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국 지도자 서애(西厓) 유성룡
ㆍ퇴계 제자로 ‘화합과 조정’의 명수
서애 유성룡(柳成龍:1542~1607)은 선조 40년인 1607년 5월6일 66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그래서 지난해인 2007년은 서애가 세상을 떠난 400주년으로 대대적인 기념과 추모행사가 열렸었다. 1542년인 중종 37년 10월1일, 서애는 외가인 당시의 의성현 사촌리에서 태어났다. 본래의 고향은 당시는 풍산현, 지금은 안동시 풍산면 서쪽에 자리한 하외라는 마을이었다. 이제는 ‘하회(河回)’로 바뀌어 세상에서 유명한 곳이 바로 서애의 고향이었다. 굽이굽이 흐르는 낙동강, 그 강이 돌면서 만들어진 마을이 서애의 고향이어서 강물이 돌아가는 하회(河回)가 되었고, 마을에서 강 건너 서쪽 절벽의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그곳을 사랑했던 이유로 서애(西厓)라는 호를 자호로 삼았다.
서애의 서원인 병산서원이 자리잡은 터. 사진작가 황헌만
그는 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한 아버지 유중영(柳仲?)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형님 겸암 유운룡(謙唵 柳雲龍)도 문과에 급제하여 서애보다는 벼슬이 낮았으나 학문과 덕행으로 서애에 버금가는 이름 높은 학자이자 관인(官人)이었다. 우선 태어나기를 좋은 집안에서 유복하게 태어나 어려서부터 부족한 것 없이 넉넉하게 공부하고 연구하는 일에 정성을 바칠 수 있었다.
학자로서의 소양을 제대로 갖추려면 스승을 잘 만나야 한다. 풍산현의 이웃고을인 예안(禮安:지금의 안동)현에 당대의 학자 퇴계 이황 선생이 도산(陶山)에서 강도(講道)하고 있던 때였다. 서애는 가정에서 학문을 익혀 어느 정도의 수준에 이른 21세에 퇴계의 문하로 들어가 본격적인 도학(道學) 공부에 몰두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퇴계에게서 직접 ‘근사록(近思錄)’ 등의 성리학을 배우고 몇 달을 도산에 머무르면서 깊고 넓게 도(道)를 얻어들었다고 한다.
23세에는 생원시와 진사시에 각각 1등과 3등으로 합격하여 세상에 이름을 날리며 태학(성균관)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학문을 닦고 과거공부에도 열중하였다. 25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이 열렸고, 29세에 퇴계가 세상을 떠나자 제자의 예를 다하며 장례를 치르기도 했다. 벼슬은 오르고 올라 47세에는 대제학으로 나라의 문권(文權)을 쥐었고 49세에는 우의정이라는 신하로서는 최고의 지위인 정승에 올랐다. 51세인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지고 영의정으로 국난에 임하는 임금 다음의 최고의 사령관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였다.
하회마을의 서애 유성룡 종택인 충효당 전경. 사진작가 황헌만
퇴계의 제자로 익힌 학문을 후학들에게 전수했으니 정경세(鄭經世), 이준(李埈) 등 당대의 학자들이 서애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그래서 서애는 뛰어난 정치지도자이자 퇴계의 학맥을 이은 학자로서도 큰 명망을 얻었다. 서애가 세상을 떠나자 고족(高足)인 우복(愚伏) 정경세는 판서와 대제학을 지낸 수준 높은 학자로서 스승인 서애의 행장(行狀)을 지었다. 서애의 일생을 상세하게 정리하는 작업이었다. “우리 스승은 재능으로는 온갖 실무를 처리하기에 넉넉하였고, 학문으로도 세상을 다스려 백성들을 구제하기에 넉넉하였다”(才足以應務 學足以致用)라는 결론을 내렸다. 실무처리능력과 학문역량을 함께 지녔던 서애의 인품을 제대로 기술한 내용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화합과 조정의 정치지도자
지도자는 조화를 이루고 조정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극단적인 대립이 벌어지고 각을 세운 논쟁이 치열할 때에 거중조정을 통하여 실마리의 얽힘을 풀어서 화합의 분위기로 이끌 수 있어야 한다. 이점에서 서애는 모두가 인정했던 당대의 정치지도자였다. 화합과 조정의 명수가 서애였음을 알게 해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31세에 서애는 옥당벼슬이라는 명예로운 홍문관의 수찬(修撰)으로 재직하였다. 이 무렵 어느 날, 임금이 경연(經筵)에 나와 여러 신하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어떤 수준의 임금인가?”라고 묻자, 정이주(鄭以周)라는 신하가 먼저 답했다. “전하는 요순과 같은 임금입니다”라고 답했다. 서애와 쌍벽으로 퇴계의 제자로 이름 높던 학봉 김성일(金誠一)도 그 자리에 있었다. 학봉은 곧고 바른말 잘하기로 세상에 명성이 높던 분이다. 학봉이, “전하는 요순과 같은 임금도 될 수 있지만 걸주(桀紂:세상에 포악한 임금의 대명사)와 같은 임금도 될 수 있습니다”라고 답하였다. 그러는 순간 임금의 얼굴에 극도의 분노가 보이며 좌중이 전율하는 분위기에 휩싸였다.
안동시 풍산면 수동리에 있는 서애의 묘소. 사진작가 황헌만
그런 위기의 순간에 서애는 뛰어난 기지와 조정의 능력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서애가 사뢰기를 “정이주가 말한 바의 요순과 같은 임금이란 임금님을 그런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의미이고, 김성일이 말한 걸주 같은 임금도 될 수 있다는 것은 걸주 같은 임금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경계의 말이니, 두 사람 모두 임금님을 사랑하는 뜻에서 나온 말입니다”라고 능숙하게 답변하자, 임금이 그때에야 기뻐하며 얼굴빛을 바꾸고 술상을 가져오라 명하여 즐겁게 지내다 파하였다는 이야기다. 그런 위기의 순간에 서애가 아니었다면 김성일의 처지가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하면 서애의 말솜씨가 대단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지도자는 인재를 천거할 줄 알아야
서애의 인물됨이야 조선 500년의 역사에서 그래도 가장 많이 세상에 알려진 사람의 한 분이다. 그는 영의정이라는 국가의 최고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임진왜란이라는 전대미문의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여 구국의 정치지도자라는 호칭에 걸맞게 행동한 인물이다. 그러나 서애라고 약점은 없고 장점만 있는 인물은 아니다. 율곡 이이는 후배인 서애에 대하여, “서애는 재주나 식견이 높아 임금께 올려 바치는 건의를 잘하였다. 더욱 경연에서 아뢰는 내용은 모두가 잘한다는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때로는 일관된 마음으로 봉직하지 못하고 이롭고 해로운 점만 따지려는 부분이 있어 식자들이 단점으로 여기기도 했다”라는 평을 하였고, 문장·학문·청빈 등 모든 것이 다 좋으나 어떤 경우 골경(굳세고 곧은 성품)의 풍모가 부족한 점을 남들이 한스럽게 여겼다는 평가도 있었다. 화합과 조정의 능력에 온화한 성품이 뛰어나 강하고 굳세지 못한 성격을 탓하는 경우도 있었다는 평가였다.
[IMG4]
이러한 단점이 있으면서도 서애가 지도자로서 우뚝 서있었고 무거운 성망을 잃지 않았던 데에는 그가 인재를 제대로 천거하고 능력을 알아보아 발탁하는 뛰어난 지감(知鑑)을 지녔다는 점이다. 임진왜란의 비참한 패망에서 승리의 두 장군을 들자면 충장공 권율(忠壯公 權慄)과 충무공 이순신이다. 바로 이 두 위대한 애국자이자 뛰어난 전략가들 때문에 나라가 중흥될 수 있었으니, 그 두 사람을 천거한 서애야말로 임진왜란으로 패망해버린 조선이라는 나라를 중흥시킨 주인공이었다.
본디 서애는 인재발탁에 대한 높은 정치철학을 지닌 분이었다. 그의 유명한 논문이자 국가에 바친 정책건의서인 ‘청광취인재계(請廣取人才啓)’라는 글에 서애의 뜻이 담겨있다. 널리 인재를 발탁하기를 청하는 건의서인데, 1594년 53세의 서애가 전쟁이 한창이던 난리통에 임금에게 바친 건의서는 지금 우리가 읽어도 바르기만 한 주장이다. 아무리 천한 사람, 아무리 신분이 낮은 사람도 약간의 재주만 있다면 무조건 등용시켜 활용토록 해야 한다고 했다. 단점은 묻어두고 장점만 취해야 하고 신분이나 문벌로 인재를 고르는 악습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래서 인재발굴의 10대 원칙을 열거했으니 병법(兵法)에 밝은 사람, 학식이 있고 시무(時務)를 아는 사람, 담이 크고 언변이 뛰어난 사람, 집안에서 효제(孝悌)에 뛰어난 사람, 문장에 뛰어나 사신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사람, 용감하고 활 잘 쏘는 사람, 농사일에 밝고 농업기술이 있는 사람, 염업·광산업·무역업에 밝은 사람, 수학과 회계에 밝은 사람, 병기를 잘 만드는 사람 등 열 가지 종류의 인물들은 신분이나 가문을 따지지 말고 조건 없이 발탁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권율 장군과 이순신 장군이 발탁되지 못했다면 그때의 조선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삼한(三恨)을 지녔던 서애
66세에 생을 마친 서애, 그 당시로는 천수를 제대로 누린 나이다. 대제학에 이조판서, 형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에 올라 모든 복을 다 받았지만, 임진왜란이라는 모진 전쟁에 온갖 시달림을 받았고, 당파싸움의 격화로 반대파의 혹독한 비판을 받았던 서애, 그는 노년에 자신에게는 세 가지의 한(恨)이 있노라는 술회의 기록을 했다. 첫째는 임금과 어버이의 은혜를 보답하지 못했다. 둘째, 벼슬은 지나치게 높았는데 일찍 벼슬에서 물러나지 못했다. 셋째, 망령스럽게 도(道)를 배우겠다는 뜻을 두었으나 이룩한 것이 없다. 바로 그 세 가지가 자신의 한(恨)으로 여겼다니 얼마나 겸허하고 공손한 삶의 자세였는가.
서애의 어머니 안동 김씨는 남편을 잃고도 매우 오랫동안 살았다. 유운룡·유성룡 두 형제의 지극한 효도로 온갖 영화를 누리고 살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서애는 효도로 부모의 은혜를 갚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 뛰어난 효심의 발로다. 임진왜란에 그만한 공업을 이루었건만, 일찍 벼슬에서 물러나지 못했음을 후회하는 마음도 얼마나 훌륭한 정신인가. 퇴계의 학통을 이은 도학자로 많은 제자들에게 도를 전해준 학자였지만, 도학에 뜻을 두고도 이룬 바가 없다는 그의 겸손함이 바로 그와 같은 큰 정치지도자로 대접받게 했던 것이 아닐까. 못된 일은 다 하고도 자기만 잘 했다고 떠드는 오늘의 지도자들에게 서애의 ‘삼한’은 많은 반성의 자료가 될 것이다.
ㆍ전란을 경계삼아 비전을 제시하다
눈을 감은 지 400년이 지났지만
40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서애는 지금의 안동시 풍산면 수동리(壽洞里)라는 마을의 뒷산에 누워있다. 우리가 서애 유적지를 찾은 초겨울의 그날은 바로 수동리 서애의 묘소에서 묘제를 지내는 날이었다. 서애 400주년 기념 묘제인데, 전국에서 모인 유림, 후손들이 합쳐 수백명이 넘는 대단한 인파였다. 그가 남긴 유덕(遺德)이 얼마나 크기에 그만한 인파가 모여 묘제를 올리는 것일까. 400년, 이제는 잊을 만큼 세월도 흘렀건만 그의 마음과 혼이 살아계신 듯, 참으로 공손하고 엄숙하게 제를 올린다. 모인 모두가 도포를 입고 유건을 쓴 모습으로 보기도 아름답게 제를 올리고 있었다.
서애의 서원인 병산서원의 강학공간(사진 위)과 하회마을의 겸암 유운룡의 종택인 양진당 전경(아래 왼쪽). 아래 오른쪽 사진은 징비록 표지. <사진작가 황헌만>
묘소에도 일생을 청빈하게 살았던 서애의 뜻이 살아있었다. 6대 후손 운(澐)이라는 분이 지은 간단한 묘비가 하나 서있을 뿐, 그 흔한 신도비 하나 없었다. 서애의 일대기는 그의 제자 정경세의 행장만 남아있을 뿐, 신도비는 애초에 짓지도 않았다니 그러한 낭비를 하지 말라는 서애의 유훈에 의해서 지켜진 일이라고 했다.
어지간한 인물의 묘소에는 의당 제각도 있고 여러 가지 치장이 있게 마련인데 서애의 묘소에는 제각 하나 없이 초라하지만 검소하고 청렴한 정신이 흐르고 있었다. 서애의 서세 400주년 기념행사가 전국 도처에서 열렸던 것도 큰 지도자의 유덕은 그렇게 후인들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의 하나였다.
충효당(忠孝堂)을 찾아서
긴 설명이 필요 없는 마을이 하회마을이다. 겸암 유운룡의 종가인 양진당(養眞堂)과 서애의 종가인 충효당이 있기에 하회는 시골마을로 나라 안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마을이다. 민속관광촌으로 대표적인 곳이 바로 그곳이다. 서애의 14대 종손 유영하(柳寧夏)가 거주하면서 하루에도 수백명의 방문객과 관광객을 맞는 그곳이 바로 역사의 땅이자 사상의 고향이다. 낙동강으로 둘러싸여 아름답기로도 비길 곳이 없지만, ‘하회탈’과 ‘하회탈춤’이라는 탈과 춤으로 전 세계에 알려진 곳이다. 얼마 전에 영국 여왕의 방문으로 전세계에 잘 알려지기도 했다.
충효당에서 멀지 않은 낙동강가에 서애의 서원인 병산서원(屛山書院)이 있다. 서애의 후학들이 서애의 학문을 기리고 후학들을 길러내기 위한 교육의 도장으로 세웠다. 요즘도 수시로 학회가 열리고 학술토론이 벌어지는 장소가 바로 그곳이다. 서애의 학문과 사상, 우국충정의 뜨거운 혼이 식지 않고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학자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임진왜란을 치른 탁월한 공신으로 서애가 받은 서훈은 참으로 거창하다. 조선국(朝鮮國)을 앞에 놓고, 수충(輸忠)·익모(翼謀)·광국(光國)·충근(忠勤)·정량(貞亮)·효절(效節)·협책(協策)·호성공신(扈聖功臣)이라는 칭호에 풍원부원군의 봉호를 받았으며,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글자마다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건져낸 그의 충성심과 효성을 기리기 위한 공신의 칭호였다.
천추에 전해질 ‘징비록(懲毖錄)’
서애는 그만한 공훈을 세우고도 당파싸움에 밀려 노년기는 불우하게 은거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겨를은 또 하나의 행운이었으니, 그런 여가를 이용하여 그의 학문은 익어갔고 그의 사업도 아름다운 결실을 맺었다. 다른 동문들과 함께 퇴계가 세상을 떠난 31년째인 59세의 서애는 ‘퇴계집’을 편찬하여 간행하고 퇴계의 연보를 손수 편찬하는 위업을 이룩하였다. 퇴계의 학문과 일생이 서애의 손을 거쳐 이룩되었으니 그 스승에 그 제자임을 명확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퇴계선생연보’의 발문에 퇴계의 손자 이안도(李安道)가 수집한 자료들을 중심으로 연보를 기술했노라는 서애의 글이 있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에 은퇴하여 한세월을 보내던 서애는 초당(草堂)을 짓고 은자의 생활을 즐겼다. 그렇다고 임금과 나라를 잊을 수 있었겠는가. 그 혹독한 전쟁, 난후의 가난과 병마가 휩쓴 조선에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비참한 현실이 전개되었다는 것이 서애의 기록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는 전쟁이 나지 않고, 국방이 튼튼한 나라가 될 수 있는 방책을 세우는 것이 지식인의 책무가 아니던가. 이래서 서애는 그 유명한 ‘징비록’이라는 명저를 남긴다. 시경(詩經)에 ‘징전비후(懲前毖後)’라는 글귀가 있다.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여 미래를 대비한다는 뜻인데, 여기에서 취하여 책의 이름으로 삼았다. 전쟁의 비참상, 무너지던 나라의 처참한 상태, 그런 비극을 다시는 겪지 않기 위해 서애는 나라의 재건을 위한 비전을 제시했으니 그게 ‘징비록’이다. 이제는 영어로까지 번역되어 관심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읽을 수 있다. 그 책 하나만으로도 서애는 영원한 역사적 인물이 되기에 충분했다. “이제서야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마는 다만 뒷날에 경계로 삼아야 하겠기에 자세하게 적어둔다”라는 서애의 징비록 저작 목적이 지금에 더욱 새롭다.
이조판서로서의 서애
46세에 ‘퇴계선생문집’을 편차(編次)하여 59세에 간행한 서애는 50세에 이조판서로 있으며 국가적 대업을 이룩했으니 자신의 권한인 인재 천거를 정확하게 해낸 일이다. 그 해는 선조 24년으로 1591년인데 이조판서에 임명된 서애는 수상하기 그지없던 일본의 정정과 동태를 살피기 위해 임금께 상주하여 통신사를 파견토록 건의한다. 전례가 없이 우의정에 이조판서를 겸직한 서애는 국사의 중요 부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낸다. 황윤길과 김성일이 일본에서 돌아와 상주한 상반된 내용으로 시끄럽던 무렵이 바로 그때의 일이다. 많이 알려진 그 부분은 언급을 생략한다.
서애의 연보(年譜)에 의하면 그해인 임진왜란 1년 전에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고 인재를 발탁하여 천거했다는 기록이 있다. “형조정랑(刑曹政郞) 권율을 추천하여 의주목사(義州牧使)로 삼았고, 정읍현감 이순신을 추천하여 전라좌도수사(全羅左道水使)로 삼았다”라는 부분이 그것이다. 대신으로 사람을 천거함은 이런 일을 두고 하는 말이다. 현감을 수사(水使)에 오르게 하는 일은 유례없는 승진이니 서애의 안목을 그런 데서 알 수 있다. 이런 충신(忠臣)이자 명장(名將)을 천거했었기에, 그래도 임진왜란과 같은 큰 난리에도 나라를 다시 중흥시킬 수 있었으리라 여기면, 서애의 공은 필설로는 다 표현할 수 없으리라.
나라가 어려우면 생각나던 재상
옛말에 “집안이 가난하면 어진 아내가 생각나고, 나라에 난리가 나면 훌륭한 재상이 생각난다”(家貧思賢妻 國亂思良相)라고 했는데, 서애야말로 나라가 어지럽고 난리가 날 때에는 언제나 생각나는 재상의 대표적 인물임에 분명하다. 그만한 학식, 그만한 능력, 그만한 지혜를 지닌 인물이었기 때문에 임진왜란에 나라가 망한 지경에서 중흥의 대업을 이룩할 수 있었다.
당대의 문장가이자 학자 재상이던 백사 이항복은 한음 이덕형의 일대기에서, 율곡 이이와 서애 유성룡, 한음 이덕형의 부음이 들리자 신분 고하를 가리지 않고 일반 백성들까지 가장 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에 참석하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슬프게 울었다고 했는데, 서애의 업적이 참으로 훌륭했던 이유에서 누가 시키지 않았어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슬픈 울음을 터뜨렸던 것이다.
나라에는 충성, 부모에게는 효도
서애의 어머니 안동 김씨(1512~1601)는 지례현감이던 김극해의 손녀요, 진사로서 시골에 은거했던 김광수(金光粹)의 따님이었다. 운룡과 성룡을 비롯한 훌륭한 아들을 길러냈고 세 딸을 키워 좋은 사위들을 맞았다. 90세의 장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난 어머니 김씨는 생전에 내외의 손자·손녀·증손자·증손녀에 이르기까지 66명에 이르렀다니 부귀·다남·장수까지 누린 당대의 복인이었다. 겸하여 운룡·성룡 형제는 세상에서 이름난 효자였고 두 형제는 세상에 알려진 우애하던 사이였다. 성룡은 효심이 뛰어나 일부러 어머니 봉양을 위해 안동에서 가까운 상주목사를 지냈고, 또 어머니를 모시기 편하도록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운룡도 어머님을 모시기 위해서 안동에서 멀지 않은 인동현감과 원주목사를 역임하여 두 형제가 번갈아가면서 노령의 편모를 봉양하는데 온갖 정성을 바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29년째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30년 가까이 지극정성으로 늙은 어머니를 모셨기에, 그 형제의 효도는 온 나라에서 칭송이 자자했다. 임란을 극복하며 나라에 바친 그 뛰어난 충성심, 어머니에게 바친 그 효도 때문에 충효(忠孝)가 함께 빛나게 되어, 살아가는 집의 이름을 ‘충효당’이라고 명명했을 것이다.
‘서애연보’를 살펴보면 벼슬하다가도 수시로 벼슬을 버리고 어머니를 찾아뵈었으며, 두 형제가 경치가 좋고 찾아가 볼 만한 명승지를 수시로 어머니를 모시고 찾아 다녔던 기록이 있다. 어머니께서 기뻐하는 일은 가능한 한 다 해드리며 반드시 뜻에 맞게 모셨다고 여겨진다. 인간 행위의 근본은 효도에 있다. 그러한 효심이 있었기에 그만한 충성심을 나라에 바칠 수 있었다. 60세의 노인 연령에 형님이 세상을 떠나고 바로 이어서 90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 그런 노인의 몸으로도 온갖 효성심을 발휘하여 초종(初終) 장례의 모든 절차를 예에 맞게 치렀으니 효자로서의 본분을 다 했다고 일컬어졌다.
서애는 아버지의 일대기도 슬프게 기술했지만, 특히 혼자서 오랫동안 사셨던 어머니 김씨에 대하여 ‘선비정경부인묘지(先 女比 貞敬夫人墓誌)’라는 장문의 글을 지어 어머니의 훌륭한 인품을 기록하여 잊을 수 없는 사모(思母)의 정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효도를 근본에 두었기에 400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아직도 서애의 훌륭함을 기리는 것이다.
〈 박석무 | 한국고전번역원 원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
'역사자료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안동을 빛낸 사람들 (0) | 2010.01.24 |
---|---|
[스크랩] 치악산 태종대 : 원천석선생 (0) | 2010.01.24 |
[스크랩] 목은 이색 (0) | 2010.01.24 |
[스크랩] 서애 유성룡 (0) | 2010.01.24 |
[스크랩] 목은 이색의 문학관 (0) | 2010.01.24 |