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임금은 왜 청화백자를 금지했을까
[[오마이뉴스 고진숙 기자]
서울로 서울로
폐족이 되는 비극의 끝에서 죽음을 목전에 둔 정약용은 아들에게 '절대로 서울을 벗어나지 말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서울은 권력의 심장부이고, 그곳을 벗어나는 것은 정치인에게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몰락한 남인들은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처음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신도시를 건설하여 천도를 하였을 때 서울의 인구는 불과 만명. 그러나 조선왕조의 성장과 함께 서울은 비대화하기 시작하여 임진왜란을 거친 뒤 농촌유랑민까지 몰려들었습니다. 서울도심의 집값은 뛰었고, 부심은 계속 확장되어갔습니다.
지방의 유력자들은 서울에 반드시 집 한 칸이라도 있어야 했는데, 정보의 수집, 접대 등 일상적인 정치활동이 이곳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다 혹시 조정에서 밀려나면 서울에 있는 것이 임금에게 누를 끼치는 일이라 여겨 서울에서 가까운 반나절 거리, 그러니까 20킬로미터 안팎에 있는 경기도 집으로 옮겨 다시 복귀할 날을 꿈꿨습니다.
18세기는 이렇게 권력을 좇아 혹은 일자리를 따라 서울로 모여든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서울문화가 펼쳐지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서울문화는 '목가적 전원생활을 동경하고, 안빈낙도를 꿈꾸며 청렴한 생활이야말로 진정한 군자의 길'로 여기던 성리학적 이상에 대한 정면 도전이기도 했습니다. 송나라 유학인 성리학은 가난한 시대의 공생을 모색하기 위해 인간의 내면적 욕구를 억제하라고 했습니다만, 도시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에겐 그것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주문 같았습니다.
부를 축적하였으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상인들에게 특별히 더 그랬고, 안정적인 직업을 기반으로 오랫동안 가난을 모르고 살아온 중인들에게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다 노론 가문 출신들이 가세했습니다. 그들의 부모나 삼촌이나 형제들은 모두 조정대신. 청나라 사신단으로 한번 정도는 베이징 여행의 기회를 잡았던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문명의 바람이 문풍지틈새사이로 바람 들듯이 서울로 서울로 소록소록 들어왔습니다.
도시문화의 발달
이 새로운 바람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은 역시 노론을 이끄는 가문인 안동김씨. 안동김씨 도 조선중기에 세력기반을 경상도에서 경기도로 이주하며 권력으로의 향한 행보를 시작한 가문입니다. 이후 전통 명문가와 혼인인맥을 통해 가문의 격을 높이고, 김상헌, 김수항이 국민스타로 발돋움한 데 힘입어 권력의 핵심부로 진입하는데 성공합니다.
안동김씨 가문의 서원으로 도시를 기반으로 한 노론의 이데올로기를 양산하여 농촌 중심의 노론(충청도 중심의 노론)에 대항하는데 일조한 석실서원은 따지고보면 이렇게 새롭게 형성된 도시문화가 가져오는 충격을 흡수해내는 지배층의 위기관리능력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소위 '호락논쟁'으로 알려진 이 논쟁에서 석실서원의 김원행을 중심으로 한 도시문화의 대표자들은 서양과학기술문명을 '없는 것'으로, '야만'으로 치부하는 농촌형 성리학에 대항하여 '있는 것', 그리고 '배울 가치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비록 이런 그들의 개방성이 과학혁명의 길과 같지 않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만, 18세기 영정조시대 이후의 도시문화는 이런 바탕위에서 전개됩니다.
물론 임진왜란 직전에도 똑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침류대학사로 일컬어지는 서울문화의 대표자들은 인간적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는 당나라문학을 즐겼고, 신분을 초월하여 사귀었습니다. 싹트기 시작한 이 도시문화는 전쟁과 정치적 격변을 거치면서 쏙 들어갔다가 다시 200년 가까운 시간 동안의 잠복기를 거친 후 고개를 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전과는 다르게 한 시대를 풍미했기 때문에 도자기로 자신의 시대를 드러냅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도시문화를 주도한 북학파를 중심으로 중국풍이 급속히 확산되었는데, 문학적으로는 < 삼국지연의 > 를 비롯한 중국 통속소설들이 들어와 이것을 팔고 사는 서점이 증가했으며, 길거리에서 소설을 읽어주고 돈을 버는 직업도 생겼습니다. 문체에서도 사대부풍의 늘어지는 미사여구가 가득 들어가기 보다는 저잣거리 사람들의 말투를 빼닮은 빠르고 간결한 언어로 구사된 박지원의 글들이 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그것에 자극을 받아 서민문화도 급속히 발전하였는데요, 바로 인간의 내면을 성리학적 품격으로 재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묘사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양반사대부들에게 위협이었습니다. 안빈낙도를 설파함으로써 가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고, 욕망을 억제함으로써 수공업과 상업을 천대시하는 사농공상의 신분질서를 유지해온 그들로서는 이것을 무너뜨릴 이 불온한 사상을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여긴 것입니다.
중국의 서적들은 이적표현물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소지한 죄로 박지원의 친구 이희천은 저잣거리에 목이 걸렸고, 박지원의 책은 금서가 되었으며, 박제가는 '당나라병에 걸린 괴물'이라는 의미로 '당괴'로 지탄받고 정치적으로 낙마하는 문체반정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집권세력은 북학파는 문체반정으로 숙청하고, 남인들은 천주교로 숙청하면서 불어닥치는 변화에 꿈틀거리는 이 격동의 18세기가 끝나는 그날, 정조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인구의 증가와 부의 집중, 그리고 세도가의 출현
18세기는 베이비붐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17세기는 한·중·일 3국 모두 왕조의 교체와 전쟁 등으로 국가관리시스템에 대한 위기에 직면하였던 때였습니다. 내전 혹은 국가간 전쟁으로 인해 급격하게 줄었던 인구는 18세기, 동아시아에 찾아온 평화와 함께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이것은 생산과 소비 모두를 자극, 경제에 활력을 넣었습니다.
경제활동 인구의 증가로 인해 18세기 경제는 활력을 찾았습니다만, 그것은 또한 위기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 다시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넘어간 것은 인구증가로 인한 경제위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절대적 위기를 돌파하는 방법은 생산방식의 변화, 즉 경제적 관계의 재구성외에는 없었던 것이지요. 그것이 구석기 채집 경제를 신석기 농경의 시대로, 다시 신석기 분산농경을 청동기 협업의 시대로 이행시켜낸 힘이었습니다).
18세기 초의 폭발적인 인구증가는 19세기를 목전에 둔 시기, 바로 정조시대에 딱 멈추고 정조의 죽음과 함께 시작한 19세기에 조선의 인구는 급격하게 뒷걸음치기 시작합니다.
그 원인에 대해서 뉴라이트 계열의 연구서는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았습니다.
그 연구서는 18세기 조선을 비교사적으로 보아도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만큼 높은 수준의 재분배가 이루어진 시대라고 평합니다. 17세기 체제의 위기에 직면한 조선 집권세력은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유교적 도덕경제를 펼칠 수밖에 없었는데 그 법률적 표현이 '대동법'이라는 것이지요.
이에 힘입어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중엽까지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분배경제의 힘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바로 이때부터 조선경제는 침체에 빠지는데 그 이유를 이 연구서는 시장경제의 발달을 저해했던 도덕경제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재화의 효율적 재분배를 가져오는 것은 시장경제라는 것은 굳이 이 연구서의 주장이 아니라도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연구서는 시장경제를 교란하는 물가의 비상식적인 상승이 있을 경우 이것을 상인들의 농단으로 치부하여 정부와 관리들이 간섭함으로써 소농들이 부를 축적하고 상업자본이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될 수 있는 길을 가로막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입니다.
'(이 시대가 주는 교훈은) 숭고한 이념의 정책이 경제의 번영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19세기 이전의 경제속에서 시장경제 속에서 성장의 전망을 찾는 경제주체들이 경제의 번영을 가져온다는 점이다.'
인구가 정체될만큼의 위기를 초래한 것이 18세기 도덕경제 때문이라는 이 분석이 왜 씁쓸하게 느껴질까요? 그것은 아마 같은 문제를 바라보는 다른 두 사람의 견해 때문일 것입니다. 한사람은 외국의 동양사학자이고, 다른 한사람은 이시대를 살았던 실학자 성호이익입니다.
동양사학자는 아시아, 특히 중국과 한국의 18세기에서 19세기까지를 분석하면서 인구증가가 오히려 발전을 저해했던 요인이라고 분석합니다. 인구 증가에 따른 유휴노동력의 증가는 언제든 대체가능한 인력풀을 보여줌으로써 노동력간의 경쟁을 유발, 소작농들이 자기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라도 노동생산성을 극대화시키고 농장주들의 이익을 높여주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지요.
거기에다 중앙집권제라고 해도 중앙과 지방사이에는 강제력이 차츰 약해질 수밖에 없는 통치체제가 가세합니다. 지방관리는 구조적으로 농민들에게 세금을 자의적으로 징수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 것이지요. 관리의 월급은 작았고, 아전들의 월급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뇌물이 간접세라는 형태로 용인되기도 했고, 그마저도 성에 안찼는지 아예 합법적인 고리대금업인 환곡을 통해 부를 축적합니다.
성호이익은 관리의 월급을 늘이고, 아전들에게 녹봉을 지급함으로써 이 부조리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뇌물의 경계선이 없는 이런 체제하에서는 관리와 아전의 횡포는 도무지 막을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중국과 조선은 이런 체제하에서 농장주들에겐 관대하고 농민들에겐 가혹한 세금제도가 농촌사회를 피폐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두 사람의 견해입니다.
사실, 뉴라이트계열 사학자의 말에도 진실이 담겨있고, 그것은 매우 중대하기도 합니다. 상업경제로의 이행을 막은 것은 어찌되었든 농업경제에 기반을 둔 조선이라는 국가체제였으니까요. 그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상업자본의 발전은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풍부한 노동력은 농업이윤을 더욱 높여주었으니 서울의 거상들은 돈이 모이는 족족 지방의 문전옥답을 사들였습니다. 땅은 부의 축재수단이었으니 땅에 돈을 묻은 사람들은 상업경제,화폐경제의 발전을 반길리 없었습니다. 그들은 조선이라는 전근대적 국가형태와 밀착하여 대대손손 번영을 기원합니다.
이들이 19세기를 이끌어간 세도가들로 변질합니다. 시대의 흐름을 막아선 그들이 분배에 관심을 쏟았던 도덕경제의 주체들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반상기와 상차림문화
백자에 음식을 담으면 멋스럽게 장식할 수 있습니다. 백자가 만들어진 후 세계가 열광한 것은 백자에 음식을 담을 때 그 가치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세계적인 도자기는 백자입니다.
청자는 식탁문화를 이끌기엔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청자접시위에 담긴 음식보다 백자접시위에 담긴 음식이 훨씬 맛깔스럽고 멋스럽게 보입니다. 흰색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초록색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의 차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고려시대 귀족은 청자로 상차림 문화를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우리나라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발전했습니다. 새로운 부자들이 나타났고 그들은 한양을 중심으로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도시문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맞는 상차림 문화를 원했습니다.
생활이 풍족해지자 잔치상이 풍성해졌습니다. 잔치상에 괴임음식을 넣기 위해서 여러 가지 접시가 만들어졌습니다. 둥근 접시, 네모난 접시, 굽이 높은 접시 등이 연회를 화려하게 수놓은 음식들과 함께 주인의 능력을 뽐내는 데 쓰여졌습니다.
'반상기'라고 불리는 식탁용 백자가 만들어진 것도 이때입니다. 밥그릇 국그릇은 물론이고 종자, 보시기 등 용도에 따라 크기와 모양이 다른 그릇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상차림에 따라 7첩반상용 묶음그릇과 같이 형식을 갖춘 그릇을 반상기라고 합니다.
반상기라는 한식상 차림법이 만들어진 것은 조선 초기입니다. 주자학자들인 조선시대 양반은 격식을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식탁문화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도자기가 처음부터 쓰이지는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양반가의 밥상은 놋그릇으로 차려졌습니다.
백자를 만드는 기술도 발전하고 그것을 사들일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춘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백자 반상기를 쓰는 사람들이 등장했습니다. 놋그릇과 백자로 차려진 밥상을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백자 반상기는 말 그대로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선비들의 소박한 밥상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반상기를 일반 백성들도 쓸 수 있게 된 것은 값싼 도자기가 나온 뒤인 일제강점기시대부터입니다. 서양요리나 중국요리는 순서대로 음식이 나오는 코스요리입니다만 우리나라는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식탁 가득 음식을 차려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다양한 모양과 크기를 가진 그릇들이 필요합니다.
한상 가득 차려먹는 우리 밥상문화는 우리 민족에게는 행운이기도 합니다. 중국 요리는 돼지기름이나 쇠기름을 많이 쓰기 때문에 금방 만들어서 식기 전에 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만들어지자마자 식탁에 올려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순서대로 음식을 먹는 방법을 써야 합니다.
우리나라 식탁에 그런 음식이 올라오면 식어버려서 먹을 수가 없습니다. 동물성 기름은 식으면 굳어지므로 보기도 좋지 않고 맛도 없습니다. 오래도록 상위에 두고도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식물성기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튀김요리가 발달하지 않은 대신에 굽거나 찌거나 무쳐먹는 음식이 발달했고 기름도 참기름이 쓰였습니다. 차를 마시지 않게 된 우리나라로서는 참으로 다행인 일이었습니다.
상위에 다 펼쳐두고 이것저것 집어먹기 때문에 영양소도 골고루 섭취할 수 있습니다. 우리 반상기를 갖춘 상차림은 복잡하고 거추장스러워 보이지만 이런 장점도 있었습니다.
외면받기 시작한 우리 도자기
정조도 세종처럼 점점 사치스러워지는 청화백자에 대해 곱지 않게 여겼습니다. 왕실의 도자기로만 만들어지던 청화백자를 몰래 몰래 만들어가지는 사람들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보다 못한 임금은 청화백자뿐 만아니라 갑발을 씌운 호화로운 도자기를 가지는 것도 금지시켰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지배자인 세도가와 그에 빌붙은 부자들은 사치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들은 중국 골동품 도자기에 돈을 마구마구 써댔습니다. 송나라시대 도자기는 부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수집품이 되었습니다.
우리 도자기는 백성의 그릇이자 나라의 상징이었습니다만 조선후기 사회를 이끌던 사람들에게 버림받기 시작하였습니다.
분원리시대의 종말
분원에서 일하는 도공들은 왕실 도자기를 만들고 남는 시간에 도자기를 구워 팔 수 있었습니다. 봉급 대신에 밥이나 먹고 살 수 있도록 해 준 것입니다. 그 일은 처음엔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했습니다. 그 도자기를 살 만한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동법이 실시되고 영·정조임금 시대를 거치면서 늘어난 부자들은 자신들만의 도자기를 갖고 싶어 했습니다. 분원의 도공은 나라에서 가장 도자기를 잘 만드는 사람이다 보니 주문량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질 좋은 도자기를 찾는 손님들은 더욱 늘어나고 있었지만 분원의 도공들은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조정에 바칠 도자기를 구울 흙과 나무를 함부로 쓰면 큰일이 나기 때문입니다. 이때 도공들을 찾아 돈 냄새를 맡은 상인들이 분원리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도공들에게 돈을 빌려주었습니다. 도공들은 그 돈으로 도자기를 구워 상인에게 팔았습니다.
상인은 그 도자기를 여기저기 필요한 사람에게 팔았습니다. 부잣집은 제기에서부터 부엌살림까지 고급 백자로 바꾸었고 선비들은 문방구를 사들였습니다. 청화백자로 만든 연적 하나 가지지 못하면 얼굴을 들지도 못할 형편이었습니다.
돈벌이가 되는 이 일에 도공들은 더 열심이었습니다. 오히려 품질이 관청 것보다 좋아졌고 결국엔 왕실의 도자기가 여염집 도자기보다 못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보다 못한 고종임금은 1884년에 관요를 포기했습니다.
분원은 12명의 물주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개인공장이 되었습니다. 도공들은 물주가 돈을 대주지 않으면 아예 도자기를 구울 수 없었기 때문에 고용인과 다름없는 신세로 변해버렸습니다. 분원리는 전국에서 몰려든 도자기 상인들로 넘쳐났습니다. 도공들은 쉴 새 없이 그리고 재미도 없이 그저 도자기를 굽고 또 구웠습니다. 도자기는 이제 누구나 가질 수 있어서 평등해졌습니다만 그 평등의 대가는 너무도 가혹했습니다. 도자기에는 어떤 정신적 가치도 남아있지 않았으며 어떤 품격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조선 백자의 최후
상인들이 분원을 들락거릴 무렵부터 어두운 소식은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왕실에서 분원의 도자기가 여염집 도자기와 같아지건 말건 무신경한 것은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중국 도자기입니다.
청나라에 대한 분노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되었고 수도인 북경은 최신 문명의 집합장소로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북경을 다녀오는 것은 대단한 자랑거리였고 그곳에서 중국도자기를 사들이는 것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사옹원이 대놓고 청나라 도자기를 사들여 궁중의 식탁위에 올렸습니다.
기가 막히게도 헌종 임금은 한술 더 떴습니다.아예 중국 도자기를 정식으로 왕실행사에 쓰도록 했습니다. 분원의 도자기가 질이 떨어졌으니 나름대로 생각해낸 방법입니다. 왜 분원을 세계 최고의 도자기로 만들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요? 그렇게 묻는 것은 좋은 질문이 아닙니다. 상업도 공업도 발달할 기회를 이미 다 놓쳐버린 마당에 도자기에게만 특별 대우를 할리 없었습니다.
1876년에 일본과 정식 조약을 맺으면서 도자기로서는 더 이상 일어설 수 없는 치명타를 맞았습니다. 병자년에 열려서 병자수호조약이라고도 하고 강화도에서 있었던 일이라 강화도 조약이라고도 불리지만 진짜 이름은 '조일수호조약'입니다. 이 조약은 일본인이 우리나라에서 자기들 물건을 팔아 이윤을 챙기고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원료나 쌀을 제 맘대로 빼앗아가겠다는 내용을 담아서 불평등조약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외국 여러 나라와 무역을 시작했습니다. 외국과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조선에서 이득을 보아야 했습니다. 우리나라를 윽박질러 이 조약을 성사시킴으로써 일본은 강대국이 될 길을 열었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우리나라는 막 싹이 자라던 공업과 상업이 그 자리에서 무너지며 스스로 나라의 힘을 키울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이때를 시작으로 우리나라에는 외국 문물들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그 중에서도 일본도자기는 품질도 좋고 값도 싸서 우리나라 도자기의 경쟁상대가 안 되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우리도공을 납치해가서야 비로소 시작된 일본도자기산업이 우리나라 도자기의 뿌리를 뽑아버린 것입니다.
일설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소문으로만 들어오던 도자기를 구하기 위해 고종임금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청자를 구할 수 있습니까?"
"청자요? 그게 뭐지요?"
고종 임금의 대답이 사실이었든 아니든 그것은 우리나라 도자기의 현실이었습니다. 도자기를 포기한 왕실의 운명이 어땠는지는 굳이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마치며
일제 강점기는 일본이 도자기를 우리나라에 팔아 배를 채우던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도자기는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았고 도자기를 만들지 못한 우리민족은 35년간 나라 잃은 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오히려 우리 도자기인 청자는 차문화를 즐겼던 일본인들에 의해 재평가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일본의 도굴범들이 조상들의 무덤을 뒤져 우리 도자기를 훔쳐가도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한술 더 떠 해방 후에는 엿장수의 손수레 가득 도자기가 쌓였다고 합니다. 집에서 굴러다니는 도자기를 들고 나와 엿이나 바꿔먹고 말았던 것이지요. 수집가들은 우리가 외면한 도자기를 부지런히 외국으로 가지고 나갔습니다. 우리 도자기의 진가를 외국인들은 알았습니다. 지금은 전세계인들이 우리 도자기가 지닌 정신적 가치와 예술적 품격을 인정하며 호사가들의 중요한 수집품이 되었습니다.
과연, 우리는 우리 도자기의 가치와 품격에 대해 돈의 액수 이상의 것을 보고 있나요?
[☞ 오마이 블로그]
서울로 서울로
폐족이 되는 비극의 끝에서 죽음을 목전에 둔 정약용은 아들에게 '절대로 서울을 벗어나지 말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서울은 권력의 심장부이고, 그곳을 벗어나는 것은 정치인에게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몰락한 남인들은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처음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신도시를 건설하여 천도를 하였을 때 서울의 인구는 불과 만명. 그러나 조선왕조의 성장과 함께 서울은 비대화하기 시작하여 임진왜란을 거친 뒤 농촌유랑민까지 몰려들었습니다. 서울도심의 집값은 뛰었고, 부심은 계속 확장되어갔습니다.
지방의 유력자들은 서울에 반드시 집 한 칸이라도 있어야 했는데, 정보의 수집, 접대 등 일상적인 정치활동이 이곳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다 혹시 조정에서 밀려나면 서울에 있는 것이 임금에게 누를 끼치는 일이라 여겨 서울에서 가까운 반나절 거리, 그러니까 20킬로미터 안팎에 있는 경기도 집으로 옮겨 다시 복귀할 날을 꿈꿨습니다.
18세기는 이렇게 권력을 좇아 혹은 일자리를 따라 서울로 모여든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서울문화가 펼쳐지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서울문화는 '목가적 전원생활을 동경하고, 안빈낙도를 꿈꾸며 청렴한 생활이야말로 진정한 군자의 길'로 여기던 성리학적 이상에 대한 정면 도전이기도 했습니다. 송나라 유학인 성리학은 가난한 시대의 공생을 모색하기 위해 인간의 내면적 욕구를 억제하라고 했습니다만, 도시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에겐 그것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주문 같았습니다.
부를 축적하였으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상인들에게 특별히 더 그랬고, 안정적인 직업을 기반으로 오랫동안 가난을 모르고 살아온 중인들에게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다 노론 가문 출신들이 가세했습니다. 그들의 부모나 삼촌이나 형제들은 모두 조정대신. 청나라 사신단으로 한번 정도는 베이징 여행의 기회를 잡았던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문명의 바람이 문풍지틈새사이로 바람 들듯이 서울로 서울로 소록소록 들어왔습니다.
|
이 새로운 바람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은 역시 노론을 이끄는 가문인 안동김씨. 안동김씨 도 조선중기에 세력기반을 경상도에서 경기도로 이주하며 권력으로의 향한 행보를 시작한 가문입니다. 이후 전통 명문가와 혼인인맥을 통해 가문의 격을 높이고, 김상헌, 김수항이 국민스타로 발돋움한 데 힘입어 권력의 핵심부로 진입하는데 성공합니다.
안동김씨 가문의 서원으로 도시를 기반으로 한 노론의 이데올로기를 양산하여 농촌 중심의 노론(충청도 중심의 노론)에 대항하는데 일조한 석실서원은 따지고보면 이렇게 새롭게 형성된 도시문화가 가져오는 충격을 흡수해내는 지배층의 위기관리능력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소위 '호락논쟁'으로 알려진 이 논쟁에서 석실서원의 김원행을 중심으로 한 도시문화의 대표자들은 서양과학기술문명을 '없는 것'으로, '야만'으로 치부하는 농촌형 성리학에 대항하여 '있는 것', 그리고 '배울 가치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비록 이런 그들의 개방성이 과학혁명의 길과 같지 않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만, 18세기 영정조시대 이후의 도시문화는 이런 바탕위에서 전개됩니다.
물론 임진왜란 직전에도 똑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침류대학사로 일컬어지는 서울문화의 대표자들은 인간적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는 당나라문학을 즐겼고, 신분을 초월하여 사귀었습니다. 싹트기 시작한 이 도시문화는 전쟁과 정치적 격변을 거치면서 쏙 들어갔다가 다시 200년 가까운 시간 동안의 잠복기를 거친 후 고개를 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전과는 다르게 한 시대를 풍미했기 때문에 도자기로 자신의 시대를 드러냅니다.
|
그것에 자극을 받아 서민문화도 급속히 발전하였는데요, 바로 인간의 내면을 성리학적 품격으로 재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묘사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양반사대부들에게 위협이었습니다. 안빈낙도를 설파함으로써 가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고, 욕망을 억제함으로써 수공업과 상업을 천대시하는 사농공상의 신분질서를 유지해온 그들로서는 이것을 무너뜨릴 이 불온한 사상을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여긴 것입니다.
중국의 서적들은 이적표현물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소지한 죄로 박지원의 친구 이희천은 저잣거리에 목이 걸렸고, 박지원의 책은 금서가 되었으며, 박제가는 '당나라병에 걸린 괴물'이라는 의미로 '당괴'로 지탄받고 정치적으로 낙마하는 문체반정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집권세력은 북학파는 문체반정으로 숙청하고, 남인들은 천주교로 숙청하면서 불어닥치는 변화에 꿈틀거리는 이 격동의 18세기가 끝나는 그날, 정조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인구의 증가와 부의 집중, 그리고 세도가의 출현
|
17세기는 한·중·일 3국 모두 왕조의 교체와 전쟁 등으로 국가관리시스템에 대한 위기에 직면하였던 때였습니다. 내전 혹은 국가간 전쟁으로 인해 급격하게 줄었던 인구는 18세기, 동아시아에 찾아온 평화와 함께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이것은 생산과 소비 모두를 자극, 경제에 활력을 넣었습니다.
경제활동 인구의 증가로 인해 18세기 경제는 활력을 찾았습니다만, 그것은 또한 위기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 다시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넘어간 것은 인구증가로 인한 경제위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절대적 위기를 돌파하는 방법은 생산방식의 변화, 즉 경제적 관계의 재구성외에는 없었던 것이지요. 그것이 구석기 채집 경제를 신석기 농경의 시대로, 다시 신석기 분산농경을 청동기 협업의 시대로 이행시켜낸 힘이었습니다).
18세기 초의 폭발적인 인구증가는 19세기를 목전에 둔 시기, 바로 정조시대에 딱 멈추고 정조의 죽음과 함께 시작한 19세기에 조선의 인구는 급격하게 뒷걸음치기 시작합니다.
그 원인에 대해서 뉴라이트 계열의 연구서는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았습니다.
그 연구서는 18세기 조선을 비교사적으로 보아도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만큼 높은 수준의 재분배가 이루어진 시대라고 평합니다. 17세기 체제의 위기에 직면한 조선 집권세력은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유교적 도덕경제를 펼칠 수밖에 없었는데 그 법률적 표현이 '대동법'이라는 것이지요.
이에 힘입어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중엽까지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분배경제의 힘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바로 이때부터 조선경제는 침체에 빠지는데 그 이유를 이 연구서는 시장경제의 발달을 저해했던 도덕경제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재화의 효율적 재분배를 가져오는 것은 시장경제라는 것은 굳이 이 연구서의 주장이 아니라도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연구서는 시장경제를 교란하는 물가의 비상식적인 상승이 있을 경우 이것을 상인들의 농단으로 치부하여 정부와 관리들이 간섭함으로써 소농들이 부를 축적하고 상업자본이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될 수 있는 길을 가로막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입니다.
'(이 시대가 주는 교훈은) 숭고한 이념의 정책이 경제의 번영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19세기 이전의 경제속에서 시장경제 속에서 성장의 전망을 찾는 경제주체들이 경제의 번영을 가져온다는 점이다.'
인구가 정체될만큼의 위기를 초래한 것이 18세기 도덕경제 때문이라는 이 분석이 왜 씁쓸하게 느껴질까요? 그것은 아마 같은 문제를 바라보는 다른 두 사람의 견해 때문일 것입니다. 한사람은 외국의 동양사학자이고, 다른 한사람은 이시대를 살았던 실학자 성호이익입니다.
동양사학자는 아시아, 특히 중국과 한국의 18세기에서 19세기까지를 분석하면서 인구증가가 오히려 발전을 저해했던 요인이라고 분석합니다. 인구 증가에 따른 유휴노동력의 증가는 언제든 대체가능한 인력풀을 보여줌으로써 노동력간의 경쟁을 유발, 소작농들이 자기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라도 노동생산성을 극대화시키고 농장주들의 이익을 높여주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지요.
거기에다 중앙집권제라고 해도 중앙과 지방사이에는 강제력이 차츰 약해질 수밖에 없는 통치체제가 가세합니다. 지방관리는 구조적으로 농민들에게 세금을 자의적으로 징수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 것이지요. 관리의 월급은 작았고, 아전들의 월급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뇌물이 간접세라는 형태로 용인되기도 했고, 그마저도 성에 안찼는지 아예 합법적인 고리대금업인 환곡을 통해 부를 축적합니다.
성호이익은 관리의 월급을 늘이고, 아전들에게 녹봉을 지급함으로써 이 부조리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뇌물의 경계선이 없는 이런 체제하에서는 관리와 아전의 횡포는 도무지 막을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중국과 조선은 이런 체제하에서 농장주들에겐 관대하고 농민들에겐 가혹한 세금제도가 농촌사회를 피폐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두 사람의 견해입니다.
사실, 뉴라이트계열 사학자의 말에도 진실이 담겨있고, 그것은 매우 중대하기도 합니다. 상업경제로의 이행을 막은 것은 어찌되었든 농업경제에 기반을 둔 조선이라는 국가체제였으니까요. 그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상업자본의 발전은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풍부한 노동력은 농업이윤을 더욱 높여주었으니 서울의 거상들은 돈이 모이는 족족 지방의 문전옥답을 사들였습니다. 땅은 부의 축재수단이었으니 땅에 돈을 묻은 사람들은 상업경제,화폐경제의 발전을 반길리 없었습니다. 그들은 조선이라는 전근대적 국가형태와 밀착하여 대대손손 번영을 기원합니다.
이들이 19세기를 이끌어간 세도가들로 변질합니다. 시대의 흐름을 막아선 그들이 분배에 관심을 쏟았던 도덕경제의 주체들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
백자에 음식을 담으면 멋스럽게 장식할 수 있습니다. 백자가 만들어진 후 세계가 열광한 것은 백자에 음식을 담을 때 그 가치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세계적인 도자기는 백자입니다.
청자는 식탁문화를 이끌기엔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청자접시위에 담긴 음식보다 백자접시위에 담긴 음식이 훨씬 맛깔스럽고 멋스럽게 보입니다. 흰색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초록색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의 차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고려시대 귀족은 청자로 상차림 문화를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우리나라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발전했습니다. 새로운 부자들이 나타났고 그들은 한양을 중심으로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도시문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맞는 상차림 문화를 원했습니다.
생활이 풍족해지자 잔치상이 풍성해졌습니다. 잔치상에 괴임음식을 넣기 위해서 여러 가지 접시가 만들어졌습니다. 둥근 접시, 네모난 접시, 굽이 높은 접시 등이 연회를 화려하게 수놓은 음식들과 함께 주인의 능력을 뽐내는 데 쓰여졌습니다.
|
|
백자를 만드는 기술도 발전하고 그것을 사들일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춘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백자 반상기를 쓰는 사람들이 등장했습니다. 놋그릇과 백자로 차려진 밥상을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백자 반상기는 말 그대로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선비들의 소박한 밥상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반상기를 일반 백성들도 쓸 수 있게 된 것은 값싼 도자기가 나온 뒤인 일제강점기시대부터입니다. 서양요리나 중국요리는 순서대로 음식이 나오는 코스요리입니다만 우리나라는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식탁 가득 음식을 차려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다양한 모양과 크기를 가진 그릇들이 필요합니다.
한상 가득 차려먹는 우리 밥상문화는 우리 민족에게는 행운이기도 합니다. 중국 요리는 돼지기름이나 쇠기름을 많이 쓰기 때문에 금방 만들어서 식기 전에 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만들어지자마자 식탁에 올려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순서대로 음식을 먹는 방법을 써야 합니다.
우리나라 식탁에 그런 음식이 올라오면 식어버려서 먹을 수가 없습니다. 동물성 기름은 식으면 굳어지므로 보기도 좋지 않고 맛도 없습니다. 오래도록 상위에 두고도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식물성기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튀김요리가 발달하지 않은 대신에 굽거나 찌거나 무쳐먹는 음식이 발달했고 기름도 참기름이 쓰였습니다. 차를 마시지 않게 된 우리나라로서는 참으로 다행인 일이었습니다.
상위에 다 펼쳐두고 이것저것 집어먹기 때문에 영양소도 골고루 섭취할 수 있습니다. 우리 반상기를 갖춘 상차림은 복잡하고 거추장스러워 보이지만 이런 장점도 있었습니다.
외면받기 시작한 우리 도자기
정조도 세종처럼 점점 사치스러워지는 청화백자에 대해 곱지 않게 여겼습니다. 왕실의 도자기로만 만들어지던 청화백자를 몰래 몰래 만들어가지는 사람들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보다 못한 임금은 청화백자뿐 만아니라 갑발을 씌운 호화로운 도자기를 가지는 것도 금지시켰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지배자인 세도가와 그에 빌붙은 부자들은 사치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들은 중국 골동품 도자기에 돈을 마구마구 써댔습니다. 송나라시대 도자기는 부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수집품이 되었습니다.
우리 도자기는 백성의 그릇이자 나라의 상징이었습니다만 조선후기 사회를 이끌던 사람들에게 버림받기 시작하였습니다.
|
|
그러나 대동법이 실시되고 영·정조임금 시대를 거치면서 늘어난 부자들은 자신들만의 도자기를 갖고 싶어 했습니다. 분원의 도공은 나라에서 가장 도자기를 잘 만드는 사람이다 보니 주문량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질 좋은 도자기를 찾는 손님들은 더욱 늘어나고 있었지만 분원의 도공들은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조정에 바칠 도자기를 구울 흙과 나무를 함부로 쓰면 큰일이 나기 때문입니다. 이때 도공들을 찾아 돈 냄새를 맡은 상인들이 분원리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도공들에게 돈을 빌려주었습니다. 도공들은 그 돈으로 도자기를 구워 상인에게 팔았습니다.
상인은 그 도자기를 여기저기 필요한 사람에게 팔았습니다. 부잣집은 제기에서부터 부엌살림까지 고급 백자로 바꾸었고 선비들은 문방구를 사들였습니다. 청화백자로 만든 연적 하나 가지지 못하면 얼굴을 들지도 못할 형편이었습니다.
돈벌이가 되는 이 일에 도공들은 더 열심이었습니다. 오히려 품질이 관청 것보다 좋아졌고 결국엔 왕실의 도자기가 여염집 도자기보다 못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보다 못한 고종임금은 1884년에 관요를 포기했습니다.
분원은 12명의 물주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개인공장이 되었습니다. 도공들은 물주가 돈을 대주지 않으면 아예 도자기를 구울 수 없었기 때문에 고용인과 다름없는 신세로 변해버렸습니다. 분원리는 전국에서 몰려든 도자기 상인들로 넘쳐났습니다. 도공들은 쉴 새 없이 그리고 재미도 없이 그저 도자기를 굽고 또 구웠습니다. 도자기는 이제 누구나 가질 수 있어서 평등해졌습니다만 그 평등의 대가는 너무도 가혹했습니다. 도자기에는 어떤 정신적 가치도 남아있지 않았으며 어떤 품격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조선 백자의 최후
|
청나라에 대한 분노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되었고 수도인 북경은 최신 문명의 집합장소로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북경을 다녀오는 것은 대단한 자랑거리였고 그곳에서 중국도자기를 사들이는 것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사옹원이 대놓고 청나라 도자기를 사들여 궁중의 식탁위에 올렸습니다.
기가 막히게도 헌종 임금은 한술 더 떴습니다.아예 중국 도자기를 정식으로 왕실행사에 쓰도록 했습니다. 분원의 도자기가 질이 떨어졌으니 나름대로 생각해낸 방법입니다. 왜 분원을 세계 최고의 도자기로 만들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요? 그렇게 묻는 것은 좋은 질문이 아닙니다. 상업도 공업도 발달할 기회를 이미 다 놓쳐버린 마당에 도자기에게만 특별 대우를 할리 없었습니다.
1876년에 일본과 정식 조약을 맺으면서 도자기로서는 더 이상 일어설 수 없는 치명타를 맞았습니다. 병자년에 열려서 병자수호조약이라고도 하고 강화도에서 있었던 일이라 강화도 조약이라고도 불리지만 진짜 이름은 '조일수호조약'입니다. 이 조약은 일본인이 우리나라에서 자기들 물건을 팔아 이윤을 챙기고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원료나 쌀을 제 맘대로 빼앗아가겠다는 내용을 담아서 불평등조약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외국 여러 나라와 무역을 시작했습니다. 외국과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조선에서 이득을 보아야 했습니다. 우리나라를 윽박질러 이 조약을 성사시킴으로써 일본은 강대국이 될 길을 열었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우리나라는 막 싹이 자라던 공업과 상업이 그 자리에서 무너지며 스스로 나라의 힘을 키울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이때를 시작으로 우리나라에는 외국 문물들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그 중에서도 일본도자기는 품질도 좋고 값도 싸서 우리나라 도자기의 경쟁상대가 안 되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우리도공을 납치해가서야 비로소 시작된 일본도자기산업이 우리나라 도자기의 뿌리를 뽑아버린 것입니다.
일설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소문으로만 들어오던 도자기를 구하기 위해 고종임금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청자를 구할 수 있습니까?"
"청자요? 그게 뭐지요?"
고종 임금의 대답이 사실이었든 아니든 그것은 우리나라 도자기의 현실이었습니다. 도자기를 포기한 왕실의 운명이 어땠는지는 굳이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마치며
일제 강점기는 일본이 도자기를 우리나라에 팔아 배를 채우던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도자기는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았고 도자기를 만들지 못한 우리민족은 35년간 나라 잃은 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오히려 우리 도자기인 청자는 차문화를 즐겼던 일본인들에 의해 재평가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일본의 도굴범들이 조상들의 무덤을 뒤져 우리 도자기를 훔쳐가도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한술 더 떠 해방 후에는 엿장수의 손수레 가득 도자기가 쌓였다고 합니다. 집에서 굴러다니는 도자기를 들고 나와 엿이나 바꿔먹고 말았던 것이지요. 수집가들은 우리가 외면한 도자기를 부지런히 외국으로 가지고 나갔습니다. 우리 도자기의 진가를 외국인들은 알았습니다. 지금은 전세계인들이 우리 도자기가 지닌 정신적 가치와 예술적 품격을 인정하며 호사가들의 중요한 수집품이 되었습니다.
과연, 우리는 우리 도자기의 가치와 품격에 대해 돈의 액수 이상의 것을 보고 있나요?
[☞ 오마이 블로그]
출처 : 문화탐방단(구미문화지킴이. 옛.생활문화연구소)
글쓴이 : 청산거사 원글보기
메모 :
'종합자료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15) 실학적 역사학 창시 한백겸(上) (0) | 2010.01.24 |
---|---|
[스크랩] 서애 류성룡(柳成龍)선생의 고향 하회마을을 돌아보고 (0) | 2010.01.24 |
[스크랩] `연예|스페셜 ‘ 이서영, 숨막히는 뒤태 (0) | 2010.01.19 |
[스크랩] ★한번쯤은 즐기고 싶군요★(2010.1.20.수) (0) | 2010.01.19 |
[스크랩] 다뉴부 강변의 경관 (0) | 2010.0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