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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15) 실학적 역사학 창시 한백겸(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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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15) 실학적 역사학 창시 한백겸(上)
입력: 2007년 08월 03일 14:50:17
-역사지리 천년 길 튼 ‘현학’-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부평리에 있는 한백겸의 묘소. <사진작가 황헌만>

광해군 7년은 1615년으로, 그해 가을 7월에 호조참의를 역임하여 통정대부의 위계에 있던 일세의 학자 구암(久菴) 한백겸(韓百謙:1552~1615)이 눈을 감고 세상을 떠났다. 향년 64세로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았건만, 벼슬도 버리고 학문에만 몰두하여 후학의 양성에 힘을 기울이다가 샛강과 한강이 합해지던 서울의 서교(西郊)인 수색 근처의 물이촌(勿移村) 사제(私第)에서 뜻을 못 이루고 타계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헛될 수가 없었다. 몸져 누워있던 병중에도 그는 끝내 세상에 영원히 전해질 책 한 권을 완성했으니 숨을 거두기 며칠 전의 일이었다. 그 책이 뒷날 조선시대 역사지리학의 선구적 역할을 했던 그 유명한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라는 책이었다.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등 국가에서 간행했던 책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사관과 독창적인 견해로 조선의 역사지리를 개인의 힘으로 정리한 저서는 바로 한백겸의 ‘동국지리지’가 최초였다. 이 한 권의 책이야말로 후대의 학자들에게 역사지리에 대한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킨 학문적 업적으로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실학의 비조로 ‘반계수록’의 저자이자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의 저자인 반계 유형원은, “오직 근세의 한백겸이 변론했던 바가 천년동안 정해지지 못했던 것을 깊이 알아냈으니 그분의 학설에 의해서 확정한다”라고 말하면서 한백겸의 삼한설(三韓說)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반계가 인정한 학자라면 그분의 학문적 깊이를 알 만하지 않은가. 뒷세상의 여암 신경준, 순암 안정복 등도 한백겸 학설에서 일정분의 영향을 받았음이 확인되고 있다. 실학의 집대성자 다산 정약용도 그의 저서 ‘강역고’에서 “한백겸의 학설은 바꿀 수 없는 정론(定論)”이라고 단정하여 높은 수준의 학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한백겸의 신도비. 풍수설에 의해 거북이의 머리가 틀어져 있다.
역사지리학의 초창기 연구과정이어서 불충분한 자료 때문에, 한백겸도 많은 부분에서 오류가 지적되고 있지만, 특히 그가 확정한 한강이남의 삼한설(三韓說:마한·진한·변한이 한강 이남에 있었다는 학설)은 모든 실학자들이 대체로 긍정했던 부분이었다. 고조선이 만주나 중국 일대에까지 미쳤다는 학설도 한백겸의 주장으로 많은 실학자들이 그대로 인정한 학설이어서 한백겸의 독창적인 견해가 훌륭했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 기전유제설의 학문적 업적

‘동국지리지’는 겨우 60장에 이르는 조그마한 책자다. 불과 한 편의 논문에 지나지 않은 책이지만 그의 독창성과 비판정신이 가득한 학문적 태도 때문에 그만한 영향을 미친 저술이 되었다. 한백겸의 학문적 업적으로 ‘동국지리지’에 못지않은 ‘기전유제설(箕田遺制說)’과 ‘기전도(箕田圖)’라는 짤막한 논문과 도면 하나를 빼놓을 수 없다. ‘기전도’는 기자(箕子)의 정전(井田)제도가 평양에 유적으로 남아있음을 증명한 그림으로 ‘기전도설발’(유근)과 ‘기전도설후어’(허성)라는 짧은 해설이 붙은 그림이다. 유제설과 이 그림이 후대의 토지제도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이 연구결과에서 증명되고 있다. ‘반계수록’이나 ‘경세유표’ 등의 토지정책의 핵심은 토지소유의 균등화로 분배의 공정을 기하자는 것인데, 주자(朱子)가 부인하여 일반 성리학자들 사이에서 환영받지 못하던 정전제가 한백겸의 실증적 연구결과를 통해 실재(實在)가 밝혀져 공전제(公田制)의 확충을 주장하던 실학자들에게 학설의 증빙자료로서의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백겸은 큰 아들로 두 아우가 있었다. 한중겸(韓重謙)과 한준겸(韓浚謙)인데, 중겸은 젊어서 죽고 준겸은 뒤에 인조대왕의 장인으로 인조반정 이후에는 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당대의 고관대작이자 대문장가로 이름이 높던 분이었다. 아우 한준겸이 평안감사로 있으면서 어머니를 임지에서 모시고 있었는데, 어머니의 병환 소식을 들은 한백겸이 어머니 문병 차 평양을 찾아간다. 그러던 시절에 말로만 전하던 기자의 정전제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한백겸은 평양일대를 답사하여 정전제의 실재를 확인하고 그것을 그림으로 그렸고 ‘기전유제설’이라는 논문을 써서 공전제도를 주장하는 근거를 삼을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뒤에 다산 정약용의 비판을 받지만 정(井)자의 모양이 아니고 전(田)자의 모형이었다고 한백겸은 그림으로 그렸다. 다산은 ‘발기자정전도(跋箕子井田圖)’라는 글에서 기자의 도읍지가 평양이었다는 명확한 증거도 없고 정전제가 전(田)자의 모양일 이유도 없음을 들어 믿을 수 없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백겸의 비판정신과 실증주의적인 학문태도에는 분명히 긍정적인 입장이었다.

역사학자 이기백 교수는 “그의 주장이 반드시 옳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당시의 학문적 수준에 비추어볼 때 그의 주장은 실로 놀랍도록 참신한 새 학설이었다. 그러기에 그의 주장은 반계 유형원,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등 여러 실학자들의 전제개혁론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구암유고·동국지리지 서문)라고 평하여 한백겸의 이론이 후대에 미친 영향을 말해주었다.

# 학자는 저서로 역사를 빛낸다

구암이 세상을 뜨자 위대한 학자의 죽음에 통곡하던 친구들이 많았다. 당대의 영의정으로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대제학을 지냈고 뒤에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진 백사 이항복이 최초에 통곡한 사람이다. 백사는 구암보다 4년 뒤에 태어나 3년을 더 살다간 친구인데 구암의 죽음에 제문을 바쳤다. 우선 구암이 당대의 주역연구의 큰 학자라고 칭송했다. 모든 경서에 두루 밝았으나 유독 주역에 깊은 연구가 있어 당시의 세상에서 모두 그가 큰 주역학자임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친구로 대제학에 이조판서를 지낸 큰 학자로 우복 정경세(鄭經世)가 있는데, 그도 뒤에 구암의 묘갈명(신도비명)을 지어 구암이 당대의 주역학자로 국가에서 간행한 ‘주역전의(周易傳義)’라는 책의 교정을 맡았다고 말하면서 뛰어난 주역연구의 업적을 찬양하였다.

정경세의 묘갈명은 이제는 신도비명으로 바뀌어 한백겸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부평리 가마섬(釜島:佳麻島) 마을의 입구에 신도비로 우람하게 서있다. 신도비를 안고 산등성이로 오르면 우선 문천군수(文川郡守)를 지낸 한백겸의 조부 한여필(韓汝弼) 부부의 묘소가 나온다. 바로 그분이 강원도 원주의 부론면 노림리에 터를 잡고 은거하면서 한백겸의 고향이 되었고 유명한 기호지방의 남인 대가인 한씨들의 세거지가 되었다. 노림리에서 섬강을 건너면 여주 땅인데 여주 땅에 한여필의 묘소가 있게 되면서, 한백겸의 아버지인 판관(判官) 한효윤(韓孝胤) 부부의 묘소도 있고, 그 맨 위에 도장(到葬)으로 한백겸 부부의 묘소가 있는 한씨들의 선산이 되었다. 정경세의 비문은 한백겸의 일생과 학문적 업적을 넉넉하게 기술하여 그의 삶과 인품을 충분히 파악하게 해준다.

# 구암의 이력과 생애

청주 한씨는 대단한 명문이다. 조선초기에 고관대작이 연이어 배출되어 나라 안에서 큰 명성이 있던 성씨다. 조선왕조의 개국공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한상경(韓尙敬)이 유명한 선조다. 한상경의 손자 한계희(韓繼禧)는 좌찬성의 고관에 올랐고 그 뒤로도 계속 벼슬하는 후손들이 이어졌다. 그 뒤 한동안 큰 벼슬이 없었는데 마침내 한백겸 형제가 나오면서 다시 크게 번창한다. 한백겸은 젊은 시절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화담 서경덕의 제자이던 습정(習靜) 민순(閔純)의 문하에 들어가 돈독하게 학문연마에 젊음을 바친다. 아버지야 판관벼슬에 일찍 세상을 떴으나 계부인 한효순은 고관대작으로 정승의 지위에 올라 많은 시비가 있던 분이다. 아우 한준겸은 문장에 뛰어난 고관으로 일세에 성망이 높던 분이었으나 한백겸은 과거시험에는 응하지 않고도 학문으로 천거 받아 호조좌랑·형조좌랑을 거쳐 황해도의 안악현감으로 2년여의 목민관 생활을 하면서 백성의 아픔을 몸소 느끼게 된다. 다시 함종현령을 지내고 영월군수에 부임했다. 51세에는 청주목사를 지내고 통정대부 당상관에 오른다. 장례원 판결사의 당상관직을 수행하고 호조참의라는 벼슬에 이른다. 60세에는 파주목사로 제수 받으나 사직하고 마지막 생애를 학문연구에 몰두한다. 죽음이 다가오는 64세의 마지막 순간에 그의 명저인 ‘동국지리지’의 저작을 마치고 1남 1녀의 자녀를 두고 세상을 떠난다.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노림리 한백겸 고향 마을을 지키는 당산나무.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 서문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여러 고을의 목민관을 지냈기에 자신이 아버지 시중을 들면서 목민술을 익혔고, 또 자신이 곡산도호부사라는 목민관을 지낸 경험이 있었기에 목민관들의 지침서인 목민심서를 저술한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한백겸도 여러 고을의 목민관을 지낸 덕분으로 일반 백성들의 고통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었다.

그가 58세에 ‘공물변통소(貢物變通疏)’라는 상소를 올려 이른바 지방의 특산물을 나라에 공물로 바치는 패악스러운 제도 때문에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을 열거하였다. 바로 이러한 공물변통의 주장은 당시의 대관이던 이원익이 받아들여 강력히 주장하자 공물제도를 개선한 대동법으로 바꾸고 뒷날 김육의 정책으로 반영되어 대동법을 시행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백겸의 계부가 정승이었고, 아들 한흥일도 정승이며, 아우 한준겸도 임금의 장인이자 대문장가로 큰 이름을 날렸으나, 역사는 그들 모두를 역력히 기억해주지 않는다. 오직 높은 학자적 태도로 훌륭한 저술인 ‘동국지리지’와 ‘기전도’·‘기전유제설’이라는 논문을 남긴 한백겸만을 역사는 영원히 기억해주고 있다. 학자와 학문, 그것만이 고관대작의 지위도 능가할 수 있고, 이름도 영원하게 역사에 남길 수 있음을 알게 해준다.

〈박석무|단국대 이사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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