 쳐다볼 때 어지럽더니 사진이 삐뚤게 찍혔다(아래 사진). 내가 또 욕심을 부렸다. 할 수 없이 이번에도 능수벗나무 꽃 사진도 빌릴 수밖에… 그렇다. 내가 이렇게 서둘렀던 것은 얼른 낙선재(樂善齋)로 가야했기 때문이다.
어느 책을 보니 낙선재 일곽을 두고 ‘헌종의 예술과 사랑이 빚어낸 곳’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았다. 필자도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구나라고 동감한 적이 있다. 낙선재는 우리에게 낮 익은 이름이다. 얼마 전(1989년)까지만 하여도 영친왕의 비(妃) 이방자 여사가 생활하던 곳이기 때문이다.
순조가 세상을 떠나자(1834) 헌종은 여덟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다. 재위 3년에 효헌왕후(孝憲王后)를 왕비로 맞았으나, 재위 9년에 왕후는 후사 없이 열여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만다. 이듬해 헌종은 계비를 맞아들이기 위한 삼간택에 자신도 전례를 깨고 참여하는데, 헌종이 마음에 둔 사람(후에 경빈 김씨) 대신 명헌왕후(明憲王后) 홍씨가 간택된다.
어쩔 수 없었던 것은 간택의 결정권이 왕실의 어른인 대왕대비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헌종은 3년을 고심한 끝에 왕비가 후사를 생산할 가능성이 없다는 핑계로 대왕대비의 허락을 받아 삼간택에서 낙선한 두 사람 중 한 사람인 처음부터 마음에 두었던 경빈 김씨를 후궁으로 맞아들인다. 낙선재와 그의 일곽인 석복헌과 수강재는 이때 사랑하는 여인을 위하여 지어진다.
말하자면 경빈 김씨가 곧 왕실의 대통을 이을 왕세자를 낳기 위한 둥지가 된 샘이다. 헌종의 처소인 낙선재는 경빈 김씨를 맞아들인 헌종 13년(1847)에 지어졌고, 경빈 김씨와 대왕대비의 처소인 석복헌과 수강재는 그 이듬해에 지어졌다. 헌종은 이곳 낙선재에서 경빈 김씨를 옆에 두고 편안한 마음으로 책을 읽고 서화도 감상하면서 즐겁게 머물렀을 것이다.
이쯤에 명헌왕후(明憲王后) 홍씨는 어떻게 지냈을까? 몹시 궁금하다. 낙선재(樂善齋)란 ‘착한 일을 즐겨 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헌종은 또 이곳에서 서화를 사랑하고 고금 명가의 유필을 벗 삼아 지내기를 좋아했다. 그가 얼마나 서화를 좋아했는지 당시 헌종에게 여러 차례 낙선재에 불려 들어간
소치(小癡) 허련(許鍊)이 기록한 《소치실록(小癡實錄)》에도 잘 나타나 있다. …낙선재에 들어가니 바로 상감이 평상시 거처하는 곳으로, 좌우의 현판 글씨는 완당(阮堂)의 것이 많더군요. 향천(香泉), 연경루(硏經樓), 유재(留齋), 자이당(自怡堂), 고조당(古藻堂)이 그것이었소… 완당(阮堂)의 글씨와 현판으로 가득한 낙선재의 모습이 생생히 그려지는 듯하다.
참으로 대단한 식견과 풍류를 벗 삼으며 경빈 김씨와 낙선재에 기거하는 헌종의 모습 또한 눈에 선하다. 그러나 헌종은 경빈을 맞은 후 2년도 채 못 살고 재위 15년(1849) 6월 6일 후사 없이 중희당에서 홀연히 세상을 뜨고 만다. 헌종의 나의 스물셋이었다.
헌종과 경빈이 거닐며 꽃구경하던 낙선재의 화계와 평원루에 올라 만월담의 꽃담 이야기를 나누던 예기는 나는 더 이을 수 없다.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승하한(1910) 쓸쓸한 추억이 있는 곳. 이곳에서 숙종이 수강재 뒤쪽 후원에 있는 취운정에 올라 한 시절을 음미하며 읊던 노래로 오늘의 글을 접는다.
"내려다보니 단장한 숫기와가 연이어 있고 멀리 바라보니 눈앞이 탁 트이는 도다. 봄가을 좋은 시절이 돌아오니 어찌 날마다 감상하지 아니 하리오."
낙선재는 창덕궁으로 들어가게 되어있어 창덕궁에 속한 건물로 알고 있지만. 궁궐지를 보면 창경궁에 속한다. 임금이라도 중궁전이 보이는 한 울타리에서는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질 수 없었던 모양이다.
留齋(유재), '남김을 두는 집'이라는 뜻이다.
留不盡之巧以還造化
留不盡之祿以還朝廷
留不盡之財以還百姓
留不盡之福以還子孫
기교를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조화(자연)로 돌아가게 하고
녹봉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조정으로 돌아가게 하고
재물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백성에게 돌아가게 하고
내 복을 다하지 않고 남김을 두어 자손에게 돌아가게 한다.
완당이 제주 유배시절 제자 남병길에게 써준 留齋 현판(세로 32.7㎝, 가로 103.4㎝)은
완당자신의 시서화와 자신의 운명과 의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남김을 두어 조화로 돌아가도 좋고 아니 돌아가도 좋다.
그저 남김을 두는 것이 좋고 흡족할 뿐, 이후의 덧붙는 가치는 소중히 여길 바가 아닌 것이다..
참 좋은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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